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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선배부부와 다시 부하라 시내를 돌아보기 위해 호텔을 나선다. 라비 하우즈 남쪽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골목길을 70m 정도 걸어가니 유대인 회당 (Synagogue of Bukhara) 이 나온다. 1417년에 세워진 이 유대인 회당의 건축은 라비 하우즈와 연관이 있다. 라비 하우즈를 만들기 위해서 그 당시의 도시의 책임자였던 나디르 디반베기(Nadir Divan-begi)가 돈 많은 유대인 과부에게 집터를 팔기를 원하였으나 팔지 않자 과부 집 앞으로 물길을 내었다고 한다. 우기가 되어 홍수가 나자 과부의 집이 떠내려가다가 현재의 시나고그 자리에 멈추게 되었고, 결국 집을 팔게 된 과부가 대금 대신에 이곳에 유대인 회당을 짓도록 허가를 해 주고 소유권을 인정해 줄 것을 원하여 흔쾌히 허락을 하여 이곳이 유대인 회당이 되었다고 한다.
부하라에는 12~13세기부터 유대인들이 거주했는데 이들은 페르시아어와 비슷한 고유언어를 사용하고 히브리 문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소련시대에만 해도 부하라의 유대인들은 심한 차별 속에서도 상업에 성공하면서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만 해도 부하라에 유대인이 만 명 이상이 살았지만 소련이 붕괴되면서 지금은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의 부하라 유대인이 남아 있으며 우즈벡이 이슬람 국가인 사정상 이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쓰고 러시아인인 척 하면서 조용히 지내고 있으며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한다.
회당 안에는 벽에 장식된 다윗의 별과 7지 촛대 그리고 십계명이 기록된 모세의 석판이 보이고 4명의 유대인들이 탁자에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나라를 잃고 세계 곳곳을 방랑하며, 차별과 멸시를 견디며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유대인 회당을 구경하고 초르 미노르 마드라사(Chor Minor Madrasah)를 찾아간다. 라비하우스 남쪽 수로 건너 유대인회당 부근은 수많은 상점과 모스크, 마드라사, 호텔 등이 얽히고 설켜 뭐가 뭔지 구별하기 어렵다. 각각의 건물들은 규모가 사마르칸트보다는 작지만, 올망졸망 모여 있어서 사마르칸트보다 훨씬 더 아기자기하다. 호텔과 음식점으로 사용되는 몇몇 건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상점으로 사용되고 있어 물질주의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는 듯하다.
예쁜 외관을 가진 호텔 앞에는 히잡을 쓴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여성 단체 여행객들이 가이드를 따라 어디론가 이동하는데 무슬림 여성들이 남편이나 가족없이 여자들만 단체로 여행하는 가능한 일인가? 무슬림 여성들은 외출할 때 가족과 동반하거나 적어도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고 들었는데 잘못 들은 건가?
골목을 돌고 돌아 여러 번 물어물어 가다보니 눈 앞에 청록색 푸른 돔을 가진 탑 네 개가 보인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유난히 파란색의 돔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아미르 티무르가 가장 좋아했던 색이 바로 파란색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초르 미노르는 론리 플레닛이라는 여행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면서 유명해진 곳으로 총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르 미나르는 페르시아어로 "네 개의 미나렛"이란 뜻이다. 조그만 네 개의 첨탑이 참으로 인상적인 곳으로 부하라를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오는 곳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실제는 미나렛이 아니고 모스크이자 마드라사이지만 동시에 쉼터 역할도 겸했다고 한다.
초르 미노르 마드라사는 부하라 토후국 후기인 1807년 부하라를 통치하던 망기트 왕조 때 투르크멘계 부하라 사람이었던 칼리드 니야즈 쿨(Khalif Niyaz-kul)이 세워 우즈베키스탄에선 '칼리드 니야즈 쿨 마드라사'라고도 알려져 있다. 칼리드 니야즈 쿨은 장사를 위해 인도를 방문하고 타지마할에 들러 구경한 후 타지마할의 모습을 스케치한 후 건축가와 상의해 타지마할과 비슷하게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초르 미노르를 건축하기에 앞서 쿨은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는데 하나는 실크로드를 따라 여행하는 투르크멘은 반드시 이곳에 편히 머무르다 가야하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기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시안을 떠나 실크로드를 따라 부하라로 들어올 때 첫 번째 관문인 동문 입구에 세워 많은 대상이 이용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마드라사의 일부로 정문에 해당되며,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기념물에 등록되었다.
일반적인 이슬람 건축물은 하나의 거대한 미나렛이 랜드마크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초르 미노르는 네 개의 아담한 탑이 균형을 이루며 서 있어 시각적인 재미를 준다. 흙빛 벽돌과 대조되는 푸른색 돔은 부하라의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 이국적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있으며, 각 돔의 타일 장식은 미묘하게 다른 패턴을 가지고 있어 가까이서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미나렛의 푸른 돔 위에 있는 새 둥지와 왜가리 2마리는 살아있는 새가 아니라 장식이다. 네 개의 탑은 네 딸을 의미하고 황새가 있는 탑은 막내딸이라고 하며 이 미나렛을 건축한 칼리드 니야즈 쿨은 딸이 네 명 있었는데 구혼자가 딸에게 구혼할 때 원하는 딸을 의미하는 기둥을 잡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건물 입구로 들어가는 길에는 멋진 포도나무 덩굴 아치가 설치돼 있는데 이 포도나무와 미나렛을 함께 담아 사진을 찍으니 정원같은 평화로운 느낌이 든다. 초르 미노르는 부하라의 다른 웅장한 건축물과는 또 다른 소박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원래는 모스크와 마드라사, 도서관, 그리고 마드라사 학생들을 위한 후즈(Hujra, 작은방)들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마드라사 정문과 네 개의 미나렛 뿐인데, 그나마 건물 내부와 주변은 주로 기념품가게로 운영되고 있다. 부하라 이슬람 건축물 앞에는 연못인 하우즈(houz)가 있는데,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초르 미노르 바로 옆이나 주변 건물에는 옛 무역 단지였던 역사를 반영하듯, 아늑하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기념품 가게들이 자리하고 있다. 옆에는 작은 커피가게도 있는데, 외국인 분들이 기념품가게 앞 벤치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초르 미나렛을 구경하고 있다.
초르 미노르에서 나와 우린 다시 부하라 칼란 미나렛 쪽으로 방향을 잡아 아침에 문을 안 열어 못 본 부하라 성채(아르크)를 보러 간다. 라비 하우즈 연못 우측에는 옛 환전 무역중심지였다는 Togi sarrofon이 있는데, 이곳에는 환전소를 비롯해 모스크 등이 있던 곳으로 부하라에 있는 여러 개의 실내 바자르 중 가장 오래된 돔 형태 바자르였다고 하나 지금은 많은 건물들이 사라져 광장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건물과 골목으로 이루어진 중세도시 모습으로 바자르 내부는 세 방향의 교차로가 만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근처에는 하맘(중동식 목욕탕) 간판이 보이는데 하맘 체험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은 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패스한다.
조금 더 걸어가니 카펫, 보석, 기념품을 주로 파는 상점들이 즐비한 Toqi Telpakfurushon 바자르가 보인다. 시장은 깨끗하고 이 지역의 특산품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많이 보이고, 바자르를 나와 길을 건너니 과거에 목욕탕이었다는 곳으로 지금은 낮은 벽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심신이 피곤한지라 물건에는 별로 눈이 가질 않았고 가끔 눈에 띄는 하맘이 오히려 관심이 간다.
벤치에서 앉아 주변 풍경 구경도 할 겸 쉬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겨 가위가게로 간다. 옛부터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가위는 인기가 많았다고 하는데 더구나 우리가 들어갔던 가게는 가이드북에도 나오는 가게라서 손님이 많다. 황새를 모티브로 한 디자인은 암컷과 수컷 두 종류가 있다.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며, 디자인뿐 아니라 절삭력도 꽤 뛰어나서 실제 사용하기에도 좋고, 원하면 가위에 이름을 새겨 넣어 줘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가위를 만들 수도 있는 특별한 기념품이지만 오늘은 부하라 이곳 저곳을 다녀야 하기에 히바로 가는 날 아침에 사기로 하고 가게를 나온다.
Toqi Telpakfurushon 바자르를 지나면 6개의 돔형 지붕이 눈길을 끄는 Tim Abdulla Khan Trading Dome이 보인다. 이 바자르는 수세기 동안 중앙아시아 실크무역의 중심지로 고급 실크와 카펫, 직물 등 직물이 거래되는 바자르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공사 중이고 일부 상점만 문을 열고 있다.
Tim Abdulla Khan Trading Dome 옆에 있는 Togi Zargaron은 16세기에 지어진 타지크어로 '보석 세공인의 문'이란 뜻의 돔형 시장으로 실크로드 시기에는 대표적인 금과 보석시장이었다고 한다. 이곳 바자르들은 모두 문이 많고 높게 지어졌는데 대상들이 낙타를 타고 각 방향에서 들어와 거래를 하기 위해서 이며 벽돌로 쌓아 올린 높은 돔형 지붕 꼭대기에는 환풍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는 더운 이곳의 기온을 시원하게 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작은 구역에 바자르가 많았던 걸 보면 부하라가 실크로드 시대에는 대상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도시였음을 증명해 준다.
시장을 지나면 칼란 모스크와 울루그벡 마드라사, 미르-이 아랍 마드라사 등이 모여 있는 포이 칼란 단지(Poi Kalyan Ensemble)가 있는데 칼란 미나넷이 다른 건물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부하라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칼란 모스크와 미나렛이라 할 수 있다. 부하라 탑이라고도 불린 칼란 미나렛은 기념품 가게의 티셔츠에서 열쇠고리까지 마치 파리의 에펠탑처럼 모든 기념품에 새겨져 있다.
칼란 미나렛는 높이가 45.6m(꼭대기 포인트 탑까지 합치면 48m)에 달하는 벽돌로 쌓은 탑이고, 미나렛이다. 미나렛(Mineret)은 무에진(Muezzin)이라는 사람이 꼭대기에서 하루의 다섯 번, 기도시간을 알리는 곳이며(아잔 Adhan), 밤에는 불을 밝혀, 사막에서 등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철근도 쓰지 않고 벽돌로만 48m 높이의 탑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상당히 많은 미나렛이 살짝 기울거나 삐뚤어져 있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탑 건설을 주도한 건축가 바코(Bako)가 탑 기단을 건설한 후 3년간 도망쳐 있었는데, 3년 후 기반이 단단해진 위에 탑을 건설하기 위해서지만, 탑을 계속 올리라는 압력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칼란 미나렛은 1127년에 건축되었는데 칭기즈칸이 칼란 모스크를 파괴할 때 살아남아 9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지진과 전쟁을 견뎠으며, 이는 건축 당시 뛰어난 공학 기술과 고품질의 구운 벽돌 및 모르타르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 같다. 미나렛은 원래 기도시간을 알리는 용도와 망루로 사용됐으나, 18세기~20세기 초 부하라 칸국시대 사형집행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죄인들을 탑 꼭대기에서 던져 처형해서 한때 죽음의 탑(Tower of Death)이란 무시무시한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원래 칼란 모스크와 미나렛은 1127년 카라한 왕조의 아르슬란 칸 때 처음 건설되었는데, 타지크어로 "엄청난"이란 뜻의 칼란 미나렛은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첨탑으로 높이가 46m에 깊이가 10m인데 지진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하단에 갈대를 쌓아두어 900여년을 무너지지 않고 보존이 되고 있다고 한다. 기단부 지름 9m인 원통형 탑신은 14개 층으로, 벽면 전체가 갈색이다. 각층마다 각기 다른 벽돌 문양을 사용하여 장식하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탑신 내부에는 105개의 나선형 계단이 정상까지 이어지고 탑 꼭대기에는 16개의 아치형 등화창(등불을 밝히는 창)이 있고 탑 위에 내려다보는 전망은 부하라에서 최고로 손꼽히지만 지금은 탑꼭대기로 올라갈 수 없다다. 본래 이 미나렛은 무아진이라 불리는 사람이 꼭대기에 올라 일일 5회씩 예배시간을 알리는 코란을 낭송하던 곳으로, 낮에는 아잔소리와 높이로, 밤에는 불빛으로 끝없는 사막에 지쳐 있는 실크로드 상인들에게 등대구실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미나렛은 한 때 처형대로 꼭대기에서 죄인을 자루에 담아 사형수를 떨어뜨려 사형을 시켜‘죽음의 탑’이라고 저주 받기도 했다. 미나렛에는 14개 다른 문양의 장식 띠를 볼 수 있는데 원기둥 남쪽과 동쪽부분 밝은 색의 장식은 1920년 구소련 침공 때 프룬제장군의 포병대가 훼손한 부분을 복원하면서 벽돌색이 달라진 것이라 한다.
1220년 칭기스칸이 부하라를 침략했을 때 부하라 왕이 아르크를 점거하고 몽골군에 저항하자 칭기스칸은 부하라를 약탈한 후 파괴해 버려 모스크는 파괴되었지만, 칼란 미나렛만은 파괴하지 않았다고 한다. 칭기즈칸은 마스지드에 모인 무슬림들 앞에서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발로 차면서,“나는 너희들의 죄를 처벌하기 위해서 신이 파견한 사람이다.”라고 외치며 부하라의 건물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칼란 미나렛 앞에 도착해 부하라의 상징인 칼란 미나렛도 다른 유적과 함께 없애버릴 생각으로 미나렛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미나렛을 한번 훑어보려고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는데, 순간 모자가 땅으로 떨어지자, 칭기즈칸은 엉겁결에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 숙여 모자를 주워 모자를 머리에 쓰다“천하의 나를 고개 숙이게 한 탑이니, 이 탑은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대로 두거라!”라고 해 칼란 미나렛이 칭기즈칸의 파괴에서 살아남게 되었다고 한다.
부하라의 총독이었다가 샤이반 왕조의 왕이 된 우바이둘라 칸이 부하라에 칸국을 세우면서 1514년 이곳에 거대한 모스크를 만든 것이 지금 남아 있는 칼란 모스크이다. 따라서 칼란 모스크와 칼란 미나렛은 원래 한 세트였고, 지금도 한 세트지만 건립년도에는 400여년의 간극이 있는 것이다. 우바이둘라 칸은 모스크를 지을 때 사마르칸트의 비비하눔 모스크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를 만들겠다고 했던 비비하눔 모스크를 염두에 둔 것은 그만큼 부하라와 사마르칸트가 경쟁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실제 전체 대지면적은 칼란 모스크가 조금 작은 편이고, 피슈타크 등 입구 아치도 조금 낮은 편이지만, 칼란 모스크 쪽이 공간 효율이 더 좋아 예배 수용 인원 면에서 칼란 모스크쪽이 더 많다 (1만명 vs 1만 2천명)는 평가이다. 무엇보다 비비하눔 모스크는 구조적 문제 때문에 건축이 완성된 티무르 황제 때부터 이미 무너지고 있었지만, 칼란 모스크는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이 서 있는 것이 차이점일 수 있다.
칼란 미나렛은 칼란 모스크에 딸린 미나렛으로 지어졌는데, 지금은 그 맞은편에 미르-이 아랍 마드라사까지 세워져 커다란 단지를 형성하고 있다. 도시의 상징인 포이 칼란(Po-i Kalyan) 단지의 핵심을 이루는 건물이 칼란 모스크로 우즈베키스탄 주요 관광명소에는 현금을 요구하는데, 이곳에서는 신용카드도 받는다. 칼란 모스크는 크기와 장엄함 때문에 종종 대(大) 모스크(Great Mosque)라 불리는데, "칼란(Kalon)"이라는 말 자체가 타지크어와 우즈베크어에서 "위대한, 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모스크로 꼽힌다. 칼란 모스크 옆에 우뚝 솟아 있는 칼란 미나렛(Kalon Minaret)은 부하라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며, 중앙아시아 이슬람 건축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직사각형의 안뜰을 중심으로 사방이 아치형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광장이 있는데 광장에서 1만 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한다. 중앙 광장엔 뽕나무가 있고 서쪽 정문 반대쪽에는 칭기즈칸에 의해 학살된 900명 정도의 어린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탑이 있는데 칭기즈칸이 부하라를 점령하면서 어른들은 물론 어린이까지 학살했다고 한다. 칼란 모스크 전체의 지붕은 200여 개의 기둥 위에 세워진 288개의 작은 돔(cupolas)으로 덮여 있어 그 웅장함을 더 한다.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벽감인 미흐랍(Mihrab)에는 더 크고 화려하게 장식된 돔과, 청색 타일로 장식된 인상적인 이완(Iwan) 포털이 있다. 현재 모스크는 1514년 건축한 모스크로 구소련 시대에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아서 창고로 이용되다가 1991년에서야 종교시설로 다시 이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칼란 모스크 바로 앞에 미르-이 아랍 마드라사(Mir-i-Arab Madrasa)가 있다. 미르-이 아랍은 우바이둘라 칸의 정신적 스승 역할을 하던 예멘 출신의 셰이크 압둘라 야마니 Sheikh Abdullah Yamani의 별칭이라고 한다. 우바이둘라 칸은 이란의 신흥세력이었던 사파비왕조를 상대로 여러 차례 전쟁을 수행했고, 이란 동부의 호라산을 무려 다섯 차례나 점령했는데, 이 과정에서 포로로 잡은 3천 명이상의 포로들을 노예로 판 돈으로 지은 것이 바로 미르-이 아랍 마드라사다. 따라서,“이 건물은 벽돌이나 점토가 아니라 사람들의 눈물과 피로 다져 진 것이다“라고 혹평 받고 있는데, 당시에는 승전국에서 전리품으로 패전국의 국민들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파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 부하라나 히바에는 노예시장이 아주 크게 열렸었다고 한다. 칼란 모스크의 맞은편에 이슬람학교인 미르-이 아랍 마드라사가 생기면서 초대형 모스크와 초대형 마드라사, 거기에 엄청나게 높은 미나렛과 광장이 갖추어진 이슬람단지가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게 되었고, 부하라의 상징처럼 되었다. 마드라사는 이슬람 전통의 교육기관이다. 초등과정부터 대학과정까지를 교육하는 기숙학교로 이슬람 신학과 율법은 물론 의학, 과학, 철학 등 모든 학문을 연구, 보존하고 교육하는 기관이었다. 더구나 소련의 종교탄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미르-이 아랍 마드라사는 구소련이 운영을 허락한 단 세 개의 마드라사 가운데 하나로 마드라사 역할을 계속 수행해 이슬람 세계에서 미르-이 아랍 마드라사는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이 마드라사는 많은 유명 인사들을 배출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이슬람 신학교로, 현재도 이슬람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미르 아랍 마드라사는 청백색 모자이크 타일로 식물 문양과 문자 문양을 교묘하게 조화시켜 당시 건축의 백미로 중앙아시아의 전통적인 이슬람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서, 마드라사의 입구(이완)는 크고 웅장하며, 아치형으로 되어 있다. 이완의 천장은 정교한 타일 비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마드라사의 중심에는 에메랄드빛 아름다운 큰 돔이 있으며, 이 돔은 기하학적 패턴과 종교적 비문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돔은 이슬람 건축의 중요한 요소로, 하늘과의 연결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다. 마드라사의 이완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지만 지금도 학교로 운영되기 때문에 입구까지만 들어갈 수 있고, 중정 안으로는 들어가지는 못한다. 창살 틈으로 학교 안을 들여다보고 로비에서 서성이다 나온다.
1417년 건축된 울루그벡 마드라사는 중앙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오래된 마드라사라고 한다. 티무르제국의 통치자이자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미르조 울루그벡(Mirzo Ulugbek)이 지은 것으로 부하라에 이어 사마르칸트와 기즈 두반에도 마드라사를 건립하며 학문 발전에 힘쓴 인물이다.
정문 위에는 "지식을 구하는 것은 모든 이슬람 남성과 여성의 의무이다"라는 울루그벡의 계몽주의적 이상을 담은 유명한 아랍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내부는 전통적인 4개의 아이반(아치형 홀)과 2층 구조의 후지라(학생 숙소)가 있는 직사각형 안뜰을 중심으로 설계되었는데 지금은 관리가 되지 않은 듯 지저분한 모습으로 사람없이 텅텅 비어있다. 울루그벡의 천문학적 관심사를 반영해 별 모양, 다각형 등 천문학적 요소를 포함한 기하학적 무늬와 식물 문양이 주를 이루는 곳이라고 하는데, 관리가 되지 않아 알아보기 힘들다.
울루그벡 마드라사와 마주보고 있는 압둘라지즈 칸 마드라사(Abdullaziz Khan Madrasah)는 울루그벡 마드라사보다 2세기 후인, 1652년~1654년에 아슈타르한 왕조의 압둘라지즈 칸(Abdullaziz Khan)이 만든 마드라사라고 한다. 이 마드라사는 부하라 칸국 시대에 지어진 마지막 주요 마드라사이며, 울루그벡 마드라사와는 대조적으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장식예술의 극치를 보여줘 당시 아슈타르한 왕조의 예술적 부흥과 풍요로움을 반영하는 당시 중앙아시아 건축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걸작이라고 한다. 그러나 화려한 외부에 비해 내부는 울루즈벡 마드라사처럼 관리가 허술하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난방을 위한 벽난로까지 있었다고 하지만, 벽면의 장식과 벽돌들은 떨어져 있고, 내부 공간들도 상인들이 쓰다가 버린 다양한 기물들로 지저분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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