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리: 2001. 4. 15
08:20단천골입구-08:40단천마을-09:10갈림길-10:00헬기장-11:40수곡재(한벗샘)-13:00삼신봉(점심)-14:00내삼신봉-14:45쇠통바위-15:00선유동갈림길-15:30상불재-16:50불일휴게소-17:10환학대-17:30쌍계사-19:55단천골입구
단천골로 향한다. 이른 아침에 남원역 앞 식당에서 콩나물국밥에 해장술을 한잔했고 어젯밤 함께했던 정읍의 L선생은 지리산행에 합류하지 못하고 공무로 전주를 향해 떠났다. 5월 초 춘향제와 바래봉 철쭉제 준비로 남원 시가는 떠오른 애드벌룬과 함께 축제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어 가는 느낌이 들었고, 밤에 거닐었던 아름다운 요천과 승월교 사랑의 무지개는 네온사인과 함께 아름다웠다.
남원 시가를 벗어난 나의 애마는 밤재 터널을 지나 구례로 접어들었다. 옅은 안개는 지리산 자락을 감싸고 돌아 신비스럽고, 섬진강변 도로가에 무수히 피어난 선홍빛 영산홍이 촉촉한 이슬을 머금고 선명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얼마 전 벚꽃 축제가 열렸던 꽃피는 마을 화개는 조용한 아침을 맞이한다. 쌍계사 입구는 연등이 줄줄이 걸려있어 부처님오신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신흥마을을 지나니 매표소. 매표소엔 아직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출근치 않아 무사통과하며 입장료를 전액 면제 받는다. 단천마을 입구로 애마는 들어선다. 마을 초입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배낭을 들쳐멘다.
오늘의 루트는 단천마을로 삼신봉을 오른 후 시간을 보아 선유동골이나 쌍계사로 하산을 잡았다. 단천마을까지는 포장이 깔끔하고 길 왼편으로는 잘 정돈된 계단식 논과 오른편 아래로는 그동안 가물었음에도 단천골에서 흘러내리는 수량 많은 물소리가 제법 시원스럽다. 온 힘을 다해 생명을 피우는 봄이 왔다. 어느새 메말랐던 나뭇가지엔 어린 새싹이 돋고 서서히 신록의 계절을 맞이할 채비 하고 있다. 20여 분 된비알을 치고 올라가니 단천마을. 불과 이십여 채가 겨우 넘는 전형적인 지리산 자락의 작은마을이다. 마을은 인적도 없고 적막하다.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고 개가 마구 짖어대니 평화롭고 고요한 아침을 깬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단천마을 맨 꼭대기 집을 끝으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이 고로쇠 물을 채취하기 위해 곳곳에 길을 내놓아 길이 헷갈린다. 사위를 살피며 희미한 길을 찾아 나선다. 얼마 오르지 못해 길은 사라지고 없어 맥없이 헤맨다. 장애가 되는 나뭇가지를 꺾고 헤치며 가시덤불에 손을 긁히고 옷을 뜯기고서 소로를 발견 겨우 한숨을 내쉰다. 단천마을 직전, 오른편 계곡으로 직등하면 삼신봉. 하지만 오늘의 산행은 계곡이 아닌 왼편의 능선을 치고 올라 남부능선 수곡재에 합류를 하여야 한다. 한참을 오르고서야 물주머니에 물을 채우지 못한 것을 후회하나 이젠 어쩔 수 없는 일. 앞으로 한벗샘까지는 물 한 모금을 할 수가 없으니 심적으로 부담이 간다.
단천마을을 떠난 지 30여 분.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길로 접어든다. 아마도 좌측길은 대성마을로 이르는 길이라 추정된다. 곳곳엔 고로쇠 수액을 받던 얇은 PVC 파이프가 수거되지 않고 방치되어있다. 이곳에서 오름 길은 너덜이 많이 분포되어 식생은 쉽지 않은 듯하다. 길도 확실치 않고 표지기도 전혀 없어 고행이다. 자신을 과신한 무모한 산행이었을까. 남원O적에게 무조건 미안한 마음이다. 걸음마다 잡목과 나뭇가지를 헤쳐나가야 하니 어찌 산행이 괴롭지 않으랴. 고행의 가시밭길이다. 남부능선 수곡재까지 이런 일이 연이어 반복이 되었으니 팔과 다리가 성한 곳이 없이 찔리고 긁히고 말았다. 미안하다. 친구여.
10시 정각이 되어 오름 능선의 중간 기점인 듯한 헬기장에 올랐다. 이곳 헬기장은 산님의 접근이 없었던지 소나무들이 이미 세 그루가 자리를 잡았고, 길게 자란 산죽들이 무성했으며 곱게 피어난 진달래도 지천이다. 북쪽을 향해 바라보니 영신봉에서 뻗어 내린 남부 능선이 이어졌으며 촛대봉 옆으로 천왕봉이 빼꼼 모습을 나타냈고 우측엔 삼신봉보다 멋진 내삼신봉과 아래를 바라보니 대성마을과 벽소령 길도 보인다. 서편 저 멀리엔 반야봉과 왕시루봉이 오늘따라 유난히 거대하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오른다. 남부능선으로 오르는 이 길은 곳곳에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막아 우회하거나 올라타고 넘어야만 했다. 희미한 길이 약간씩 보이기도 했으나 정상적인 산행은 아니다. 힘겨운 오름 길에 체력이 달려 남원O적과 김밥을 물도 없이 꾸역꾸역 먹는다.
11시 반이 넘어서야 겨우 수곡재에 올랐다. 북쪽 위로 오르면 음양수를 거쳐 세석산장에 이르고 아래로 내려가면 삼신봉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에 올라서 보니 우리가 올랐던 이 길에 위험 출입금지 푯말이 있다. 이 남부능선길 바로 우측 아래엔 해발 1,200m의 한벗샘이 있다. 넉넉한 초지 위에 숨겨진 한벗샘. 일명 박단샘이라 한다. 그동안 오래 가물었건만 물줄기는 끊기지 않아 고맙고 기특하다. 한벗샘 아래는 거림골로 내려서는 길이다. 이름하여 자빠진골. 계곡이 협소이고 작은 너덜이 많고 미끄러워 잘 넘어진다고 하여 자빠진골이라는 악칭이 붙었으니 재미있는 일이다. 일단 물을 원 없이 마시고 수통에 물을 빵빵하게 채우고 든든한 마음으로 삼신봉을 향한다. 점심은 경치 좋은 삼신봉 정상에서 먹기로 한다.
이곳부터는 남부능선의 명물 산죽 터널이 반긴다. 크게 웃자란 산죽을 헤치며 나간다. 지리산 어느 곳에서나 널리 분포하고 있는 산죽.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 이곳은 한적하다. 영신봉과 촛대봉을 뒤로 힐긋힐긋 쳐다보며 세석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랜다. 앞으로 한 달 후면 아름다운 연분홍 색채로 화려한 철쭉의 정원을 이룰 세석고원. 고정희 시인의 ‘세석고원을 넘으며’ 의 싯귀절이 떠오른다. 지리산을 그토록 사랑했던 시인 고정희는 결국 지리산 뱀사골 간장소에서 장마로 불어난 계류와 운명을 다했다. 왜 고정희는 그런 악천후에 뱀사골을 찾았을까. 고정희의 지리산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피가 끓었다.
오후 1시가 되어서야 삼신봉 정상에 올랐다. 하동의 화개와 청암 그리고 산청의 시천면을 가르는 삼신봉. 아름다워라. 지리산이여. 삼신봉과 석 달 만에 재회이다. 역시 지리산 전경의 조망은 삼신봉이 최고이다. 바로 눈앞의 내삼신봉을 정겹게 바라보고 있다. 동쪽으로는 외삼신봉과 묵계치를 건너 산청의 주산까지 낙남정맥의 줄기가 보인다.
삼신봉에서 풍광을 즐기며 점심을 먹고 널널하게 다시 길을 떠난다. 내삼신봉에 오르니 저 아래엔 의신마을과 단천골이 선명하고 멀리 목통골 마을도 뚜렷하다. 뒤를 돌아보니 청학동 마을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주차장엔 대형버스 여러 대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아까 올랐던 헬기장과 오르고 넘던 바위와 능선 길도 확연히 보인다. 벌써 시간은 2시. 하지만 해는 아직도 까마득한 중천이며 날씨는 따사롭다. 내삼신봉을 지나 얼마 전 겨울 폭설의 눈길을 잃고 헤맸던 그곳을 지나며 피식 웃는다. 그때는 얼마나 황당했던지.
쇠통바위 밑에서 휴식을 취하는 남원O적을 잠시 쉬게 하고 쇠통바위에 올랐다. 이 바위는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어 생김새가 열쇠 구멍처럼 보여 쇠통바위라 부른다. 평소에 그저 지나치기만 했던 터라 잠시 짬을 내어 올랐다. 조망은 청학동과 묵계 저수지가 보이며 내삼신봉과 거의 동일하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우측 아래로 갈림길이 나온다. 그 길 아래엔 깊고 깊은 계곡이 이어져 있다. 그곳은 이름하여 선유동골이다. 선유동골로 내려서는 길이 초입부터 가파르다.
다음 기회로 이곳은 아낀다. 지리산 청학동의 하나로 손꼽히는 선유동골은 최근에야 비경이 알려져 여름철에는 피서객으로 붐빈다. 선유동골 초입이 찾기가 어려워 대부분 지나쳤지만 이젠 선유동골도 조금씩 알려져 오염이 되어 안타깝다. 상불재를 지난다. 이곳 상불재에선 삼성궁으로 하산할 수 있고, 직진하면 시루봉과 형제봉을 거쳐 악양의 평사리로 빠지며 우측으로 내려가면 불일폭포와 쌍계사다. 너덜과 급경사의 하산 길이 당분간 이어진다. 곳곳엔 산벚꽃과 진달래가 조화를 이루며 산님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시원한 물소리. 정말 반갑다. 작년 시월의 삼신봉에서 쌍계사 하산 길은 비에 젖고 외로웠지만, 오늘 봄 산행은 친우 남원O적도 동행해 마음도 흐뭇하다.
아까 오름길에서 무릎 관절에 통증을 느껴온 남원O적은 걸음이 신통치 않다. 특히 내리막이 계속 진행되는 터라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속도를 늦추며 휴식을 잠깐씩 자주 취한다. 불일폭포 갈림길. 시간상 들르지 못하고 불일평전으로 향한다. 이곳 변규화옹의 불일 휴게소는 경치가 좋고 아늑한지라 많은 산님에게 사랑을 받는다. 오늘도 많은 상춘객으로 가득하다. 아직도 쌍계사까지는 2km가 넘게 남았다. 남원O적이 무척이나 지친 것 같다.
오늘의 산행은 난코스에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검증되지 않은 루트는 동행을 꺼린다. 남까지 개고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쌍계사는 축제 분위기로 상춘객으로 가득하다. 하산 후 시원한 막걸리가 생각나 빨리 걸음 품을 판다. 정류소 앞 식당에서 의신마을로 향하는 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10여 분 전에 이미 떠났고 막차는 7시 30분. 즉 2시간 후에나 있다고 한다. 참 잘되었다. 남원O적과 마음 놓고 퍼질러 앉아 빙어 튀김에 파전, 산나물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청하고 시간을 죽인다. 어둠이 찾아온 오후 8시가 되어서야 단천마을 입구의 애마를 찾아 상처투성이의 피곤한 몸을 싣고 남원으로 향하나 지리산의 정기를 듬뿍 받았으니 정신은 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