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수(喜壽)에 던지는 메시지
전상준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희수(喜壽) 나이를 살아왔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테니스를 즐기고 한두 번씩은 바둑을 둔다. 돈 버는 일은 뒤로 하고 문학단체나 글쓰기동호회 모임에 가끔 참석하며 한껏 여유롭고 평화롭게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 일백 년을 살아 보니 ‘인생의 황금기’가 육십에서 칠십오 세까지였다는 어느 노철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그분의 삶의 경험에 대입하면 지난해를 끝으로 나의 인생 황금기도 끝난 상태다. 그래도 이 나이에 나에게 던질 몇 마디 말을 찾아본다.
먼저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이 난다. 두 분 모두 내 곁을 영원히 떠나가셨지만, 삶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존재다. 나는 누님과 여동생 사이, 삼 남매 중 중간이다. 남아선호사상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외동아들로 애지중지 고생을 모르고 자라 의지가 강하지 못했다. 사랑은 많이 받았지만 힘들거나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고 부모님의 얼굴을 쳐다보며 나약한 행동을 했다. 약간의 내성적인 성품으로 남보다 앞서 새로운 일을 개척하는데 소극적이었다. 삶이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궁핍하지도 않았다. 부모님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모셨다.
아버지는 내가 결혼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진갑을 맞이한 해였으니 연세가 예순한 살 때다. 정성 들여 가꾼 벼를 가을걷이해 집으로 옮기는 중이다. 리어카를 소가 끌고 다니게 개조한 수레에 탈곡하지 않은 벼 단을 가득 싣고 신작로를 지나고 있다. 그때 뒤따라온 버스가 경적을 울리자 소가 놀라 뛰는 바람에 길가로 넘어졌다. 머리를 돌에 부딪쳐 병원으로 가던 중 영면하셨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객지에서 교사로 2년째 근무하던 가을이다. 마음에 드는 참한 며느리를 보겠다고 분주하게 지인들께 부탁하시더니 끝내 자부가 지은 따뜻한 밥 한 끼 드시지 못하셨다. 영원한 불효자다.
어머니는 아흔아홉 해를 보내고 이승을 하직하셨다. 1912년생이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있던 이태 후다. 어린 시절을 일제강점기 아래 보내면서 배고픔도 견디어야 했고,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배우지 못해 문맹자로 한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사셨다. 아버지와 결혼 후에도 끼니 걱정하면서도 7남매를 낳았으나 어릴 때 다 잃고 삼 남매만 건사해 결혼시켰다. 나대로는 정성을 다해 모셔왔지만, 말년에 치매란 몹쓸 병으로 4년이란 긴 세월을 요양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마지막에는 손자가 병원을 찾아도 누군지 몰라보고 심지어 나를 보고도 엉뚱한 말씀을 하셨다. 마지막 가실 때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아들인 내가 임종을 못 했으니 지금도 마음에 회한으로 남아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재수하고도 실패해 지방대학을 다녔다. 학과도 그 당시 유행하던 상경 계열학과에 낙방해 인문계열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대기업이나 은행에 취직하거나 자영업을 하더라도 비전이 확실하다는 관련 학과에서 공부를 못 했으니 인생의 일차적이 꿈은 일찍 접어야 했다. 심리적 방황 속에서 대학 저학년을 보내고, 고학년이 되면서 장래 먹고 살 생각에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대학에서 교직과정을 이수해 국어 교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덕분에 순위 고사를 거처 경상북도교육청 산하 중·고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어 37년 6개월 동안 교육공무원으로 근무했다. 대학 학과 선택이 평생 직업으로 교사의 길을 걷게 했다. 매월 받는 월급으로 생활하느라 경제적으로는 팍팍했으나 마음은 편안했다. 하루 중 대부분을 청순한 청소년들과 보냈으니 늘 활기차고 여유가 있었다. 잘 먹고 살기 위한 생존경쟁도 치열하게 해본 기억이 없다. 매년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수확하는 농부처럼 제자들을 보살피며 그들의 가슴에 심은 꿈이 잘 영글도록 도와주며 지냈다.
어제는 40여 년 전 제자 아버님이 돌아가셔 문상을 다녀왔다. 퇴직하기 전에는 장년(壯年)이 된 제자들이 학교에 가끔 찾아와 그들의 학창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환담했다. 지금은 그들도 장년(長年)이 되어 부모님 부고를 보내온다. 제자도 머리에 서리를 이고 슬픔에 잠겨 있다. 세월의 흐름에 비켜 갈 장사 없다더니 그도 나처럼 황혼이다. 그래도 상갓집을 찾아 제자를 위로하고 왔으니 축복받은 시간을 보냈다.
누가 뭐래도 이제 노년이다. 노년은 노을빛 같고, 흰 눈빛 같고, 또 별빛 같은 나이라고 하나 그만큼 늙었음도 인정해야겠다. “성성백발(星星白髮)을 머리에 인 사람의 겉모습은 한겨울 백설에 싸인 태산 같고, 속마음은 한여름 밤 은하수의 별빛과도 같다. 노년은 높다란 고갯마루에 싸인 백설처럼 장엄하면서도 밤하늘에 높이 뜬 샛별처럼 은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김열규 교수는 말했다. 노을빛 같고, 흰 눈빛 같고, 또 별빛 같은 나이, 그게 노년이다. 나도 세 가지 빛살을 더불어 하나로 누리고 있는 나이다. 일몰(日沒)의 아름다운 기운이 일출(日出)의 그것과 어금버금하다고 한다. 인생 황혼이 석양빛에 물들고 석양의 기운으로 율동하기를 다짐한다. 희수(喜壽)의 나이에도 성취와 결실을 향한 열정으로 나에게 메시지를 던져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즐길 수 있는 것, 숨어 있는 행복을 찾는데 개으름 부리지 않을 작정이다. 인생은 지금부터라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원고지 13.9장)
<전상준 프로필>
· 2002년 《문예한국》으로 등단.
· 한국문인협회, 대구문인협회, 사)국제펜한국본부, 사)국제펜대구지역위원회, 수미문학회 회원. 영남수필문학회, 수필문예회 회장(역), 대구수필가협회, 일일문학회 부회장(역), 대구수필문예대학 학장(역).
· 수필집 《행복한 삶 아름다운 삶》 《행복한 삶 즐거운 삶》, 《행복한 삶 지혜로운 삶》(2017. ‘세종도서문학나눔’에 선정), 《행복한 삶 너그러운 삶》, 수필 선집 《행복한 삶 여유로운 삶》 발간
<프로필 사진>
첫댓글 전상준 선생님 글을 읽으며 선생님의 일상을 살며시 엿보며 선생님의 지도를 받던 때를 떠올려 봅니다.
선생님 김형석 교수님 처럼 건강하셔서 수필에 입문하는 후학들 잘 지도해 주시기를 바라며 마지막 부분 너무 공감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