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47
시래깃국 한 그릇이 푸졌으면
「설날 아침에」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김종길 시인의 「설날 아침에」란 시다. 이 희망의 노래는 작위적 미사여구가 없는 일상의 언어만으로 우리를 어른 되게 해준다. 얼음장 아래에서도 봄은 움트는 법, 살을 뚫는 고통을 이겨낼 때 고운 이빨이 된다. 시인은 그것이 나이를 더하는 지혜라고 말한다.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태도로 삶을 긍정하는 시어가 잔잔한 파동으로 가슴에 머문다.
잘났다는 사람들로 나라 안팎이 소란스럽다. 싸움질은 그칠 날이 없고 염치는 실종했다. 정의는 위선의 허울에 숨은 지 오래고 개인의 자유와 자아는 집단의 목적과 욕구에 포획되어가고 있다. 정치집단의 왜곡된 신념이 선량한 시민의 삶을 얼마나 황폐화하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새해다. 지난해는 대통령선거가 있었고 코로나 팬데믹이 이어진 가운데 세계경제위기와 이태원 참사가 있기까지 다사다난이라는 말을 실감한 해였다. 올해에는 나라가 평온하고 시민의 살림살이가 나아져 골목마다 웃음소리가 많이 들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해가 되면 서로 덕담을 나누고 계획을 세운다. 사람들이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은 통계로도 증명된다. 대표적으로는 담배판매량의 변화다. 신년 초가 되면 어김없이 담배 소비가 급감했다가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나마 인간이기에 그만큼이라도 참았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스트레스 수준과 흡연 여부의 관련성을 연구한 논문들도 흥미롭다.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의 연구자료에 따르면 낮은 스트레스 집단의 흡연율에 비해 높은 스트레스 집단의 흡연율이 많게는 2.39배나 된다. 사는 것이 팍팍할수록 담배를 더 피운다니 아무쪼록 담배 연기가 사라지는 올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새해에는 사회적 기부가 많았으면 좋겠다. 목청이 좋은 사람은 노래를 부르고 뼈마디가 부드러운 사람은 춤을 추면 좋겠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지식을 퍼 나르고 주머니가 두툼한 사람은 추운 이웃을 불러 뜨끈한 돼지국밥이라도 상 위에 올려놓았으면 좋겠다. 이도 저도 아니면 잔칫집에서 손뼉 치고 아픈 이를 보고 함께 울어주면 된다.
올해는 꼭 쇠사슬과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드는 원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북녘 하늘 아래 동토의 들판에도 이팝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으면 좋겠고 더 멀리는 우크라이나의 밀밭 위로 하얀 비둘기가 떼로 날았으면 좋겠다.
태양은 어제 그대로고 봄이 오면 미나리는 어제처럼 싹을 키울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직선의 시간을 구부려 영원회귀의 원을 만들고 굳이 시작점을 찍는다. 새해라는 말이 그렇다.
새해가 묵은해가 되고 묵은해가 또 다른 새해를 잉태한다. 그 윤회의 노정에서 썩은 고목의 그루터기에 오욕의 재를 뿌리고 가는 이도 있을 테지만, 탑을 쌓고 사랑이라는 진신사리를 남기는 이도 있다.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실컷 사랑하다 죽어도 모자란 시간에 다른 이를 아프게 하는 것은 소비적인 삶이다.
새해에는 꿈을 꾸자. 가난한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보듬고 사랑하는 꿈을 꾸자. 등이 시리고 허리가 곱쳐도 꿈이 있으면 달랑 하나 놓인 시래깃국이 12첩 반상보다 달다. 시인이 말한다.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