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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서면 인터뷰>
코로나19의 몹쓸 바이러스가 벌써 만 2년이 넘도록 온 세상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건강이 상하고 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것은 물론이고, 너나없이 장기간의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쳐갑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정말 몹쓸 병인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일수록 더 큰 피해를 입게 되고 더 견디기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그런 이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고 나눔이 절실한 때인 것 같습니다.
우리 동기들 중에는 특별히 이런저런 방식의 기부를 통해 소중한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번 모교 졸업 50주년을 맞으면서 다함께 이웃과의 나눔을 생각해보자는 뜻에서, 수범이 될 만한 동기 몇 분을 골라 서면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제가 과문한 탓으로 꼭 인터뷰가 필요한 동기분을 빠뜨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동기분의 크고 작은 나눔의 역할들이 바로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행복의 바이러스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어 김용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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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태 동기에 대한 서면 인터뷰
○ 동기께서는 2018년 모교총동창회가 운영하는 남성장학재단에 모교 후배 재학생들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1억 원을 쾌척하셨습니다. 특별한 기부의 동기라도 있는지요?
- 저는 어릴 적에 부자로 사는 동네 어른들이 좀 너그러웠으면 했습니다마는, 제 고향 동네에는 너그러웠던 어른은 안 계셨습니다. 그러나 여기 남도에 와 살면서 훌륭한 어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분 형제를 뵈었들 때가 삼십대 중반이었고, 그분들은 오십대 초반이었습니다. 형제가 용감하셨지요. 동생은 순천건물주들 중에서 가장 싸게 임대를 해 주시고 임대료를 인상하지 않았고, 형님은 제철소 협력업체를 운영하시면서 해마다 모교인 고려대와 가까운 순천대에 수억 씩을 기부하시어 그 누적금액이 수십억이 되어 양 대학에서 기념관이 지어졌습니다.
제가 감히 말씀을 드리자면 그분들을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저의 삶 속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이 남성을 졸업한 것입니다. 제가 만약 기부를 마음먹었다면 단연 모교인 남성을 생각했겠지요. 때 마침 제 존경하는 벗이 총동창회장을 할 때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손길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 우리 22회 동기회의 ‘친구의 날’ 행사로 2017년 봄에 처음으로 섬진강을 따라 1박 2일의 단체 지방여행을 갔는데, 그때도 참가자들 전원의 숙박비 등 대부분의 여행경비를 동기께서 부담하셨지요. 그 남도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지요?
- 제가 여행을 따라다니다가 어쩌다 섬진강 기행 코스를 개발했고, 그 전 십여 년 동안 많은 그룹들이 저를 따라서 섬진강을 내려왔는데 고등학교 친구들하고는 그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뱃심 좋은 황왕규가 회장을 할 때 과감히 밀어 붙여 성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섬진강 기행을 하면서, 멀리서 온 손님들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저녁식사와 숙소제공을 해왔습니다. 저녁은 광양불고기가 고정 메뉴였고, 숙소는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많은 친구들과 같이 했던 기억은 지금도 제 즐거움입니다. 핑계겠지만, 고교동창들은 제가 인솔해왔던 그룹 중에 가장 많은 인원이었지요. 그 날 진행이 좀 미숙했던 점이 아쉽습니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시 한 번 더 친구들을 초청 해보고 싶습니다.
○ 동기께서는 다방면에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지금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특히 8번에 걸쳐 성악 독창회를 개최하셨는데, 앞으로 더 공연 계획이 있으신가요?
- 내년 봄에 계획하고 있습니다마는, 코로나가 우선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음향시설이 좋은 호텔에서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고, 디너 콘서트 형식으로 재미있게 진행해볼까 계획하고 있습니다. 벗님들께서 많이 와주셔야 합니다. 꼭 부부동반해주시고. 내년 서울에서 콘서트가 공식행사로는 마지막이 될 겁니다. 멋지게 꾸며볼 생각입니다.
○ 동기께서 2017년 창단된 ‘남성합창단’의 초대 단장을 맡으셨습니다. 모교와 남성여중고 동문들로 구성된 합창단으로 알고 있는데, 합창단을 운영하시는데 애로사항이 없으셨는지요?
- 제가 살아오면서 해왔던 일 중에 노력했던 것에 비해서 가장 성과가 적었던 사업이 남성합창단 사업이었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단원이 열 두 명입니다. 내년 봄 계획된 “남성여고동문과 같이하는 섬진강 기행”과 “이준태 콘서트”를 계기로 동문들을 많이 불러 모아서, 회원배가 운동을 펼쳐볼 심산인데 쉽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 남아 있는 동문들은 정이 많이 들어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제 콘서트에 오시어 남성합창단이 부르는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나오는 “축배의 노래” 들어보시면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 동기께서 몇 년 전에 장편소설 “동틀 무렵 1, 2권”을 집필해 출간하시고, 그 소설이 나중에 “1915”로 개작되어 재출간되기도 했는데, 그 집필 배경과 과정이 궁금합니다.
- 제 소설 1915(동틀 무렵)은 저희 집안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 군 동기 들이 주관하는 줌 포럼에 제가 나서서 한 시간 남짓 제 소설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제가 오랜 시간 이런 고단한 작업에 매달려야만 했나하는 간절함을 설명하던 대목에서 울컥울컥하고 올라와, 참아 내느라 혼이 났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오래되었지만, 제 불효막심함은 더 사무쳐만 갑니다.
언제 평화로운 시기가 와서 송년회에 시간을 주시면 고교 친구들하고도 제 소설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 동기께서는 우리 동기회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으로 알려지신 분입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땅을 샅샅이 걸으시고, 히말라야‧중국 차마고도‧알프스 등 해외의 여러 곳도 순례하셨는데, 가장 추억이 남는 곳은 어디인가요?
- 인도의 라다크 입니다. 라다크는 인도 히말라야입니다. 5200미터의 준령을 넘는 험난한 코스였습니다.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일 겁니다. 라다크는 연간 강우량이 80mm 밖에 되지 않는 고립된 고원 사막지대이고, 1970년대 후반에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4박 5일 동안 세상과 유무선이 완전히 두절되는 오지중의 오지였습니다. 기행 나흘 째 고산증이 와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길바닥에 드러 누워서 숨을 할딱거렸습니다.
그런 곤욕을 치르고도 아직 덜 혼이 났는지. 다음은 EBC(Everest Base Camp)를 가볼까 여행프로그램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결어: 기부는 여건이 주어지면 더 하고 싶고, 콘서트는 내년이 마지막이고. 소설은 80살까지 쓰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살아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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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수 동기에 대한 서면 인터뷰
○ 동기께서 이번 모교 졸업 50주년 기념행사에 맞추어 모교에 여러 점의 희귀한 화석류와 종유석 소장품을 기증하셨습니다. 앞으로 모교의 재학생 후배들이 자연지리와 지학을 공부하는 데 아주 소중한 학습 자료가 되리라 믿습니다. 기증을 결심하신 특별한 동기가 있으신지요?
- 작년에 돌아가신 제 선친께서는 모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셨습니다. 또한 일찍 돌아가신 어머님의 추억도 모두 남성의 추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희 4형제 중 3형제가 모두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부모님을 기리며, 후배들에게 기념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번에 아까던 소장품을 기꺼이 부모님 이름으로 기증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제 아내가 이번 기부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제가 이번에 힘을 내게 되었습니다.
제가 모교를 졸업할 때까지 희귀한 암석이나 예술품을 실물로 본 일이 없고, 특별히 감동을 체험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 기회가 닿는 대로 이를 구입하였는데, 그중에서 모교 후배 재학생들이 직접 보고 자연의 신비함을 체험할 수 있게 하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 기증품의 가치를 돈으로 정확히 환가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만, 그래도 언제 대략 어느 가격에 구입하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 제가 소장품을 구입할 때, 그 소장품의 가치에 주안점을 두어 사실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기증하는 화석류와 종유석은 모두 20여년 전에 상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매입한 것입니다. 이제는 돈이 있어도 이러한 화석들은 구입하기가 어려운 실정입니다.
○ 동기께서는 상당히 많은 골동품과 귀중한 서화 작품들을 소장하고 계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본인의 그런 수집벽(癖)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제가 첫 소장품을 구매한 것이 예수병원 정형외과 과장으로 첫 월급을 받았을 때이니 벌써 30년 가까이 되어갑니다. 당시부터 수입의 상당부분으로 골동품과 그림, 서화작품들을 하나씩 사모아서 어쩌다보니 수만점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이나 서화를 수집할 때는 이른바 유명작가의 작품보다 숨겨지거나 잊혀진 전북의 예술가들 중심으로 수집하였습니다. 단, 화석류나 골동품은 구입할 때도 비용이 상당하여, 몇 달을 돈을 모아 오랜 기간 공을 들였습니다. 수집벽이 있는 것은 맞는데, 이리 오랜 기간 시간이 되었으니 이제는 만성화된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저는 다행히 돈벽이 아니라 수집벽이어서 만년에 지인들과 함께 즐기고 기증도 할 수 있어서 행복 합니다.
○ 동기의 부친께서 바로 저희 모교의 은사이셨던 고 최종순 선생님이신데, 아버지가 재직하고 계신 학교에 다니면서 겪게 된 애로사항이 많지 않으셨나요?
- 우리 동기들은 잘 알다시피 아버님 별칭이 “늑대”이셔서, 제가 자동으로 “늑대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엄격하셔서 나름 장남으로 여러분들이 짐작하듯이 애로점이 있었습니다. 또한 제 스승님들이 아버님과 함께 근무하시는지라 남성중·고를 졸업하기까지 6년동안 무척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런 스트레스가 학업에 매진하게 만든 동기부여가 된 것 같습니다.
○ 동기께서는 전주시내에서 요양병원을 경영하시면서 취미활동으로 틈틈이 그림도 그리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시회 계획은 없으신지요?
- 제가 오랜 기간 병원을 운영해오면서 여가 활동으로 최근 10년 동안 5차례의 전시회를 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개인적인 취미수준이라 내놓기는 그러합니다만, 내년에 제 칠순기념으로 제 글과 소장품, 그림 등으로 작품집을 제작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 동기께서 10년 가까이 매일 아침마다 주위의 지인들에게 나누어주는 짧은 글들이 마음의 공감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특별한 이웃과의 나눔이라고 생각되는데, 주로 어떤 글들을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 저는 새벽에 일어나면 일단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글을 씁니다. 제 글은 특별한 글이라기보다 하루하루 제 느낌, 일상의 소소함을 녹여내는 것입니다. 이 짧은 글을 통해 제가 사랑하는 이웃들과 마음을 교감하고 위로감을 공유하는 것이 매우 큰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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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홍권 동기에 대한 서면 인터뷰
○ 동기께서는 경남 진주시에 거주하면서 지역사회의 NGO 활동 등 다방면의 봉사활동을 계속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간단히 활동내용을 말씀해주십시오.
- 진주에 살면서 당시 카톨릭 농민회에서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시작했는데 대표이신 차광호 신부님이 로마 교황청에 파견나가면서 제가 대표를 맡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지역 시민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30년 동안 NGO 대표로 활동한 단체는 우리밀 살리기 운동 지부장, 진주 경실련 대표, 바른정치실현 진주시민모임 의장, 진주영상미디어 대표, 진주시민단체협의회 의장, 진주참여연대 상임대표, 진주신문 사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 동기께서 오래전부터 진주시내에 4,000평 규모의 ‘아침고요 산방’이라는 선원(禪院)을 설립해 운영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그 선원을 영업 목적으로 운영하지 않고 진주시민의 기도와 휴식 장소로 개방하여 무상 제공하신다는데, 그리 하시는 특별한 뜻이 있으신지요?
- 이는 불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수행은 명상인데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고 호젓한 장소에 누구나 와서 명상하고 힐링하는 장소를 꿈뀌왔고 시절인연이 도래해서인지 그같은 장소가 마련되어 이곳을 명상처로 만들었습니다. 넓은 부지를 휴게공간, 명상공간, 차실, 아쉬람, 정원 등으로 나눠 시민들에게 무상 제공하고 차실에서 보시 등의 이익금이 발생하면 전액 진주 장애인 학교에 기부했습니다. 기부를 불교에서는 보시라고 하는데 수행의 궁극적 목적을 ‘보시회향’이라고 합니다. 즉 남에게 베풀고 마지막에 되돌려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목적으로 ‘아침고요산방’이라는 명상 마당을 만든 것입니다.
○ 동기께서는 일찍이 화엄사에 출가하여 수행을 하셨고, 그런 인연으로 불교를 주제로 한 여러 차례의 서양화 개인전도 열고, 또 2014년에는 “탱큐 붓다”라는 불교 수행서를 저술하시기도 했는데, 어떠한 연유로 환속을 하시게 된 것인가요?
- 우연히 입산하여 십년동안 조계종 비구 승려생활을 했습니다. 언젠가 광주 약사암에 살 때 지산동 소재 소년자활원을 방문했고 그곳 아이들의 열악한 환경을 돕고자 자활원 건립을 위한 자선 전시회를 광주 Y살롱에서 열었습니다. 이는 비구승 최초의 서양화 전시회이기도 합니다. 이를 계기로 몇 차레 자활원, 양로원 등 자선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땡큐 붓다”는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인도 빨리어 원전에 의거하여 편년체로 기록한 방대한 성전입니다. 이 책은 세계적으로 첫 편년체 성전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한국 기자협회 종교부분 베스트 북에 선정되었고 불교계에서 불교학자들이 읽어야할 다섯 도서 중에 하나로 뽑혔으며 구미 각국에서 번역 사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환속은 지금의 아내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많은 우여곡절 끝에 성직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환속 후에도 열심히 불교계 활동을 하고 지도법사로 활동해 왔습니다. 이점 큰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 동기께서 저희 동기회의 단체 카카오톡에 수시로 올려주시는 글과 그림과 노래들이 많은 이들로부터 마음의 큰 울림을 얻고 있습니다. 두루 다방면에 걸친 본인의 능력 중에서도 어느 쪽을 가장 사랑하십니까?
- 전 별로 뛰어난 점이 없지만 한가지 음악을 듣고 기억하는 재주가 남달랐습니다. 처음 들은 노래는 세월이 흘러도 그때 장소와 분위기 등을 생생히 기억했습니다. 더불어 음악에 몰입되면 푹 빠져드는 감정 이입파이기도 합니다. 그림은 작은 판자에 주로 그리는데 자연 소재들을 원색을 덧입혀 단순한 구도로 압축해서 평면적으로 그립니다. 주로 좋은 노래를 들을 때 그리는데 즉설주알하듯 감정을 담아 신속히 그려내지요. 글은 제가 2,000년도부터 월간잡지를 13년 동안 발행했는데 한달 한번씩 머리글을 쓰게 되었고 그때 대부분 쓴 글들을 친구들과 공유한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늘 산에 살아왔고 제 성향도 자연친화적이라 그 안에서 글소재를 찾고 제가 공부하는 불교사상을 가미하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림과 글, 음악중, 어느 게 더 좋은 지는 잘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굳이 이 나이에 선택하라면 음악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림과 글은 산고의 아픔이 크지만 음악은 오히려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종전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착한 마음을 일깨우는 마력이 있으니까요.
○ 동기의 자제인 장이정 군이 방탄소년단(BTS)의 전속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고, 장군이 작곡해 BTS가 부른 “잠시”라는 노래는 빌보드 챠트 100위 안에 들기도 했는데, 장군을 남다른 길로 키우면서 특별히 어려움을 겪지 않으셨나요?
- 이정이는 어릴 적부터 노래를 잘 부르고 음악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에도 학업보다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부자지간에 숱한 갈등도 있었지요. 제 생각엔 노래는 취미로 하고 대학에 들어가서 얼마든지 동아리 활동으로 노래를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정이가 고3 되던 해 봄, 우연히 MBC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에 나가 이선희 멘토스쿨에 입성했습니다. 그래서 로엔 엔터테인먼트의 히스토리 그룹 아이돌이 되었고 일본에서는 제법 인기있는 그룹으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선 여전히 B그룹에 머물렀고 멤버중 두명이 군입대하면서 그룹이 해체되었는데 이정이는 다행히 작곡 능력이 뛰어나 BTS가 있는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하여 음악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금 와서야 이렇게 편하게 말할 수 있지만 가수가 되어 겪은 수많은 불안과 좌절 등은 가족으로 너무 고통스럽기도 했 습니다. 이렇게나마 성장할 수 있었음은 친구들의 열렬한 응원지덕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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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중 동기에 대한 서면 인터뷰
○ 동기께서는 우리 동기회의 ‘헌혈왕’이십니다. 그동안 200번 이상의 헌혈을 하시고 소정의 헌혈증서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헌혈이 왜 필요하고 또 지금 의료계의 혈액 수급 상황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 피는 인공으로 제조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수술등의 필요시에는 같은 혈액형을 가진 누군가의 피를 보충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한 헌혈기피로 혈액부족 현상이 매우 심각하다고 들었습니다. 일상 혈액보유분이 4~5일 정도의 여유 밖에 안된다고 들었습니다.
○ 언제 어떤 동기에서 처음 헌혈을 시작하시고, 또 어떤 뜻에서 계속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언제까지 계속하실 계획인가요?
- 군 제대 후 첫 예비군 훈련 때 헌혈하면 조기 귀가시켜준다는 유혹에 넘어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헌혈에도 정년이 있어 만 70세까지만 가능하다고 하니 앞으로 3년 정도 남은 것 같습니다. 요즘에도 월 1회 정도는 하려고 노력중입니다.
○ 헌혈을 장기간 계속하시면 아무래도 신체적인 영향이 없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동안 특별히 건강에 지장은 없으셨는지요?
- 건강한 사람은 헌혈후 곧장 재생산되므로 건강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저의 경우 헌혈하고 나면 묵은피가 빠져나갔다는 안도감으로 오히려 몸이 가뿐하고 헌혈당일에는 자제하라는 혈액원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한잔의 맥주가 주는 상쾌함은 꿀맛!입니다. 지금까지 40여년 동안 주욱 그래 왔습니다.
○ 헌혈은 우리 사회의 건강 증진과 생명 보호를 위하여 매우 소중한 나눔의 실천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자신의 몸속의 피를 계속 나누려면 특별한 용기가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헌혈을 하게 되면 헌혈자에게 혹시 무슨 혜택이라도 있는 것인가요?
- 헌혈에 특별한 용기는 필요치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관심”입니다. 저의 경우 처음에는 전혀 별다른 의도 없이 시작했지만 횟수가 거듭되면서 건강한 신체에 대한 감사함의 표시로 누군가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되고자 꾸준히 팔뚝을 내밀었습니다. 헌혈행위는 비록 작지만 쉽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헌혈 후 느껴지는 보람과 삶의 의미까지 생각하면 항상 즐거운 마음이 들어 손수 헌혈의 집까지 시간을 내어서 찾아가 헌혈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제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헌혈횟수가 30회, 50회, 100회 때에 은장, 금장, 포장을 받았습니다. 헌혈에 대한 특별한 혜택은 없고 제 스스로에게 감사하고 위로하는 기쁨과 보람만 누리고 있습니다.
○ 동기께서는 평생직장이던 은행 일을 그만두시고 취미활동으로 색소폰 연주를 시작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본인의 연주실력이 어느 수준이라고 평가하시나요?
- 평소 노래하고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나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하모니카밖에 없어 은행퇴직 후 10여년 동안 색소폰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코로나로 인해 연습도 불가능하여 중급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우리 동기생들끼리 “색소폰앙상블”을 만들어 합동공연을 해보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색소폰 합주음은 정말로 환상적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