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悔堂孝友錄 회당효우록
君姓申諱元祿字季綏自號悔堂 本貫巨濟鵝洲 是高麗中全羅道按廉使諱祐之六世孫也 按廉公處昏濁之世 以廉潔秉節 遭考版圖判書諱允濡喪 廬墓三年 一俊禮制 有二竹生于墓側 當時以爲孝感所致 聞于朝旌其閭 實錄在國乘及輿地誌 按廉公生諱光富中顯大夫內府令 令生諱士廉通德郞彦陽縣監 卽我高祖也
군성신휘원록자계수자호회당 본관거제아주 시고려중전라도안렴사휘우지육세손야 안렴공처혼탁지세 이염결병절 조고판도판서휘윤유상 여묘삼년 일준예제 유이죽생우묘측 당시이위효감소치 문우조정기려 실록재국승급여지지 안렴공생휘광부중현대부내부령 령생휘사렴통덕랑언양현감 즉아고조야
군의 성은 신, 이름은 원록, 자는 계수이며 스스로 회당이라 하였다. 본관은 거제도의 아주이다. 이분은 고려 때 전라도 안렴사를 지낸 우의 6세손이다. 안렴공은 혼탁한 세상에 처하여 청렴결백함으로써 절개를 지키려 하였다. 부친 판도판서 윤유의 상을 당하자 삼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한결같이 예의와 제도를 지켰다. 대나무 두 그루가 묘의 옆에서 자라났으니 당시 사람들이 효성에 감응하여 그리된 것이라 여겼으며 조정에 알려져 정려받았다. (이 사실은) 나라의 기록 및 여지지에 실려 있다.
안렴공은 함자가 광부인 중현대부 내부령을 낳았고, 내부령은 함자가 사겸인 통덕랑 언양현감을 낳으셨으니 언양현감은 우리 고조시다.
曾祖諱錫命成均生員祖諱俊禎從仕郞 考諱壽世業儒 素妣義興朴氏 曾祖諱艮成均進士祖諱惟昌通政大夫咸安郡守 考諱自儉承議郞主簿
증조휘석명성균생원조휘준정종사랑 고휘수세업유 소비의흥박씨 증조휘간성균진사조휘유창통정대부함안군수 고휘자검승의랑주부
증조의 함자는 석명, 성균생원이셨으며, 조부의 함자는 준정, 종사랑을 지내셨다. 아버님 함자는 수, 유학을 공부하셨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의흥박씨로, 어머니의 증조 함자는 간, 성균진사셨고, 조부 함자는 유창, 통정대부 함안군수셨으며, 아버님 함자는 자검, 승의랑 주부를 지내셨다.
君幼而聰穎 志操耿介 敦行孝悌 不由勉强
군유이총영 지조경개 돈행효제 부유면강
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지조가 빛나고 단단하였다. 행동은 돈독하고 효성스럽고 공손하였으니 힘써 노력하여 된 것이 아니었다(타고난 것이었다).
昔我先君早嬰風疾 歲丙戌得傷寒 醫藥無效 又得咳嗽 氣息喘急 晝夜苦劇 君年纔十餘歲 登八公山 親採藥材 必從良醫而劑之 日夜湯進 目不交睫 衣不解帶 至于八年
석아선군조영풍질 세병술득상한 의약무효 우득해수 기식천급 주야고극 군년재십여세 등팔공산 친채약재 필종양의이제지 일야탕진 목부교첩 의부해대 지우팔년
예전에 우리 선군께서 이른 나이에 풍질에 걸리셨다. 병술년에 찬 기운이 들어 의약이 효과가 없었고 또 해소가 생겨 기침과 천식이 심하여 주야로 크게 고통을 겪으셨다. 군은 나이가 겨우 10여 세였는데 팔공산에 올라 직접 약재를 채취하였으며 좋은 의사의 말대로 조제하여 밤낮으로 달여서 올렸다. 눈조차 붙이지 않았고 옷의 띠조차 풀지 않은 채 8년을 그리하였다.
癸巳仲春 君年十八 遂遭終天之痛 籲天叩地 五內崩摧 入則慰母 出則血泣
계사중춘 군년십팔 수조종천지통 유천고지 오내붕최 입칙위모 출칙혈읍
계사년 중춘에 군의 나이 18세였는데 지극히 애통한 친상을 당하였다.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고 땅을 두드리며 애통해 하였는데 오장이 찢어질 듯하였다. (그럼에도) 집에 들어가서는 어머니를 위로하였고 나오면 피눈물을 흘렸다.
至十一月己酉 葬于八智山 乾向之原 廬墓三年 構齋舍以爲永世奉先之所
지십일월기유 장우팔지산 건향지원 여묘삼년 구재사이위영세봉선지소
11월 기유일이 되어 팔지산 건향 언덕에 장례지내고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 하기를 3년동안 하였다. 재사를 지어 영원히 선조들을 모실 수 있는 곳으로 삼았다.
乙未春服闋 君年始二十 事親事兄無不極其誠
을미춘복결 군년시이십 사친사형무부극기성
을미년 봄에 복상이 끝났을 때 군의 나이 스물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형을 섬기는데 그 정성을 이루 다 하지 않음이 없었다.
戊戌承老母旨 遊于國學 閱歲而還 自是硏精篤志 講習不怠
무술승노모지 유우국학 열세이환 자시연정독지 강습부태
무술년에 늙으신 어머니의 뜻에 따라 국학(성균관)에 가서 공부하였으나 해 넘기지 않고 돌아왔다. 이 때부터 정진하여 연구하고 뜻을 돈독히 하며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己亥秋與我同屈於漢城之發解還途 余構瘧疾 未克前路 間關跋涉
기해추여아동굴어한성지발해환도 여구학질 미극전로 간관발섭
기해년 가을에 나와 함께 한성부의 시험에서 선발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갑자기 학질에 걸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었다.
至天民川時 秋水方漲 人言此水有毒螫之蛇 多害人致死 君不以爲惑 背負病兄 乃克濟水
지천민천시 추수방창 인언차수유독석지사 다해인치사 군부이위혹 배부병형 내극제수
천민천에 이르렀을 때 가을 물이 바야흐로 넘쳐흘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물에는 독을 가진 이무기가 있어 사람들을 많이 해쳐 죽이기도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군은 의심하지 않고 병든 형(필자)을 업고서 물을 건넜다.
庚子春 君娶星山李氏 花山公之後 正言諱孟專之曾孫女也 余喜得佳配 以悅親心
경자춘 군취성산이씨 화산공지후 정언휘맹전지증손녀야 여희득가배 이열친심
경자년 봄에 군은 성산 이씨와 혼인하였는데 화산공 후손이며 정언 이맹전의 증손녀시다. 나는 그가 좋은 배우자를 얻어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음을 기뻐하였다.
辛丑壬寅兩歲 飢饉連仍 君以奉養不稱爲憂 卒其細 君親臭菽水
신축임인양세 기근연잉 군이봉양부칭위우 졸기세 군친취숙수
신축 임인년 두해 동안 기근이 잇달았다. 군은 봉양을 제대로 하지 못함을 걱정하였으며 끝내 그 세세하게 하였으니 군은 직접 콩물 냄새를 맡았다.
癸卯冬 聞豊基倅周愼齋始營書院于竹溪 士子坌集 君贄文往謁先生以客禮遇之
계묘동 문풍기쉬주신재시영서원우죽계 사자분집 군지문왕알선생이객례우지
계묘년 겨울에 풍기군수 신재 주세붕 선생이 죽계에 서원을 지어 선비들이 많이 모여든다는 소식을 듣자 군은 폐백문안을 지어서 가서 뵈었으며 선생은 객으로써 예우하였다.
留數日出論題曰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君卽製而進之 先生以德器稱之 批其篇尾曰 我院有人 其心如玉 天將玉汝 申其祿矣 因䂓以言行 相顧之實質 以東方道學之緖 疊疊不倦
유수일출논제왈 유붕자원방래 부역낙호 군즉제이진지 선생이덕기칭지 비기편미왈 아원유인 기심여옥 천장옥여 신기록의 인규이언행 상고지실질 이동방도학지서 첩첩부권
며칠간 머물다가 논제를 내었는데.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였다. 군은 즉시 제술하여 제출하니 선생은 덕이 있는 그릇이라 칭하였으며 그 글의 말미에 비답을 붙여주기를 “우리 서원에 사람이 있으니 그 마음이 옥과 같도다. 하늘이 그대를 옥과 같이 여기니 그에 합당한 녹을 거듭 주시리라.”하였다. 인하여 말과 행동으로 규찰하고 실질이 있도록 서로 권면하여 동방(우리나라) 도학의 길이 쌓이고 쌓여 게을러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辭歸之日 贈一絶曰 爲學師原水 論交取兇觥 相䂓唯十字 庶悉百年情 其眷顧也如是
사귀지일 증일절왈 위학사원수 론교취흉굉 상규유십자 서실백년정 기권고야여시
마치고 돌아가는 날에 절구 한편을 써서 주기를 “학문은 근원을 스승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교분은 예의에 맞도록 할 것이다. 서로 규찰할 것은 오직 이 열 글자이니, 모든 것은 백년의 정이다.”라 하였다. 그 아끼고 신경써줌이 이와 같았다.
其還謂余曰 豊川之有書院 乃是勝事 吾鄕獨無藏修之所乎 遂有營建之志
기환위여왈 풍천지유서원 내시승사 오향독무장수지소호 수유영건지지
돌아와서는 내게 이르기를 “풍천에는 서원이 있으니 아주 좋은 일입니다. 우리 지역에는 책을 보관하고 선비들이 배움을 닦는 곳이 없습니다.”하고는 서원을 세우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丙午國恤[仁廟喪]時 人只擧義服之制 而君獨以素粲終三年 人或有問卽曰 我有功緦之服云
병오국휼[인묘상]시 인지거의복지제 이군독이소찬종삼년 인혹유문즉왈 아유공시지복운
병오년에 (인종의)국휼을 당하였는데 사람들은 다만 의리상 복제만 하였다. 그러나 군은 유독 3년간 소찬을 지켰다. 그 이유를 묻는 이가 있으면 곧 말하기를 “내가 공복이나 시마복을 입어야 할 일이 있다.”고만 말하였다.
是年春遭其婦翁之喪 棺槨之備 親自營辦 葬具祭奠 盡其情禮
시년춘조기부옹지상 관곽지비 친자영판 장구제전 진기정례
이해 봄에 장인의 상을 당하였는데 관이나 곽을 갖추는 일을 직접 몸소 마련하였으며, 장례 도구나 제사 올리는 것에 모두 그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丁未夏 朴兄橫罹 無妄拘囚牢獄 君單童匹馬 奔告于甘棠之下 以直其寃
정미하 박형횡이 무망구수뢰옥 군단동필마 분고우감당지하 이직기원
정미년 여름에 박형이 재난을 당하여 억울하게 뇌옥에 갇혔는데 군은 어린 종하나 데리고 말한마리 타고 달려가 그 억울한 사정을 말하고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戊申春 余避癘遠遊于公山 得病苦痛 至幾滅性 君追往求療 極盡調護 以續殘命
무신춘 여피려원유우공산 득병고통 지기멸성 군추왕구료 극진조호 이속잔명
무신년 봄에 내가 역질을 피하여 공산으로 멀리 가다가 병을 얻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군은 쫓아 와서는 구호하고 치료하기를 극진히 간호해 주었으니 이 덕에 목숨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庚戌夏 朴兄見背葬送之祀[禮?} 營造之役 以身當之
경술하 박형견배장송지사[례?} 영조지역 이신당지
경술년 여름에 박형이 어버이를 여의고 장례를 치러야 했을 때에는 영건하는 역을 몸소 담당하였다.
其四女一男 親自擇人婚嫁 躬辦婚需 使不失時
기사녀일남 친자택인혼가 궁판혼수 사부실시
그의 딸 넷과 아들 하나를 직접 사람을 택하여 시집보내고 장가들게 하였는데 몸소 혼수를 마련하여 때를 놓치지 않도록 하였다.
辛亥春乃歎曰 光陰易邁 立揚無期 慈闈年深 甘旨不稱 古人云 家貧親老 不爲祿仕 一不孝也 吾將冒恥笑 得除殘邑訓學 以遂負米之情
신해춘내탄왈 광음역매 립양무기 자위년심 감지부칭 고인운 가빈친로 부위록사 일부효야 오장모치소 득제잔읍훈학 이수부미지정
신해년 봄에 탄식하며 말하기를, “세월은 빨리 지나가고 입신양명은 기약이 없다. 어머니 나이가 많으신데 입에 달고 맛있는 것을 마련해 드리지 못한다. 옛 사람이 이르되.‘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노쇠한데 벼슬하여 녹을 받지 않는 것은 불효 가운데 하나다.’라 하였다. 나는 장차 부끄러움과 비웃음을 무릅쓰고 잔약한 읍의 훈도나 학관이라도 되어 집안에 쌀가마니나 지고 오는 정을 이루려 한다.”고 하였다.
於是得除湖南長水學 時致月餼之餘 以資偏親之養
어시득제호남장수학 시치월희지여 이자편친지양
이에 호남 장수현의 학관으로 제수되었다. 이 때 달마다 받는 급료의 여유가 있어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는 자산을 삼을 수 있었다.
癸丑 荒政方極 邑宰委以賑恤之任 君曰 此乃濟人之事 不可不盡心竭誠措置 民賴以存活者衆
계축 황정방극 읍재위이진휼지임 군왈 차내제인지사 부가부진심갈성조치 민뢰이존활자중
계축년에 기근이 심하여 진휼을 크게 해야 하는데 읍의 수령이 진휼하는 책임을 맡기려 하였다. 군은 이르기를 “이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조치해야만 한다.”고 하셨다. 백성들 중 이에 의지하여 살아남게 된 이들이 많았다.
甲寅秋 聞周愼齋簀 奔往哭焉 自是心喪三年
갑인추 문주신재책 분왕곡언 자시심상삼년
갑인년 가을에 신재 주세붕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곡하였으며 이 때부터 심상 3년을 지켰다.
丁巳 卜地于長川之上 創建書院 因時不利 纔立十間 而功未就緖
정사 복지우장천지상 창건서원 인시부리 재립십간 이공미취서
정사년에 장천 위쪽에 자리를 정하고 서원을 창건하였다. 그때 시세가 불리하여 겨우 열칸 남짓만 세우고는 공사를 다 마치지 못하였다.
又以老兄嫁女之禮 勤苦資粧 余不費力焉
또한 노형(필자)의 딸이 시집가게 되었을 때 그 예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여 밑천을 준비해주어 나는 비용과 노력을 거의 들이지 않았다.
庚申 與南村姓族 結約爲契 講信睦族 又與柳義興希潛議立鄕約 講禮春秋
경신 여남촌성족 결약위계 강신목족 우여유의흥희잠의립향약 강례춘추
경신년에 남촌에 사는 동성 친족들과 계를 만들어 친족간의 신뢰와 화목을 다짐하였으며, 또한 의흥 유희잠과 논의하여 향약을 세워 봄가을의 예법을 강구하였다.
甲子又除淸道學 凡前後除學 皆爲親計 嘗書壁上曰 負重涉遠 不擇地而休 家貧親老 不擇祿而仕 自是親益衰老 專以定省溫淸爲任 身未嘗遠遊
갑자우제청도학 범전후제학 개위친계 상서벽상왈 부중섭원 부택지이휴 가빈친로 부택록이사 자시친익쇠로 전이정성온청위임 신미상원유
갑자년에 또 청도 학관으로 제수되었다. 전후로 학관에 제수된 것은 모두 어머니를 모시기 위한 계책이었다. 일찍이 벽에 글귀를 써놓았는데 이르기를,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려 할 때에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쉬어야 하며, 집안이 가난한데 어버이가 늙으셨다면 봉록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때부터 어머니께서 더욱 노쇠해지시자 오로지 전심을 다하여 따뜻하고 맑게 살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며 멀리 출타하지도 않았다.
戊辰秋 慨然歎曰 吾鄕之營建書院 乃吾夙志而終不能成 則豈不爲一大欠事也 卽與同志 告于邑宰 專任其事 晨夜展力 至庚午秋 斷手其所未備者 唯祠宇也 嘗以爲恨 至乙亥 與鄕中士友 共立祠廟 丙子春 以鄕先正金慕齋文敬公奉安 方伯啓聞賜額長川 君始快於意 其篤於校塾之事 勉進後學 以衛斯文 盖其素志也
무진추 개연탄왈 오향지영건서원 내오숙지이종부능성 칙기부위일대흠사야 즉여동지 고우읍재 전임기사 신야전력 지경오추 단수기소미비자 유사우야 상이위한 지을해 여향중사우 공립사묘 병자춘 이향선정금모재문경공봉안 방백계문사액장천 군시쾌어의 기독어교숙지사 면진후학 이위사문 개기소지야
무진년 가을에 개연히 탄식하며 이르기를 “우리 지역에 서원을 세우는 것은 내가 일찍부터 마음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어찌 커다란 흠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동지들과 읍재(수령)에게 고하여 그 일을 전담하여 맡아 새벽부터 밤까지 힘을 다하였다. 경오년 가을에 그 미비한 채로 마무리하였는데 오직 사우만 지을 수 있었다. 일찍부터 그것을 한으로 여겨 을해년에 지역의 사대부들과 함께 사묘를 세웠으며 병자년 봄에 지방의 선정 모재 김안국 선생을 봉안하였다. 방백(관찰사)이 계문하여 장천이라 사액받으니 군이 비로소 마음에 흡족히 여겼다. (이와 같이) 학교를 세우는 일과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힘써 노력하여 사문을 지키는 것은 평소 공이 마음 둔 바였다.
癸酉又除三嘉學 甲戌以親病辭歸 憫親之老 凡可以慰悅親心者 無不爲之 嘗雜植奇花異草 每於佳辰令節 陪親邀兄作宴 親曲八關歌 以獻酌盡愛 日之至誠 敍天倫之樂 事因口占一絶曰 愁裡生涯莫怨嗟 吾門一樂最堪誇 七旬兄弟班衣處 百歲慈親有幾家
계유우제삼가학 갑술이친병사귀 민친지로 범가이위열친심자 무부위지 상잡식기화이초 매어가진영절 배친요형작연 친곡팔관가 이헌작진애 일지지성 서천륜지악 사인구점일절왈 수리생애막원차 오문일락최감과 칠순형제반의처 백세자친유기가
무릇 어머니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정성을 다하여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신기한 꽃과 색다른 풀들을 심었고 좋은 계절 절기를 맞이하면 매양 어머니를 모시고 형을 맞이하여 연회를 열었는데 직접 팔관가를 지어 헌수하고 잔 올리면서 사랑을 극진히 하였다. 날마다 지극히 정성을 바쳐 천륜의 즐거움을 펼쳤고 이로 인하여 입으로 한 구절을 읊으니. “근심 속에 보내는 삶에서 원망하고 한탄하지 않았다. 우리 집안에 한가지 기쁜 일 있어 가장 자랑할 만하니. 칠순형제가 무늬 옷 입고서 백세되신 어머니 앞에 있으니 몇 집이나 그럴 수 있겠는가.” 하였다.
且書十八字於壁上曰 古人一日養 不以三公換 誠未感天事與心違云 凡養親以養志爲先 有能慰悅親心者 必厚其人飮食 必具二品 擇其美味而進之 請其所與而與之
차서십팔자어벽상왈 고인일일양 불이삼공환 성미감천사여심위운 범양친이양지위선 유능위열친심자 필후기인음식 필구이품 택기미미이진지 청기소여이여지
또 벽에 18글자를 써서 이르기를 “옛 사람은 하루를 봉양할 수 있으면 삼공의 자리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실로 하늘에 감응하지 않았어도 일과 마음에 어긋남이 있으면 이르기를 “무릇 어버이를 봉양함은 그 뜻을 기르게 하는 것을 우선해야 하며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그 드시는 것을 좋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반드시 두 종류를 갖추어 그 중 맛좋은 것을 택해서 올리면서 무엇을 드릴까요 여쭙고 드렸다.
凡親所着褻衣 常作小槽 必手澣然後付之人便旋之 器亦必躬自除濊 不使之人
범친소착설의 상작소조 필수한연후부지인편선지 기역필궁자제예 불사지인
무릇 어버이께서 입으셨던 때묻은 옷은 작은 물통을 만들어서 반드시 직접 세탁한 후에 인편에 맡겨 가져오게 하였다. 그릇들도 반드시 직접 씻어내었으며 남을 시키지 않았다.
是年冬 親病轉劇 氣息奄奄 長燈徹夜 飮泣籲天 床褥少不安穩 則重茵累席 或以白絮 或以柔毛 黍穀著作裡絮 務安親體 然長臥不起 筋骨失脈 皮肉糜爛 君憫其苦 是裹之以衣 擁抱而坐 日復益勤
시년동 친병전극 기식엄엄 장등철야 음읍유천 상욕소불안온 칙중인루석 혹이백서 혹이유모 서곡저작리서 무안친체 연장와불기 근골실맥 피육미란 군민기고 시과지이의 옹포이좌 일복익근
이해 겨울에 모친의 병세가 급히 나빠져 호흡이 어려웠는데 등불 밝히고[등잔의 심지를 돋우고] 밤새면서 눈물을 삼키면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잠자리가 조금이라도 편안하지 않으면 자리를 더 깔고 요를 겹쳐 깔아드렸다. 혹은 흰 솜이불, 혹은 부드러운 털이불, 기장을 넣은 흰 솜이불 등을 이용해서 어머니 몸이 편안하시도록 힘썼다. 그러나 오래 누워계시고 일어나지 않으셔서 근육과 뼈는 기운이 빠지고 피부와 살은 문드러졌다. 군은 그 아픔을 가슴 아프게 여겨 옷으로 싸서는 끌어안고 앉아서 날마다 더욱 착실히 모셨다.
親曰 吾不遄死 使汝勞苦 誰知汝之若此乎
친왈 오불천사 사여노고 수지여지약차호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빨리 죽지 않아서 너를 수고롭게 하는구나. 네가 이렇게 하는 것을 누가 알겠느냐.” 하였다.
君瞿然曰 固所子職 是何言也 雖千萬歲 猶以不足 有何勞焉
군구연왈 고소자직 시하언야 수천만세 유이부족 유하로언
군은 놀라서 말씀드리기를 “실로 아들된 직분일 뿐입니다. 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년만년이라도 오히려 부족한데 어찌 수고랄 게 있겠습니까.” 하였다.
至乙亥春 親病少間 朴妹來侍親側久矣 三月將還乃曰 親病稍歇 娣亦歸家 値此令節 可不慰親之心乎
지을해춘 친병소간 박매래시친측구의 삼월장환내왈 친병초헐 제역귀가 치차영절 가불위친지심호
을해년 봄에 어머님의 병환이 조금 나으셨을 때 박씨 누이가 와서 어머니를 모시면서 오래 있었다. 3월이 되어 장차 돌아가려 하니 말하기를 “어머니 병이 조금 덜하시고 누이도 귀가해야 하는데 마침 명절이 되었으니 어머니 마음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卽設席於東皐 陪老母携兄娣邀隣里老軀 以悅親心 有一老女 不知自何處來 狂歌胡舞 以作俳優戱 親得一笑 以終此日之樂
즉설석어동고 배노모휴형제요린리노구 이열친심 유일노녀 불지자하처래 광가호무 이작배우희 친득일소 이종차일지악
즉시 동쪽 언덕에 자리를 마련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형제 자매와 손잡고 동네 노인들도 맞이하여 어머니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다. 어떤 노파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미친 듯 노래부르며 오랑캐 춤을 추어 광대들처럼 놀았다. 어머니가 그것을 보고 한번 웃으셨다. 이로써 이날의 놀이를 마쳤다.
時丁 國恤 或有非之者曰 雖是悅親之事 當此國恤 無乃過乎
시정 국휼 혹유비지자왈 수시열친지사 당차국휼 무내과호
이 때가 국휼기간이라 혹 이를 잘못했다 하면서 이르기를 “비록 이것은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는 일이었다고 해도 이같이 국휼을 당했을 때에는 지나친 것이 아닌가.”하였다.
君聞之曰 非是耽吾樂也 日迫西山 餘日苦短 明年此辰 難卜再見 以是知過而犯之耳
군문지왈 비시탐오락야 일박서산 여일고단 명년차신 난복재견 이시지과이범지이
군은 듣고서 이르기를 “이는 내가 즐겁자고 한 일이 아니다. 날은 서산에 기울었는데 남은 날들이 너무나 짧다. 내년 이 날을 다시 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지나친 줄 알면서도 범한 것일 뿐이다.” 하였다.
自是以後 親病日篤 嘗糞以知其殆 仰天摧咽 至六月十一日未時棄養 攀號擗踊 哭泣無時
자시이후 친병일독 상분이지기태 앙천최열 지육월십일일미시기양 반호벽용 곡읍무시
이날 이후 어머니의 병이 날로 위독해졌다. 똥을 맛보아 그 위태로움을 알게 되자 하늘을 우러러 큰소리로 울기도 하였으나 6월 11일 미시에 끝내 어머님이 운명하셨다. 군은 부여잡고 소리치며 가슴을 치며 날뛰었으며 무시로 크게 울부짖었다.
殯于八智山所 冬十月二十日甲申 合葬于先塋 造墓之時 躬自執役 吾懼其傷性也 諭之曰 凡爲人子 當此大事 孰不欲竭心力而爲之 誠有所不堪 又有役夫 何奈自苦耶 答曰 我性自好 不知爲勞
빈우팔지산소 동십월이십일갑신 합장우선영 조묘지시 궁자집역 오구기상성야 유지왈 범위인자 당차대사 숙불욕갈심력이위지 성유소불감 우유역부 하내자고야 답왈 아성자호 불지위로
팔지산의 산소에 모셨으며 겨울 10월 20일 갑신일에 선영에 합장하였다. 무덤을 조성할 때에 몸소 직접 일을 도맡아 하였다. 나는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 되어 타일러 이르되, “무릇 자식된 도리로서 이 같은 큰일을 당하여 누군들 마음과 몸을 다하려 하지 않겠는가. 진실로 감당하지 못할 바가 있고 또한 일꾼이 있는데 어찌하여 몸소 힘들게 하는가.”하였다. 그러자 답하기를, “내 천성이 스스로 좋아서 피곤한 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凡送終之事 獨自營辦 家雖貧乏 極其情禮 殆無遺憾
범송종지사 독자영판 가수빈핍 극기정례 태무유감
무릇 장례지내고 모시는 일을 모두 홀로 경영하고 마련하였으니 집은 비록 가난하고 궁핍하였으나 그 마음과 예의를 극진히 다하여 조금도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不食醬酪蔬菜 惟糲飯飮水 日漸柴毁 人皆憂其過禮 而益自堅苦 遑遑不息 供奠之具 躬執其勞
불식장락소채 유려반음수 일점시훼 인개우기과례 이익자견고 황황불식 공전지구 궁집기로
간장이나 식초로 양념한 채소를 먹지 않고 오직 거친 현미밥만 먹고 물만 마셨으니 날마다 장작개비처럼 마르고 몸이 상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예의가 지나치다고 걱정하였으나 그럴수록 더욱 스스로 어려움을 감수하였으며 정신없이 다니며 쉬지 않았고 공궤하여 올리는 도구를 몸소 그 노고를 다하였다.
嘗作慈母影幀 以爲後日 永感之資 至是揭之几筵之上 朝暮拜哭 以致如在之誠 每日三至于墓所環繞哀痛 雖雨雪不廢 毒病始纏于身 柴毁益甚 只存皮骨
상작자모영정 이위후일 영감지자 지시게지궤연지상 조모배곡 이치여재지성 매일삼지우묘소환요애통 수우설불폐 독병시전우신 시훼익심 지존피골
일찍이 어머니 영정을 만들어서 훗날 오래 느낄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때에는 궤연의 위에 걸어두고는 아침 저녁으로 절하며 곡하니 마치 살아계실 때 정성을 올리는 듯하였다. 매일 세차례씩 묘소에 가서는 둘레를 돌면서 애통해 하였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치지 않았으니 독한 병이 이 때부터 몸에 들어가 바짝 말라감이 더욱 심해져 다만 뼈와 가죽만 남을 지경이었다.
子弟泣諫卽曰 命稟於有生之初 豈以勤苦致死乎
자제읍간즉왈 명품어유생지초 기이근고치사호
자제들이 울면서 간하면 말하기를, “목숨이라는 건 날 때부터 타고나는 것이니 어찌 힘쓰고 고생한다고 죽음에 이르겠느냐.” 하였다.
丙子淸明 增修曾祖墓 乃曰 平生積念 於此少弛
병자청명 증수증조묘 내왈 평생적념 어차소이
병자년 청명일에 증조의 묘소를 보수하고는 이르기를 “평생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인데 이제야 조금 풀렸다.”고 하였다.
三月二十八日 得癨亂 彌留不廖 拜奠之禮 猶不少廢
삼월이십팔일 득곽란 미류부료 배전지례 유부소폐
3월 28일에 곽란에 걸려 오래도록 낫지 않았는데에도 절하고 상올리는 예의는 조금도 폐하지 않았다.
四月初二 厥疾危重 未能起居 不以病爲痛 以廢禮爲痛
사월초이 궐질위중 미능기거 불이병위통 이폐례위통
4월 초 2일에 병질이 위중해져서 일어나지도 앉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병을 아파하지는 않고 예의를 폐하고 있음을 애통하게 여겼다.
至初七 乃曰 久闕親奠 實所哀痛 明日乃是觀燈令節 可設別奠
지초칠 내왈 구궐친전 실소애통 명일내시관등영절 가설별전
초 7일이 되자 이르기를 “오래도록 친히 존헌례를 행하지 못했으니 실로 애통해 하는 바이다. 내일은 연등회 구경을 하는 명절이니 특별한 상을 올려야 한다.”하였다.
命取薔薇花 來回扶起盥嗽 病旋大灼 百藥無效
명취장미화 래회부기관수 병선대작 백약무효
장미꽃을 가져오라 하고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하였는데 곧 병세가 크게 악화되어 백약이 효과가 없게 되었다.
子弟請調護于家則曰 喪人死於殯側可矣 何死於家
자제청조호우가칙왈 상인사어빈측가의 하사어가
자제들이 집에서 조리하고 요양할 것을 권하니 이르되 “상을 치르는 사람은 빈소에서 죽어야 한다. 어찌 집에서 죽겠느냐.” 하였다.
病勢已不可 爲內嫂來省 卽曰 山所非婦人所至 何以來爲
병세이불가 위내수래성 즉왈 산소비부인소지 하이래위
병세가 이미 가망이 없게 되자 안으로 들이기 위해 형수가 와서 살피니 곧 이르기를, “산소는 부인이 올 곳이 아닌데 무엇하러 왔소?” 하였다.
問後事不答 但云 我之平生 事親有所未盡 今又不得終制 以是爲憾
문후사불답 단운 아지평생 사친유소미진 금우불득종제 이시위감
뒷일을 물으니 답하지 않았으며 다만 이르기를, “내 평생 어버이를 섬기되 미진한 점이 있었는데 지금 또 예식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니 이것이 유감이다.”하였다.
欲哭不能 嗚咽垂淚 而言曰 以母氏遺像。置我棺傍。吾將奉侍于泉下矣。至八日酉時。乃逝。
욕곡불능 오열수루 이언왈 이모씨유상。치아관방。오장봉시우천하의。지팔일유시。내서。
곡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하고 오열하면서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이르기를, “어머니 초상을 내 관 옆에 넣어주시오. 나는 장차 황천에서도 어머니를 모시겠다.” 하였다. 8일 유시가 되자 사망하였다.
是日朝 謂老兄曰 我疾甚革 不能自支 請俱紙筆來 吾將田民分與二兒 吾答曰 痛苦之中 不可用慮 姑徐徐云
시일조 위노형왈 아질심혁 불능자지 청구지필래 오장전민분여이아 오답왈 통고지중 불가용려 고서서운
이날 아침에 노형에게 이르기를, “내 병이 심해져 스스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종이와 붓을 가져다 주세요. 나는 앞으로 전답과 노비들을 두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려 합니다.”하였다. 나는 답하기를, “힘들고 아픈 중에 마음을 써서는 안되니 우선 천천히 하세요.”라고 하였다.
適張壻來問疾 促之以紙筆 使書之 凡所區處 纖悉備具 少無差誤 其精神不亂如此
적장서래문질 촉지이지필 사서지 범소구처 섬실비구 소무차오 기정신불란여차
마침 사위 장군이 병문안을 오니 재촉하여 붓을 잡게 하고 종이에 쓰도록 하였는데 무릇 일을 나누어 하게 하는 것마다 모두 제대로 갖추었고 조금도 어그러지거나 잘못된 것이 없었으니 그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았음이 이와 같았다.
且以夕尊督之 老兄承其意而焚香上食於靈位前
차이석존독지 노형승기의이분향상식어영위전
또한 저녁 상식을 독촉하였다. 이에 나는 그 뜻에 따라 위패 앞에서 분향하고 상식하였다.
未及輟尊 擧家慟哭 奔往視之已逝矣
미급철존 거가통곡 분왕시지이서의
상을 치우기도 전에 온 집안이 통곡하므로 급히 와서 보니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噫 傳曰仁者必壽 又曰爲善者 天報以福 天乎何乃反其道 使吾弟不得終孝 而至於斯耶
희 전왈인자필수 우왈위선자 천보이복 천호하내반기도 사오제부득종효 이지어사야
슬프다! 경전에 이르기를 어진 이는 반드시 장수할 것이라 하였고 또 이르되 착한 일을 한 자는 하늘이 복으로 보답할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하늘이시여! 어찌하여 그 도리에 반대로 하시는 것입니까. 내 동생으로 하여금 효도를 다 못하고 이 지경이 되도록 하시다니요.
君嘗以老兄之病爲憂 豈知病者全 而强者逝乎 天將何以勸人子之善居喪者哉.
군상이노형지병위우 기지병자전 이강자서호 천장하이권인자지선거상자재.
그대는 일찍이 노형(필자)의 병이 근심이라고 하였는데 어찌 알았으리오. 병든 자(필자)는 온전한데 건강한 자(그대)가 가버리다니. 하늘은 장차 무엇으로 사람의 자식으로서 상을 잘 치르는 것을 권면하려는가.
嗚呼 人生天地間 孰無稟賦之良性 孰非職分之當爲 而鮮有全其孝悌之行者 君能事親以孝 終始無違 友兄以愛 至老彌篤 敎子以義方 訓人以遜悌 堅苦刻勵之志 孜孜汲汲 日不暇給 而不爲崖岸嶄絶之行 只就日用間 盡其所當行者 故知君者鮮而名不顯於世
오호 인생천지간 숙무품부지양성 숙비직분지당위 이선유전기효제지행자 군능사친이효 종시무위 우형이애 지로미독 교자이의방 훈인이손제 견고각려지지 자자급급 일부가급 이부위애안참절지행 지취일용간 진기소당행자 고지군자선이명부현어세
아아, 사람이 천지간에 나서 누구라도 타고난 좋은 성품이 없겠으며 누구라도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겠는가마는 그 효성스럽고 공손한 행동을 다하는 자는 드물다. 그대는 능히 어버이를 섬김에 효로써 하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어김이 없었다. 형제 사이에 우애가 좋기로는 늙을수록 더 돈독하였다. 자손은 의롭고 바르게 가르쳤고 남을 가르칠 때에는 겸손하고 받드는 태도를 지켰다. 갈고 닦은 뜻은 굳고 고되었으니 일상을 살아가기에 바빠 날마다 여유가 없었으므로 우뚝 솟은 뛰어난 행실은 없었으며 다만 살아가면서 그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다하였을 뿐이다. 이 때문에 공을 아는 자가 드물고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然其孝友之行 拔出流俗 能追按廉府君之芳蹟 以肥家道 垂範後昆 則恐無愧於古之人也
연기효우지행 발출유속 능추안렴부군지방적 이비가도 수범후곤 칙공무괴어고지인야
그러나 그 효성스럽고 우애깊은 행동은 평범한 속세에서 아주 뛰어난 것이니 안렴공 부군의 꽃다운 행적을 뒤따라 집안의 법도를 풍부하게 한 것이니 후손에게 모범을 보인 것으로 하자면 옛 어른에 비해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병其從事師友之間 早知爲己之學 一皆體驗切實于身 不事俗儒口耳之學 尤以興學右文爲己任 創建書院 終始擔當 其所以得於學問之力者 爲如何哉
병기종사사우지간 조지위기지학 일개체험절실우신 부사속유구이지학 우이흥학우문위기임 창건서원 종시담당 기소이득어학문지력자 위여하재
또 함께 일하는 스승이나 벗들 사이에서 일찌감치 위기지학(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학문이 아닌 자기가 깨달은 학문)은 모든 것이 본인의 체험이고 절실함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으며, 속된 유학자들의 입과 귀에 걸린 학문을 따르지 않았다. 더욱이 학문을 진흥시키고 돕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알아 서원을 창건하고 시종 담당하였다. 그 얻은 바는 학문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니 어찌하겠는가.
嗚呼君之懿美之行 淵源之學 赫赫前日終不泯沒 則固無待於老兄吃吃而然 其事親處家兄弟閨門之間 有非他人所及知 而吾家後孫 非文無以徵之 故老兄不揆蹇拙 不避嫌疑 謹以平日所親見於百一者 强爲少錄 後來兒孫 勿以辭不達意爲嫌 而以賢行爲式 可也
오호군지의미지행 연원지학 혁혁전일종부민몰 칙고무대어노형흘흘이연 기사친처가형제규문지간 유비타인소급지 이오가후손 비문무이징지 고노형부규건졸 부피혐의 근이평일소친견어백일자 강위소록 후래아손 물이사부달의위혐 이이현행위식 가야
아아, 군의 아름다운 행실과 근본이 있는 학문은 전날에 혁혁하였고 오래도록 사라져 버리지 않으니 진실로 노형이 껄껄 웃으라고 기다린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레 그리 됩니다. 그 어버이를 모신 곳이나 집안 형제 규문의 속에는 다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으리니 우리 집안 후손들은 남겨진 글이 없으면 징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형이 재주 없음을 살피지 않고 혐의를 피하지 않고 삼가 평소에 직접 본 것 가운데 백분지 일이나마 억지로 짧게 기록하니 앞으로 태어날 어린 자손들은 글이 뜻에 이르지 못한다 하여 꺼리지 말고 어진 행동을 본받을 법식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君生于正德丙子十二月癸亥 歿于萬曆丙子四月辛未 賢嫂李氏少君子一年隔一月而生 事姑三十五年 孝心亦純至矣 有子二人各生英兒得 賢者必有後之應 是可慰也 萬曆丙子五月旣望 老兄元福 書于八智山所
군생우정덕병자십이월계해 몰우만력병자사월신미 현수이씨소군자일년격일월이생 사고삼십오년 효심역순지의 유자이인각생영아득 현자필유후지응 시가위야 만력병자오월기망 노형원복 서우팔지산소
군은 정덕 병자년 12월 계해일에 태어났고 만력병자 4월 신미일에 돌아갔습니다. 어지신 형수 이씨는 군보다 1년 1개월 뒤에 태어났고 시어머니를 35년 모셨으니 효심 역시 지극히 순수하십니다. 아들 둘이 각기 뛰어난 자식들을 두었으니 어질게 된 자는 반드시 후손으로 보답을 받는다는 것이 기쁨이 될 것입니다.
만력 병자년 5월 기망에 노형 원복이 팔지의 산소에 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