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복음교회, 2022년 12월 11일
♱기도로 마음을 모읍니다♱
[공동체고백] 사도신경
[어린이시간] 어린이 찬양; 238장(금과 은 나 없어도), 122장(고요한 밤 거룩한 밤)
말씀; “믿음으로 희망을 품어요 (눅1:39-42, 51-53)”
[광 고]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전히 소외되시는 아기예수님을 생각하는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목요일 ‘대교회협의회비상대책’위원으로 교회협의회 이홍정총무를 면담하고 돌아왔습니다.
-월드컵의 뜨거운 함성으로 작은(?) 울부짖음을 듣지 못하지는 않았는지. 10,29참사의 국정조사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화물노동자들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입시다.
[특 송] 다음주; ‘감사 위의 감사’ (2022년 재정부장, 전영호형제)
[성시 교독] 교독문 117번(구주강림3)
[찬 송] 366장(어두운 내 눈 밝히사)
[강 론]
시선을 하늘에 둡시다(마6:19-34)
지금, 우리의 시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비록 우리는 땅을 밟고 살아가고 있지만 시선을 하늘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시선을 하늘에 두는 사람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입니다. 땅에 있는 보물은 좀먹기 쉽고 도둑맞기 일쑤여서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안전합니다. 하늘에는 좀도, 도둑도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보물입니다, 기도를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드린다면 하늘에 쌓는 보물이 되는 것입니다. 절제도 우리에게는 보물이죠, 그 보물을 하늘에 쌓는 방법은 절제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는 구제, 역시 보물입니다. 그 보물을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한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는 일이 되고,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22)”이라고 했습니다. 등불은 어두운 길을 안내합니다. 눈은 우리를 안내하는 등불입니다. 특히나 우리의 삶에 어둠이 짙게 드리울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의 눈, 즉 시선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우리의 눈이 건강하고 우리의 시선이 하늘을 향한다면 아무리 어둡고 가난한 현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가는 길은 밝을 테지만 우리의 세계관이 병들어 있거나 땅엣 것만 추구한다면 이미 많은 것을 소유하고도 어둠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마치 노예로 400년을 애굽의 종으로 있던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자유롭게 가나안을 향하지만 시선이 하늘에 있지 못하면 광야에만 머물며 광야 너머 있는 가나안을 보지 못하듯이).
우리의 시선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면 어둠이 덮치는 순간에도 삶의 지향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진탕에서 연꽃을 피우는 삶이겠지요. 지금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24)”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재물이냐? 하나님이냐?’를 늘 선택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의사가 될 것인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의사의 길을 선택합니다. 적어도 21세기 한국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시대에 뒤떨어졌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천민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저는 뒤쳐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확신합니다. 의사라는 직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선택되어야 합니다. 공무원도 소위, 철밥통이라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봉사하기 위해 선택되어야 합니다. 이런 선택의 순간이 ‘재물이냐? 하나님이냐?’의 선택의 기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이에서 불가능한 길을 선택하려고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재물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는 선택 말입니다. 즉, 돈도 벌고 사람도 살리는 의사, 철밥통이면서도 시민에게도 봉사하는 공무원이 되는 길입니다. 예.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말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난 없이 그리스도인의 길을 가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니라도 생각합니다. 결정적인 순간, 즉 어둠이 드리울 때 시선을 하늘에 두는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길, 봉사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시선을 땅에 두는 사람은 당장의 유익을 위해 돈을 선택하고 자리(사회적 위치)에 연연해합니다.
부끄럽지만 목사로서도 이런 갈등의 순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고난 없이 영광에 이르는 불가능한 길을 고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듯이 고난 없이 영광은 없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저는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기로 결심하고 대림절 3째 주일을 맞습니다. 여러분도 두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기기로 결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탄절, 하늘에 시선을 둠으로 우리 주님의 오심을 마음껏 기뻐하는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숨(생명)이 음식보다 더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더 귀합니다. 더 많이 먹기 위한 탐욕으로 이웃의 생명가치와 인간존엄이 훼손되고(택배, 화물노동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더 좋은 것을 입기 위한 선택으로 지구는 파괴됩니다(1년에 버려지는 9,200만 톤의 의류쓰레기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과도한 음식에 지구 반대편 이웃은 굶주리고, 우리의 화려한 소비로 가난한 사람들은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과도한 음식은 스스로의 건강도 해치기까지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너무 골몰하는 가운데 우리 몸이 상합니다.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더 많은 양식을 위해 염려하다가 오늘을 의미 있게 살기 보다는 염려로 허비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께서는 말씀하시죠. “공중의 새를 보라(26)”,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먹이십니다. 하물며, 우리를 먹이지 않으시겠습니까? 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28)”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입히시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가장 아름답게 말이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30)”. 요사이 사람들은 말합니다, “요새 대한민국에서 굶는 사람이 어디 있노?”. 이런 말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할 때 제 마음은 더 아픕니다. 이 말이 맞는 측면도 있습니다. 말인즉, 더 많이 먹으려고 하고 더 좋은 것으로 입으려고 하니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지구 반대편에서는 헐벗고 굶주리는 것이죠.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작게 먹고, 작게 소비하는 것이 국제적 트렌드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먹고 입는 것으로 자족(自足)할 줄 아는 복음교회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잘 아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통치)와 그 의(뜻)을 구하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33). 이 말씀만큼 오용되는 경우도 없지만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말씀으로 교회 일을 열심히 함으로 우리 야망에 하나님을 복무하게 하려 들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럼 내일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질문 할 수 있습니다. 제겐 뼈아픈 질문입니다. 그러나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34)”하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대답하겠습니다. 내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고 오늘의 염려만 합시다. 괴로움은 “한날의 괴로움(34)”으로 족합니다. 괴로움은 인생에서 꼭 필요합니다. 괴로움(고통)으로 인간은 성숙해 지기 때문이죠. 교리적으로 표현하자면 원죄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우리는 괴로움이 없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길이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난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애굽의 노예로 있던 사람이 갑자기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까? 광야를 거쳐야만 자유인이 되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죠).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칠 때 시선을 하늘에 두는 사람은 자신을 성찰하고 성숙의 시간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땅에 시선을 두는 사람은 내일까지 염려함으로 절망하고 낙심하죠. 절망하고 낙심하면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27)”고 말입니다.
말씀마치겠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둡시다.
①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불가능한 길에서 갈등합니다. 시선을 하늘에 두는 사람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선택하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②시선을 하늘에 두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몸을 아끼며 좋은 것으로 입혀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이 모든 것을 채워주실 하나님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③염려하지 맙시다.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고 그 괴로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갈 수 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인생의 드라마를 극적이게 하는 장치입니다. 내일 염려는 내일하고 오늘의 염려로 한날의 괴로움을 성숙과 성장의 기회로 삼읍시다. 이러한 일은 시선을 하늘에 두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찬 송] 515장(눈을 들어 하늘 보라)
[주님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