⑱당진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국민보도연맹사건>
당진에서는 전쟁 발발 직후인 7월 10일경 국민보도연맹원 사건이 발생했다. 당진군지에 따르면, 7월 10일 벌어진 이 사건으로 주민 160명이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당진경찰서 연혁사에는 7월 12일 발생한 이 사건으로 인해 주민 360명이 희생되었다고 정리하고 있다. 희생지는 두 경우 모두 송악면 한진포구의 ‘목캥이’를 지목하고 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당진지역은 7월 12일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고 한다.
당진을 비롯하여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지역 모두 의용군 강제징집에 의한 피해가 컸는데, 당진에서는 의용군 인수증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1950년 9월 11일 당진군 군사동원부장 앞으로 작성된 의용군 인수증에는 ‘인수인원(합격자) 446명’으로 기재되어 있다.
인민군 후퇴시기에 당진의 주민피해가 심했다. 1950년 9월 28일 당진읍 공동묘지에서 100여 명, 시곡리 야산에서 20여 명, 석문면 노학산 방공호에서 20여 명이 희생되었다. 가해자는 지방좌익, 정치보위부였고 당시 인민군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역혐의 피해>
당진 지역의 주민들은 국군 수복 시기 군과 경찰에 의해서도 큰 피해를 입었다.
송악면에서는 국군 수복 초기 해병대에게 30여 명의 주민들이 송산면 오도리 성굼이 바닷가에서 희생되었다.
당진경찰서는 1950년 10월 1일 복귀하여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을 색출‧연행했다. 이렇게 당진경찰서로 이송된 주민들은 유치장과 경찰서 인근 2동의 곡물창고에 감금되어 사찰계와 수사계 경찰에 의해 분류되었으며, 결국 한진리 목캥이 바닷가, 한진리 한재 교통호에서 집단 살해되었다.
당진경찰서로 이송된 순성면 성북리 강선주 등 8명이 10월 16일 트럭에 실려 한진항에서 수장당했다. 함께 연행되었던 순성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 일부 주민들은 한진리 갯고랑에서 살해당했다.
11월 4일에는 당진경찰서가 5대의 차로 170여 명의 주민들을 한진출장소 뒤 한재 교통호에서 기관총으로 살해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이후 한차례 더 당진경찰서가 수십 명을 한재 바닷가 벼랑에서 총살했다. 당진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희생된 주민들은 모두 200여 명에 달했다.
뒤늦게 연행된 주민들 중에는 갇혀 있던 중 추위를 견대지 못해 동사한 주민들도 있었다. 송악면 가교리 인민위원장 이규택이 농회창고에 감금되어 동사했는데, 함께 동사한 주민의 시신이 7구가 더 있었다.
같은 시기에 당진경찰서로 연행된 주민 외에도 각 지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집단희생당했다.
면천지서로 연행된 주민 100여 명은 인민군 점령기 신작로 변으로 파 놓은 상하리 공동묘지 교통호, 죽동리 아미산 철광산으로 끌려가 집단희생되었다.
송악지서는 지서와 한진리 어업창고에 감금했던 주민들을 송악면 중흥리 야산과 한진리 한재 등에서 집단살해했다. 송악면에서는 국군 수복 초기 해병대에게 30여 명의 주민들이 송산면 오도리 성굼이 바닷가에서 희생되기도 했다.
순성지서는 순성면 곡물창고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을 광천리 남원천 냇가 모래구덩이와 지서 인근 야산 고개에서 살해했다. 희생자 중 19명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백석리에서는 인민위원장 김승현, 그의 아들 김영악, 그의 친구 이명규 등이 희생되었다.
1950년 11월 초에는 백석리 이명규가 대한청년단원들에게 고문을 당해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백석리 대한청년단 감찰부장 등 3명이 『비상조치령』위반으로 기소되었으며 1952년 1월 15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집행유예 2년 등을 받았다. 재판부는 이○○, 이○○에 대한 기소내용을 인정, 해당 범위 내에서 형을 정하되범죄의 정상이 민량(憫諒)할 점이 있으므로그 형을 감경한다 하였다.
무죄를 선고받은 이○○은 1954년 11월 19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위와 같은 이유로 징역 1년․집행유예 2년에 처해졌다. 대한청년단 감찰부원 이○○이 ‘한국전쟁 중 수십 명의 동지들과 태극동맹을 결성하여 인민군 점령시기 지하반공활동’을 했다고 한다.
신평지서는 20여 명의 주민들을 지서 부근 양곡창고에 감금했다가 집단살해했으며 살아남은 10여 명은 당진경찰서로 이송되어 집단희생되었다. 남산리 양기석, 이현봉 등 15명이 신평면 국민학교에서 연행되어 면창고에 감금되었다가 신평지서 경찰이 복귀한 뒤 모두 희생되었다.
우강지서는 국군 수복 후 우강면 치안대에 의해 면 창고로 연행된 주민들 중 89명을 우강면 전파송신대에서 집단살해했다. 그 후 연행된 주민 40여 명은 당진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우강면 전파송신대 골망에서 희생된 시신들은 수습되지 못하였고 이후 유족들이 봉분을 조성하여 공포리 희생자 정성봉의 아내가 차례를 지내고 봉분을 관리했다.
합덕지서는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을 합덕면 곡물창고에 감금했다. 이들 대부분은 송산리 은골과 우강 전파송신대에서 희생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송산리 야산골짜기 은골과 우강면 전파송신대에서 3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단희생되었다. 이외에 합덕여자고등학교 뒷산에서도 희생된 주민들이 있었다.
이상 당진지역에서 확인된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