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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에 아첨하여 불도를 손상시킴을 경계하다
귀운여본(歸雲如本)스님
귀운 여본(歸雲如本)스님의 『변영편(辯 篇)』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나라 정국공(鄭國公) 부필(富弼)은 투자 수옹(投子修)스님에게 도를 물었는데, 그 때 오
갔던 편지와 게송은 14장이나 되었으며, 대(台)땅의 홍복사(鴻福寺) 두 회랑 벽 사이에 비를
세웠다. 이로써 선배들이 근엄하게 법을 주관했다는 것과 왕공귀인들이 독실하게 도를 믿었
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국공이 사직(社稷)의 중신(重臣)으로서 만년에 방향을 제대로 찾았던 것은 투자 수옹스
님에게 반드시 남다른 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자신도 "투자 수옹스님에게서 자극받은
바가 있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사대부 가운데서 불교를 진실하게 믿는 이는 나이도 잊고 세도도 굽히면서 용맹정진하여
완전하게 반드시 깨닫기를 기약하고야 말았다. 시랑(侍郞) 양대년(楊大年)과 도위(都尉) 이
화문(李和文) 등이 광혜원 원연(廣慧院 元璉)·석문 온총(石門 蘊聰)과 자명(慈明) 등 모든
큰스님들을 뵈었을 때, 뜨겁게 오갔던 문답들이 여기저기 모든 선서(禪書)에 분명히 기록되
어 있다.
양무위(楊無爲)와 백운 수단(百雲守端)스님의 관계, 장무진(張無盡)과 도솔 종열(兜率從悅)
스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모두가 관문을 통과하고 정곡을 쳐서 철저하게 끝까지 깨달았는
데, 구차하게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근세에 시랑(侍郞) 장무구(張無垢)와 참정(參政) 이한노(李漢老)·학사(學君) 여거인(呂居
仁)은 모두가 묘희(妙喜) 노장을 뵙고 점점 진보하여 결국 선의 심오한 경지를 체득했으니,
이들은 속세를 초탈한 도반이라 할 만하다. 그들은 좋고 싫은 감정과 맞고 거슬리는 경계를
번개처럼 뿌리치고 우뢰처럼 쓸어버려 세속의 구차함과 거리낌을 벗어버렸다. 그리하여 보
는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황송한 마음으로 길을 비켜서며 그 경지를 엿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군자(君君子)들은 한가하고 적막한 강가에서 서로를 구하고 선(禪)의 고요한 경지
에 마음을 깃들이고자 하면서 본심만을 캘 뿐이었다.
후세엔 선덕(先德)들의 법다운 모범은 보지 못하고, 오로지 아첨을 일삼으며 승진하여 이름
날릴 것만을 비뚤어지게 구하고 있다. 주지가 추천한 이름으로 장로가 된 자들은 더러는 명
함을 써서 모 문중의 승려 아무개라 자칭하며 웃사람들을 받듬으로써 배경을 삼고 대중의
상주물을 빼돌려 뇌물로 바치면서 아첨하기도 한다. 식견 있는 자들이 그것을 딱하게 여기
고 비웃는데도 수치를 모르고 그저 편안할 뿐이다.
아 - 아, 우리 불제자 사문들은 물병 하나, 발우 하나로 구름처럼 새처럼 떠돌아도 얼거나
굶주리는 절박한 상황은 없다. 그런데도 자녀와 옥백(玉帛)을 그리워하여 허리를 굽히고 빗
자루질을 한다. 웃사람에게 아첨하고자 설설 기며 몸도 제대로 못피니 욕됨과 천함을 자초
하는 상황이다.
은혜의 곳간〔恩府〕이라 칭하는 배경은, 자기 한 몸의 욕심에서 나왔으므로 기댈 곳이 못
된다. 터무니없고 째째한 사람 하나가 앞에서 부르짖으면 백이나 되는 똑같은 무리들이 그
뒤에서 화답하며 다투어 그를 받들려 하니, 실로 비루하고 좀스러울 뿐이다.
교풍(敎風)을 깎아내고 약화시키는 것으로는 아첨하는 사람보다 심한 것은 없다. 실로 간사
한 이가 교묘하게 살금살금 속여 들어가면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이라 해도 몸은 불의에 빠
지고 마음은 구제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되니 슬프지 않은가. 법을 파괴하는 비구는 마
구니의 기운이 모여 있으므로 미친 속임수를 쓰면서도 태연자약하다. 속임수로 선지식의 자
태를 나타내고 선림의 큰스님 이름을 대면서 그의 법을 이었다 하며 요직에 있는 귀인에게
아첨하여 그를 종속(宗屬)이라 한다.
바라지도 않는 공경을 바쳐가면서 불법을 무너뜨리는 단서를 터주고 속인을 법상에 오르게
하여 승려로서 그 아랫사람들에게 절을 하니, 성인의 법도를 왜곡시키고 종풍(宗風)을 매우
욕되게 하고 있다.
우리 불도가 쇠퇴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 아 슬프다. 하늘도 귀신도 모두 벌을
주리니, 만번 죽어도 속죄되지 않을 사람은 아첨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명교 계숭(明敎契嵩)스님의 『원교론(原敎論)』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의 고승들은 천자를 배알해도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미리 조서(詔書)를 지어 공(公)
이니 사(師)니 하고 칭하였다.
제(齊)나라 종산(鍾山) 승원(僧遠:414∼484)스님은 고조(高祖)의 수레가 산문에 이르렀으나
법상에 앉은 채 맞이하지 않았으며, 호계(虎谿)의 혜원(惠遠:334∼416)스님은 천자가 심양(¡
湯)까지 당도하여 조서를 내렸으나 산문을 나가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당세에서는 그분의
사람됨을 대우하고 그분의 덕을 받들었다. 이 때문에 성인의 도가 진작되었던 것이다.
후세에 고승을 흠모하는 자들은 경대부(卿大夫)와 사귀면서도 낮은 사람만큼도 예의를 차
릴 줄 모르며, 자기 처신은 제멋대로인 용렬한 사람만도 못하다. 더구나 승원스님이 천자를
뵌 일이나 태연자약했던 혜원스님과 비교가 되겠는가. 그러면서도 우리 불도가 흥성하고 납
자들이 수행 잘하기를 바란들 될 수 있겠는가. 가르침은 보존하려 하면서 적임자를 구하지
않으면 가르침이 존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생각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다.
순희(淳熙) 정유(丁酉:1177)년에 크신 은혜를 하직하고 평전서산(平田西山)의 조그마한 마
을에 붙어 살게 되었는데, 매일 가까이서 보고 듣는 일이 대부분 교만과 속임수여서 옛날의
교풍이 시들어 가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내 말이 먹혀들어갈 리도 없으므로 몇자 적어 그
런대로 자신을 경책할 뿐이다. 『총림성사(叢林盛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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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편』에 발문(跋文)을 붙이다
원극 언잠(圓極彦岺)스님
원극 언잠(圓極彦岺)스님의 발문(跋文)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부처님 가신 지가 멀고 바른 종지는 얇아져서 경박한 풍조가 팽배한 마당에, 선배들은 시
들어 가고 후학들은 지성이 없어 총림의 법도는 거의 전몰지경이 되었다. 비록 구제해 보겠
다고 나서는 자가 있다 해도 도리어 문중에서 덜 떨어진 놈이라는 소리나 들을 뿐이다.
지금 소산 여본(疏山如本)스님의 『변영편(辯¿篇)』을 관찰해 보았더니 말과 뜻이 폭 넓
고 매우 절실하고도 분명하여 그 병통을 완전히 바로잡을 만하였다. 다만 용렬하고 허망한
무리들은 어둡고 짧은 지식으로 삿된 세계에 마음이 빠져 있으니, 필연적으로 제호(醍¿)를
독약으로 여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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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물을 사사로이 씀을 경계하다
동산 혜공(東山慧空)스님 / 1096∼1158
동산 혜공(東山慧空:1096∼1158)스님이 여재무(余才茂)가 인부(짐꾼)를 빌어달라는 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장하였다.
"지난날 외람되게도 보살펴 주신 은혜를 받고 헤어진 뒤, 또 은혜로운 편지를 받드니 더욱
자신의 부끄러움을 느낄 뿐입니다. 저는 본래 바윗골 사이에 사는 사람이라 세상사에는 무
심합니다. 이는 재무(才茂)께서도 아시리라 여겨집니다. 지금은 장로가 되어 방장실(方丈室)
에 거처하기는 하나 여전히 `수좌 혜공'일 뿐입니다.
사중살림은 한결같이 소임자에게 맡겨버리고 수입·지출의 장부도 모두 눈에 스치지를 않
습니다. 의발(衣鉢)을 쌓아두지도 않고 상주물을 사용하지도 않으며, 외부의 초청에도 가지
않고 남의 도움을 청하지도 않습니다. 인연따라 안주할 뿐 애초에 다음날의 계획 같은 것은
세우지도 않습니다.
재무께서는 예로부터 도가 높다는 칭송을 받아왔읍니다. 그러므로 도에서 서로를 잊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편지에서는 인부 몇을 찾으시는데, 이 인부가 상주물에서 나오는지
이 혜공에게서 나오는지를 모르겠읍니다. 저에게서 나온다면 제게 무엇이 있겠으며 상주물
에서 나온다면 그것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일단 사사로운 데 빠지고 나면 도
적이 되고 마니 어떻게 선지식으로서 상주물을 도용할 수 있겠읍니까. 공께서는 관직에 몸
담으셨으니 좋은 일을 하셔야지 사중에서 이러한 일을 계획하시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또한 공께서는 민()지방 사람이라 아는 사람들도 모두 민지방의 장로들입니다. 한번 절에
욕심을 두게 되면 상주물을 다 훔쳐 자기가 차지하고 말 것입니다. 혹 그것으로 귀인과 우
호를 맺거나 속가에 공급하거나 아는 사람을 대접하고 모신다면 그것이 사중의 스님네들이
쓰는 공용물〔十方常住 招提僧物〕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처사입니다. 요즈음
뿔을 달고 털을 뒤집어 쓴 채, 전생의 빚을 갚는 축생들 중에 이런 사람의 경우가 많습니다.
이점을 옛날에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읍니까.
근래에 절집이 잔폐되고 승도가 쓸쓸한 것은 모두가 이런 탓입니다. 공께서는 우리를 이런
무리로 만들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공이 결과적으로 신임을 받아 다른 사찰에서 허락 받았
던 것도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으신다면 공의 앞날은 헤아릴 수 없는 영광이 있을 것입니
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어떻게 여기실는지 모르겠군요. 차가운 계절인데 가는 길에 몸조심하
소서." 『어록(語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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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스님의 답서를 평하다
절옹 여담(浙翁如)스님 / 1151∼1225
이 글은 실로 염라대왕 대궐 앞에서 사죄받을 수 있는 한 통의 비방이다. 그러나 요즈음
제방의 스님들이 모르는 것을 어찌하랴. 과연 이 글을 수긍하여 명심할 수 있다면 언젠가
크게 덕을 볼 날이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늘 이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곤 한다.
"찬은산(隱山=州 淨衆山 佛眞 了禪師)스님도 말하기를 "상주물인 돈과 곡식은 대중공양을
제외하고는 거의 쥐약과 같다" 하였다. 주지나 수입·지출을 맡은 자로서 일단 여기에 빠져
들었다 하면 온몸이 썩어 문드러지리니, 이는 율부(律部)에 자세히 실려 있다.
또한 옛 분〔오조스님〕은 돈을 가지고 창고에 가 생강을 사 가지고 돌아와서야 약을 달였
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지금 방장(方丈)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은 대중의 발우에 담길 물
건을 깎아서 자기의 속을 멋대로 채울 뿐 아니라, 자기만을 떠받든다 해서 그것이 인심을
들뜨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 또 이보다 심한 경우는 값진 것을 팔아 널리 인심을 얻
고 큰 절로 승진하기를 바라기까지 하니 뒷날 추상같은 염라대왕이 계산해 줄 값이 두려울
뿐이다." 『염애온록(溫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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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한 뜻을 저버리지 않다
설당 도행(雪堂道行)스님 / 750∼852
1.
설당 도행(雪堂道行:750∼852)스님이 천복사(薦福寺)에 머물 때 하루는 잠시 들른 납자에
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복주(福州)에서 왔읍니다."
"오던 길에 훌륭한 큰스님을 뵈었는가?"
"요전에 신주(信州) 박산(博山)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 오본(悟本)스님이란 분이 계셨읍
니다. 그분께는 아직 절을 올리지는 않았으나 훌륭하신 큰스님임을 알 수 있었읍니다."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절로 들어가는 길이 확 트였고, 회랑은 정연하게 닦여 있었으며, 법당에 향과 등불이 끊어
지지 않았읍니다. 또한 아침저녁으로 종과 북소리가 분명하였으며, 두 때의 죽과 밥은 정결
하였고, 스님들이 가다가 사람을 보면 합장을 하였읍니다. 그래서 그분이 훌륭한 스님이라는
것을 알았읍니다."
설당스님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오본스님은 본래 훌륭하다. 그러나 그대도 안목을 갖추었다."
바로 이 사실을 군수 오부붕(吳傳朋)에게 전달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 스님의 이야기가 범연령(范延齡)이 장희안(張希顔)을 추천한 일과 매우 비슷하고, 각하
의 훌륭함도 장충정공(張忠定公)보다 덜하지 않습니다. 노승은 너무 늙었으니 스님을 주지로
청한다면 문중의 영광이겠읍니다."
오공(吳公)은 매우 기뻐하였고, 오본스님은 그 날로 천복사로 옮겨왔다. 『동호집(東湖
集)』
2.
천리나 되는 튼튼한 둑도 개미떼에게 무너지고, 아름다운 흰구슬도 흠 때문에 쪼개진다. 하
물며 위 없는 오묘한 도를 둑이나 옥 따위에 비하며, 탐욕과 성내는 마음을 개미의 파괴나
옥의 흠집 정도에 비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뜻을 확고부동하게 세우고 정밀하게 닦아 나아가며 굳게 지켜 완벽하고 훌륭
하게 수행(修行)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 뒤에야 자신을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할 수 있다. 『여왕십붕서(與王十朋書)』
3.
내가 용문사(龍門寺)에 있을 때, 병철면(昺鐵面)스님은 태평사(太平寺)에 머물고 있었다. 어
떤 이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병철면스님이 고향을 떠나 행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부하던 어느 날 밤에 책을 불에
놓쳐 모조리 타버렸다. 그러자 책을 주웠다가 땅에다 내던지면서 `부질없이 사람의 마음만
어질럽힐 뿐이군!' 하였다." 『동호집(東湖集)』
4.
설당스님이 회암 혜광(晦庵惠光)스님에게 말하였다.
내가 20살 쯤에 독거사(獨居君)를 뵙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음에 줏대가 없으면 자립하지 못하고, 행동이 바르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한 이 말을 평생 실천한다면 성현의 일이 완성되리라."
나는 그 말씀을 간직한 채, 집에 있을 때는 자신을 닦고 출가해서는 도를 배워 드디어는
나 자신을 통솔하고 대중에 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저울이 무게를 달고 곱자와
콤파스가 원과 사각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아서 버리면 일마다 법칙을 잃게 된다. 『광록(廣
錄)』
5.
고암(高庵)스님이 대중에 임하면 반드시 "대중 가운데서 지견있는 사람을 꼭 알아야 한다"
라고 말하곤 하였다. 내가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말하였다.
" `행동거지는 뛰어난 무리들을 바라보아야지, 헛되이 용렬한 이들을 좇아가서는 안된다'고
하신 위산(山)스님의 말씀도 못들어 보았는가. 평소 대중과 섞여 살면서도 어리석은 무리에
떨어지지 않았던 자들은 모두 이 말을 했었다. 빽빽한 사람 중에 비루한 자는 많고 식견 있
는 자는 드문데, 전자에는 익숙해지기 쉽고 후자와는 친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결단코 누군가가 분발해 낼 수 있다면, 그 힘은 일당백(一當百)쯤 되어서 용렬한 습기가 다
하여 참으로 훤출하게 격식을 벗어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평생 그 말씀을 실천하고서야 비로소 출가했던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광
록(廣錄)』
6.
설당스님이 차암수인(且庵守仁 : ?∼1183))스님에게 말하였다.
"일을 맡으면 반드시 중요한 정도를 재보고, 말을 꺼내려면 우선 깊이 생각하여 중도(中道)
에 맞도록 힘써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가령 성급하게 일을 해나가면 완성하는 경우가 드물
며, 설사 해냈다 해도 끝내 만전을 기하지는 못한다. 나는 대중 가운데 살면서 이익과 병통
을 골고루 보아왔는데, 오직 덕이 있는 사람만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중을 감화시킬 수 있
었다. 그들은 항상 뜻과 재능이 있는 후배들이 살펴 실천하기를 서원하여 바야흐로 커다란
이익이 되어 주었다."
영원(靈源)스님도 일찌기 이렇게 말하였다.
"범인(凡人)은 평소에는 안으로 관조하여 깨우치는 경우는 많아도, 일에 부딪치면 바깥으로
마음이 치달려서 훌륭한 법체(法體)를 잃는다. 반드시 불조를 잇겠다는 책임을 생각하여 후
배를 인도하려 한다면 항상 자신부터 단속해야 한다." 『광록(廣錄)』
7.
응암 담화(應庵曇華:1103∼1163)스님이 명과사(明果寺)에 머물자 설당스님이 매일같이 그를
찾아가 만났다. 이 일을 가지고 더러 이렇쿵저렇쿵하는 자가 있자, 설당스님이 말하였다.
"조카 응암은 사람됨이 이익을 좋아하거나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고 먼저는 칭찬했다가 뒤
에 가서 비방하지도 않으며, 아부하는 모습으로 구차하게 영합하거나 교묘한 말을 할 줄도
모른다. 더우기 명백하게 도를 보아서 머물고 떠남에 자재하니, 납자들 가운데서도 만나보기
어려운 사람이므로 내가 굳이 그를 소중하게 여긴다." 『차암일사(且庵逸事)』
8.
배우는 사람의 혈기(血氣)가 심지(心圍)를 이기면 소인이 되고, 심지가 혈기를 이기면 단정
한 사람이 된다. 올바른 인재는 혈기와 심지가 가지런하여 도를 체득한 현성(賢聖)이 된다.
어떤 사람이 억세고 괴퍅하여 곧은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함은 혈기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며, 단정한 인재가 착하지 못한 일을 강요당했을 때 차라리 죽을지언정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은 심지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광록(廣錄)』
9.
고암스님이 운거사(雲居寺)에 머물 때 보운 자원(普雲自圓)스님이 수좌(首座)가 되었고, 재
목감이 될 만한 어떤 스님이 서기(書記), 백양 법순(白楊法順 : 1076∼1139)스님이 장주(藏
主), 법통 오두(法通烏頭)스님이 지객(知客), 정현 진목(正賢眞牧 : 1084∼1159)스님이 유
나(維那), 조카 담화(曇華)스님이 부사(副寺), 조카 덕용(德用)스님이 감사(監寺)로 있
었는데, 모두가 덕업이 있는 자들이었다.
조카 덕용스님은 평소에 청렴하고 검약하여 상주물(常住物)인 기름으로 불을 켜지 않자, 조
카 담화스님이 그것을 희롱하였다.
"훗날 큰스님이 되려면 모름지기 시초부터 대범해야 합니다. 이렇게 째째해 가지고서야 되
겠읍니까?"
이에 덕용스님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덕용스님은 자기 처신에는 검소하였으나, 다른 사람
에게는 매우 넉넉하게 베풀었으며, 사방에서 오는 사람을 대접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조금도 권태로운 기색이 없었다. 고암스님이 하루는 그를 보고 말하였다.
"그대의 마음씀은 실로 보기 드물다 하겠으나 그래도 상주물을 살피고 관리하여 소홀하게
낭비함이 없도록 하라."
덕용스님은 이렇게 대꾸하였다.
"제가 물건을 낭비하는 것쯤이야 작은 허물이 됩니다만, 스님께서 훌륭한 사람을 존대하고
인재를 대접하심에 있어서는 바다처럼 산처럼 받아들이셔야 하니, 자잘한 일은 묻지 않아야
실로 대덕이라 할 것입니다."
고암스님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총림에서는 `쓸만한 그릇'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일사(逸事)』
10.
어떻게 닦아 나아가야 할지를 모르는 납자는 스승과 도반을 찾아서 물어야 한다. 한편 선
지식은 도(道) 자체만으로는 교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납자를 통해서만이 도를 드러낼 수 있
다. 이 때문에 절을 주관하는 도덕 있는 스승이 법회를 열면 반드시 훌륭하고 지혜로운 납
자가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호랑이가 포효하면 차가운 바람이 따라 일어나고, 용이 날면
구름도 따라 일어난다"라고 한 것이다.
옛날 강서(江西) 마조(馬祖)스님은 백장(百丈)스님과 남전(南泉)스님을 통해 자신의 대기대
용(大機大用)을 드러냈고, 남악(南嶽)의 석두(石頭)스님은 약산(藥山 : 745∼828)스님과 천황
(天皇 : 748∼807)스님을 만남으로써 대지대능(大智大能)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천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사이였으므로 서로 법담을 나누면서 의심이 없었으
니, 마치 고니가 바람에 나래를 싣고 훨훨 날듯, 큰 물고기가 바다에 나아간 듯 패연(沛然)
하여 모두가 자연스러운 형세였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총림에 공을 세우고 불조를 더욱 빛
나게 하였던 것이다.
스승(先師 : 불안스님)께서 용문사(龍門寺)에 머무실 때, 하룻밤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였
다.
"나에게 덕업이 없어 강호 납자들을 잘 보살펴주지 못하였으니 결국 동산(東山) 노덕에게
부끄럽게 되었구나" 하시고는 말씀을 마치더니 눈물을 뿌리셨다.
내 보기에 요즈음 남의 스승이 되었노라는 자는 옛사람과 비교할 때 만 분의 일도 안된다.
『여죽암서(與竹庵書)』
11.
내가 용문사에 있을 때 영원스님은 태평사에 머물고 있었다. 어떤 소임자가 못된 마음으로
소란을 피우자 영원스님은 자기 스승에게 편지로 이렇게 말하였다.
"곧은 마음으로 도를 행하려니 잘 되지 않고, 자신을 굽히고 주지를 하려니 실로 나의 뜻
이 아닙니다. 천암만학(千巖萬壑) 사이에 뜻을 놓아버리고 매일 풀열매로 배불리 밥 지어 먹
으며 여생을 내 뜻대로 보내느니만 못하겠읍니다. 다시 무엇을 그리워하겠읍니까."
그리고는 10여 일이 채 못되어 황룡(黃龍)스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신바람이 나서 강서(江
西)로 되돌아가 버렸다. 『총수좌기문(聰首座記聞)』
12.
영원스님은 납자의 일을 비유로 설명하기를 좋아하였는데,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사람도 말했듯이 이 일은 마치 흙인형〔土偶人〕과 나무인형〔木偶人〕을 만드는 것과
같다. 나무인형의 경우, 귀와 코는 일단 크게 해놓고 입과 눈은 우선 작게 만들어 놓고 보아
야 한다. 어떤 사람은 틀렸다 하겠지만 큰 귀와 코는 깎아서 작게 할 수 있고, 입과 눈은 작
아도 파내서 크게 할 수 있다. 흙인형을 만들 땐 귀와 코는 일단 작게 하고 입과 눈은 먼저
크게 만들고자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틀렸다 하겠지만 작은 귀와 코는 더 빚어 붙일 수
있고, 컸던 입과 눈은 좀 떼어낼 수도 있다."
이 말이 소소한 것 같아도 큰 일에 비유할 수가 있다. 납자가 일에 부딪쳐 택하고 버리고
할 때, 깊이 생각하기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진지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문(記
聞)』
13.
만암(萬庵)스님이 고암스님을 전송하느라고 천태산을 지나갔다 되돌아와서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덕 높은 관수좌(貫首座)라는 이가 있었는데 경성암(景星巖)에서 30년 동안 은거하면서 그
림자가 산문을 벗어나지 않았다. 용학경공(龍學耿公)이 군수가 되어 특별히 서암(瑞巖)에다
가 스님을 모시려 하자 게송을 지어 사양하였다.
삼십년 간 빗장을 채웠는데
임명장이 어떻게 청산에 이르렀나.
좀스러운 세간사로
임하(林下)의 한가한 일생 바꾸지 말라.
三十年來獨掩關 使符那得到靑山
休將¡末人間事 換我一生林下閑
사신의 명령이 거듭 이르렀으나 끝내 나아가질 않았다. 그러자 경공은 요즈음의 산중에 은
둔하는 진정한 도류(道流)라 경탄하였다.
만암스님은 "그곳에도 이 이야기를 기억할 노숙(老宿)이 있겠지"하더니 이어서 말하였다.
"도의 근본을 체득하지 못하여 생사에 빠지면 부딪치는 경계마다 마음이 일어나 감정을 따
라 사념이 요동한다. 그리하여 사나운 마음, 의심하는 마음 때문에 아첨으로 사람을 속이려
권세에 붙어 아부하고 명예를 찾아 이익에 구차해진다. 이렇게 진실을 어기고 거짓을 좇으
며 깨달음을 등지고 세속〔六塵〕에 합하는 일을 사문 납자라면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다."
나도 한마디 하였다.
"관수좌도 스님네들 중에 희대의 기상이라 하겠군요." 『일사(逸事)』
14.
설당스님은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교만한 자태가 없었다. 몸소 절약·근검하여 평소
에 물질을 일삼지는 않았다.
오거산(烏巨山)에 머물 때 납자 하나가 쇠거울을 바치자 스님은 그에게 말하였다.
"시냇물이 맑아 터럭까지 비추어 볼 만하다. 이를 쌓아둔들 무엇하겠느냐."
그리고는 끝내 물리쳐 버렸다. 『행실(行實)』
15.
설당스님은 인자하고 진실〔忠恕〕하며 인격과 재능 있는 사람을 존경하였고, 우스개나 속
된 말은 입 밖에 꺼내질 않았으며, 기세를 부리지도 사납게 노하지도 않았다. 세상에 나가느
냐 들어앉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극히 청렴하였는데,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옛사람은 도를 배워 외물에 대해서 담박하여 맛에 빠져 즐기는 일이 없었으며, 자기의 권
세나 지위를 잊을 뿐더러 바깥의 성색(聲色)을 버리는 데 이르러서는 마치 애쓰지 않고도
저절로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즈음 납자들은 기량을 다해도 끝내 어찌해보질 못하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 의지가 약하고 일에 집중하지 못하며 요긴하지 않은 일에 매달리기 때문
이다." 『행실(行實)』
16.
황룡 사심(黃龍死心 : 1043∼1114)스님은 운암사(雲巖寺)에 살 때, 집안에서 성내고 꾸짖기
를 좋아하였으므로 납자들이 모두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슬슬 피하는 사정이라 혜방 시자
(惠方侍者 : 1173∼1129)가 말하였다.
"불조의 도를 실천하며 인간·천상을 호령하려는 선지식이라면 갓난아기 보듯 납자들을 보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과 따뜻한 손길로 중화(中和)의 가르
침을 베풀지는 못할지언정 어찌하여 원수처럼 보았다 하면 꾸짖고 욕을 하시는지요. 이를
어찌 선지식의 마음씀이라 하겠읍니까."
사심스님은 주장자를 가져다 그를 쫓아내며 혼을 내주었다.
"너의 소견이 이 따위니 뒷날 권세 있고 돈 있는 사람에게 붙어 아첨하여 불법을 팔아먹고
세상을 속일 놈임이 분명하구나. 나는 차마 그렇게는 못했기 때문에 엄중한 말로 그들의 뜻
을 분발시켰을 뿐이지 어찌 다른 까닭이 있었겠느냐. 그들이 부끄러운 줄을 알고 허물을 고
쳐 잊지 않고 생각하여 훗날 좋은 사람이 되게 하려 했을 뿐이다." 『기문(記聞)』
23
이익을 구하는 자는 도를 얻지 못한다
황룡 사심(黃龍死心)스님 / 1043∼1114
1.
법수 원통(法秀圓通 : 1027∼1090)스님이 일찌기 말하기를 "자신은 바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바로잡으려는 자를 두고 `덕(德)이 없다'고 하고, 자신은 공순(恭順)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공순함을 강요하는 자를 두고 `예(禮)를 모른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선지식으로서
덕을 잃고 예의에 어긋났다면 무엇으로 후학에게 모범을 보이겠는가. 『여영원서(餘靈源
書)』
2.
사심스님이 진영중(陳瑩中)에게 말하였다.
"대도(大道)를 구하고자 한다면 우선 마음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분해서
화를 낸다거나 좋아서 욕심을 낸다면 바르게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세상에 응해주
는 성현 정도가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희노애오(喜怒肯惡)가 없을 수 있겠읍니까? 다만 `이
런 일은 성인이나 하는 것'이라고 멀리 제껴두어서 정도(正道)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그런대
로 되었다 하겠읍니다." 『광록(廣錄)』
3.
단속〔節儉〕과 자재〔放下〕는 도에 들어가는 첩경이다. 마음으로 통달하려 하나 되지 못
하고, 마음은 깨우쳤다 하더라도 말이 제대로 트이지 못하는 납자를 많이 보게 된다. 누구라
서 옛사람을 계승하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단속과 자재를 놓고 보자면 만에 하나도 없다.
이를 세속에 비하자면 젊은이가 글은 읽으려 하지 않으면서 관리가 되고자 하는 것과도 같
으니, 결코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삼척동자라도 다 안다. 『광록(廣錄)』
4.
사심스님이 담당(湛堂)스님에게 말하였다.
"납자 중에서 재주와 식견〔才識〕에 충신절의(忠信節義)를 겸비한 자가 제일 가고, 재주는
높지 못해도 근실하고 도량이 있는 자는 그 다음쯤이다. 혹 삿된 마음으로 기웃거리다가 형
편따라 태도를 바꾸는 이가 있다면 진실로 소인이다. 이런 이를 대중 속에 방치해 둔다면
반드시 총림을 무너뜨리고 불법 문중을 모독할 것이다." 『실록(實錄)』
5.
사심스님이 초당(草堂)스님에게 말하였다.
"주지를 맡은 자는 언행의 요점이 진실과 미더움에 있다. 말이 진실하고 미더우면 반드시
깊게 받아들여질 것이며, 말이 성실하지 못하면 받는 느낌도 따라서 천박할 것이다. 진실하
지 못한 말과 미덥지 못한 일은 평소 일반 세속에서도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니, 마을 사람
들을 기만한다고 보일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총림의 주지가 되어 불조를 잇고 교화
를 선양하면서 말과 행동에 진실과 믿음이 없다면 강호의 납자들 중에 누가 따르겠는가?"
『황룡실록(黃龍實錄)』
6.
이익을 구하는 자는 도와 함께 하지 못하고, 도를 구하는 자는 이익과 함께 하지 못한다.
옛사람은 둘 다 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럴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이익
과 도가 함께 되어지는 것이라면 장사치·백정·여염집·행상꾼들도 모두가 도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옛사람들이 부귀와 공명을 버리고 심산유곡에 들어가 번뇌를 끊고서
시냇물을 마시고 나무 열매를 먹으며 일생을 마쳤겠는가.
이익과 도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고 기어코 말한다면, 물이 새는 호리병으로 뜨거운 가마
솥을 식히려는 것처럼 될 수 없는 일이다. 『여한자창서(與韓子蒼書)』
7.
스승 회당스님께서 지난날 동오(東吳)지방에 계실 때 보았던 이야기라 한다.
원조(圓照宗本 : 1006∼1087)스님께서 정자사(淨慈寺)에 주지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아 그
리로 가자, 소주(蘇州)와 항주(杭州)의 사부대중들은 끈질기게 싸웠다. 한쪽에서 "우리 스님
을 무슨 이유로 빼앗아가느냐?" 하면 한쪽에서는 "이제는 우리 스님인데 너희들이 무슨 관
계냐?" 하였다.
8.
사심스님이 취암사(翠巖寺)에 살 때, 각범(覺範)스님이 남해로 귀양가다가 남창(南昌)을 지
난다는 소문을 듣고 산중으로 일부러 맞이하여 여러 날을 대접하고 후한 예의로 전송하였
다. 이 일로 어떤 사람이 사심스님에게 희노의 감정이 일정치 않다고 하자 스님은 말하였다.
"각범은 덕이 있는 납자이다. 지난날 그에게 모난 성미를 버리라고 간곡히 충고했으나 지
금 뜻밖의 일에 걸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것은 그의 타고난 분수이고, 나는 평소 총림의 도
의대로 처신하여 그를 대했을 뿐이니, 식견 있는 자라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사사로운 마음
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서산기문(西山記聞)』
9.
사심스님이 초당 선청(草堂善淸 : 1057∼1142)스님에게 말하였다.
회당스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의 마음이 관대하고 후한 것은 천성이니, 억지로 사납게 하면 반드시 오래가지 못하
고, 매섭게 하여 오래 가지 못하면 도리어 소인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 그러나 아주 삿되거
나 바른 경우와 극악·극선한 경우는 본래부터 그런 것이므로 모두가 변화되기 힘들다. 오
직 중간 정도의 성품은 올라가기도 쉽고 내려가기도 쉬우므로 따라서 교화할 만한 것이다."
『실록(實錄)』
24
사념이 일어나기 전에 다스려라
초당 선청(草堂善淸)스님 / 1057∼1142
1.
들판을 태우는 불도 반딧불만한 작은 불씨에서 발생하고, 산을 쓸어버리는 물도 졸졸 흐르
는 물에서부터 샌다. 물이 적을 때는 한 움큼의 흙으로도 막을 수 있지만 크게 불어나면 나
무와 돌을 쓸어내고 언덕을 덮어버리며, 불이 약할 땐 한 국자의 물로도 끌 수 있지만 활활
타오르게 되면 산과 마을까지 번지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저 물난리 같은 애욕이나 불길 같은 성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옛사람은
마음을 다스릴 때 감정과 사념이 일어나기 전에 막았다. 그러므로 적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거두었다.
정념(情念)과 본성이 뒤섞여 애오(肯惡)의 감정이 서로 싸우는 데 이르면 자신의 삶을 망
치고, 남의 인격까지도 망쳐 위태한 지경이 되니 그때가서는 어쩌지 못한다.
2.
주지하는 데는 별다른 묘수가 없다. 요컨대 대중의 마음을 살피고 상하를 두루 아는 데 있
다. 인정(人情)을 살피면 안팎이 조화롭고 상하가 통하면 모든 일이 정리되니, 이것이 안정
되게 주지하는 방법이다. 한편 대중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여 아랫사람의 마음이 위로 통하
지 못하면 상하가 어긋나서 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주지가 망하는 원인이다.
혹 주지가 총명한 자질은 지녔으되 편견을 고집하기 좋아하면 남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
하고서 모든 사람의 의견을 버리고 자기의 권세만 지중히 여겨 공론(公論)을 폐지하고 사사
로운 은혜를 베풀게 된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선(善)으로 나아가는 길을 점점 막히게 하고,
대중을 책임지는 도를 더욱 약하게 하며, 자기가 아직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은 헐뜯고, 익
숙하고 가리워진 데에 안주한다. 그러고서도 주지로서 크게 경영하고 멀리 전하려 한다면,
이는 뒷걸음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격으로 끝내 되지 못한다. 『여산당서(與山堂書)』
3.
납자라면 반드시 정당하게 처신하여 다른 사람들이 뒷공론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한번
구설수에 걸렸다 하면 죽을 때까지 뜻을 펴지 못한다.
옛날 시자(侍者) 태양 평(太陽平)스님은 도학으로는 총림에서 추대받고 존중되었으나 마음
가짐이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식자들의 비난을 사, 드디어는 평생 곤란한 지경에 빠져 지내
다가 죽을때 가서도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러나 어찌 납자에게 있어서일 뿐이랴. 어느 곳의 주지라면 더욱 행여하는 마음으로 조심
해야 한다. 『여일서기서(與一書記書)』
4.
초당스님이 여(如)스님에게 말하였다.
회당선사(先師)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많은 대중 가운데서는 훌륭한 사람이나 어질지 못한 사람이나 줄지어 와서 교화의 문이
넓어진다. 그 사이에는 친소(親疏)가 용납되지 않으니 적잖이 인재를 엄격히 가려내야 한다.
즉 재주와 덕이 인망(人望)에 부응하는 자라면 자기가 그에게 노(怒)할 일이 있다고 멀리해
서는 안되며, 또 식견(識見)이 용렬하여 대중들에게 미움을 받는 자라도 자기가 그를 사랑한
다고 친하게 해서도 안된다. 이렇게 하면 훌륭한 사람은 제대로 올라가고 못난 사람은 자연
히 물러나 총림이 편안해진다.
주지하는 자가 사심 드러내기를 좋아하여 희노의 감정을 멋대로 하면서 남을 승진시키고
물러나게 할 경우, 현자는 입을 다물고 못난 사람이 다투어 승진하므로 기강이 문란해져 총
림이 폐지된다.
이 두 가지야말로 주지의 대체(大體)이다. 실로 이를 살펴서 실천한다면 가까이 있는 사람
은 기뻐하고 먼 데까지도 퍼진다. 그렇게 되면 도가 시행되지 않고 납자들이 흠모하며 찾아
오지 않을까 무엇을 염려하겠는가." 『소산석각(疎山石刻)』
5.
초당스님이 수좌(首座) 공(空)스님에게 말하였다.
"총림이 생긴 이래로 석두(石頭)·마조(馬祖)·설봉(雪峯)·운문(雲門)스님만큼 제대로 사람
을 만난 경우는 없다. 근래에는 황룡(黃龍)·오조(五祖) 두 분 노덕만이 사방의 뛰어난 납자
를 받아들여, 그릇과 도량의 정도나 타고난 재능의 가부를 따라 발탁해서 채용했을 뿐이다.
이를 비유하면 경쾌한 수레에 준마를 채우고 여섯 가닥 고삐 잡고 힘차게 채찍질하며 당겼
다 놓았다 함이 눈짓하는 사이에 있는 것과도 같다. 이런 기세로라면 어딘들 못가겠는가."
『광록(廣錄)』
6.
주지하는 일은 별다른 것이 없다. 요는 편파적으로 듣고 자기 멋대로 하는 폐단을 조심하
는 데 있으니, 먼저 받아들인 말에 신경쓰지 않는다면 소인이 아첨하면서 영합하려는 참소
에 현혹되질 않을 것이다.
여러 사람의 감정은 한결같지 못하고 지공(至公)한 의론은 드물기 때문에 모름지기 이로움
과 병통을 보아서 가부를 살핀 뒤에 시행해야 하겠다. 『소산실록(疎山實錄)』
7.
초당스님이 산당스님에게 말하였다.
모든 일은 시비가 아직 밝혀지기 전에는 반드시 조심해야 하며, 시비가 밝혀지고 나면 이
치로 해결하되 도가 있는 경우라면 의심치 말고 결단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간교한 사람이
현혹하지 못하고 어거지 변론으로 결단을 바꾸지도 못한다. 『청천기문(淸泉記聞)』
25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도를 바탕삼다
산당 도진(山堂道震)스님 / 1079∼1162
1.
산당 도진(山堂道震) 스님이 처음 조산(曹山)에 주지하라는 명령을 물리치자 군수가 글을
보내 권하였다. 스님은 이렇게 사양하였다.
"고량진미의 음식을 먹고 명예나 탐하는 납자가 되려 한다면 초의(草衣)를 입고 먹지 않으
며 산에 은둔하는 야인(野人)이 되느니만 못합니다." 『청천재암주기문(淸泉才庵主記聞)』
2.
뱀과 호랑이는 올빼미와 소리개의 천적은 아니지만 올빼미와 소리개가 울부짖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뱀이나 호랑이에게 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소와 돼지는 까치가 타고 놀 것은
아닌데도 까치가 모여서 타고 노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 조주(趙州)스님이 어떤 암자의 주지를 방문하였는데 생반(生飯:재나 공양 후 귀신이
나 짐승을 위해 조금씩 떼어낸 음식)을 내어왔다. 조주스님이 "까마귀는 사람만 보면 무엇
때문에 날아가버릴까?"하고 말하자, 주지는 망연하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드디어는 앞의 얘
기를 받아서 스님에게 묻자, 조주스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에게 살생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남을 의심하면 그 사람도 나를 의심하며, 외물(外物)을 잊어버리면 외물도 나를
잊게 된다. 옛사람이 독사나 호랑이와 짝을 하고 놀았던 것은 이 이치를 잘 통달했기 때문
이다.
방거사(居君:?∼808)가 말하기를, "무쇠소〔鐵牛〕가 사자의 포효를 두려워하지 않음이 흡
사 목인(木人)이 화조(花鳥)를 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극진한 말씀이라 하겠다. 『여
주거사서(與周居君書)』
3.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방법은 은혜로우면서도 지나치게 베풀어서는 안되니 지나치면 교만해
지기 때문이며, 위엄스러우나 사나와서도 안되니 사나우면 원망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은혜를 베풀어도 교만해지지 않고 위엄스러워도 원망을 듣지 않게 하려면, 은혜는 반드시
공을 세운 사람에게 베풀고 아무에게나 함부로 주어져서는 안되며, 위엄은 반드시 죄 있는
사람에게 가해져야지 무고한 사람에게 엉뚱하게 미쳐서는 안된다. 이렇게 하면 은혜가 후하
다 해도 대중들에게는 교만함이 없고, 태도가 근엄해도 원망이 없다.
칭찬하기에 부족한 공로인데도 상이 너무 후하거나 따질 정도의 죄가 아닌데도 벌이 너무
무거울 경우, 보통사람이라면 교만과 원망을 내게 마련이다.
4.
불조의 도는 중도(中道)를 얻는 데 있을 뿐이니 중도를 지나치면 치우치고 삿되게 된다. 또
한 모든 일에 자기 의사를 끝까지 고집해서는 안되니 그렇게 하면 환란이 생긴다. 예나 지
금이나 절제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거의 위태로와서 망하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누구라서 허물이 없겠는가마는 오직 어질고 지혜로운 인재만이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으니 그것을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것이다.
5.
산당스님이 상서(尙書)인 한자창(韓子蒼)·만암 도안(萬庵道顔) 수좌·정현 진목(正賢眞牧)
스님과 함께 운문암(雲門庵)으로 피난을 하였다.
한공이 이런 차에 만암스님에게 물었다.
"근래에 들으니 이성(李成)의 군사에게 잡혔다더니〔南宋 高宗 紹興 원년(1131)에 있었던
난〕 무슨 수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요?"
그러자 만암스님이 대답하였다.
"포로가 되었을 때, 추위와 배고픔에 여러 날을 시달리다 결국 `죽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는
데 우연히도 큰 눈이 내려 집을 덮어버리자 묶여 있던 벽이 까닭없이 무너지더군. 그날 밤
에 요행히 탈출한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지."
한공은 다시 물었다.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면 어떻게 빠져나오려 하였읍니까?"
만암스님이 대꾸를 않자, 공은 거듭 따졌다. 스님은 "그걸 말해 뭘하겠나. 우리는 도를 배
워 바른 이치〔義〕로 바탕을 삼았으므로 죽으면 그만일 뿐 무엇을 두려워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공은 턱을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이로부터 선배들이 세속의 환란을 당해서 사생을 다툴 때 모두 처신과 결단이 있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6.
산당스님이 백장(百丈)스님에게서 물러나 한자창에게 말하였다.
"옛날에 벼슬을 맡았던 자들은 덕도 있고 명(命)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간곡히 세 번씩
이나 청해야 나갔고, 일단 마음만 먹으면 물러나버렸다. 그런데 요즈음 벼슬하는 자들은 오
직 권세를 위할 뿐이다.
나가고 물러나는 처신을 알아서 바른 도를 잃지 않는 자라면 현명하고 지혜롭다 하겠다."
『기문(記聞)』
7.
산당스님이 야암(野庵)스님에게 말하였다.
"주지는 마음을 공정하게 가져야 한다.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자기에서 나와야
만 옳고 다른 사람은 잘못이라고 여기지만 않는다면, 사랑과 증오의 차별된 감정이 마음에
서 생기지 않고, 거칠고 오만하며 삿되고 치우친 기색은 들어갈 곳이 없다." 『환암집(幻庵
集)』
8.
이상로(李商老)는 이렇게 말하였다.
"묘희 종고(妙喜宗:1089∼1163)스님은 도량이 넓고 누구보다도 절의(節義)가 굳으며 배우기
를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부(老夫)스님과 함께 보봉(¿峯)스님을 겨우 사오 년 모
셨는데, 열흘만 보지 못해도 반드시 사람을 보내 문안을 드렸다. 우리집 식구가 온통 종기를
앓자 스님은 집을 찾아와 몸소 약을 달여주며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듯 예의를 다하였다.
되돌아왔을 때 수좌 도원(道元)스님이 그 일을 나무라자 그저 `예예'하면서 꾸지람을 달게
받아들였다. 식견 있는 자들은 여기서 스님이 큰그릇이라는 것을 알았다."
담당스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종고시자(宗侍者:묘희)는 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인데, 내 안타깝게도 알아보지 못하
였구나."
담당스님이 죽자, 묘희스님은 발에 못이 박히도록 천리길을 달려가 저궁(渚宮)의 무진거사
(無盡居君)를 방문하고 탑명(塔銘)을 부탁하였으니, 담당스님이 죽은 뒤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스님의 힘이라 하겠다. 『일섭기(日涉記)』
선림보훈
下
26
깨닫고 교화하는 일은 혼자서만으로는 될 수 없다
묘희 종고(妙喜宗)스님 / 1089∼1163
1.
담당스님은 옛 현인의 서첩(書帖)을 얻을 때마다 반드시 예불하고 열어보았으며, 더러는 "
앞 성인의 커다란 인격과 명성을 어떻게 차마 버려두겠는가"라고 하면서 돌에다 새기곤 하
였다.
스님은 이토록 고상했기 때문에 죽는 마당에 단돈 열 냥을 모아놓은 것이 없고 다만 당송
(唐宋) 모든 현인들의 저서 두 바구니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이에 납자들이 앞다투어 말을
전하여 돈 8만 냥을 모아 다비식을 도왔다. 『가암집(可庵集)』
2.
불성(佛性)스님이 대위산(大山)에 머물 때, 행자(行者)와 농부가 서로 치며 싸우는 것을 보
고 행자만을 나무라자 문조 초연(文祖超然)스님이 한마디 하였다.
"농부를 놓아두고 행자만 꾸짖고 욕을 보이려 한다면 위 아래의 명분을 잃을 뿐만 아니라,
소인이 그 틈을 타 업신여기고 태만하여 일이 진행되지 않을까 매우 염려됩니다."
그러나 불성스님은 들어주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과연 소작인이 일 맡은 사람을 죽인 일
이 벌어지고 말았다. 『가암집(可庵集)』
3.
문조 초연스님이 앙산(仰山)에 머물 때, 지객(地客)이 절에서 일용할 곡식을 훔쳤다. 스님
은 평소 지객(地客)을 의심해 왔으므로 그를 내보내려는 뜻으로 창고 맡은 행자〔庫子行
者〕에게 그가 바쳤던 그 동안의 공납문서를 만들라고 하였다. 행자는 지객을 감싸주고자
스님의 의도를 살피고서 도리어 지객 소임에서 물러나는 문서를 만들라고 그에게 알려주고
는 되돌아와 울부짖게 하였다. 그리고는 곡식 관리에 대한 책임 추궁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스님은 행자가 권세를 멋대로 한다고 노하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죽비로 결단했을 뿐이다.
스님은 행자에게 은근히 속임수를 당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아 - 아, 소인의 교활함
이 이러하다.
4.
사랑하고 미워하는 차별된 감정은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인격이 트이고 지혜가 밝은 사
람이라야 그 부림을 당하지 않는다.
옛날 원오스님이 운거산에 머물 때, 고암스님은 동당(東堂)으로 물러나 있었는데 원오스님
을 좋아하는 사람은 고암을 싫어하였고, 고암스님과 함께 하는 자는 원오스님을 괴이하게
여겼다. 이렇게 하여 총림이 어수선해져서 원오 무리·고암 무리가 나뉘게 되었다. 그런데
나름대로 두 스님을 관찰해 보았더니 변두리까지 큰 명성을 떨칠 정도로, 보통사람으로서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애석하다, 소인이 아첨하는 말을 경솔하게 믿고 총명한 이를 혼란시켜 드디어는 식견있는
자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도다. 이 때문에 양좌주(亮座主)*나 은산(隱山)* 같은 부류가 되
어야 고상한 인재라 할 수 있다.
* 마조스님에게서 깨친 후 산에 숨어 살며 도를 간직했던 분들.
5.
옛사람은 선(善)을 보면 실천하고 허물이 있으면 고쳤다. 덕을 닦아 실천하고 죄 면하기를
생각하여 허물이 없도록 했다. 또한 자기의 단점을 모르는 것보다 심한 병통이 없으며, 자기
허물에 대해 충고 듣기를 좋아하는 것보다 훌륭한 장점이 없다고 여겼다.
그렇긴 하나 어찌 옛사람이 재주와 지혜가 부족하고 식견이 분명하질 못하여 그렇게 했겠
는가. 실로 자신의 잘난 점으로 남을 업신여기는 후학에게 경계를 주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광대한 총림과 세상의 많은 무리들을 혼자서 다 알 수는 없다. 반드시 좌우의 이목과 사려
를 의지해야만 극진한 이치를 깨닫고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시킬 수 있다.
혹은 자기만 높은 체하면서 자잘한 일에 엄격하고 큰 일은 소홀히 하며, 훌륭한 사람인지
어질지 못한 자인지도 살피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릇된 일도 고칠 줄 모르고 옳은 일은 따
르지 않으며 미친 듯이 제 뜻대로만 하면서도 거리낌 없다면 이것이 실로 재앙의 기반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혹 좌우에 물어 볼 만한 사람이 없다 해도 옛 성인을 본받으면 될 것이니, 마치 튼튼한 성
벽, 날랜 군사로 지키는 것처럼 들어갈 틈이 없도록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한다면 이른바
모든 시냇물을 받아들여 바다를 이룬다고 하는 큰 도량이 못된다. 『여보화상서(與¿和尙
書)』
6.
곳곳에서 큰스님〔長老〕을 추천하려면 반드시 도를 지키며 담담하게 물러나 있는 자로 해
야 한다. 그런 사람을 추천하면 지조와 절개가 더욱 견고하여 가는 곳마다 절 물건을 축내
지 않고 총림의 일을 해내며, 또한 법을 주관하는 자로서 오늘의 폐단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런데 아첨하는 교활한 무리들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높은 사람에게 가서 붙기도 하고 권
력 있는 집과 결탁하기도 하니, 하필 그런 사람을 추천하려 하는건지……
7.
묘희스님이 초연거사(超然居君)에게 말하였다.
"모든 일에 대중의 여론을 폐지해서는 안됩니다. 시행되지 못하도록 억누른다 할지라도 그
것이 여론일진대 어찌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총림에서 도 있는 인재를 하나 추천하면
보고 듣는 사람들이 반드시 기쁜 마음으로 칭찬하고, 혹 한번이라도 진실치 못하고 합당하
지 않은 자를 추천하면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근심스럽게 탄식을 하니, 이는 실로 다름이
아니라 공론(公論)이 시행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 - 아, 이로써 총림의 성쇠를 점칠 수 있겠다. 『가암집(可庵集)』
8.
단속〔節儉〕과 자재〔放下〕는 자기를 닦는 기반이며, 도에 들어가는 요체이다. 옛사람을
쭉 관찰해 보았더니 이러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그런데 요즈음 납자들은 형초(荊楚)에
유람하면서 갖가지 이불을 사들이고 절강(漸江) 가를 지나면서 비단을 구하니,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9.
고덕(古德)들은 주지를 하면서 상주물을 직접 관리하지 않고 모두 일 맡은 자에게 일임했
다. 그런데 근래의 주지하는 자들은 재력을 믿고서 큰 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조리 방장
(方丈)으로 되돌려 버린다. 그리하여 일을 맡은 사람은 부질없이 헛된 이름만 있을 뿐이다.
슬프다, 구차하게 제 한 몸 편하자고 굳이 온 절의 일을 쥐고 흔들면서, 소인에게 속지 않
고 기강의 문란없이 지당하고 공평한 의론에 맞기를 바라나, 어렵지 않겠는가.[여산당기(廬
山堂記)]
10.
양(陽)이 다 되면 음(陰)이 생기고 음이 끝간 데서 양이 생기니, 성쇠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 바로 천지 자연의 운행법칙이다. 형통하다는 뜻을 가진 풍괘〔豊亨:〕는 한낮〔日中〕
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해가 정오가 되면 기울고, 달도 가득 차면 이지러진다"라고 했던 것
이다. 이렇듯 천지의 가득 차고 이지러지는 것도 시절에 따라 꺼지고 불어나니, 더구나 사람
의 경우이겠는가.
그러므로 옛사람은 혈기가 한창일 때 세월이 쉽게 가버림을 염려하여 아침저녁으로 반성하
고 삼가하여 더욱 조심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감정과 욕구를 멋대로 하지 않고 도만을 구하
여 드디어는 명예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방일한 욕구에 떨어지고 방자한 감정으로 잘못되어 거의 구제가 불가능하게 된 경우,
그제서야 팔다리를 걷어붙이며 돌이키려 해도 이미 늦은 것이다. 기회란 만나기는 어려워도
놓치기는 쉽기 때문이다. 『임향서(林書)』
11.
옛사람은 우선 도 있는 이를 선택하고, 다음으로 재주와 학문 있는 이를 추천하여 필요한
시기에 등용하였다. 그런데 실로 쓸만한 그릇이 아닌데도 자기를 사람들 앞에 내세우는 자
에겐 주위 사람이 천박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납자들이 명예와 절개를 가다듬어
남 앞에 설 것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요즈음 총림이 시들고 상하는 이유를 살펴보았더니 납자들이 도덕은 돌아보지 않고 절개와
의리를 좀스럽게 여기며 염치를 무시하는 한편, 순수하고 소박한 사람을 촌스럽다 나무라고,
들떠서 떠들어대는 사람을 빼어나고 민첩하다고 부추기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후배들이 식견이 분명하질 못하여 대강 한 번 훑고 남의 이론 베낀 것을 말재주
나 채우는 밑천으로 삼는다. 이런 현상은 갈수록 더하여 드디어는 얄팍한 풍조를 이루었다.
더구나 성인의 도에 대해 대화하는 데 있어서는 깜깜하기가 마치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것
과도 같으니, 거의 구제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여한자창서(與韓子蒼書)』
12.
옛날 회당스님이 황룡스님의 『제명기(題名記)』를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
다.
"옛날 납자들은 바위굴에 거처하며 풀뿌리를 먹고 풀껍데기를 입고 살면서 명성과 이익에
마음이 얽매이지 않았으므로 관부(官府)에는 이름조차 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위(魏)·진
(晋)·제(齊)·양(梁)·수(隋)·당(唐) 이래로 비로소 절을 지어 사방의 납자를 모으고서 훌
륭한 사람을 선택하여 못난 이를 바로잡고 지혜로운 사람에게 어리석은 자를 이끌어주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손님과 주인이 있게 되었고, 상하의 질서가 나뉘게 되었다.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한 절에 모여들었으니, 그 책임을 맡은 사람은 실로 잘 해내기가 어
려웠다. 그런데도 큰 문제는 잘 다루고 자잘한 것은 버리며, 급한 일부터 하고 덜 급한 일은
뒤로 돌려 사사로운 계책을 꾸미지 않고 오로지 대중을 이롭게 하는 데에 요점을 두었던 것
이니, 요즈음 허둥지둥 한 몸만을 도모하는 자와는 실로 천지차이였다.
지금 황룡스님께서 뒷날 보는 자들이 하나씩 지목해 가며 `어느 스님은 도덕이 있었고, 어
느 스님은 인의(仁義)가 있으며, 누구는 대중에게 공정하였고, 아무개는 자기만을 위하였더
라'할 수 있도록 역대 주지의 이름을 돌에다 새겨 놓았으니, 아 - 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석각(石刻)』
13.
시랑(侍郞)인 장자소(張子韶)가 묘희스님에게 말하였다.
"선림에서 수좌라는 직책은 훌륭한 사람을 선발하는 지위입니다. 그러나 지금 총림에서는
잘난 이, 못난 이 할 것 없이 으례 이것을 요행을 바라는 미끼로 여기는데, 이는 어떻게 보
면 주지의 잘못입니다.
그렇다면 상법·말법 시대엔 실로 그 적임자를 만나기 어렵다 하겠읍니다. 가령 그 행동이
보다 우수하고 인격과 재주가 더욱 갖추어져 염치(廉恥)와 절의(節義)를 아는 자를 그 자리
에 앉게 한다면 약간은 나아질 것입니다." 『가암집(可庵集)』
14.
묘희스님이 자소에게 말하였다.
"근대의 주지로는 진여 모철(眞如慕喆)스님만한 이가 없고, 총림을 보필하는 자로는 양기
(楊岐)스님만한 이가 없다. 또한 알 만한 사람들은 자명(慈明)스님의 진솔(眞率)함에 대해 `
하는 일은 소홀하였으나 전혀 꺼리고 숨기는 일은 없었다'고 평하였다.
양기스님은 자기 몸을 잊고 그를 섬기면서 빠진 일은 없을까, 혹은 완전하지 못할까 염려
하였다. 심한 추위나 더위에도 자기의 급한 일로 게으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남원(南
源)에서 시작하여 흥화(興化)에서 마치기까지 근 30년 동안 자명스님의 세대가 다할 때까지
기강을 총괄하였다.
진여스님의 경우는 처음 보따리를 싸들고 행각하면서부터 세상에 나가 대중을 거느릴 때까
지 주리고 목마른 사람보다도 더 법을 위해 자신을 잊고 지냈다. 아무리 급한 경우라도 당
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말을 정신없이 하는 법이 없었다. 또한 여름에도 창문을 열지 않았
고,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았다. 방에서 여유롭게 지내며 책상에는 먼지가 가득하였다. 한번
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납자가 안으로 고명한 지혜와 넓은 안목이 없고, 밖으로 엄한 스승과 좋은 도반이 없다면
큰 인물 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당시에 상식을 넘어설 정도로 고집스럽기는 영부 철각(永孚鐵脚)스님과 같았고,
굽히지 않기로는 수원 통(秀圓通)스님과 같아 모든 사람들이 그의 풍모만 바라보아도 바람
에 풀이 눕듯 하였던 것이다.
아 - 아, 이 두 노스님은 천년에 한 번도 있기 어려운 납자의 귀감이라 하겠다." 『가암기
문(可庵記聞)』
15.
자소와 묘희·만암도안(萬菴道顔:1094∼1164) 세 스님이 함께 앞채 수좌 오본(悟本)스님에
게 문병을 갔다. 묘희스님이 "수행자라면 몸이 편안해야지 도를 배울 수 있다"라고 하자, 만
암스님은 곧바로 "그렇지 않다. 꼭 도를 배우려 한다면 몸 따위를 생각해서는 안된다"라고
반박하였다.
묘희스님이 말하였다.
"이런 꼭 막히고 틀어진 사람 보게나."
자소는 묘희스님의 말을 소중히 여기기는 했으나 끝내 만암스님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겨
아끼게 되었다. 『기문(記聞)』
16.
자소가 묘희스님에게 물었다.
"지금 주지는 무엇을 우선해야 합니까?"
스님이 대답하였다.
"납자들을 편안하게 하는 일은 재정문제를 잘 관리하면 될 뿐이다."
그때 만암스님이 좌중에 있으면서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상주물의 소득을 계산하여 불필요한 경비를 잘 조절하고 그것을 쓰는 데 도가 있으면 돈
과 곡식은 이루 세지도 못할 것이니 뭘 그다지 염려하겠는가? 그렇다면 현재 주지는 도를
간직한 납자를 얻는 것을 우선해야 할 뿐이다. 설사 주지가 지모(智謀)가 있어 10년 먹을 양
식을 비축할 수 있다 해도 이 자리에 도를 간직한 납자가 없다면 옛 성인이 말씀하신 `앉아
서 신도들의 시주만 소비하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다'라고 한 것이니, 주지에게 무슨 도움
이 되랴."
자소는 말하였다.
"수좌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묘희스님은 만암스님을 되돌아보며 말하였다.
"모두가 그럴 듯한 얘기로군."
그러자 만암스님이 그만두었다.
27
시초에서 조심하여 재앙에 대비하다
수좌 음(踵)스님
1.
만암 도안(萬庵道顔:1094∼1164)스님이 말하였다.
묘희스님이 지난날 경산(徑山)에 머물 때 야참(夜參)하는 차에 다른 몇 종풍(宗風)을 지지
하는 논조를 펴다가 조동 종지(曹洞宗旨)에 이르러서는 그칠 줄 몰랐다. 다음날 수좌 음(踵)
스님이 묘희스님에게 말하였다.
"세간을 벗어나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원래 작은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종풍〔宗
風〕을 진작하려 한다면 시기를 따라 폐단을 바로 잡을지언정 당장 보아 통쾌하다 해서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스님께서 지난날 납자시절이라 해도 허망하게 다른 종지(宗旨)를
논해서는 아니되거늘, 하물며 지금 보화왕좌(¿華王座)에 올라 선지식이라 일컬어지는 경우
에야 더욱 그러하지 않겠읍니까?"
스님은 "하루 저녁 그저 지나가는 말일 뿐이었네"하고 변명하였으나 수좌는 "성현의 학문
은 천성에 근본하였읍니다. 이렇게 경솔하게 해서야 되겠읍니까?" 하면서 따졌다.
스님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으나 수좌는 그래도 말을 그치지 않았다.
2.
만암스님이 말하였다.
묘희스님이 형양(衡陽)에 귀양가자 시자 현(賢)스님이 깎아내리는 말을 적어서 큰 방 앞에
걸어보이자 납자들은 부모를 잃은 듯 눈물을 흘리고 근심스럽게 탄식을 하면서 안절부절하
였다.
그러자 수좌 음(踵)스님이 대중방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인생의 화환(禍患)이란 구차하게 면하지 못한다. 가령 묘희스님이 평생을 아녀자처럼 아랫
자리에 매달려 있으면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오늘같은 날은 없었으리라. 더구나
옛 성인들에게 부응하는 길은 여기에 그치지 않으니 그대들은 무엇이 괴로와 슬퍼하는가?
옛날 자명(慈明)·낭야(¿)·곡천(谷泉)·대우(大愚)스님이 도반이 되어 분양선소(汾陽善
昭:947∼1024)스님을 참례하러 가는데, 마침 서북지방에서 전쟁을 하였으므로 드디어는 옷을
바꿔입고 대열에 끼어서 갔었다. 그런데 지금은 경산과 형양은 멀지 않고 길은 막힘이 없으
며 산천도 험하지 않다. 묘희스님을 뵙고자 한다면 다시 무엇이 어렵겠는가."
이 말로 온 대중이 잠잠하더니 다음날 줄지어 떠나버렸다. 『여산지림집(廬山智林集)』
3.
만암스님이 말하였다.
묘희스님이 매양현(梅陽縣)으로 오신 일을 가지고 더러 이런저런 말이 있자 수좌 음(踵)
스님이 한마디 하였다.
"대체로 사람을 평가하려면 허물있는 가운데서 장점을 찾아야 된다. 어찌 허물이 없는 데
서 단점만을 끄집어내려 하는가. 그의 마음은 살피지 않고 자취만 가지고 의심한다면 실로
무엇으로써 총림의 공론을 맞춰주겠는가.
더구나 묘희스님의 도덕과 재주는 천성에서 나왔으며 뜻을 세워 일을 주도함이 의로움을
따를 뿐이다. 스님의 도량은 누구보다도 뛰어난데, 지금 조물주가 억제하는 것은 반드시 이
유가 있어서일 것이니, 뒷날 스님이 불교 집안의 복이 될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듣고 나서는 사람들이 다시는 거론하지 않게 되었다.
4.
수좌 음(踵)스님이 만암스님에게 말하였다.
"선지식이라 불리우는 자는 마음을 씻어내야 하며, 지극한 공정(公正)으로 사방에서 오는
납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중에 도덕과 인의를 지닌 자가 있으면 원수처럼 틈이 있다 해
도 반드시 써주어야 하며, 간사하고 음흉한 자라면 개인적으로 은혜가 있다 해도 반드시 멀
리해야 한다. 그리하여 찾아오는 사람들로 하여 각각 지켜야 할 바를 알아 일심동체가 되게
하면 총림은 안정되리라." 『여묘희집(與妙喜集)』
5.
또 이렇게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주지된 자라면 누구인들 법도와 질서가 반듯한 총림을 세우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총림을 진작시키는 자가 드문 이유는 도덕을 잊고 인의를 폐지하며, 법도를 버리고
개인의 감정에 맡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불교가 시들어가는 것을 진정 염려한다면 자기부터 바르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하고
훌륭한 사람을 선발하여 돕게 하며, 덕망있는 분을 권장하고 소인을 멀리해야 한다. 절약·
근검을 자신부터 실천하고 덕과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채용하
여 일 맡고 시중들고 하는 사람들이 덕있는 자를 모시고 아첨하는 자는 멀리할 줄을 알게
되며, 치졸한 비방과 편당(偏黨)하는 혼란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마조(馬祖)·백장(百丈)스님과도 짝이 될 수 있고, 임제(臨濟)·덕산(德山)스
님의 경지에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지림집(智林集)』
6.
수좌 음(踵)스님이 말하였다.
"옛날 성인은 재앙이 없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하늘은 어찌 이 못난 놈을 버리시는가' 하
고 탄식하였다. 범문자(范文子)는 말하기를 `성인만이 안팎에 환란이 없을 수 있으니, 스스
로가 성인이 아니고서야 바깥이 편안하면 반드시 마음이 근심스럽다' 하였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어질고 총명한 이는 환란을 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시초부터
조심하여 스스로 방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약간의 근심과 수고로움이 있다
해도 반드시 진정한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재앙·근심·비방·모욕은 아마 요순(堯舜) 같은 성인이라 해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
구나 그 나머지의 경우이겠는가." 『여묘희서(與妙喜書)』
28
적시에 폐단을 고쳐 종풍을 간직하다
만암 도안(萬庵道顔)스님 / 1094∼1164
1.
요즈음 총림을 살펴보았더니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 아예 없다. 몇 백 군데를 가보아도 아
무개가 주지가 되고 대중이 짝이 되어 법왕(法王)의 자리를 빌어 주장자와 불자(佛子)를 세
우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었다. 토론이 있긴 하나 경론을 섭렵하지 않았으므로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 없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세간을 벗어나 중생을 이익되게 하며 부처를 대신해 교화를 드날리려 하면서 마음을 밝히
고 근본을 깨달아 깨달음과 실천〔行解〕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내겠는가? 비유하
면 어떤 사람이 거짓으로 왕이라 자칭하다가 죽음을 스스로 초래하는 것과도 같다. 더구나
법왕을 어떻게 거짓으로 훔치려 하는가?
아 - 아, 부처님 가신 지가 더욱 멀어지자 `수료학(水 鶴)' 게송을 지어 부르며 사견을
내는 무리들이 자기 멋대로 하며 옛 성인의 가르침을 날로 침체시키니 내가 말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마침 일없이 지내다가 교풍(敎風)을 매우 해치는 한두 가지를 조목별로 진술해 보았다. 이
를 총림에 유포하여 후학으로 하여금 선배들이 살얼음판을 지나듯 칼날 위를 달리듯 조심스
럽게 큰 법 걸머지려는 마음을 지녀 명예·이익에 구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였다.
나를 인정해 주는 자에게도, 나를 허물하는 자에게도 나는 변론하지 않으리라. 『지림집(智
林集)』
2.
옛사람은 상당(上堂)하여 우선 불법의 요점을 제시하고 대중에게 자세히 물으면 납자는 나
와서 더 설명해 주기를 청하였으니, 그리하여 문답형식의 법문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요
즈음 사람들은 운(韻)도 안맞는 4구게(四句)를 옛 법도를 무시한 채 멋대로 지어놓고는 그
것을 조화(釣話:법에 대한 의심을 던지는 말)라 부른다. 한 사람이 대중 앞에 불쑥 나서서
옛시 한 연구(聯句)를 큰 소리로 읊조리며 그것을 매진(罵陳:의심을 결단해 주는 진술)이라
부르고 있으니 치졸하고 속되어 비통해 할 만한 일이다.
선배들은 생사의 큰일을 염두에 두고 대중과 마주하여 의심을 결단하였으며, 이윽고 뜻을
밝히고 나서는 생멸하는 마음을 일으키진 않았다.
3.
명성 높은 존숙(尊宿)이 절에 오시면 주지는 자리에 올라 겸손하게 인사하고 높은 지위를
굽혀 낮은 데로 가야 한다. 더욱 정중하게 말하고 자리에서 내려와 수좌대중(首座大衆)과 함
께 법좌(法座)에 오르시기를 청하고 법요(法要) 듣기를 바라야 한다.
요즈음은 서로를 부추기면서 옛사람의 공안(公案)을 들어다가 대중들에게 비판하게 하고는
그를 시험한다고들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절대로 이런 마음을 싹트게 하지 말라. 옛 성
인께서는 법을 위하여 모든 생각을 떨치고 함께 교풍을 세워 서로가 주고받으며 법이 오랫
동안 머물게 하였다. 생멸하는 마음으로 이런 악한 생각 일으키는 것을 어찌 용납하려 했겠
는가. 예의 차리는 데에는 겸손하기부터 해야하니 깊이 생각해야 한다.
4.
요즈음 사대부·감사(監司)·군수(郡守)가 산에 들어와 처소를 잡으면 다음날 시자(侍者)를
시켜 큰스님에게 "오늘은 특별히 아무개 관리가 법회에 오르겠읍니다" 하고 아뢰게 하는 경
우를 보는데, 이 한 마디는 세 번쯤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예로부터 방책(方冊) 가운데 실린 이름이 모두가 선지식을 찾아온 사대부이긴 하나, 이때
주지는 그들이 참례하는 마당에 속인으로서 불법을 보호하는 방법만을 대략 거론하여 산문
(山門)의 본의를 빛나게 하였다. 이렇게 집안 사람이 집안 일 한두 마디를 담박(淡泊)하게
하여 상대방이 공경하는 마음을 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곽공보(郭公輔)와 양차공(楊次公)이 백운(百雲)스님을 방문하고, 소동파(蘇東坡)·황태사
(黃太史)가 불인(佛印)스님을 뵌 경우가 모두 이런 본보기이다. 어찌 유별나게 망령을 떨어
식견있는 자들에게 비웃음을 샀겠는가.
5.
옛사람은 납자들이 선방에 들어오면 먼저 패(牌)를 걸어놓고 각각 생사의 큰일을 위해 힘
차게 찾아와 결택(決擇)을 구하게 하였는데, 요즈음은 늙었거나 병들었거나를 묻지 않고 모
조리 와서 극진한 공경을 바치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사향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향기가 나게 마련인데 하필 일률적으로 몰아붙일 필요가 어디
있는가. 결과적으로 예의를 따지는 절차 조목만 부질없이 생겨나 손님 쪽이나 주인 쪽이나
편치 않으니 주지라면 마땅히 생각해야 하리라.
6.
초조 달마(初祖達磨)스님께서는 의발(衣鉢)과 법을 둘 다 전하였는데, 6조 혜능스님에 이르
러서는 의발은 전하지 않고 깨달음과 수행방법이 이 도리에 맞는지만을 기준으로 하여 대대
로 가업(家業)을 삼았다. 이로부터 조사의 도는 더욱 빛나고 자손은 점점 번성하였다.
6조(六祖) 대감(大鑑:혜능)스님의 후예로는 석두(石頭)·마조(馬祖)스님이 다 적손(嫡孫)으
로서 반야다라(般若多羅)스님의 예언에 적중하였으니, "요컨대 아손(兒孫)의 다리를 빌어 걷
겠구나"라고 한 말씀이 바로 이 말이다.
두 스님의 현묘한 말이 천하에 퍼져 은밀한 깨달음에 가만히 부합한 자들은 더러더러 있게
되었다.
법을 이어받은 자가 많아지자 가문을 독차지하는 학풍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조계(曹溪)의
원류가 다섯 파로 나뉘었으나, 마치 모나고 둥근 그릇에 물이 담길지라도 물 자체는 변함없
는 경우와 같아서 각각 아름다운 명성이 드날리며 자기의 책임을 힘써 실천하였다.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 명령 하나가 온 납자들에게 미쳐 총림이 물끓듯 하였는데 이는 구차하게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이로부터 서로가 주고받으면서 은미하고 그윽한 도를 드러내 밝히기도 하고, 혹은 부정하
고 혹은 긍정하면서 설법을 했는데, 그 말 자체는 아무 맛 없기가 마치 나무토막으로 끓인
국, 무쇠로 지은 밥과도 같았으므로 후배들이 이를 씹어보고 염고(古)라고 불렀다.
그러한 게송은 분양(汾陽)스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설두(雪)스님에 이르러서는 변론이 유창
하고 종지는 밝게 드러나 광대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후세에 게를 짓는 자들은 설두스님
을 부지런히 좇아가기는 하나 도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문체를 아름답게 하는 데만 힘을 쏟
아 후학들로 하여금 혼순(渾淳)하고 완전한 옛사람의 종지를 보지 못하게 하였다.
아 - 아, 나는 총림에 노닐면서 선배들을 보고 옛사람의 어록이 아니면 보질않고 백장(百
丈)의 호령이 아니면 행하질 않으니, 내 이런 태도가 어찌 복고적인 성향 때문만이겠는가.
요즈음 사람들에게서는 본받을 만한 점이 없기 때문이다.
원컨대 지혜로운 자라면 말 밖에서 내 뜻을 알아내야 하리라.
7.
요즈음 편견으로 집착하기 좋아하는 납자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들은 세상 물정 모르고
경솔하게 약속을 해대다가 수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을 사랑하
면서 순종하면 좋다 하고 거역하면 멀리한다.
설사 반쯤, 아니 온전한 분별이 있는 자라 해도 이런 악습에 가리워지면 머리가 희끗한 노
인이 되도록 성취한 것 없는 수가 많다. 『지림집(智林集)』
8.
이르는 총림마다 삿된 말이 불길 같다. 즉 "계율을 지키거나 정혜(定慧)를 익힐 필요도 없
으며, 도덕을 닦고 탐욕을 버려 무엇하겠는가"라고들 말한다. 거기다가 『유마경(維摩脛)』
이나 『원각경(圓覺脛)』을 인용하여 증거를 대면서 탐진치 살도음망(貪痴殺盜淫妄)을 범
행(梵行)이라 찬탄하기도 한다.
아 - 아, 이 말이 어찌 오늘의 총림에만 해가 되겠는가. 참으로 불법 만세의 병통이다.
또 번뇌에 꽉 얽혀 있는 범부는 탐하고 성내는 애욕과 나다 너다〔人我〕하는 어리석음
〔無明〕이 생각 생각에 마주함이 마치 한 솥 끓는 물과도 같으니 무슨 수로 식히겠는가.
옛 성인께서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문제가 있으리라는 것을 잘 내다보시고 드디어는 계(
戒)·정(定)·혜(慧) 3학(三學)을 마련하여 그런 짓을 그만두고 돌이키기를 바랐던 것이다.
지금의 후학들은 계율을 지키지도 정혜를 익히지도 않는다. 도는 닦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지식만 늘리고 억지 변론이나 하면서 세속으로 끌려들어가 잡아당겨도 되돌아올 줄 모른다.
이것이 내가 말한 `만세의 병통'이다.
바른 발심〔正因〕으로 수행하는 고상한 납자라면 생사를 한 번에 결판내야 하니, 성신(誠
信)을 간직하여 이 무리들에게 끌려가서는 안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 말을 믿어서는 안된다. 이는 마치 극약을 먹고 싼 똥이나 독사가 마신 물과 같으니 보
거나 들어서도 안되는데 하물며 먹어서야 되겠는가. 그 물이 사람을 죽이리라는 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식견이 있는 자라면 자연히 그것을 멀리 하리라." 『여초당서(與草堂書)』
9.
초당스님의 제자 중에 유일하게 산당(山堂)스님만이 옛사람의 풍모를 간직했을 뿐이다. 황
룡사에 살 때, 공적인 일을 맡아 주관하려면 반드시 용모를 가다듬고 방장실(方丈室)에 나아
가 분부를 받은 뒤에야 차 달이는 예의를 갖추었다. 이런 태도는 시종 변함이 없었다.
지은(智恩)이라는 상좌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면서 금(金) 두 닢을 내놓은 일이 있었다. 이
를 이틀이 지나도 찾지 못하였는데 시자 성승재(聖僧才)가 청소를 하다가 이를 주어 습유패
(拾遺牌)에 걸어놓자 온 대중이 이를 알게 되었다.
이는 법을 주관하는 주지가 청정하여 웃사람이 하는 것을 아랫사람이 본받았기 때문이다.
10.
만암스님은 근검·절약하여 소참(小參)에 보설(普說)하면서 공양하게 되었다. 납자들 사이
에 나름대로 이를 문제삼는 자가 있자 스님이 그 말을 듣고 말하였다.
"아침에 고량진미를 먹고도 저녁에는 거친 음식을 싫어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대들이
생사의 큰일을 생각하여 적막한 구석에서 살고자 하였다면 도업(道業)을 이루지 못할까만을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성인과 멀어진 지가 아득한데 조석으로 탐하고 즐기는 것을 일삼아
서야 되겠느냐."
11.
만암스님은 천성이 어질고 후하며 자기 처신에는 청렴하였다.
평소에 법문을 하면 말은 간결하나 의미는 치밀하였으며, 널리 배우고 열심히 익혀 철저히
도리를 따져 나갔으며, 구차하게 중단하거나 허망하게 남의 논리를 따르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과 고금을 평론하면 마치 자신이 그 사이를 누비고 다닌 듯하여 듣는 사람들이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분명히 깨달았다. 어떤 납자가 스님을 두고 한 말이 있다.
"세월이 다하도록 참선하는 것이 하루 동안 스님의 말을 듣고 체득하는 것만 못하다."
『기문(記聞)』
12.
만암스님이 수좌 변(辯)스님에게 말하였다.
원오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즈음 참선하는 사람들은 절의(節義)를 대단찮게 여기고 염치를 차리지 않으므로 사대부
들이 업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대도 뒷날 이렇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한다면 벌레와 한 가
지일 것이다. 항상 법도에 맞게 수행할지언정 권세나 이익을 좇느라 남의 안색이나 살펴 아
첨하지 말며, 생사·재앙은 일체 그대로 맡겨두어 버린다면 마구니 세계를 벗어나지 않은
채 그대로 부처님 세계에 들어가리라."[법어(法語)]
29
도를 간직하고 뜻대로 살다
소각 대변(昭覺大辯)스님
1.
수좌 소각 대변스님이 세속을 떠나 여산(廬山) 서현사(棲賢寺)에 머물면서 항상 대나무 지
팡이 하나와 떨어진 짚신 한 켤레만을 지니고 다녔다. 이런 꼴로 구강(九江)을 지나자 동림
(東林)의 혼융(混融)스님이 보더니 이렇게 꾸짖었다.
"스님이란 사람들의 모범이다. 행동거지가 이 꼴이니 자신을 경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겠
는가. 예의 차리는 것이 엉망이구나."
수좌 변(辯)스님은 웃으며 대꾸하였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즐거움이니, 내게 무슨 허물이 있겠읍니까?"
그리고는 붓으로 게송을 써 놓고 가버렸는데, 그 게송은 이렇다.
날더러 형편없다 흉보지 말라.
형색이 초라하다고 도마저 궁하겠는가.
짚신은 호랑이 같이 사납고
지팡이는 용처럼 꿈틀거리네.
勿謂棲賢窮 身窮道不窮
草鞋獰似虎 杖活如龍
목마르면 조계수(曹溪水) 마시고
배고프면 율극봉(栗棘蓬) 먹는다네.
고지식한 돌대가리여
다들 아상에 빠져 있구나.
渴飮曹溪水 饑呑栗棘蓬
銅頭鐵額漢 盡在我山中
혼융스님은 이를 보고 부끄러워하였다. 『월굴집(月窟集)』
2.
수좌 변(辯)스님이 혼융스님에게 말하였다.
"조각된 용이 비를 뿌릴 수 없듯, 그림 속의 떡으로 주린 배를 채울 수 없듯, 납자들이 안
에 실다운 덕이 없으면서 밖으로 화려하고 교묘한 것만을 믿는다면, 마치 썩어서 물이 새는
배에다 화려하게 단청을 하고서 허수아비 사공으로 육지에 닿으려는 것과 같다. 이는 실로
구경거리야 되겠지만 물을 건너다 갑자기 풍파라도 만난다면 위태롭지 않겠는가." 『월굴집
(月窟集)』
3.
이른바 큰스님이라 하는 이는 부처님을 이어 교화를 드날리는 자이니, 요컨대 자기부터 깨
끗이 하여 대중에 임하고 일을 벌이면 정성을 다해야 한다. 이해를 따져 마음을 이랬다 저
랬다 해서야 되겠는가.
내게 주어진 일을 당연히 이렇게 하면 될 뿐, 성취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는 옛 성인이라
도 꼭 기약하지는 못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구차한 말을 하겠는가.
4.
불지(佛智)스님이 서선(西禪)에 살 때였다.
다른 납자들은 제것을 챙기고 정돈하느라 정신없는데, 수암(水庵)스님만은 천성이 조용하고
따뜻하며 자기 몸 봉양하는 데는 지극히 박절하였지만 고고한 모습으로 대중 가운데 있으면
서는 한번도 구차하게 미련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불지스님은 그에게 꾸짖는 투로 말하였다.
"어쩌면 이렇게도 바보스러울까."
수암스님은 대꾸하였다.
"제가 물건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여 정돈할 만한 물건들이 없을 뿐입니다.
제게도 돈이 있다면 털옷 한두 벌 해 입고 도반들과 함께 어울리겠읍니다만 가난하여 도무
지 어찌해 보질 못하겠읍니다."
불지스님은 웃으면서 억지로는 안되겠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드디어는 그만두었다.
30
납자는 총림을 보호하고 총림은 도덕을 보호한다
불지 단유(佛智端裕)스님 / 1085∼1150
1.
힘차게 달리는 준마가 실족하지 않는 것은 재갈과 고삐 때문이며, 아무리 억지 센 소인이
라 할지라도 감히 제 뜻대로 다 못하는 것은 형벌이 막아주기 때문이듯, 치달리는 알음알이
〔意識〕가 감히 경계를 반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선정을 닦은〔覺照〕의 힘이다.
슬프다. 납자에게 선정을 닦은 힘이 없다면 준마에게 고삐가 없고 소인에게 형벌이 없는
것과 같으리니, 무엇으로 탐욕을 끊고 망상을 다스리겠는가. 『여정거사법어(與鄭居君法
語)』
2.
불지스님이 수암(水庵)스님에게 말하였다.
"주지의 기본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도덕·언행·인의·예법이다. 도덕·언행은 가르침의
근본이며, 인의·예법은 그 지말이다. 그러므로 근본이 없으면 우선 자립하지 못하고, 지말
이 없으면 완성되지 못한다.
옛 성인께서는 납자들이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보셨다. 그래서 총림을 세워 그들
을 안주시키고 주지를 뽑아 통괄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총림의 존귀가 주지를 위한 것
이 아니며, 앞서 말한 네 가지 아름다운 근본은 납자만을 위한 것도 아니라 모두 불조의 도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훌륭한 주지는 무엇보다도 도덕을 존중하고 언행을 조심하는 한편, 납자된 이는
무엇보다도 인의를 간직하고 예법을 지켰다. 그러므로 주지는 납자가 아니면 존립할 근거가
없고, 납자는 주지가 아니면 덕을 완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몸과 팔, 머리와 발이
크기가 알맞아 거슬리지 않고 서로가 의지하며 가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납자는 총림을 보호하고 총림은 도덕을 보호해야 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니 주지
된 사람이 도덕이 없다면 총림은 폐지되고 말 것이다." 『실록(實錄)』
31
한끼 먹고 눕지 않으며 선정을 닦다
수암 단일(水庵端一)스님*/1107∼1176
1.
『주역(周易)』에 `군자는 환난을 생각해 미리 방지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생사의 큰 환난을 생각하여 도를 닦아 방지하고 드디어는 이 도를 크게 운용하고 널리 전하
였던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도를 구하는 일은 현 실정에서 멀다. 절실히 당면한 이익을 구하느니만
못하다'라고들 한다. 이리하여 들뜨고 화려한 것만 다투어 익히고 털끝만한 이끗도 비교하
고 헤아리면서 눈앞의 일만 하려하고 구차한 계교를 품는다. 때문에 한 해를 주선해 갈 계
획조차 세우지 않으니, 더구나 생사를 염려하겠는가.
그러므로 납자들은 날로 야비해지고 총림은 계속 피폐되며 기강이 실추되어, 드디어는 밋
밋하다가 거의 구제가 불가능한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슬프다. 걱정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쌍림실록(雙林實錄)』
2.
옛날 운거산(雲居山)에 떠돌아다니다가 고암(高庵)스님이 저녁 소참(小參)에서 이렇게 말하
는 것을 들었다.
"지극한 도는 너무 곧아서〔徑挺:直指〕 상식을 벗어나 있으니, 모름지기 마음을 진실히 하
고 뜻을 바르게 하여 교만과 꾸밈·치우친 사견을 일삼지 말아야 한다. 교만과 꾸밈은 속임
수·아첨에 가깝고 삿됨과 치우침은 올바른 중도가 아니므로 지극한 도와는 모두가 일치하
지 못한다."
나는 나름대로 그 말씀이 이치에 가깝다 생각해서 각고의 의지로 실천해 가다가 불지선사
(佛智先師)를 뵙자마자 크게 깨닫고 평생 행각하는 목적을 저버리지 않게 되었다. 『여월당
서(與月堂書)』
3.
월당(月堂)스님은 주지하면서 가는 곳마다 도를 실천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았다. 화
주(化主)를 보내지도 않고, 누구를 찾아가 뵙는 것도 일삼지 않았다. 해마다 대중을 헤아려
소득을 따라 물자를 사용하였다. 납자들 가운데 화주하려는 마음을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들을 물리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부처님도 비구에게 발우를 지니고 신명을 도우라고 가르치셨는데, 스님께서는 왜 거절만
하고 용납하지 않으시는지요?"
월당스님은 대답하였다.
"우리 부처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에는 가능했으나 요즈음 그렇게 하면 반드시 이익을 좋아
하는 자가 있어서 자신을 파는 데까지 이를까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월당스님의 이 말이 점점 불어나는 악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신 절실하고도 현
명하며 실제에 걸맞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요즈음의 세태를
보건대 어찌 자신을 파는 데 그칠 뿐이겠는가. 『법어(法語)』
4.
수암스님이 시랑(侍郞)인 우연지(尤延之)에게 말하였다.
"옛날에 대우(大愚)·자명(慈明)·곡천(谷泉)·낭야(¿)스님이 도반이 되어 분양스님을 참방
하게 되었읍니다. 그런데 하동 지방은 추위가 극심한지라 모두들 가려하지 않았으나 자명스
님만은 도에 뜻을 두어 아침저녁으로 게을리하지 않았읍니다. 밤에 좌선하다가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자신을 찌르며 이렇게 탄식하였읍니다.
"옛사람은 생사의 큰일을 위해서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던데,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토록
방종하여, 살아서는 시대에 도움이 못되고 죽어서도 후세에 남길 이름이 없으리니, 이는 자
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고는 하루아침에 하직하고 되돌아 가 버렸다. 그러자 분양스님은
"초원(楚圓)이 지금 떠나버렸으니 나의 도가 동쪽으로 가겠구나" 하고 탄식하였읍니다."
『서호기문(西湖記聞)』
5.
옛날 덕 있는 주지는 솔선하여 도를 실천하였을 뿐, 구차하게 명리를 구하느라고 인의(仁
義)를 저버리는 방자한 일은 하지 않았다. 옛날 분양스님은 상법·말법 시대에 심성이 들떠
서 납자 교화하기 어려운 것을 매양 탄식하였다. 이에 자명스님은 말하기를, "이는 매우 쉬
운 일인데도 문제는 법을 주관하는 자들이 잘 인도하지 못하는 데 있읍니다"
하자, 분양스님이 말하였다.
"순수하고 성실한 옛사람도 2,30 년을 지내고서야 도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자 자명스님은 말하였다.
"이는 훌륭한 성인의 얘기가 아닙니다. 열심히 도에 매진하는 자라면 천일 공부면 됩니다."
사람들은 헛소리라 여겨 주의깊게 듣지 않았다. 그리고 분양 지방은 매우 추웠으므로 여기
서 야참(夜參)을 마쳤다. 이역의 어떤 비구가 분양스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모임에는 보살(大君)이 여섯이나 있는데 왜 법을 설하지 않는지요?"
그러더니 천일이 못된 3년 안에 과연 여섯 사람이 도를 이루었다. 분양스님은 이 일로
게송을 지었다.
호승(胡僧) 지팡이의 광채
법을 청하러 분양에 이르렀네
여섯 사람 큰 그릇 이루니
법을 펴 드날리라 권하네
胡僧金錫光 請法到汾陽
六人成大器 勸請爲敷揚 『서호기문승(西湖記聞僧)』
6.
투자 의청(投子義淸)스님이 은사 수암스님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찬(贊)을 지었다.
나의 스승 수암스님
당당하기 당할 자 없네
하루 종일 한끼 공양에
자리에 눕는 일 없네
선정에 깊이 드시어
들고 나는 숨마저 잊으셨는지
嗣淸禪人 孤硬無敵
晨昏一齋 脇不至席
深入禪定 離出入息
명성이 대궐에 퍼져
선덕전에서 선을 논할 제
용안(龍顔)이 활짝 펴지사
비단을 내리시었네.
세번 굳이 사양하시니
천자 더욱 칭찬하셨네.
名達九重 談禪選德
龍顔大悅 賜以金帛
力辭者三 上乃圈歎
진실한 도인이시여
초목도 빛을 드날립니다.
못난 제게 법을 물려주시니
향 사루어 찬을 지어봅니다.
眞道人也 草木騰煥
傳予陋質 香請贊
이 찬(贊)으로 미루어 보건대 소위 청출어람(靑出練藍)이라 하겠다. 『견서상(見書像)』
7.
불지선사(佛智先師)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산 연조(東山演祖)께서는 경룡학(耿龍學)에게 `나에게 원오(圓悟)가 있는 것은 물고기에
게 물이 있고 새에게 날개가 있는 것과 같다' 하셨다. 그 때문에 승상인 자암거사(紫巖居君)
가 이렇게 찬탄하였다.
`스승과 제자〔師資〕가 서로를 인정하며 동시에 만나기를 희망하니, 그들의 한결같은 정
분을 누구라서 이간질하겠는가.'
자암거사는 말의 이치를 안다 할 만하다.
요즈음에 제방(諸方)의 큰스님들은 딴 마음을 품고 납자를 거느리며, 한편 납자들도 세력과
이익을 끼고 큰스님을 섬기는 경우를 보게 된다. 주인과 객이 서로 이익을 다투고 상하가
속이고 업신여기니 어떻게 불교가 일어나고 총림이 성대해지겠는가." 『여매산윤서(與梅山
潤書)』
8.
말로 사람을 감동시키려면 진실하고 간절해야 한다. 말이 진실·간절하지 못하면 받는 느
낌도 따라서 얕으리니 어떤 사람이 그런 말에 기꺼이 감동하겠는가. 옛날 백운(白雲)스님께
서 나의 스승(불지 단위스님)을 전송하실 때 사면(四面)에 머무시면서 간절하게 말하셨다.
"조사의 도가 해이해져서 쌓아올린 달걀마냥 위기에 처해 있으니, 함부로 방일하며 헛되게
세월만 보내고 지극한 덕을 무너뜨려서는 안된다. 넓게 받아들이는 도량으로 세상을 이익케
하고 중생을 보존할지니, 이렇게 하여 불조의 은혜에 보답하거라."
당시 이 말을 들은 자들은 누구라서 감동하지 않았겠는가.
투자(投子), 그대는 지난날 부름을 받고 대궐로 들어가 천자를 대면하였으니 실로 불교 집
안의 다행이라 하겠다. 자기를 낮추고 도를 높혀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지 자
신을 뽐내고 자랑해서는 안된다.
예로부터 선철(先哲)들은 겸손과 공경으로 자기를 보존하고 덕을 완전히 하였으며, 세력과
지위를 영화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청아함은 한 시대를 진동하였고, 아름다
움은 만세토록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내 죽을 날이 멀지 않아 다시는 못볼까 염려
스러우니, 때문에 이를 간절히 부탁한다. 『견투자서(見投子書)』
9.
수암스님은 젊어서 기상이 훤출하였다. 큰 뜻〔圍〕이 있어 기개와 절도를 숭상하였으며,
들떠 쏠리는 일도 없고 자잘한 것까지 다 따지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용납하는 마음가짐으
로 도리에 맞게 행동하였으며, 재해가 목전에 닥쳐도 실색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여덟 절의
주지를 역임하고 4개 군(郡)을 두루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애써서 도를 실천하여 일으켜 세
우려 하였다.
순희(淳熙) 5년(1178)에 서호(西湖)의 정자원(淨慈院)으로 은퇴하였는데 이런 게송을 지었
다.
황도(皇都)의 큰 절에서 6년을 쓸고 닦았더니
기와 조각이 제석의 범천궁(梵天宮)이 되었네
오늘 집이 완성되자 갈 길 가시노니
지팡이의 팔면에서 청풍이 일어나네.
六年灑掃皇都寺
瓦礫凶成繹梵宮
今日宮成歸去也
杖頭八面起淸風
사람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무시라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작은 배로 수수(秀水)의 천녕사
(天寧寺)에 가신 지 오래지 않아 병을 보이더니 대중과 이별하고 임종을 고하였다. 『행실
(行實)』
32
성급하게 제자 지도함을 경계하다
월당 도창(月堂道昌)스님 / 1089∼1171
1.
옛날 대지(大智)스님께서 말세의 비구들이 교만하고 게으를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법도를
지어 이를 예방하셨다. 그들의 그릇과 능력에 따라 각각 소임을 정하였는데, 주지는 방장실
에 대중은 큰 방에 거처하며, 예시한 10개 소임〔十局頭首〕의 엄숙하기는 관부(官府)와
도 같았다.
웃사람은 굵직한 일을 주관하였고 아랫사람은 세부조목을 정리하여, 상하가 몸이 팔을 부
리고 팔이 손가락을 움직이듯 서로 받들고 통솔하였다. 그러므로 앞사람들이 법도를 따라
계승하여 공경하고 떠받들며 조심스럽게 실천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옛 성인의 유풍(遺風)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총림이 쇠퇴하여 납자들이 재능에 능한 것만을 귀하게 여기고 절개 지키는 것을
천시한다. 들뜨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고 진실·소박을 가벼이 여기기를 날로 달로 더하여
점점 말세로 치닫는 것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편안함만 훔치는 정도였다가 빠져
들어 익숙해진 지가 오래되면 으례 그런 것이려니 하고 비리(非理)로 여기지 않게 된다. 그
리하여 웃사람은 아랫사람을 두려워하며, 아랫사람은 웃사람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평소에는 달콤한 말로 굽신거리며 아첨하다가 틈이 생기면 사나운 마음과 속임수로 서로를
해친다. 여기에서 일을 이룬 사람은 훌륭하다 하고 패한 자는 어리석다 하며 존비(尊卑)의
질서나 시비(是非)의 이치를 다시는 묻지도 않는다. 일단 상대방에서 그렇게 하고 나면 이
쪽에서도 똑같이 본받으니, 아랫사람이 말하고 나면 웃사람이 그를 따르며 앞에서 행하고
나면 뒤에서 따라 익힌다.
아 - 아, 성인이신 우리 스승이 원력을 바탕으로 백년 공부를 쌓지 않으셨다면 이 고질화
된 폐단을 개혁할 수가 없으리라.
2.
월당스님이 정자원(淨慈院)에 머문 지가 매우 오래되었다. 어떤 사람이 "스님께서는 도를
수행하신 지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문하에는 제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읍니다.
이는 묘담(妙湛)스님을 저버리는 것이 아닌지요?" 하고 말하자, 스님은 대꾸도 하지 않았
다. 뒤에 거듭 이를 따지자 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이런 소리를 듣지도 못하였는가. 옛날에 오이를 심어놓고 매우 아끼는 자가 있었
다네. 그런데 무더운 여름날 한낮에 물을 주자 오이는 발꿈치 돌리는 순간 시들어 버렸다네.
무엇 때문이었겠나? 신경쓰기를 게을리해서가 아니라 물을 제때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니,
시들게 하기에 딱 알맞은 짓이었다네.
제방의 노숙(老宿)들이 납자를 끌어줄 때, 그의 도업이 안으로 충실한지, 재능과 그릇은 크
고 위대한지를 관찰하지 않고 그저 성급하게 위하는 마음만 쓰려 할 뿐이지. 그리하여 납자
들의 도덕을 보면 더럽고 언행을 보아도 도리에 어긋나 있으며 공평정대함으로 말하자면 삿
되고 아첨스러우니, 아끼는 마음이 그의 분수에 지나쳐서가 아니겠는가?
이는 바로 한낮에 오이에 물을 주는 것과도 같다네. 나는 식견있는 사람들이 비웃을까 깊
이 염려스럽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네." 『북산기문(北山記聞)』
3.
황룡스님이 적취암(積翠庵)에 머무를 때 병으로 석달을 문 밖으로 나오질 못하였다. 그때
진정(眞淨)스님은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하다가 머리와 팔을 태우기까지 하면서 은밀한 가피
력을 빌었다. 황룡스님이 이 말을 듣자 꾸짖으며 말하였다.
"살고 죽는 것은 원래 내 분수이다. 그대는 참선을 했는데도 이토록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
였는가."
그러자 진정스님이 얼굴빛을 누그러뜨리고 대꾸하였다.
"총림에 저는 없어도 되지만 스님께서 없어서는 안됩니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진정스님이 스승을 존경하고 법을 소중히 하는 정성이 이 정도니 뒷날 반드시 큰 그릇을
이루리라." 『북산기문(北山記聞)』
4.
황태사 노직(黃太史魯直)이 일찌기 이렇게 말하였다.
"황룡 남(黃龍南)스님은 인격이 깊고 두터워 다른 것에 의해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았으며
평소에 교만이나 꾸밈이 없었다. 문하의 제자들도 종신토록 그가 희노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심부름하는 일꾼에게까지도 한결같이 정성으로 대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명성이나 기개에 흔들림 없이 자명스님의 도를 일으켰던 것이지 구차하게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일본견황룡석각(一本見黃龍石刻)』
5.
건염(建炎) 기유(¿酉:1129) 상사일(上巳日)에 종상(鍾相)이 풍양(陽)땅에서 반란을 일으켰
다.
문수 심도(文殊心導)스님께서는 난리에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었는데, 도적들의 세력이 성
대해지자 그의 제자들이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스님은 "재앙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하
며 의연한 모습으로 방장실에 계시다가 끝내는 도적들에게 해를 당하였다.
무구거사(無垢居君)는 그 법어를 발췌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오직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
이 본래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태어나도 삶에 집착하지 않으며, 한번도 멸한 적이
없다는 것을 통달하고 죽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환(禍患)을 당해 죽을 찰나에
도 자기가 지키던 것을 바꾸지 않을 수 있다 하였는데, 스님이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다. 스
님의 도덕과 절의는 총림을 교화하고 모범을 후세까지 드리우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스님의 이름은 정도(正導)이며, 미주(眉州) 단릉(丹稜) 사람으로서 불감(佛鑑)스님의 법을
이었다. 『일본견여산병부혜태사기문(一本見廬山兵府惠太師記聞)』
33
교외별전을 해설하는 폐단을 경계하다
심문 운분(心聞雲賁)스님*
1.
납자들이 참선을 하다가 병통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병통이 귀와 눈에 있는 자들은 눈썹
을 솟구치고 눈을 노기등등하게 하며, 귀를 기울여 머리를 끄덕이는 것을 선(禪)으로 여긴
다. 병통이 입과 혀에 있는 자들은 전도된 말로 어지럽게 할(喝)! 할(喝)!하는 것을 선으로
여긴다. 병통이 손과 발에 있는 자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며, 여기 저기 가리키는
것으로 선을 삼는다. 병통이 가슴 속에 있는 자들은 현묘함을 끝까지 궁구하고 알음알이를
벗어나는 것을 선으로 여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경우가 사실은 모두 병통이다. 진짜 선지식〔本色宗師〕이라야 깊숙한
기미에서 분명히 살펴낼 수 있으니, 보자마자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를 알아차리며, 입문했을
때 깨칠 수 있을는지 못할는지를 분별해 버린다. 그런 뒤에 한 방을 날려 끈질기게 이어지
던 그들의 미세한 번뇌까지 벗겨주며, 막힌 곳을 쳐서 진실과 거짓을 판정케 한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의 방편만을 고집하느라 변통(變通)에 어두운 일이 없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끝
내 안락하여 일 없는 경지를 밝히게 하고 그런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다. 『어록(語錄)』
2.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 사람 가운데서 빼어나면 영특〔英〕하다 하고, 만 사람 가운데서
빼어나면 걸출〔傑〕하다' 하였다. 납자로서 지혜와 수행이 총림에 소문난 자라면 어찌 영
걸(英傑)한 인재에 가깝다 하지 않으랴. 단지 부지런히 탐구하여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지녀
누구나 제자리에 쓰일 수 있게 한다면 절의 규모나 대중의 수에 관계없이 모두가 그의 교화
를 따르리라.
옛날 백정의 풍혈(風穴)·우란의 약산(藥山)·대매의 상공(常公)·형초의 자명(慈明)스님,
이 스님이 모두 위와 같은 영걸이셨는데, 당시 그들과 어울리던 유유자적한 무리들이 이들
에게 지위나 외모를 구했더라면 보고서는 반드시 업신여겼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영광된 사석(師席) 법좌(法座)에 올라 모든 사람들이 에워싼 가운데 불조의 도
를 밝혀, 만세의 빛이 되었으니, 총림에서 누군들 그 풍모만 바라보고도 쏠리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앞사람들은 아름다운 재질과 뛰어난 기상을 가지고도 시기를 만나지 못했을 즈음에
는 조심하면서도 수치와 더러움을 참고 세상에 뒤섞여 함께 어울리면서 이렇게 살아갔는데,
하물며 이보다 더 못한 자의 경우이겠는가.
아 - 아, 옛날도 지금과 같으니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기어코 약산·풍혈스님을 기다려
스승 삼으려 한다면 천년에 한번 만날 것이며, 꼭 대매·자명스님을 도반으로 의지하려 한
다면 백년에 한번쯤 나올 것이다.
모든 일은 은미한 곳으로부터 현저한 데에 이르며, 공은 작은 것이 쌓여 큰 것을 이루는
법이니, 배우지 않고도 성취하고 수행하기에 앞서 먼저 깨친 자를 보지 못하였다.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스승을 구하고 벗을 선택하며 도를 배우고 덕을 닦는 일이 가능하리라. 그렇게
되면 천하의 일 중에서 무엇을 시행한들 되지 않겠는가.
옛사람은 말하기를 `사람 알아보기가 참으로 어려우니 이 일은 성인도 부족하다 여기셨다'
하셨는데, 하물며 그 나머지이겠는가." 『여죽암서(與竹庵書)』
3.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도는 지극히 간요(簡要)하여 애초에 아무 말이 없었다. 앞사람들은
의심없이 실천하고 꾸준히 지켜나갔다.
그러다가 천희(天禧:1017∼1022) 연간에 설두(雪)스님이 박식과 말재주로 의미를 아름답게
한답시고 손을 대어 희롱을 하였으며, 참신하게 한답시고 교묘하게 다듬으며 분양(汾陽)스님
을 계승, 송고(頌古)를 짓고 당세의 납자를 농락하니 종풍(宗風)이 이로부터 한번 변하게 되
었다.
선정(宣政:1100∼1125) 연간에 이르러 원오(圓悟)스님이 여기에다 또 자기의 의견을 붙이고
이를 떼어내 『벽암집(碧巖集)』을 만들었다. 그때 옛날의 순수·완전한 경지에 매진하던 인
재로서 영도자(寧道者)*·사심(死心)·영원(靈源)·불감(佛鑑) 같은 모든 노숙들도 그의 학
설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새로 진출한 후학들이 그의 말을 보배처럼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아침저녁으
로 외우고 익히면서 지극한 학문이라 말들 하며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가 없
었다.
슬프다. 잘못되어 가는 납자들의 공부〔用心〕여.
소흥(紹興:1131∼1162) 초에 불일(佛日)*스님이 민() 지방에 들어갔다가 납자들을 끌어당
겨도 되돌아보질 않고 날로 달로 치달려 점점 폐단을 이루는 것을 보고는 즉시 그 경판(脛
板)을 부수고 그 학설을 물리쳐버렸다. 이로써 미혹을 제거하고 빠져든 이를 구원하였으며
번잡하고 심한 것을 척결하고 삿됨을 꺾어 바른 길을 제시하게 되었다. 이런 기세가 널리
확산되자 납자들이 이제껏 잘못되어 왔다는 것을 차츰 알고 다시는 흠모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불일스님이 멀리 내다보는 고명한 안목으로 자비원력을 힘입어 말법의 폐단을 구하
지 않았더라면 총림에는 두고두고 걱정거리가 남았으리라. 『여장자소서(與張子韶書)』
34
큰도는 어리석음도 지혜로움도 없다
졸암 덕광(拙庵德光)스님 / 1121∼1203
1.
졸암 불조 덕광(拙庵佛照德光)스님이 처음 천복사(薦福寺)에서 설당(雪堂)스님을 참례하였
을 때, 관상장이가 한번에 그를 인물로 알아보고는 설당스님에게 말하였다.
"대중 가운데 광상좌(光上座)는 두상〔頂骨〕이 반듯하고, 이마는 넓고 턱은 도타우며, 사
지와 양미간 이마 어느 한 군데 모난 곳이 없읍니다. 뒤에 반드시 왕의 스승이 될 것입니
다."
효종 황제가 순희(淳熙) 초(1174)에 그를 불러 대면하였는데 마음에 맞아 내관당(內觀堂)에
서 7일을 머물게 하고는 전례없던 특별대우를 하며 불조(佛照)라는 이름을 하사하니 소문이
천하에 퍼졌다. 『기문(記聞)』
2.
졸암스님이 승상(丞相) 우윤문(虞允文)에게 말하였다.
"대도는 훤출하여 본래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없읍니다. 예컨대 이윤〔伊尹:탕(湯)임금 때
의 훌륭한 재상〕과 여망〔呂望:주나라 무왕(武王)때의 어진 신하로 강태공이라 알려져 있
음〕이 농사짓고 물고기 잡는 데서 일어나 왕의 스승이 된 것과도 같으니, 어찌 지혜롭고
어리석은 정도를 가지고 헤아릴 수 있겠읍니까. 잡다하게 뒤섞여 있는 상태에서 대장부가
아니라면 누구라서 대도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겠읍니까." 『광록(廣錄)』
3.
선야 암(璇野庵)스님은 항상 황룡스님에 대해 말을 하였다.
황룡 남스님은 관후(寬厚)·충신(忠信)하고 공순·자애로왔으며 도량은 원대하고 박학하다
고 널리 소문이 나 있었다. 항상 운봉 열(雲峯悅)스님과 호상(湖湘)에서 노닐었는데, 한번은
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운봉스님은 두 다리를 길게 뻗고 양 손을 무릎에 얹은 채
마주앉았으나 황룡스님은 홀로 꼿꼿이 앉아 있었다. 운봉스님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
며 이렇게 말하였다.
"불조의 오묘한 도는 두서너 집 모인 촌락이나 쓸쓸한 옛 사당 속에서 죽은 모습이나 짓고
있는 생명력 없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황룡스님은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할 뿐, 꼿꼿이 앉기를 더욱 고수하였다. 그러므로
황태사 노직(黃太史魯直)이 그를 칭찬하기를 "황룡 남스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공경을 잃
지 않았으니 참으로 총림의 기둥이다" 하였던 것이다. 『환암집(幻庵集)』
4.
자기와 대중을 통솔하는 데는 반드시 지혜가 필요하고, 그릇된 망정을 떨쳐버리는 데는 반
드시 깨달음이 필요하다. 깨달음을 등지고 6진(六塵)과 어울리면 마음이 가리워지고, 지혜와
어리석음을 분간 못하면 일이 문란해진다. 『서감사서(書監寺書)』
5.
불감(佛鑑)스님이 태평사(太平寺)에 머물면서 고암(高庵)스님에게 유나(維那)직을 맡겼다.
고암스님은 어린 나이에 기상이 호탕하여 제방(諸方)의 스님을 무시하며 마음속으로 인정하
는 자가 적었다.
하루는 점심공양시간을 알리는 건치〔:작은 종〕가 울리니, 행자가 다른 그릇에 음식을 담
아 불감스님 앞에 놓는 것을 보았다. 고암스님은 당(堂)에서 나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하였
다.
"오백이나 되는 큰스님들에게 다 이렇게 해드린다면 무엇으로써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이겠
는가?"
불감스님은 못들은 체하고 있다가 그가 당에서 내려오자 인사하고는 곧 물에다 점심 반찬
인 채소를 씻었다. 불감스님은 평소에 비장병(脾臟病)이 있어 기름진 음식을 먹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고암스님은 부끄러워하며 방장실에 나아가 유나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하자, 불감스
님이 말하였다.
"그대가 한 말은 매우 합당하다. 내 병 때문에 그러했을 뿐이다. 성인께서도 이렇게 말씀하
셨다. `이치로써 모든 장애를 뚫는다'라고. 먹는 것이 호화롭지 못하니 대중들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대는 뜻과 기상이 분명하고 원대하니 뒷날 종문의 기둥이 될 것이다. 이를 받아들
이는 데 어려워하지 말기를 바란다."
불감스님이 지해사(智海寺)로 옮겨가자 고암스님은 용문사(龍門寺)를 찾아갔는데 그 후 불
안(佛眼)스님의 법을 이었다.
6.
대체로 관원과 법담을 나누며 말을 주고받으려면 반드시 알음알이를 제거하여 상대방이 망
상의 소굴 속에 앉아 있게 하지 말고, 바로 향상일구〔向上一著子〕만을 밝히게 해야 한다.
묘희스님께서도 `사대부와 마주할 때, 그가 질문하면 대꾸하고 질문이 없으면 대답해서는
안된다. 이런 사람이라야 옳으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시대에 도움이 되고 주지의 체통도
상하게 하지 않으니 간절히 생각해야 되리라. 『여흥화보암서(與興化普庵書)』
7.
땅이 기름지면 만물을 잘 기르고, 주인이 어질면 인재를 훌륭히 기른다. 그런데 요즈음 주
지라고 불리우는 자들은 대중은 아랑곳 않고 자기 욕심만 급하게 채운다. 착한 말 듣기를
싫어하고 악한 허물 가리기를 좋아한다. 방자하고 삿된 행동으로 한 때의 뜻은 쾌활하게 하
나, 반대로 소인들에게 허물 가리기 좋아하고 충고 듣기 싫어하여 자기가 했던 것들을 고스
란히 받게 되니 주지의 도가 어찌 위태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홍노서(與洪老書)』
8.
졸암스님이 야암(野庵)스님에게 말하였다.
"승상인 자암거사(紫巖居君)가 묘희스님을 이렇게 말하였다.
`묘희스님은 평소 도덕·절개·의리·용기를 우선하시니, 친할 수는 있어도 멀리하지는 못
하고 가까이는 해도 범접하지는 못하며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되게 할 수는 없는 분이다. 거
처는 방탕하지 않고 음식도 멋대로 맛을 탐하지는 않으며 생사와 재앙에 임해서도 무심히
넘겼으니, 이 분이야말로 간장(干將)·막야()의 보검으로서 함께 칼끝을 다투기가 어려운 상
대라 하겠다. 다만 해를 입어 다치지나 않을까 미리 걱정스러울 뿐이다.'
뒤에 과연 자암거사의 말처럼 되었다." 『환암기문(幻庵記聞)』
9.
야암스님은 주지하면서 납자들의 사정을 잘 알아주고 총림의 일에 밝았다. 언젠가는 나에
게 이렇게 말하였다.
"어느 총림의 주지라면 반드시 목적과 실천이 뚜렷한 납자를 가려내어 도와주어야 한다.
그 일을 마치 머리에 빗이 있고 얼굴에 거울이 있듯 한다면 이익과 병통·좋고 나쁜 것이
숨겨지지 못하리라.
이는 자명(慈明)스님이 양기(楊岐)스님을 얻고 마조(馬祖)스님이 백장(百丈)스님을 만났던
경우처럼 물과 물이 서로 합하듯 거슬릴 수 없으리라." 『환암집(幻庵集)』
10.
껍데기만 받아들이는 말세 학인들은 남의 이론이나 들을 뿐, 자기 체험을 중시하지 않아서
결국 오묘한 도를 찾지 못한다. 그러므로 `산은 높은 것을 싫어하지 않으므로 그 가운데는
무거운 바위가 있고 푸른 숲에 싸여 있으며, 바다는 깊은 것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안으
로는 사해의 큰 물과 깊은 소용돌이가 있다'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
대도를 탐구하는 요점은 높고 깊은 것을 궁구하는 데 있다. 그런 뒤에야 그윽하고 은미한
곳까지 밝히고 현상의 변화에 무궁하게 응할 수 있다. 『여근노서(與覲老書)』
11.
졸암스님이 우시랑(尤侍郞)에게 말하였다.
"성현의 뜻이 그 속은 느슨한 듯하나 이치는 분명하고, 겉은 여유롭지만 일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일을 주관함에 있어서는 빨리 이루어짐을 바라지 않고 꾸준함을 인정하며,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대수로 여기지 않고 여유를 갖고서 살피는 태도를 높이 삽니다.
이로써 성인의 뜻을 펼쳐가기 때문에 만세에 뻗치도록 계속되며 과실이 없는 것입니다."
『환암집(幻庵集)』
12.
시랑 우공(尤公)은 말하였다.
"조사 이전에는 주지라는 직책이 없었으나 그 뒤 세상에 응하여 도를 실천하느라고 부득이
해서 주지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가난하여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으며 음
식은 거칠어 주린 배를 채웠을 뿐이었읍니다. 고생으로 초췌해진 모습은 근심스럽기 짝이
없을 정도였지만 왕공대인(王公大人)이 한번 만나 보고자 해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읍
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운 총림은 돌무더기 내려앉듯한 거리낌 없는 기세여서 천지를 떠
들썩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후세엔 그렇지 못하여 높은 마루·넓은 집에서 아름다운 옷·풍성한 음식으로 턱짓만으로
도 자기의 뜻대로 되었읍니다.
이때 마군의 무리가 비로소 의기양양하게 그 마음을 요동하며 권세있는 문전에 기웃거리고
꼬리치며 불쌍하게 봐주기를 바랐읍니다. 심지어는 교묘하게 훔치고 폭력으로 빼앗기를 마
치 대낮에 남의 황금을 움켜잡듯〔正晝攫金〕하였읍니다. 그리고 다시는 세간에 인과법칙
이 있다는 사실 따위는 돌아보지도 않았읍니다.
묘희스님이 이를 쓴 것이 어찌 박산(博山)만을 위해서였읍니까? 곳곳에 팽배한 악습을 철
저히 들춰내 털끝만큼도 빠뜨리지 않았으니, 이는 마치 편작(扁)이 이슬에 약을 복용*하고
환자의 오장육부를 훤히 꿰뚫어보듯 하였읍니다. 이 말을 믿고 받들어 실천한다면 따로 불
법을 구하는 일이 무슨 필요가 있겠읍니까." 『견영은석각(見靈隱石刻)』
13.
시랑 우공이 졸암스님에게 말하였다.
"옛날에 묘희스님은 임제스님의 도가 스러져가는 마당에 일으켜 세워놓고도 성품이 겸허하
여 도를 보았노라고 떠들어대지 않으셨읍니다. 평소에 권세 있는 집에 달려가지 않았으며
이양(利養)에도 구차하지 않았는데, 언젠가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만사를 제뜻대로 쾌락만을 찾아서도 안되며, 사치스럽고 게으른 태도를 지녀서도 안된다.
만사 중에는 시대에 도움이 되고 대중을 편케 해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허물만 있을 뿐 효
과는 없는 일도 있게 마련인데, 사치와 방일을 멋대로 한다면 되는 일이 없으리라.'
어리석은 나는 이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드디어는 평생의 훈계로 삼았읍니다.
노스님께서 지난날 주상(主上:왕)으로부터 내관당(內觀堂)에 유숙하도록 예우를 받은 것은
실로 불법의 행운입니다. 자비 원력을 게을리하지 마시어 착한 데로 나아갈 길을 밝게 여시
고 대중을 책임진 도가 더욱 넓어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후배들이 이제껏 익힌 습관만을 도
모하지 않고 각각 원대한 계획을 품게 하소서. 그러면 어찌 총림을 이롭게 구제하는 길이
아니겠읍니까." 『연시자기문(然侍者記聞)』
35
티끌 세속에서 불사를 짓다
밀암 함걸(密庵咸傑)스님 / 1118∼1186
1.
총림이 흥하고 쇠하는 것은 예법에 달려 있고, 납자의 아름다움과 추악함은 관습〔俗習〕
에 달려 있다.
가령 옛사람들이 둥우리나 바위굴에 거처하면서 시냇물 마시고 나무열매 먹었던 생활을 이
시대에 적용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요즘 사람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과 맛있고
기름진 음식 먹는 것을 옛 시대로 되돌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무슨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익숙하고 익숙하지 못한 차이 때문일 뿐이다.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눈에 익은 것을
정상으로 여기며 반드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일은 이렇게 되어야 마땅하다'라고.
그러니 하루아침에 그들을 다 잡아서 저것은 버리고 여기로 나아가라 한다면 의심을 내어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따르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이로써 관찰해 본다면 사람 마음은 익숙한 것을 편안하게 여기고, 아직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는 깜짝 놀란다. 이는 인지상정인데 무얼 괴이하다 하겠는가. 『여시사간서(與施司¡
書)』
2.
밀암스님이 수좌 오(悟)스님에게 말하였다.
"총림 가운데서 유독 절강인(浙江人)은 경솔하고 나약하여 도를 이룬 자가 적은데, 그대만
은 재질이 크고 도량이 넓으며 지향하는 바가 바르고 확실하다. 더우기 안목마저 깊숙하니
그대의 앞날을 쉽게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허명을 숨기고 바깥보다는 내실에 힘쓰며, 자취
를 감추고 자기의 잘난 빛을 누그러뜨려 세속과 동화하는 가운데 언행이 모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마치 기와를 구울 때 원형의 판을 네모로 잘라 내 사각기와를 만들고 떼어낸 네
곳을 합쳐 다시 원형을 만들듯 다 용납하는 태도여야 한다.
중도를 지니고 세력과 이익엔 조금도 타협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구태여 티끌 같은 세상
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불사(佛事)를 지으리라." 『여소암서(與笑庵書)』
3.
스승 응암(應庵)께서는 일찌기 이렇게 말씀하셨다.
"훌륭한 사람과 못된 이는 서로 반대되므로 가리지 않으면 안된다. 훌륭한 사람은 도덕과
인의를 지니고 몸을 지키며, 어질지 못한 사람은 오로지 세력·이익과 속임수·아첨을 의지
하여 일을 꾸민다.
훌륭한 사람이 목적을 이루면 반드시 그가 배웠던 것을 실천하지만, 어질지 못한 사람이
지위에 오르면 사심(私心)을 제멋대로 하며 덕있고 유능한 사람을 질투한다. 그리고는 욕심
을 즐기고 재물에 구차하여 못할 짓 없이 다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을 만나면 총림이 일어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채용하면 피폐하게
된다. 한 가지라도 여기에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조용하지 못하리라." 『견악화상서(見岳和
尙書)』
4.
주지는 세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일이 번거로와도 두려워 말고, 일이 없다 해
서 굳이 찾지도 말며, 시비분별을 말아야 한다.
주지하는 사람이 이 세 가지 일에 통달한다면 외물(外物)에 끄달리지 않으리라. 『혜시자기
문(慧侍者記聞)』
5.
납자의 행실이 삿되고 바르지 못하여 평소에 착하지 못한 자취가 드러난 자는 총림에서 다
알고 있으므로 근심할 것이 못된다. 반면, 대중들이 그를 훌륭하다 말하나 실제는 안으로 어
질지 못한 자가 진실로 걱정거리이다.
6.
밀암스님이 수암(水庵)스님에게 말하였다.
"나를 헐뜯고 욕하는 이가 있으면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어찌 말만을 경솔하게 듣고 허
망하게 좁은 소견을 내어서야 되겠는가.
대체로 민첩하게 아첨하는 데는 종류가 있고 삿되고 교묘함은 방법이 있다. 음험함을 품고
속이는 말을 하는 자는 사심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의심과 증오가 많은 자는 편파적으로 공
론을 폐지한다. 이런 무리들은 추구하는 바가 좁고 소견은 어두워 고질적으로 자신의 특이
함을 일반과 다르다 여기고, 공론을 막는 것을 뛰어나다고 여긴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끝내 옳고 훼방은 상대방에 있으니 세월이 가면 저절로 밝혀지리라
는 것을 알았으면 흑백을 구별하지 말라. 또한 내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다른 사람을 고
자질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된 수행자에 가깝다 하리라." 『여수암서(與水庵
書)』
36
근본을 체득하여 지말을 바르게 하다
자득 혜휘(自得慧輝)스님 / 1097∼1183
1.
일반적으로 납자가 진실하여 정도(正道)를 행한다면 어리석어도 받아들여야 하며, 아첨하면
서 삿된 마음을 품고 있으면 지혜로와도 끝내 해로움이 된다. 산중에서 수행하는 사람으로
서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재능이 있다 해도 끝내 자기 뜻을 펼 수가 없으리라. 『견간
당기(見簡堂記)』
2.
대지(大智)스님께서는 특별히 `청규(淸規)'를 창안하여 말법 비구의 부정한 폐단을 고치셨
다. 이것을 앞사람들이 받들고 계승하며 조심스럽게 실천하여 교화에 조리와 본말이 있게
되었다.
소흥(紹興) 말년(1162)까지도 총림에는 노덕들이 계시어 법도를 지키며 잠시도 좌우에서
떠나지 않을 수 있었으나 근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그 근본 실마리를 잃고 기강(紀綱)이 기
강답질 못하니, 비록 기강은 있다 하나 어떻게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벼리〔綱〕 하나만 들면 숱한 그물코〔目〕가 쫙 펴지듯 한 기미만 해이해도 만
사가 무너진다"고 했던 것이다.
위태롭도다. 기강은 진작되지 못하고 총림도 일어나지 못하는구나. 옛사람은 근본을 체득함
으로써 지말을 바르게 하였다. 그래서 법도가 근엄하지 못할까 염려하였을 뿐 납자가 자기
직분을 잃을까 염려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바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정에 입각했기 때문
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곳곳의 주지들은 개인적인 것을 공적인 것과 혼돈하고 지말로써 근
본을 바로 잡으려 한다. 웃사람이 이익에 구차하여 정도(正道)를 시행하지 않으므로, 아랫사
람도 이익을 훔치며 의(義)를 행하지 않아서 상하와 빈주(賓主)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으니
어떻게 납자가 정도로 향하고 총림이 잘 될 수 있겠는가. 『여우시랑서(與尤侍朗書)』
3.
훌륭한 옥도 광석째로 다듬지 않으면 기왓돌과 다름 없고, 훌륭한 말도 달려보지 않으면
둔한 말과 함께 섞여 있다. 광석은 쪼개서 윤을 내고 말은 달리게 해서 시험해 보아야만 옥
인지 돌인지, 명마인지 둔마인지가 분간된다.
납자로서 덕이 훌륭한데도 아직 발탁되지 않았을 때는 빽빽한 사람들 가운데 뒤섞여 있는
것이니 어떻게 구별해 내겠는가. 요컨대 고명한 인재가 공론으로 그를 추천하여 직책을 맡
겨 재능을 시험하고 임무의 완성을 따져보는 데 있다. 그렇다면 용렬한 무리들과는 아득히
다를 것이다. 『여혹암서(與或庵書)』
37
선지식의 요점은 사람을 알아보는 데 있다
혹암사체(或庵師體)스님/1108∼1179
1.
혹암사체(或庵師體)스님이 차암(此庵) 경원 포대(景元布袋:1092∼1146)스님을 천태산 호국
사(護國寺)에서 처음 참례하였다.
법당에 올라 방거사(龐居君)·마조(馬祖)스님의 선불장(選佛場;승관직 채용 과거시험)에 대
한 게송을 거론(擧論)하는 차에 `…여기가 바로 선불장일세'라는 구절에 이르자, 차암스님
이 대뜸 할(喝)을 하였다.
혹암스님은 여기서 크게 깨닫고 이 과거장 상황에 제격일 듯한 게송을 지었다.
헤아리길 다한 곳에 제목〔試題〕을 보고
길이 끝나는 데서 시험장에 들었네
붓끝을 들자마자 장황한 글 쏟아내니
이제부터 3등짜리 급제자〔探花郞〕는 되지 않으리
商量極處見題目 途路窮邊入試場
拈起毫端風雨快 遮回不作探花郞
이로부터 자취를 천태산에 숨기고 있었다. 승상 전공(錢公)은 그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천봉
사(天封寺)를 맡아 세간에 응해 주기를 권하였다. 혹암스님이 듣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짓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는 그날 밤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2.
건도(乾道) 초년(1165)에 할당(堂)스님이 국청사(國淸寺)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혹암스님이
관음상〔圓通像〕을 보면서 찬(贊)을 한 수 읊었다.
본분에서 나오사 중생을 깨우시나
우러러보면서도 소경같은 중생들
장안의 달빛은 고금에 여전한데
뉘라서 더듬더듬 소경행세 하겠는가
不依本分惱亂衆生
之仰之有眼如盲
長安風月貫今昔
那個男兒摸璧行
이 찬(贊)을 듣고, 할당스님이 깜짝 놀라며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차암(此庵)스님에게 이런 납자가 있는 줄 몰랐다."
그리고는 즉시 두루 찾다가 그를 강심(江心)에서 만나고는 굳이 많은 사람 가운데서 제
일 윗자리에 앉기를 청하였다. 『천태야록(天台野錄)』
3.
혹암스님이 건도(乾道) 초년에 호구산(虎丘山) 할당스님을 날듯이 방문하였다. 고소(姑蘇)
지방의 4부대중이 그의 고상한 풍모를 소문으로 듣고 즉시 군으로 나아가 추천하며 성 안의
각보사(覺報寺)에 머물게 해주도록 청하였다.
혹암스님은 이 소문을 듣더니 말하였다.
"스승 차암(此庵)께서 나에게 유언하시기를 뒷날 노수(老困)를 만나면 머물라 하셨는데 지
금은 마치 부절(符節)이 들어맞듯 하구나."
드디어 기쁜 마음으로 명에 응하였다. 이는 각보사의 옛 명칭이 노수암(老困庵)이었기 때문
이다. 『호구기문(虎丘記聞)』
4.
혹암스님이 각보사에 들어간 후 시주(施主)들이 법문을 청하자, 소참(小參)에서 이렇게 말
하였다.
"도는 항상(恒常)하여 나빠지지 않으나 세상일은 피폐함이 있으면 반드시 좋아질 때도 있
다.
옛날 강서(江西)·남악(南嶽) 등 모든 스님들은 옛 도를 상고하여 가르침을 삼았는데, 그
타당성 여부를 살핌에는 중도(中道)에 입각했으며 인심에 계합하는 일에는 깨달음으로 목표
를 삼았다. 때문에 평소의 가풍이 늠름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끊기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 문하를 거론해 본다면 말〔言〕끝에 알음알이를 내어 우리 종풍을 변질시키고,
글귀 아래서 분간하여 불조의 도를 매몰시키고 있다. 비록 이런 판국이긴 하나 물이 다한
곳까지 도달하면 앉아서 산 아래 구름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리하여 승속이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던 법문을 기뻐하며, 시장가는 사람처럼 앞을 다투
어 귀의하였다. 『어록이차(語錄異此)』
5.
혹암스님이 주지를 맡고 나자 관리 계급들이 새떼처럼 쏠린다는 소문이 납자들에 의해 호
구산에 이르자, 할당스님이 말하였다.
"이 산간의 오랑캐 같으니, 법도를 따르지 않고 인정도 되돌아보지 않으면서 방종하게도
눈먼 선〔盲禪〕에 기대고 가는구나. 그들 여우 같은 정령(精靈) 무리를 내 혼내주어야겠
다."
혹암스님은 이 말을 듣더니 게송으로 답변하였다.
산간 오랑캐 멋대로 하는 짓 미워할 순 있어도
대중 거느리고 바로잡는 건 아직 없던 일인 듯하네
격식을 초월하여 빗자루 거꾸로 들고
눈먼 선에 의지하여 여우 같은 스님 치료하네
山蠻杜拗得能憎 領衆翠徒昭不曾
越格倒拈苕 柄 拍盲禪治野狐僧
할당스님은 보더니 웃을 뿐이었다. 『기문(記聞)』
6.
혹암스님이 시랑(侍郞) 증체(曾逮)에게 말하였다.
"도를 배우는 요점은 저울이 물건을 달듯 평형을 유지해야 하니 편중되어서는 안됩니다.
전후로 미루거나 가까이 하는 것도 치우치기에는 매한가지니 이를 알면 도를 배울 수 있읍
니다." 『견증공서(見曾公書)』
7.
도덕은 총림의 근본이며 납자는 도덕의 근본이니 주지가 납자를 싫어하며 버리는 것은 도
덕을 망각한 것이다. 도덕을 잊고 나면 무엇으로 교화를 닦아 총림을 정돈하고 후학을 끌어
주겠는가.
옛사람은 근본을 체득함으로써 지말을 바로잡았으니, 도덕이 실행되지 않는 것을 근심했을
지언정 총림에서 제 소임을 잃을까 걱정하진 않았다. 그러므로 "총림의 보존은 납자에게 있
고, 납자의 보존은 도덕에 달렸다"고 말했던 것이니 주지가 도덕이 없다면 총림이 폐지되리
라. 『견간당기(見簡堂記)』
8.
선지식의 요점은 훌륭한 사람을 알아보는 데 있으며 스스로가 잘났다고 여기는 데 있지 않
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을 해치는 자는 어리석고, 가리워 버리는 자는 어둡고, 질투하는
자는 자신의 견해가 짧아진다. 한 몸의 영화를 얻는 것이 한 세대의 명성을 얻느니만 못하
고, 한 세대의 명성을 얻는 것이 훌륭한 납자 하나를 얻어 후학에게 스승이 있고 총림에 주
인이 있게 하느니만 못하다. 『여원극서(與圓極書)』
9.
혹암스님이 초산(焦山)으로 옮긴 지 3년 되던 해, 그러니까 순희(淳熙) 6년(1179) 8월 4일
의 일이었다. 먼저 작은 병을 보이시더니 즉시 손수 쓴 편지와 벼루 한 개를 군수시랑(郡守
侍郞) 증공(曾公)에게 보내 이별을 하였다. 그리고는 한밤중에 천화(遷化)하자 증공은 게송
으로 그를 애도하였다.
짚신 한짝 매고 훨훨 서풍(西風)을 좇더니
혼연하여 일물(一物)도 포대 속에 없었네
벼루를 남겨 사용하라 하시나
내게는 허공같은 광명을 그려낼 글재주 없다네.
翩翩隻履逐西風 一物渾無布袋中
留下陶泓將底用 老夫無筆判虛空 『행장(行狀)』
38
안을 다스려 밖을 대하다
할당 혜원(轄堂慧院)스님/1103∼1176
1.
할당 혜원(堂慧遠)스님이 혹암스님에게 말하였다.
사람의 그릇은 원래부터 크고 작음이 있어 실로 교육으로만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포
대가 작으면 큰 것을 담지 못하고, 짧은 두레박 줄로는 깊은 우물을 긷지 못한다" 하였고, "
올빼미는 밤엔 이도 훔켜잡고 가을날 새털 끝도 살피지만, 낮에 나오면 눈을 부릅떠도 언덕
과 산도 보지 못한다"고 하였던 것이니, 이는 분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옛날 원정 남당(遠靜南堂)스님은 동산(東山)스님의 도를 전수하여 심오하게 깨달았다고 매
우 알려졌었다. 그러나 세상에 나와 주지하는 일에 있어서는 가는 곳마다 떨치지 못하였다.
스승 원오스님께서 촉(蜀) 지방으로 돌아가시면서 각범(覺範)스님과 함께 원정 남당스님을
대수(大隨)에서 방문하였는데, 그가 경솔하고 덜렁거려서 모든 일이 해이하여 폐지된 것을
보면서도 원오스님께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으셨다.
되돌아오는 길에 각범(覺範)스님은 말하였다.
"원정스님과 스님께서는 함께 참구했던 도반이었는데도 한 마디도 깨우쳐 주지 않았던 것
은 무슨 까닭입니까?"
선사께서는 말씀하셨다.
"세상에 응하여 대중에 임하는 요점은 법령을 우선하는 데 있다. 법령이 행해지는 것은 그
의 지혜와 능력에 있고, 지능이 있고 없는 것은 그의 본래 분수인데 가르친다 해서 되겠는
가."
그러자 각범스님은 알았다는 듯이 턱을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호구기문(虎丘記聞)』
2.
도를 배우는 인재라면 요컨대 우선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 그런 뒤에 자기를 바르게 하
고 상대도 바로잡을 수 있다. 그 마음이 바르고 나면 만물이 안정되니 마음이 다스려졌는데
도 몸가짐이 흐트러졌다는 자는 이제껏 보지 못하였다.
불조의 가르침은 안으로부터 밖으로 미치며 가까운 곳에서 먼 데로 이른다.
성색(聲色)이 밖에서 현혹하면 사지가 병들고, 허망한 감정이 안에서 발동하면 마음 속에
병이 든다. 마음이 바른데도 사물을 다스리지 못하거나, 몸가짐이 올바른데도 다른 사람 교
화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는가.
이는 마음이 근본이 되고 만물이 지엽이기 때문이다. 뿌리가 튼튼하고 알차면 지엽이 풍성
하고, 뿌리가 메마르면 지엽도 말라 죽는다. 훌륭하게 도를 배우는 자라면 먼저 안을 다스려
바깥을 대적하고, 바깥을 탐하느라 안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만물을 인도하는 요점은 마음을 청정히 하는 데 있으며, 남을 바로잡는 것은 원
래 자기부터 바로잡는 데 있다. 마음이 바로되어 자기가 바로 섰는데도 만물이 따라서 교화
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여안시랑서(與顔侍郞書)』
39
미물까지 덮는 자비를 베풀다
간당 행기(簡堂行機)스님
1.
간당 행기(簡堂行機)스님은 파양(陽)지방의 관산(管山)에 20년이나 머물면서 명아지국과 기
장밥을 먹으며 마치 세간의 영달엔 뜻을 끊은 듯하였다.
언젠가는 하산하다가 길가에서 슬피우는 소리를 들었다. 스님은 측은하게 여기며 그에게
다가가 연유를 물었더니, "온 집안이 학질병에 걸려 두 식구가 죽었으나 가난하여 시신을
거둘 도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스님은 특별히 시장에 나가 관을 대여받아 장례하였
는데, 이 소문을 듣고 고을 사람들이 감탄해 마지 않았다.
시랑 이춘년(李卵年)이 사대부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고을의 간당 행기노스님은 도 있는 납자이다. 더우기 자비로운 은혜가 사물에게까지
미쳤으니, 스님을 관산에서 쓸쓸하게 오래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마침 추밀(樞密)인 왕명원(汪明遠)이 여러 관부를 순찰하다가 구강군수(九江郡守) 임숙달
(林叔達)에게 이르자, 그는 원통전에 법석을 마련하고 스님을 맞이하려하였다. 스님은 명을
듣자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도가 시행되겠구나."
그리고는 즉시 기쁜 마음으로 주장자를 끌고 왔다. 법좌(法座)에 올라 설법하기를 "이 자리
는 사람 살리는 약을 파는 데가 아니라 죽은 고양이를 팔 뿐이니, 그런 줄도 모르고 생각
없이 먹었다간 온 몸에서 식은 땀을 뺄 것이다"하였다. 그러자 승속이 깜짝 놀랐으며 법석
이 이때부터 크게 떨치게 되었다. 『뇌암집(瀨庵集)』
2.
옛날엔 몸을 수행하고 마음을 다스리면 다른 사람과 그 도를 나누어 가졌고 사업을 일으키
면 다른 사람과 그 공로를 함께 하였으며, 도가 완성되고 공덕이 드러나면 남과 그 명예를
함께 하였다. 그리하여 도는 완전히 밝아지고 공업은 다 성취되었으며 명예는 영화로왔다.
요즈음 사람들은 그렇질 않다. 자기의 방법만 고수하며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나을까 염려
할 뿐 아니라, 또 선(善)을 따라 의로움을 힘써 자신을 넓히지도 못한다. 또한 자기의 공로
를 독점하여 남이 그것을 차지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덕 있고 유능한 사람에게 맡김으
로써 자신을 크게 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도는 가리워지고 공로는 손상되며 명예는 욕스
러워지는 꼴을 면치 못한다.
이것이 옛날 납자와 요즘 납자의 큰 차이다.
3.
"도를 배우는 것은 마치 나무를 심는 일과도 같다. 잎이 무성해야 베어서 땔감에 공급하고
좀 자란 뒤에야 찍어서 서까래를 만들며, 더 자라면 베어서 기둥을 만들고 완전히 커져야
대들보가 되니, 이는 노력을 많이 들여야 그 쓸모도 커진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옛사람은 그 도가 견고하고 커서 좁지 않았고 지향하는 목적은 멀고 깊어서 지나치
게 세속적이지 않았으며, 말은 고상하여 천박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 때를 잘못 만나 추위
와 주림으로 언덕이나 골짜기에서 죽었다 해도, 그가 남긴 가풍과 공덕은 백 천년토록 뻗쳐
뒷사람들이 본받고 전하였던 것이다.
가령 지난날 짧은 도로 구차하게 용납되고 가까운 목적으로 영합되기를 구하며, 비루한 말
로 세력 있는 이를 섬겼더라면 그 이익은 자기만을 영화롭게 하는 데 그쳤을 뿐, 남은 은택
이 후세에 두루 미칠 수 있었겠는가." 『여이시랑이서(與李侍郞二書)』
4.
간당스님이 순희(淳熙) 5년(1178) 4월에 천태산 경성암(景星巖)에서 은정사(隱靜寺)로 다시
부임하게 되었다.
급사(給事)였던 오패(吳 )는 휴휴당(休休堂)에서 노년을 편안히 보내고 있었는데 도연
명(陶淵明)의 시에 13편을 화답하여 가는 길을 전송하였다.
(1)
숲 속으로 돌아온 뒤
나는 세상과 멀어졌네
선지식 한 분이 계셨으니
때로는 나의 움막 찾아오셔서
함께 법담을 나누며
불서 읽는 나를 사랑하셨네
이윽고 경성암 떠나시니
나도 떠날 준비해야 하겠네
문득 나도 발우를 펴고
스님 따라 소반을 공양하며
진속(塵俗)의 누를 벗어나
깊이 바위 속에 묻히고 싶네
이 바위 정말로 높아
산해도(山海圖)에서 우뚝 빼어났으나
스님의 고상함에 비한다면
도리어 그만 못하다 하리.
我自歸林下 已與世相疎
賴有善知識 時能過我廬
伴我說道話 肯我左佛書
旣爲巖上去 我赤爲膏車
便欲展我鉢 隨師同飯蔬
脫此塵俗累 長與巖石居
此巖固高矣 卓出山海圖
若比吾師高 此巖還不如
(2)
내가 사는 산굴 속
사면이 우뚝한 겹겹의 바위
경성암이라 불리는 바위 있어서
가보고자 한 지 몇년 되었나
지금에야 절묘함을 확인하고서
일견에 뭇 산이 작게 보였네
다시 스님이 주인 되었으니
산과 스님 모두 깊어 쉽사리 말 못하겠네
我生山窟裏 四面是顔
有巖號景星 欲到知幾年
今始信奇絶 一覽小衆山
更得師爲主 二妙未易言
(3)
호산 속에 있던 내집도
눈만 뜨면 숲과 언덕뿐이나
수려한 이곳에 비하면
비교 안될 언덕 정도니
구름 서린 산 천리에 뻗어 있고
샘물은 사철 흐르네
내 이제야 비로소 와보니
오호(五湖)에서의 노닐음을 능가하네
我家湖山上 觸目是林丘
若比玆山秀 培 固難 壽
雲山千里見 泉石四時流
我今裳一到 已勝五湖遊
(4)
내 나이 일흔 다섯
나무 끝에 비껴가는 석양빛 같아
몸은 아직 죽지 않았다 해도
어찌 오래 갈 수 있으랴
그래도 숲 속에 머무는 것은
스님과 말년을 빛나게 하렴이었네
외로운 구름 한 점 어느덧 흩어지니
멀리 또 가까이 청황빛이 선명하네
我年七十五 本末掛殘陽
縱使身未逝 赤能豈久長
尙冀林間住 與師共末光
孤雲俄暫出 遠近駭蒼黃
(5)
평소에 산을 사랑하였으나
세속에 얽매여 가련키도 하였어라
지난날 이 고을 맡았을 때엔
고요한 이 산을 알지 못하다가
스님 그리워 왔건만 또 떠나시니
부끄러워라. 내 다시 무얼 말하리
그래도 오래 머물지 마시고
돌아와 함께 여생 보내소서
肯山端有固 拘俗赤可憐
昨守當塗郡 不識隱靜山
羨師來又去 愧我復何言
尙期無久住 歸送我殘年
(6)
마음은 꺼진 재 같고
몸은 죽은 나무 같으시나
납자들의 큰 귀의처 되심이
빈 골짜기 메아리 답하듯 하네
저의 더러운 몸 보살피사
최상의 법(法)으로 씻어 주시고
다시 원하옵나니 부처님의 법등 널리 펼치사
저희를 위해 대대로 밝혀 주소서
師心如死灰 形赤如枯木
胡爲衲子歸 昭響答空谷
顧我塵垢身 正待醍 浴
更願張佛燈 爲我代明燭
(7)
무성한 바윗가 나무
여름 들어 모두 그늘 이루니
오랫동안 가시밭 땅이
하루아침에 총림이 되었네
내 납자와 함께
해조음(海潮踵) 들으렸더니
모였다간 흩어지는 인생
갑작스런 이별에 새삼 마음 놀라네
扶疎巖上樹 入夏總成陰
幾年荊棘地 一倦成叢林
我方與衲子 共聽海潮踵
人生多聚散 離別忽驚心
(8)
스님과 내왕한 세월
길지는 않지만
어느덧 친한 사이 되었고
풍류도 뛰어났어라
스님은 바위에 편히 앉으시고
나는 먹을 양식 모았네
행여 스님이 일찍 돌아오신다면
즐거운 마음 다함 없으리
我與師來往 歲月雖未長
相看成二老 風流赤異常
師宴坐巖上 我方爲聚糧
師能早歸 此樂猶未央
(9)
분분히 선(禪)을 배우는 자
경쟁하듯 분주하네
말만 꺼냈다 하면
어리석은 뜻 자부하나
도의 경지를 살펴보면
스님 같은 이 거의 없어라
상승법(上乘法) 전하는 사람이여
임제(臨濟)의 뒤를 영원히 빛내소서
紛紛學禪者 腰包競奔走
裳能說葛藤 癡意便自負
求其道德尊 如師蓋希有
願傳上乘人 永光臨濟後
(10)
우리 고을의 많은 스님네들
운해(雲海)처럼 드넓은데
대기(大機)는 오래 전에 없어졌으나
다행히 소기(小機)에 의지하니
일잠(一岺 : 원극 언잠스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완전하여 둘 다 모자람 없어라
당당한 두 노숙의 선(禪)이여
온 나라가 모두 기대합니다
吾邑多緇徒 浩浩若雲海
大機久已亡 賴有小機在
仍更與一岺 純全兩無悔
堂堂二老禪 海內共期待
(11)
옛날엔 주지하는 일 없었고
법지(法旨)만을 전했을 뿐이니
색공(色空)을 깨달으면
그대로 생사를 초월하였네
못난 중 본래면목에 어두우니
어찌 서쪽으로 돌아갈 길 알겠으리오
선상(禪滅)에 앉아 장사나 하니
불법은 이제 무엇을 의지하랴
古無住持事 但只傳法旨
有能悟色空 便可超生死
庸僧昧本來 豈識西歸履
買帖坐禪滅 佛去將何時
(12)
스님 중에 고승 있듯
선비도 고사(高君) 있다네
나는 고사 아니나
거친 마음으로나마 그칠〔止〕 줄 알았네
스님도 그러한 분이시라
그렇지 못할까 근심하였어라
나와 스님, 이웃집 사람임이
어찌 그리도 다행이온지
僧中有高僧 君赤有高君
我雖不爲高 心祖能知缺
師是個中人 特患不爲爾
何幸我與師 俱是隣家子
(13)
스님도 원래 가난한 화상이요
나도 궁색한 수재(秀才)라네
곤궁 참는 마음 이미 사무쳤으니
늙은이 어찌 되돌아오지 않겠나
지금 스님과 잠시 이별하나
천석(泉石)은 시기치 말라
인연 따라 나에게 되돌아온들
스님이야 어찌 마음이 있으랴
師本窮和尙 我赤窮秀才
忍窮俱已徹 老肯不歸來
今師雖暫別 泉石莫相猜
應緣聊復我 師豈有心哉 『경성석각(景星石刻)』
4.
급사(給事) 오공(吳公)이 간당스님에게 말하였다.
"옛사람은 천암만학(千巖萬壑) 사이에서 모든 사려분별을 끊고서 흐르는 시냇물을 마시고
나무열매를 먹으며 마치 부귀공명에는 뜻을 끊은 듯하였읍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주지를
맡으라는 명을 받게 되면 방아지기 등의 천한 일로 자기의 잘난 자취를 숨기고 살아갔으며
애초에 출세에는 마음이 없었으니, 그러므로 끝내는 불법을 이어가는 조사의 대열에 끼게
되었읍니다. 그러므로 무심(無心)에서 얻으면 그 도와 덕은 넓어지고, `구할 것이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헤아리면 그 명성과 목적은 비루해집니다.
스님께서는 도량이 원대하셔서 고인의 자취를 계승, 관산(管山)에서 11년이나 깃들 수 있었
읍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총림의 훌륭한 그릇을 이루셨읍니다.
요즈음의 납자들은 안으로는 지키는 것이 없고 밖으로 분주하고 화려한 것을 좇아갑니다.
그리하여 긴 안목은 줄어들고 큰 뜻도 없어 불교를 부지하고 돕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스님
보다 한참이나 못한 것입니다." 『고시자기문(高侍者記聞)』
5.
사람의 마음〔常情〕은 미혹이 없는 경우가 드문데, 이는 맹신에 가리우고 의심에 막히며,
가볍다고 소홀히 하고 애착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치우치면 말만 듣고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드디어는 타당성을 잃는 말을 하게
된다. 의심이 심하면 사실이라 해도 그 말을 듣지 않고 드디어는 사실을 놓치고 듣는 경우
가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을 가볍게 보면 중요한 일까지 빠뜨리고, 그 일만 아끼다 보면 버려
야 할 사람을 놔두게 된다. 이는 모두가 자기 생각을 구차하게 멋대로 하고 도리에 맞는지
를 묻지 않았기에, 드디어는 불조의 도를 망각하고 총림의 인심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사람이 경솔하게 여기는 것을 성현은 소중하게 여긴다. 옛 스님은 말하기를,
"원대하게 계획하는 자는 우선 가까운 데서 시험하고, 큰 것을 힘쓰는 자는 반드시 은미한
데서 조심한다" 하셨다. 그러므로 널리 듣고 채택하여 중도를 살펴 운용함이 중요할지언정
실로 실정에 맞지 않는 고상함만을 흠모하고 특이함을 좋아하는 데에 도가 있는 것은 아니
다. 『여오급사서(與吳給事書)
6.
간당스님은 성품이 말고 온화하여 자비로운 은혜가 남에게까지 미쳐갔으니, 혹 납자에게
약간의 잘못이 있다 해도 덮어주고 보호하여 그의 덕을 이루어 주었다.
언젠가는 이렇게도 말하였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허물이 없겠는가. 허물을 고치는 데에 장점이 있는 것이다."
스님이 파양 지방 관산에 머물던 날, 마침 몹시 추운 겨울이라 눈이 연일 내려 죽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였으나, 스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더니 이런 노래를 지었다.
지로(地爐)에 불 없고 객승의 바랑 비었는데
세모(歲暮)에 버들꽃 같은 눈 내리네
누더기 덮었더니 고목 같은 몸 불붙듯 하여
고요하고 쓸쓸한 곳에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네.
地爐無火客囊空 雪昭楊花落歲窮
衲被蒙頭燒 木出 不知身在寂寥中
스님은 평생 도에 자적하면서 영화나 명예를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산(廬山) 원통(圓通)
스님의 청을 받고 부임하던 날도 주장자와 짚신뿐이었으나 스님의 씩씩한 기색을 보는 자들
은 속으로 알아보았다.
구강군수(九江郡守) 임숙달(林叔達)은 스님을 가리켜 불법의 대들보이며 나루터라고 평하
였다.
그 일로 사방에 이름이 알려졌으나 벼슬에 나아가느냐 들어앉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실로
옛 스님들의 체통과 품격을 체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죽던 날엔 천한 심부름꾼까
지도 눈물을 흘렸다.
7.
시랑인 장효상(張孝祥)은 풍교(楓橋)*의 연장로(演長老)*에게 편지를 드려 말하였다.
"옛날의 모든 조사들은 주지 맡는 일이 없었읍니다. 문호를 개방하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던
것은 마지 못해서였읍니다. 그러다가 상법(像法)마저 쇠퇴한 시기에는 실제로 땅을 떼어 주
거나 관직 임명장으로 절을 매매한다는 말이 있을 지경에 이르렀읍니다. 지난날 풍교사(楓
橋寺)가 어지러웠던 경우도 모두가 이러한 물건들 때문이었읍니다.
스님의 관직에 대한 처신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와 같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새끼와 어미가 안팎으로 동시에 쪼아대듯 원래 힘을 들이지 않고 인연이 있으면 머물고 인
연이 다하면 문득 떠나셨읍니다.
그런데 여래를 팔아먹는 무리들은 이 주지 자리에 앉으려고 지옥 갈 업을 짓고 있으니, 차
라리 누구라고 지적하여 맡기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한산사석각(寒山寺石刻)』
* 풍교:소주의 한산사(寒山寺)앞에 있음.
* 연장로(演長路):상주 화장(華藏)의 축암(逐庵) 종연(宗演)선사. 대혜선사에게 법을 얻었다.
남악의 제 16세 법손.
40
조계의 정통을 다시 일으켜 주기를 간청하다
자수 회심(慈受懷深)스님 / 1077∼1132
자수 회심(慈受懷深)스님이 경산 지눌(徑山智訥)스님에게 말하였다.
"2,30년래에 선문(禪門)이 쇠퇴해져서 거의 봐주지 못할 지경입니다. 남북을 나눠놓고 치닫
는 제방(諸方)의 장로는 그 숫자를 모를 정도이고, 눈에 가득한 것은 거처를 나누어 흩어진
대중들입니다.
이런 판국에서도 사형(師兄)께서만은 정신과 감정이 흔들리지 않고 앉아서 안정을 누리십
니다. 어떻게 좀스러운 소인들과 같은 수준으로 말할 수 있겠읍니까. 진정 흠모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이러한 인연은 도가 충만하고 덕이 알차서 깨달음과 실천〔行解〕이 서로 일치하
지 않는 자라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겠읍니까.
다시 바라옵는 것은 후배들을 힘써 인도하여 조계(曹溪)의 바른 근원이 다시 크게 불어나
고, 시들은 깨달음의 나무에 다시 봄처럼 생기가 돌게 하소서. 이것이 구구하게 못난 저의
마음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필첩(筆帖)』
42
비방과 참소를 잘 분별해야 한다
영지 원조(靈芝元照)스님 / 1049∼1116
영지사(靈芝寺) 원조(元照)스님이 말하였다.
"참소〔:훌륭한 이를 해칠 목적으로 하는 절박한 말〕와 비방〔謗:단순히 남의 단점만을 들
춰내는 말〕과는 어떤 차이인가.
참()은 반드시 방(謗)을 의지하여 일어난다고 해야 하리라. 이는 비방에서 그치고 참소까지
는 가지 않는 경우는 있어도 참소하면서 비방을 곁들이지 않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깊숙
한 참소는 증오와 질투로 시작하였다가 신의를 가볍게 보는 결과를 낳는데, 그것은 아첨하
는 소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옛날에도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보필하는 자, 효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자, 의로움을
안고 벗이 된 자들이 있어 군신이 서로 마음을 얻고 부자가 서로 사랑하며 벗들은 서로 친
하였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의 깊숙한 참소에 녹아나서 반목(反目)·빈축하며 사
이가 벌어져 서로 등지게 된다. 그리하여 서로를 원수처럼 보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옛 성현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분별하지 못했다가 오랜 후에 밝혀진 것도 있고,
살아서는 몰랐다가 죽은 후에 밝혀진 것도 있으며, 죽음에 이르도록 분별하지 못하고 영원
히 은폐된 경우도 있으니, 이런 것은 이루 다 셀 수조차도 없다.
자유(子游)는 이렇게 말했다.
"임금을 섬기면서 너무 꼿꼿하게 간언하면 자기에게 욕됨이 돌아오고, 친구간에 충고가 잦
으면 사이가 벌어진다."
이는 사람들에게 깊숙이 참소하는 말을 멀리하도록 주의를 시킨 것이다.
아 - 아, 참()과 방(謗)을 반드시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경사(脛史)에 이를 기록하여 다 밝혀놓았기 때문에 공부하는 이들이 보고 그 잘못
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나, 더러는 자신이 비방하는 입에 빠져들어 답답하게도 죽을 때까
지 스스로 밝히지 못한 자가 있었다. 이는 틀림없이 헐뜯는 말을 노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
며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헐뜯는 사람이 아첨한 것이리라. 또다른 소인들이 그의 앞에서 다
시 남을 헐뜯는 경우에 이르러서도, 들어주며 당연하게 여기니 이를 총명하다 할 수 있겠는
가.
기막히게 헐뜯는 사람은 교묘하고 민첩하게 싸우고 얽어매며 영합하고 뒤집어 씌우면서 멍
청한 이들을 마치 귀신에게 홀린 듯하게 한다. 그리하여 죽을 때까지도 살피지 못한 자가
있게 한다.
공자께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도 모르게 점점 스며드는 헐뜯음과 피부가 저릴 만큼
애절한 하소연'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이는 점차적으로 스며와서 사람들이 미리 알아채지
못함을 경계한 것이다.
지극히 효성스러운 증자(曾子)의 경우에도 어머니는 그가 반드시 살인을 했으리라고 의심
하였으며,.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왕과 방공과의 대화에서도, 시장은 숲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거기에 호랑이가 있으리라고 꼭 의심할 것이라하였다.
더러는 이런 데에 넘어가지 않은 자도 있었으니, 바로 그런 이를 총명하고 원대한 군자라
말한다.
나는 어리석고 졸렬하며 엉성하고 게을러서 다른 사람에게 아부하고 부질없이 기쁘게 하지
는 않았다. 드디어는 이 때문에 사람들이 헐뜯고 비방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나는 이야기
를 듣고 스스로 자신을 반성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상대방의 말이 과연 옳은 것일까. 옳다면 나는 당연히 허물을 고치리라. 그렇게 되면 상대
방이 바로 나의 스승이다. 상대방의 말이 결과적으로 잘못일까. 그렇다면 상대방이 부질없을
뿐이다. 어떻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
이런 판단이 선 후로는 귀로 듣고만 있었지 입으로는 따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살폈느냐
살피지 못했느냐 하는 것은 그들의 재능과 식견이 총명한가 총명하지 못한가에 있었을 뿐이
다. 내가 무엇 때문에 잘잘못을 따져가지고 다른 사람의 인심이나 사려 하겠는가. 그러나 오
랜 후에 밝혀질는지, 뒷세대에 가서야 밝혀질는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는지는 모를 일이
다.
문중자(文中子:수나라 양제 때 사람, 王通)는 말하기를 "어떻게 비방을 그치게 할까. 이러니
저러니 따지지 말아야 하리라" 하였다. 나는 이 말씀을 명심하리라. 『지도집(芝圖集)』
42
선과 교에서 모두 무상(無上)의 도를 말하다
뇌암 도추(懶庵道樞)스님
1.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깨닫기를 기약하고 진실한 선지식을 찾아 의심을 해결하여야 한
다. 털끝만큼이라도 알음알이〔情見〕가 다하지 못하면 바로 이것이 생사의 근본이다. 알음
알이가 다한 곳에서는 모름지기 그것이 다한 까닭을 참구해야 한다. 이는 마치 사람이 집안
에 있으면서 하나라도 미비한 일이 있는지를 근심하는 것과도 같다.
위산(山)스님은 말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인연따라 일념(一念)에 돈오(頓悟)하는 본래 이치를 얻긴 했으나, 그래도
시작없이 흘러온 습기(習氣)는 한꺼번에 다 없애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납자들에게 현
전(現前)하는 업식(業識)을 말끔히 제거하게 하는 것이 수행이며, 따로 수행문이 있다 하여
그리로 나아가게 해서는 안된다."
위산스님은 고불(古佛)이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혹 그렇지 않았
더라면 죽는 마당에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여전히 끓는 물에 떨어지는 새우같은 신세를 면치
못했으리라.
2.
율장(律藏)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승물(僧物)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상주상주승물(常住常住僧物), 둘째는 시방상주승물(十方常住僧物), 세째는 현
전상주승물(現前常住僧物), 네째는 시방현전상주승물(十方現前常住僧物)이다."
상주승물은 털끝만큼이라도 범해서는 안된다. 그 죄가 가볍지가 않다고 예나 지금이나 성
인들이 그렇게 간절하게 말씀하셨는데도 듣는 사람들이 더러는 반드시 믿지도 않으며, 믿는
다 해도 꼭 실천하지는 않는다.
나는 세상에 나아가 도를 행할 때나 혹은 물러나 은둔할 때나 언제고 이 문제를 절실히 염
두에 두고 지냈다. 그러면서도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을까 두려워 게송을 지어 자신을 경책
하였다.
시방승물 산처럼 무거운데
만겁천생인들 어찌 쉽게 돌려주랴
모든 부처님 말씀 믿지 않으면
뒷날에 어떻게 지옥을 면하랴
사람몸 얻기 어려우니 잘 생각하라
축생이 되었을 땐 세월이 길리라
쌀 한 톨 탐하기를 우습게 알면
부질없이 반 년의 양식 잃으리라
十方僧物重如山
萬劫千生豈易還
金口共譚曾未信
他年爭免鐵城關
人身難得好思量
頭角生時歲月長
堪笑貪他一粒米
等閑失却半年糧
3.
『열반경(涅槃脛)』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어떤 사람이 대열반에 대한 설법을 듣고서 한 구절 한 글자마다 그대로 이것이다 저것이
다 하는 생각〔相〕을 내지 않고, 나는 설법을 듣노라 하는 생각도 내지 않으며, 부처님은
이러이러 하시겠구나 하는 생각, 어떠어떠하게 설법하리라는 생각들을 모두 내지 않는다면
이러한 의미를 모양없는 모양〔無相相〕이라 한다."
달마대사가 바다를 건너와서 문자를 세우지 않았던 것은 앞서 말한 무상(無相)의 뜻을 밝
힌 것이지, 대사 자신이 새로운 뜻을 제시하여 따로 종지를 세운 것은 아니다.
요즈음 학자들은 이 뜻을 깨닫지 못하고 "선종(禪宗)은 별도의 종지이다"라고 말하며, 선을
으뜸으로 여기는 자는 교(敎)를 비난하고 교를 으뜸으로 여기는 자는 선을 틀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두 갈래로 종지가 갈라져 서로가 시끄럽게 헐뜯으며 그만두질 못한다.
아 - 아, 지식이 천박하고 고루하여 한결같이 이 지경이 되었다. 이는 어리석지 않으면 미
친 자이니, 매우 탄식할 만한 일이다. 『심지법문(心地法聞)』
저자일람
* 운봉 문열(雲峯文悅)스님. 대우 수지(大愚守芝)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남악의 11세손이다.
* 서주(瑞州) 청원사(淸源寺)의 혜홍 각범(慧洪覺範)스님. 진정 극문(眞淨克文)스님의 법을
이었고, 남악의 13세손이다.
* 서주(徐州) 낭야(낭야)의 광조 혜각(光照慧覺)스님. 남악의 10세손이다.
* 태주(台州) 호국사(護國寺) 차암(此庵)의 경원 포대(景元布袋)스님. 원오스님의 법을 이었
고, 남악의 15세손이다.
* 임안부(臨安府) 정자사(淨慈寺)의 수암 단일(水庵端一)스님. 불지 단유스님의 법을 이었
으며, 남악의 16세손이다.
* 서주(舒州) 투자산(投子山)의 의청(義淸)스님. 수암 단일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남악의 17
세손이다.
* 복주(福州) 설봉(雪峯)의 묘담 사혜(妙湛思慧)스님. 법운 선본(法雲善本)스님의 법을 이었
다.
* 성은 양씨(楊氏). 이름은 걸(傑), 자는 차공(次公), 호는 무위거사(無爲居君). 관직은 예부
(禮部)에 이르렀으며, 천의회(天衣懷)스님의 법을 이었다.
* 송(宋) 희영(熙寧) 연간에 낭야 각(낭야覺)스님으로부터 법을 얻음. 시와 글씨에 능했으
며, 홍주(洪州)의 보봉사(寶峯寺)에 머물면서 『능엄표지(嚴標指)』를 지었다.
* 태주(台州) 만년사(萬年寺)의 심문 운분(心聞雲)스님. 육왕 개심(育王介湛)스님의 법을 이
었으며, 남악의 16세손이다.
* 경원부(慶元府) 천동사(天童寺)의 밀암 함걸(密庵咸傑)스님. 응암 담화(應庵曇華)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남악의 17세손이다.
*진강부(鎭江府) 초산(焦山)의 혹암(或庵)스님. 경원(景元)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남악의 16
세손이다.
* 임안부(臨安府) 영은사(靈隱寺)의 할당 혜원(堂慧遠)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