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엽, 광주이씨(廣州李氏)의 1대조 이집(李集)은 당시에 공민왕의 총애를 받은 신돈(辛旽)의 전횡(專橫)을 신랄하게 비판했다가 화(禍)를 자초하게 되었다. 앞으로 닥쳐올 화를 피해 아버지 이당(李唐)을 모시고 영천(永川)으로 피했다가 신돈(辛旽)이 주살(誅殺)당한 뒤에야 송경(松京)으로 돌아와 살았다. 원래 벼슬에 뜻이 없었던 그는 곧 벼슬을 그만두고 여주천녕현(驪州川寧縣)으로 퇴거하였다. 이 무렵부터 광주이씨(廣州李氏)의 많은 자손들이 지금의 성남시(城南市)와 광주군(廣州郡) 일원에 세거해 왔다. 이집(李集)의 큰아들 이지직(李之直)의 자손들은 6세 이수완(李秀莞)이 전남 보성(寶城)에 사는 전주 이언정(李彦廷)의 딸과 혼인하여 그곳에 머물러 살면서 일부가 보성(寶城)을 중심으로 세거했고, 일부는 5세 이집(李集)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는 아버지 이극견(李克堅)을 따라 갔다가 역시 팔거현(八 縣)(지금의 경북 칠곡)에 사는 최하(崔河)의 딸과 혼인하여 그곳에 터를 잡은 이래로 칠곡(漆谷)에 살게 되었다. 또한 5세 이?(李?)의 후계(後系)가 수원(水原)에 정착하였고, 이세응(李世應)의 후계(後系)가 황해도 평산(平山)에 가 살았으며 그 밖에도 남원(南原)ㆍ광주(廣州)ㆍ충주(忠州)ㆍ양주(楊州)ㆍ파주(坡州)ㆍ의녕(宜寧) 등지에도 일부 자손들이 살았던 것 같다. 이지직(李之直)의 동생 이지강(李之剛)의 자손들은 이지강(李之剛)의 손자 이극령(李克齡)이 연산군 갑자년에, 재종(再從)되는 이극균(李克均)과 이세좌(李世佐)등이 화(禍)를 당함을 보고 지금은 경북 울진(蔚珍)에 속해 있는 평해(平海)에서 숨어 살았으므로 이후 후손들이 그곳을 세거의 터로 삼았다. 그리고 목사공 이지유(牧使公 李之柔)의 손자 이용호(李用浩)(克晙)가 순천군수(順天郡守)를 지낸 뒤에 평남 개천군 사촌(价天郡 沙村)으로 가 뿌리를 내린 뒤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세거하였다. 1930년경,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자손들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ㆍ이천군(利川郡)ㆍ여주군(驪州郡)ㆍ평택군(平澤郡)ㆍ양평군(楊平郡)ㆍ화성군(華城郡)ㆍ안성군(安城郡) 일원과, 충남 천원군(天原郡)ㆍ대덕군(大德郡), 전북 완주군 고산면(完州郡 高山面), 고창군 해리면(高敞郡 海里面), 전남 보성군(寶城郡)ㆍ여천군(麗川郡)ㆍ영광군(靈光郡) 일원, 경북 칠곡군 지천면(漆谷郡 枝川面)ㆍ왜관읍(倭관邑), 경남 창녕군 규성면(昌寧郡 규城面), 의령군(宜寧郡)ㆍ울주군(蔚州郡) 일원, 하동군 화개면(河東郡 花開面), 황해도 은률군 일도면(殷栗郡 一道面), 평북 의주군(義州郡) 일원, 철산군 참면(鐵山郡 站面), 평남 안주군 대니면(安州郡 大尼面), 개천군(价川郡) 일원, 함북 무산군 동면(茂山郡 東面), 회령군 벽성면(會寧郡 碧城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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