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선생님 생가를 찾았다. 일찌기 중고교 교과서에 실린 선생님의 '모란이 피기
까지는' 을 애송하며 자랐다.
이번 남도 기행에 이 어른의 생가 방문이 있어서, 내심 기뻤다. 생가의 안채 입구에
세워진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 앞에서 이 시를 낭송해 보았다. 생가 안채 곳곳에
선생의 시비詩碑가 있으며, 선생의 시집으로 1935년에 '영랑시집'과 1949년에 펴낸
'영랑시선'이 있다. 선생의 슬하에는 7남 3녀의 자녀분들이 있다.
<김영랑 선생 생가 앞에서>
선생께서는 1903년 1월 16일에 이곳 강진 생가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은 김종호金鍾湖,
모친은 김경무金敬武신데, 5남매 중에서 장남이셨으며,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시비 - 모란이 피기까지는> - 선생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시비 앞에서> - 이 시를 낭송해 보기도.....
<생가 내부>
선생께서는 1915년에 강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시고, 결혼하였으나 1년 반만에
부인과 사별死別하셨다고 한다. 이후 상경하여 1917년에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 3학년으로 재학 중에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 고향 강진에서 '만세운동'
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어서 결국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몇 차례 재판을 거치며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최종
무죄가 확정되었다.
1920년에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청산학원' 영문과에서 수학하다가, 1923년에 귀국
하였다. 1925년에는 개성 출신 김귀련金貴蓮 여사와 재혼하였다. 1930년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일제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시를 많이 발표했다. 광복 이후에는
보수파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하였고, 공보처에서 출판국장을 맡았으나 당시 자유당
정권하에서 친일파와 일제 부역자들의 행태에 환멸을 느끼고 사임하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0년 9월 29일에 별세하였다. 선생의 대표 작품으로 '돌담에 속삭
이는 햇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 마음을 아실 이' 등이 있다. 시인으로 등단한 초창
기에는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운율이 살아있는 서정적인 시들을 세상에 선보였지만,
일제의 압제하에서 점점 저항의식이 뚜렸한 시를 남겼다. 마침내, 1940년에 절필을
선언하고 해방되기까지 일본어로 된 한 줄의 글조차도 적지않은 저항시인으로 살았다.
선생의 사후에 2008년에는 금관문화훈장, 2018년에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김영랑, 정지용, 박용철 세 분의 시인 동상> - 빈 자리에 끼어서 한 컷
코로나로 인해 기념관을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으나, 선생의 생가를 두루
찾아 보면서 새삼...감동을 받았다. 산수가 인물을 배출키도 하지만, 인물이 그 지역을
빛낸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너는 네가 태어난 고향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 이렇게
자문해 보려니 스스로 공연히 부끄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