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백, 모딜리아니>
쟌느여, 나는 죄인입니다
커다란 모자에 감춰진 그대 그늘 빛
아침 호수를 건너오는 안개보다 더 짙게 내게로 퍼질 때
하루도 걷을 수 없어 치욕이던 시간을,
내 그늘 그대 그늘을 덮어
한 치 앞을 못 보게 눈멀게 했음을
그래도 1918년 11월 29일 그날,
니스의 축복은
우리의 분신, 또 다른 쟌느의 시작입니다
닮은꼴은 닮은꼴을 남기려는 본능에 섧도록 우쭐했으나
세파에 강한 듯 연약했던
나는 가장 어리석은 가장입니다
해가 반짝 뜬 한낮의 정원도 끝내 마련치 못하고
그대의 문 앞에서
밤새 두드리던 울부짖음은 한 끼의 밥과 꿈의 간격입니다
채울 수 없는 내 용서의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하루조차를 견딜 수 없어
더 짙은 안개로 호수 건너온 쟌느여,
이제 누구를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지 맙시다
몽파르나스 언덕 위를 별빛보다
청량히 밝혀주던 그대가, 참으로만 사는 그대가
내겐 충만한 슬픔
챙 큰 모자에 감춰진 그 그늘은 내 안고 갈 그늘이려니
나로 말미암은 공허의 쟌느, 부디 풍요로운 쟌느여
이제야 아침 호수를 지키는 나는 죄인입니다
시집 《빗방울에 맞아도 우는 때가 있다》 해설 중 일부/ 박철영
지극한 사랑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목숨을 건 사랑일 것이고 그런 사랑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 진실한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 죽음이 뒤 따른다. 세기의 사랑으로 기억되는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회자된다. 비극적인 사랑이 많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런 이야기를 접하면 가슴이 아파온다. “쟌느여, 나는 죄인입니다”라며 말한 <그 고백, 모딜리아니>를 통해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을 전한다. 사랑에 대한 고백은 15살 연하의 “커다란 모자에 감춰진 그대 그늘 빛”이 슬프도록 기다란 목선을 타고 흘러내린 고요 속 말이 없는 ‘쟌느’를 향하고 있다. ‘모딜리아니’에게 영원한 사랑이자 예술의 영감이 되어준 뮤즈, ‘쟌느 에뷔테른’, 그녀와의 만남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모딜리아니는 선천적으로 허약한 체질에 늑막염, 장티푸스, 폐렴을 앓으면서 술과 마약으로 방탕한 생활을 이어간다. 당연히 화가로서 활동도 저조할 수밖에 없다. 그즈음 모딜리아니가 화가로 활동하고 있던 몽파르나스에 운명처럼 ‘쟌느’도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머문다. “내 그늘 그대 그늘을 덮어/ 한 치 앞을 못 보게 눈멀게 했”다며 말한 것을 보면 모딜리아니가 쟌느에게 사랑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 이후 둘만의 사랑을 키워가는 “니스의 축복은/ 우리의 분신, 또 다른 쟌느” 즉 니스에서의 행복했던 시간을 더해 둘 사이에 태어난 딸 ‘쟌느 모딜리아니’를 얻게 된다. 그렇게 2년 여의 행복은 불행하게도 오래가지 못한다. 쟌느의 행복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모딜리아니는 폐결핵이 악화되어 죽음을 맞는다. ‘쟌느’와 ‘모딜리아니’의 짧은 사랑에 대한 대략적인 전개는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다. 만약 이후 진전이 없었다면 모딜리아니의 고백을 시적 세계로 소환하진 않았을 것이다. 모딜리아니가 죽은 지 이틀 후 ‘쟌느’는 5층 아파트 창문에서 투신을 하고 만다. 비극 속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는 모딜리아니가 쟌느를 모델로 삼아 그린 세기의 걸작 ‘큰 모자를 쓴 쟌느 에뷔테른’의 초상화가 시적 서사를 부연하고 있다. 검은 모자로 이마를 가린 얼굴과 우수에 젖은 표정을 타고 흘러내린 갸름한 목선으로 더 수줍어 애틋해 보인 ‘쟌느’의 숭고한 사랑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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