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대에 막이 열린다. 갓밝이를 신호로 생명체가 꿈적거리기 시작한다. 맨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붙박이 미생물도 미세하게 꿈적거리는 게 느껴진다.
어릴 적 마을의 야트막한 동산 등성이에 소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었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듬성듬성 선 그 소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배시시 비쳤다. 은은하면서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이 빛을 어른들은 송간조(松間照)라고 하였다. 창호지 문에 뚫린 구멍으로 송간조가 비집고 들어오면 방 안의 먼지들이 브라운 운동을 했다. 세 살 터울의 우리 형제는 손바닥으로 빛을 가리며 실눈을 떴다. 빛은 먼지로 이루어진 것을 그때 알았다.
여명이면 아버지는 들판으로, 할머니는 밭으로,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셨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면 스멀스멀 땅거미가 내려 어두워질 때까지 일하셨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먹거리 장만에 매달렸다. 굶어 죽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아이들도 다섯 살쯤 되면 호미질을 했다. 학교에 다니면 숙제를 한다는 명분으로 호미와 쇠똥망태를 면할 수 있었다. 방학 때면 ‘방학 생활’이라는 과제물 책자가 있어 절호의 기회였다.
높게 자란 당산나무가 제일먼저 일출을 알렸다. 마을의 수호신 당산나무는 어른들의 아름드리가 되는 곧은 나무로 팔구십 년 된 노송이었다. 해가 당산나무 둥치로 서서히 떠오르면 커다란 나무가 품 넓은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일출 때쯤 같은 반 친구 셋이서 당산나무에 모이기로 했다. 셋이 모여 과제물을 해야 한다는 구실을 만들었다. 셋이 모여 과제물은 이래저래 해놓고 개미를 잡아 깡통에 넣고 싸움 놀이하느라 바빴다. 하루는 떠오르는 해를 제일 먼저 보자는 내기를 했다. 어리숙한 나는 약간 비스듬히 선 나무에 잽싸게 올라가 내가 제일 먼저 봤다고 소리쳤다. 다른 친구는 약간 경사진 곳과 작은 나무에 올라갔으나 나보다 늦었다. 평소 꾀가 많아 꾀보라 부르는 녀석이 나를 보고 소리 지르며 대뜸 그곳에서 뛰어내렸다.
“내 손가락에 불을 댕겨 하늘로 올라가지.” “요시, 좋다.”
풀쩍 뛰어내렸다 싶은 순간,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뻗어버렸다. 왼쪽 팔목에 골절상을 입었다. 인근에 병원이 없었다. 골절상을 치료하는 약초로 알려진 지황의 뿌리를 찧어 환부에 바르고 즙을 마시는 게 다였다. 왼팔을 끈으로 동여 어깨에 메고 학교에 다녔다. 교실 청소 당번에서 제외됐고, 보건 시간에는 견학이 허락됐다. 집에서는 심부름과 쇠똥 줍기도 면제되었다. 팔은 아팠지만 편하고 즐거웠다.
방학은 금방 끝났다. 개학과 동시에 ‘방학생활’을 제출하여 담임 선생님의 검사를 받아야 했다. 선생님이 우리 셋을 앞으로 불렀다.
“이 녀석들이... 같은 마을인데 같은 날 날씨가 맑음, 흐림, 가랑비라고? 왜 제각각 다르나?”
“맑았는데예.” “흐렸는데예.” “가랑비가 왔심더.”
“이 녀석들 봐라. 같은 마을인데 날씨가 각각 다르다니 벼락치기 숙제한 게 표가 나는데 어디서 우기노! 앞으로 또 거짓말하면 혼날 줄 알아라.”
머리에 알밤 한 대씩 맞고 자리로 돌아왔다. 반 아이들과 선생님도 한바탕 웃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반 아이들 대부분이 개학 이삼일 전에 화닥닥 벼락치기 숙제를 했다.
해마다 동짓날 밤이면 당산나무 앞에서 당산제를 지냈다. 나이 많은 노인이 있는 집에서 돌림으로 제를 맡았다. 우리 집 차례가 되면 할머니는 물을 덥혀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고 정성껏 제수를 만들었다. 삽짝에는 생소나무 가지를 매단 금줄로 식구 외에 다른 사람의 출입을 제한했다. 야밤 삼경쯤, 당산나무 앞 상석에 촛불을 밝힌 후 제수를 진설하면 아버지가 한복차림으로 술잔을 올리고 재배를 했다. 참여한 마을 노인들도 재배하면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
신라 때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 마을 인근에 있었다. 일제의 압제에도 지켜낸 고찰이다. 광복 후 서너 해가 지나 절을 둘러싼 사찰림에 대대적인 벌목이 시작되었다. 산기슭에는 제재소가 생기고, 마을을 둘러싼 풍치림도 사찰 소유라는 이유로 모조리 벌목되었다. 일시에 마을이 벌거숭이가 되어 황량하게 변해버렸다. 우리 마을은 다섯 가구의 작은 마을이었다. 당산나무를 비롯하여 마을 입구를 지키는 아름드리 소나무 들은, 모두 마을 소유였다. 벌목업자의 감언으로 당산나무를 비롯한 노송들이 모조리 베어지고 말았으니 마을의 자랑거리 절경, 송간조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6 . 25전쟁이 발발하자 마을에 공비가 자주 출몰해 알곡을 수탈해 갔다. 조금 큰 근동으로 소개 명령이 내렸다. 우리 가족은 남의 집 아랫방 한 칸을 빌려 비좁게 살다가 몇 달 후에 집을 마련하였다. 이후 살던 마을은 폐허가 되고 전답으로 변해버렸다.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산나무를 싹둑 잘랐으니, 마을이 망하고 말지.”
한반도에서 제일 이른 일출은 포항의 호미곶과 울산 간절곶이라 알려져 있다. 나는 해운대 미포에서 송정까지의 해안이 가장 빠르고 멋진 곳이라고 말하고 싶다. 해안을 따라 왕복 십 리 테크로드를 걸으면 일출의 장관을 오래 볼 수 있는 곳이다. 해운대 도심을 통과하던 동해남부선 철로가 몇 년 전 지하로 이설되었다. 기존의 철로는 공원으로 가꿔지고 주변의 주거 가치를 상승시켰다. 미포에서 송정까지 기존의 철로에 높게 스카이캡술을 설치해 관광 해변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과거에 간첩이 상륙했던 해안이라 작전지역이 되어 해안 절경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었다. 여명 무렵에는 병사들이 해안을 순찰한다. 튼튼한 안보에 마음 든든하다.
일출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장엄하다. 매일 반복하는 광경이지만 같은 날이 하루라도 있을까. 미포에서 송정까지 해안 길이 해맞이 명소가 된 후 처음 맞는 신축년 새해에는 아쉽게도 코로나의 만연으로 출입이 통제되었다.
태양은 표면 온도가 섭씨 5,500도나 되는 열에너지를 지닌다. 구름과 안개가 가려도 탓하지 않는다. 묵묵히 자연의 순리에 따르니 그야말로 태양계의 황제로서 경외감이 든다. 찬란하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나는 걷는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