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시중(侍中) 위계정(魏繼廷)이 중서문하성[省]에 들어
○시중(侍中) 위계정(魏繼廷)이 중서문하성[省]에 들어가서 일을 보았다. 어사(御史)가 아뢰기를,
“위계정은 한 해가 지나도록 병이 들어 일을 볼 수 없어 수차례 휴가를 청하였으니, 상(上)께서는 더욱 후하게 대우하시어 200일의 휴가를 하사하셨습니다. 〈위계정은〉 휴가 일수가 이미 다한 후에도 다시 미루고 수십 일간 나오지 않은 연후에야 부축을 받고 일어나 중서문하성[省]에 들어갔으니, 대신의 뜻이 아닙니다. 청하건대 파직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허락하지 않았다.
사신(史臣) 김부일(金富佾)이 말하기를, “위계정은 문장으로 당세에 이름을 날렸고, 청렴결백하고 정직하였으며 역대 임금을 보좌하였다. 선종(宣宗)이 등석(燈夕)에 주연을 베풀었을 때, 위계정이 추밀원승선(樞密院承宣)이었는데, 왕이 술에 거나하게 취하여 위계정에게 춤출 것을 명령하였다. 위계정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광대[伶人]가 있는데, 어찌하여 신(臣)에게 춤을 추라고 하십니까.’라고 하니, 왕이 강요하지 않았다.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됨에 이르러, 선종의 애첩인 만춘(萬春)이 집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지었다. 위계정이 아뢰어 말하기를, ‘만춘은 상(上)의 뜻을 속이고 미혹시켜서 백성들을 노역시켜 크게 사저를 지었습니다. 청하건대 헐어버리십시오.’라고 하는 글을 올렸지만, 답하지 않았다. 선종이 이자의(李資義)를 사신으로 송(宋)에 보냄에, 위계정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이자의는 진귀한 물건들을 많이 샀지만 위계정은 하나도 구하는 바가 없었다. 양부(兩府)에 올라서도 청백한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온 세상이 불교를 좋아하여 지위가 높은 자는 사원을 짓고 경전을 베끼는 것을 일삼았지만 위계정은 홀로 그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크게 등용되어 그가 〈정사를〉 베푸는 것을 보기를 바랐다. 재상이 됨에 이르러 묵묵히 따르기만 하고 뚜렷이 의견을 제시한 바가 없었던 것은 대개 그 형세가 할 수 없음을 알았고 또 노쇠하고 병들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이에 이르러 퇴직을 청하니 상(上)이 그 떠남을 애석하게 여겨 재차 손수 쓴 조서[手詔]를 내려 머물도록 하고 또 중사(中使)를 보내어 간곡히 효유하였다. 그러므로 수일동안 입조하였고 다시 휴가를 받아 돌아간 것이다. 어사(御史)가 사정을 알지 못하고 탄핵하였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