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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호-성경이 제시하는 참된 구원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태복음 6:24.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말아야 된다고 말씀하는 대신에,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사랑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통하여 호소하시는 성령의 경고의 음성을 거절한 채, 더 이상 넘어가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어 들어가서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만족시킨다. 그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중앙으로, 한쪽에는 극기와 희생과 봉사로 자신의 생애를 채워가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유행에 앞장서고, 경박한 말과 행동을 즐기며, 성경이 금지하고 있는 오락들을 탐하고, 방종에 빠져 있는 자들이 있다. 성경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선의 저 쪽 너머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도 중립적인 위치에 설 수 없다.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사단도 섬기지 않는 중간 계층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종들의 마음에 거하셔서,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의지를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시키고 그분의 영이 양심 속에서 지시하는 대로 선택하고 계획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렇게 되면, 이제 그들이 사는 것은 그들이 사는 것이 아니요, 그들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갖게 되며, 그분과 같은 생애를 살게 된다.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며, 성령의 음성이 아닌 다른 영의 음성을 들으면서 살게 된다. 하나님께 마음을 반만 바친 자들이야말로 사단이 가장 훌륭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단의 종이다. 입으로는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주장하지만, 자신의 말과 생활을 통해 사단과 동맹한 삶을 산다면, 스스로 그리스도의 원수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해를 미치는 악은 버림받은 죄인이나 타락한 불량아의 부도덕한 생애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러한 부류의 사람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덕망 있고 존경할만하며 고상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죄를 품고 있으며, 마음 깊숙한 곳에 이기적인 정신을 품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교회와 세상에게 가장 악하고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외적으로 경건하게 보이는 그리스도인을 존경한다. 큰 유혹을 받고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 은밀하게 투쟁하면서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떨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존경하는 어떤 그리스도인의 실제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그는 그 모습으로부터 죄에 대한 강력한 핑계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마음 속으로 “저렇게 신앙이 좋아 보이는 사람도 저런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나도 이런 죄쯤은 범해도 괜찮을 거야” 라고 자신의 죄를 합리화시키게 된다. 영원한 생명과 진리에 대한 고결한 사상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의도적으로 범하는 생활을 산다면, 그것은 그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에게 죄와 세속에 대해서 가장 설득력 있는 미끼를 던지는 것이 된다. 겉으로는 친절하고 관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충성과 사랑이 없는 반만 개심한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하나의 인간적인 윤리나 철학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반만 개심한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사람들을 멸망의 절벽으로 끌어 갈 수 있는 강력한 사단의 대리자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한일서 2:15,16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5:30. 병이 온 몸에 퍼져 생명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위급한 경우에 자신의 오른팔이라도 잘라내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더우기 영적인 생명을 위급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더욱 과감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잘라 내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죄는 우리의 의지를 통해서 우리를 사로잡는다. 사람이 마음 속에서 들리는 성령의 음성에 자신의 뜻과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을, 성경은 눈을 빼버리거나 손을 자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에 굴복하는 것은 평생을 불구자나 절름발이로 보내기로 동의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병신이 되고, 상처를 입으며, 불구자가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 길을 택하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자신의 계획, 생각, 뜻을 버리는 것을 커다란 손해로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생각에 재난과 희생으로 생각되는 것이 최고의 유익에 이르는 길이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혼을 죄로써 더럽히기보다는 차라리 빈곤과 비난과 고독과 고난을 택하라. 그대 자신의 이기적인 고집과 의지를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굴복시켜라. 세상 사람들에게 부정직한 수치를 보이거나,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기보다는 차라리 손과 발을 끊어 버리는 아픔을 택하라. 자신의 영혼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순결함을 똑바로 쳐다보라. 시련, 고통, 가난과 같은 불평의 요소들이 오히려 자신을 순결하게 만들 수 있다. 교만과 이기심은 양심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눌러버린다. 세속과 탐욕은 하나님의 순결한 진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의지가 가지고 있는 참된 힘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람의 성격 가운데 있는 지배력, 곧 결정하고 선택하는 능력이다. 모든 일은 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데에 따라서 좌우된다. 사람이 선과 순결에 대한 욕망을 갖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만일 거기서 그치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줄 수 없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선과 순결함에 대한 소원과 욕망을 가진채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지를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시키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기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선택하는 경험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들은 마음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은혜의 능력을 전혀 모른다. 그들은 기도하고 죄짓고, 또 기도하고 죄짓는 생애를 살면서, 부도덕과 속임과 질투와 시기와 자신를 사랑하는 정신으로 자신의 생애를 채워 간다.
우리는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교통함으로써만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난 생애는 살아 있지만 죽은 생애이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딤전 5:6. 우리의 마음 속에서 자아가 살아서 우리의 삶과 생애를 지배하는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애 속으로 들어오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나뉘어진 마음을 취하지 않으시며, 나뉘어진 보좌에 앉지 않으신다. 반드시 마음 속에 숨어 있는 모든 우상을 버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마음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사망을 택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죄를 불사르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죄를 선택하고 죄로부터 분리되기를 거절하면, 우리는 죄를 불태우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서 죄와 함께 불살라 질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일에는 언제나 희생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사단이 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끝까지 따라갈 때에 반드시 감수해야 할 희생은 고상한 것을 위해서 저속한 것을 버리는 희생이며, 신령한 것을 위해서 세속적인 것을 버리는 희생이고, 영원한 것을 위해서 잠시 있다가 사라져 없어질 것을 버리는 희생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 사단이 우리의 의지를 통하여 우리를 장악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의지를 통하여 우리를 지배하고자 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뜻과 의지를 존중해 주신다. 그분께서는 마음 속에 조용한 음성을 들려 주심으로써, 그분을 향한 우리의 선택과 결심을 받고자 하시지만, 결코 우리의 선택과 의지를 강요하지는 않으신다. 우리의 의지를 통해서 그분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아름다운 당신의 성품을 만들어 내고자 하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의지를 통해서만 당신의 계획과 뜻을 이루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뜻과 의지를 순결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하나님 앞에 바쳐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그분과 연결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뜻과 의지와 본능이 이끄는대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거하실 수 있겠는가? 강팍한 마음과 고집센 마음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의지를 굴복하는 일이 매우 쓰라리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때때로 그들은 마음 속에서 속삭이시는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기 위해서,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받게 될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 꼭 필요한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권두언
온 세계가 하나로 연합해야 한다는 무드가 지배적인 21세기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국가들이 연합하고 종교들도 연합하고 교회들도 연합하여야 한다는 세계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교통, 문화, 경제에 있어서 세상이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세상 어디에서나 같은 텔레비전과 같은 영화, 같은 책들을 읽고, 같은 음식물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에 사는 사람들도 동일한 미국 프로그램들을 TV에서 즐기며 웃고 살고 있는 이상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여러 나라들을 여행해 보면서, 그 각기 나라들의 풍습과 문화들은 달라도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다 같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세계화는 우리에게 커다란 편리함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하나가 되면서, 세상 역사는 어두운 말세에 대한 성경 예언을 성취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특히 뉴욕의 911 테러 사태 이후로 세계가 하나로 뭉치는 것이 더욱 역력하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로 뭉친다는 일이 꼭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오히려 진리로 하나가 되기 위하여 애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의 이론이나 눈 앞에 보이는 번영보다 먼저 앞서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하는 좁은 길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하나님의 진리와 명령보다는 인간적인 성공을 더 좋아하며, 진리대로 살기 보다는 세상의 인정을 더 추구하는 위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번호는 여러분들에게 참된 성서적 구원에 대한 신선한 충격을 드릴 것입니다.
3.복을 비는 신앙
기독교회의 성서적 신앙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믿음의 댓가로 복을 약속한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가짜 신들은 자신을 믿는 믿음의 댓가로 복을 약속한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구별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오래 전부터, 사단은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사단의 주장이 욥기에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라." 욥 1:10.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축복을 뇌물로 사용한다는 것이 사단의 주장이다. 만일 사단이 욥에게 승리하였다면, 사람들을 기복 신앙으로 유도하려는 사단의 논리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순결하고 비이기적인 신앙이란 무가치하고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욥은 고난과 재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불평을 토해내지 않았다. 그의 순결한 신앙은 위기 속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그분께로부터 무엇을 얻어 내야 하기 때문에 잘 믿으려고 노력하며 의롭게 살려고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그대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너무나 크고 감사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생애를 살고자 하는가? 고통과 재난 속에서도 순결한 믿음을 지킨 욥의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해 준다.
오늘날에도 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오늘날에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소수의 충성스런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경배를 유도하기 위하여 복을 미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단의 궤변을 지지하고 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잘 믿으면, 당신의 사업체와 가정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라는 설교들이 점점 더 빈번하고 대담하게 하나님의 교회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이러한 설교에 귀가 솔깃해진 세속적이고 어리석은 양들은 보다 많은 헌금과 열성적인 교회 활동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의 복을 거래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비록 매 주말마다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한번도 하나님께 온 마음을 바쳐본 경험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들은 돈과 명예와 자랑에 관심이 많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도 자신들처럼 그러한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제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좁은 길로 인도하여 그들의 성품과 생애가 결정적으로 변화되어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만일 세속적 물질이 하나님의 관심사라면,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망하는대로, 거대한 교회를 짓는 일을 도와 주셔야 하며, 그 건물을 채울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해 들이셔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의 간청과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빵과 생선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끌여 들여서 자신을 경배하도록 이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단의 고소가 옳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빵과 밀가루를 나누어 줌으로써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이듯이,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건강과 물질적 축복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사람들의 경배를 유도하고 계신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의인들과 악인들에게 모두 비를 주시며, 햇빛을 주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정당하게 역사하신다. 잘 믿는 자는 복을 많이 받고,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이와 정반대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에게 어려운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해야만, 순결하지 않은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댓가를 바라보고 당신을 따라오는 자들에게 결코 당신의 제자 직분을 맡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오히려 당신의 구속 사업에 커다란 방해가 될 뿐인데, 왜냐하면 마귀와 세상이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조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기복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맹목적인 보호가 어떤 결과와 영향을 가지고 올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일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약속된다면, 사람들은 고통과 고난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에 몰려들 것이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기적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로 당신의 왕국을 채우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잘 믿는 사람들에게만 축복을 주신다는 것은 사단의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이러한 거짓말은 교회를 파고 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부유하게 되고, 믿음이 적은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지 못해서 어렵게 산다는 식의 논리가 현대 기독교회에 편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을 보면,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번영한다는 증거를 거의 찾을 수 없다. 오직 적은 숫자의 그리스도인만이 부자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부와 재물을 획득하는데 있어서 공평한 기회를 부여받고 있다. 사실, 엄격한 정직과 순결함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매우 어려운 세상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는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어느 정도 타협해야만 자신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교회들에서, 하나님을 잘 믿어야만 그 분의 인정하심을 받아서 물질과 건강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설교가 인기를 끌고 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 내기 위해서 열심히 믿고 많은 헌금을 드리는 이상한 모습이 그리스도 교회 안에 생기게 되었다. 더우기 거듭나지 못한 성직자들이 이러한 풍조를 이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이용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복을 비는 기복 신앙과 각종 거짓 은사들을 사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애쓰는 성직자들의 숫자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교회가 눈에 보이는 축복을 받는 장소로 여겨짐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리게 되었고, 그러한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압도적인 수를 차지함에 따라서 세상은 교회를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보기 보다는 이기적 위선자들의 집단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믿음의 댓가로 축복을 구하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축복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진리와 고결함 속에서 굳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날마다 필요한 것들이 공급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다른 약속처럼, 이 약속도 조건적인 약속이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못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에게 공히 적용되는 원칙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일반적인 원칙들에 순종해야만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들만이 수확을 거둔다는 것은 믿는 자와 불신자들에게 모두 적용되는 원칙이다.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은 우리의 노력과 의무를 대신하지 않는다.
기복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벌주시는 수단으로 고통과 시련을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건강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공개적이거나 비밀스런 죄를 범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통이나 시련이 항상 죄에 대한 처벌로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시련 속에 처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렸거나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또한 어떤 사람의 건강이나 사업이 매우 잘 되어 간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감옥 속에서 외롭게 살다가 목이 잘리운 침례 요한,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베드로, 밧모섬에서 외롭게 죽어간 요한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가장 가깝게 계셨다.
욥은 재난을 당해야 할 어떤 죄도 범한 적이 없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기 2:3. 욥은 재난을 받을 만큼 큰 죄를 범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이유없이 재난을 당했다. 그러므로 고통과 재난이 항상 자신이 범한 죄의 결과로 인하여 생긴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복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어서 헤어나오기 어려운 절망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기복 신앙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숨겨져 있다.
형제 자매들이시여, 늦은 밤, 물 한그릇을 떠놓고 조상신에게 복을 비는 시골 아낙네의 기도와 그대의 기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성황당 산신령에게 치성을 드리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신앙에서 빠져 나오라. 하나님께서는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최선의 방법으로 공급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서 그대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라. 비록 그것이 고통이나 시련의 모습으로 그대를 찾아올지라도 말이다. 만일 그대가 복을 비는 신앙을 고집한다면, 그대는 그대를 고통과 시련의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결코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조용한 시간에 마태복음 5장부터 시작되는 팔복을 읽고 명상해 보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며, 무엇이 그분의 축복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
“그러므로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 6:25.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음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아신다.
태초에 몸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는 우리가 의복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계신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들을 채워주시지 않겠는가! 예수께서는 아무런 근심 걱정없이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새들을 가리키면서, 새들은“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지라도 하늘 아버지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그분께서는“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다. 참새 한마리도 그분께서 모르는 사이에 떨어질 수 없으며, 어떤 사람도 그분 몰래 머리 숙여 기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언제,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흘러내리는 괴로운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그분의 손등을 적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분께서는 당신을 의지하기 위해서 당신께 나오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아침 이슬을 맞아 생기를 머금은 꽃들을 가리키시며, 예수께서는“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말씀하셨다. 길가에 존재하는 꽃 하나도 하늘의 별세계를 움직이는 그분의 위대한 능력에 의해서 존재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인류의 심장을 지금도 고통치게 하고 있다. 들의 꽃들조차 세상의 어떤 왕이 입었던 것보다도 아름다운 옷으로 단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불신과 이기심, 그리고 불안한 근심과 염려를 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백합화의 꽃잎 위에 기록해 놓으신 기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태양계의 모든 별들이 태양을 쳐다보면서 돌고 있는 것처럼, 꽃들도 햇빛을 향하여 꽃잎을 펼치고 있는데, 어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있는가? 꽃을 아름답게 옷입히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품성의 아름다움으로 옷입히기를 더없이 바라고 계신다. 어떻게 백합화가 차갑고 어두운 땅을 뚫고 피어 올라와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향기를 풍기는지 생각해 보라. 누가 거친 갈색의 뿌리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가? 뿌리 속에 감추인 생명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비와 햇빛을 받으며 피어날 때에야 비로서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보고 찬탄한다. 꽃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로 그 말씀을 읽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마음 속에서 새로운 생각과 감정이 샘솟듯 올라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재창조의 기쁨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만이 자신들의 생애를 통하여 꽃과 같은 아름다움 향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풍길 수 있다.
병에 걸린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매우 오랜 세월에 걸쳐서 우리의 몸의 세포와 유전자를 학대해야만 겨우 병에 걸릴 수 있다. 불과 이틀 전에 암진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암은 15년 내지 20년 전에 시작된 것이다.
세포 하나가 암 세포로 변질된다는 것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상 세포를 제대로 살지 못하도록 지독하게, 그것도 아주 오랫 동안 괴롭혀야만 한다. 그런데 세포의 성질을 제대로 알고 세포가 원하는 생명적인 환경을 만들어 주기만 하면, 그 변질된 세포가 정상 세포로 돌아오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20년 동안 자라온 암이 3개월 만에 없어질 수도 있다. 세포는 반드시 재생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세포가 원하는 대로 살아 준다면 변질된 세포는 빠른 속도로 건강한 정상 세포로 되살아날 수 있다.
술을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 간경화증에 걸린 예를 생각해 보자. 간 세포는 날이면 날마다 들어오는 술로 인한 독소를 처리하느라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다가 마침내는 망가져 버리게 된다.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쳐도 안되니까 백기를 들고 죽어버리는 것이 바로 간경화증인 셈이다.
아무리 많이 파손된 유전자일지라도 충분한 시간 동안 바람직한 환경을 조성해 줌으로써, 유전자들이 다시 생명력을 찾아 회복되어서 병이 깨끗하게 완치될 수 있는 과학적 가능성이 현대 과학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다. 그렇다면 유전자는 어떤 것을 좋아할까? 유전자가 재생되기 위해서는 어떤 환경들이 조성되어야 할까?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식생활 환경: 신선한 야채와 과일과 곡류는 유전자의 건강 및 재생에 도움을 준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그들의 식생활 환경으로 채소와 과일과 곡류를 정하신 것은 그것이 그들의 유전자 건강을 위한 최고의 식품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온 지면 위에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를 내는 나무의 열매가 있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그것이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되리라” 창세기 1:29. 입으로 동물성 기름과 술과 담배와 같은 것들이 들어갈 때마다 우리의 유전자는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와 순수한 채식을 갈망한다.
2. 주거 환경: 유전자는 아름다운 환경하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 환경에서 맑은 공기를 호흡하는 것은 유전자의 재생에 도움을 준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시고 그들의 주거 환경으로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선택하신 데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그들이 거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창조해 주신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 감사하자. 아름다운 시골의 자연 환경 속에서 조그만 밭을 경작하는 것은 유전자의 재생에 많은 유익을 준다.
3. 정신 환경: 부정적인 마음은 유전자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은 유전자에 스트레스를 가져다 주고 부담을 준다. 또한 유전자는 사랑에 반응한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먹었을 경우에 유전자가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 이상으로 유전자는 사랑에 반응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사랑의 대상인 하와를 주셨고, 자주 그들을 방문하심으로써, 사랑의 교제를 나누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창조하신 사람도 사랑을 통해서만 그들의 활기를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유전자는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갈망하며 요구하는데, 이 두가지가 채워지지 않을 때, 유전자는 활기를 잃고 병들어 가게 된다.
사랑과 유전자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실험 결과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과학자들이 우연히 발견하게 된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살펴 보면, 사랑이 유전자를 변화시킨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쥐는 새끼를 낳으면 어미 쥐가 새끼 쥐를 열심히 핥아 준다. 새끼 쥐가 몇마리가 되었든 간에 골고루 돌아가며 핥아 준다. 처음에는 갓 태어난 새끼 쥐의 몸에 더러운 것이 묻었기 때문에 그것을 닥아주려니 했는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도 어미 쥐는 계속해서 새끼 쥐들을 핥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과학자들은 그 이유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과학자들은 열 마리의 새끼 쥐들 가운데 다섯 마리를 어미 쥐한테서 떼어 놓았다. 그런 후에 똑같은 음식을 주면서 성장 과정을 지켜 보았다.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어미 쥐와 함께 있던 다섯 마리의 쥐들은 정상적으로 성장했는데, 어미 쥐와 분리시켰던 새끼 쥐들은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음식만 준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 호르몬이 체내에서 분비되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어미 쥐와 분리된 새끼 쥐들의 피를 뽑아 분석해 보았더니 성장 호르몬의 양이 많이 저하되어 있었다. 반대로 어미 쥐와 함께 있으면서 어미 쥐가 열심히 핥아 준 새끼 쥐들은 성장 호르몬이 매우 많이 나와 있었다.
이 실험은 새끼 쥐들을 핥아 주는 어미 쥐들의 행동, 즉 사랑에세 우러나오는 행동이 성장 호르몬 분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미 쥐가 핥아 주면 성장 호르몬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신이 나서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게 되고, 그 결과 성장 호르몬은 매우 많은 양이 분비된다. 사랑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에너지가 성장 호르몬을 분비시킨 것이다. 어미 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유전자를 자극하여 성장 호르몬이 나오게 만든 것이다. 유전자는 사랑을 갈구한다.
4. 진리적 환경: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진리의 말씀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세포는 활기를 되찾고 마비되었던 근육은 다시 소생된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죄의 질병에서 소생되어 활기찬 생애를 살아가고 있다.
진리는 사람의 생애에 진정한 행복과 삶의 의미를 가져다 주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만든다. 유전자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 속에 생기는 이러한 놀라운 변화를 받아들여 그것에 따라서 움직이며 재생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들의 마음에 생긴 깊은 죄책감과 불안은 완전한 건강을 누리고 있던 유전자에게 그늘을 던져 주었다. 그 이후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 미움, 억울함, 분노, 증오심과 같은 죄는 사람의 마음 속에 죄책감과 불안을 가져오며 이것은 유전자의 활기와 생명을 좀먹어 간다. 진정한 회개의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마다 마음의 평화라는 놀라운 선물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즉시로 유전자의 재생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 예수께 나아와 치유를 간구했던 수많은 환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고, 즉시로 치유가 되었다. 죄와 육신의 병으로 인하여 죽어가던 환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치유의 약속보다 죄의 용서를 약속해 주셨는데,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평화와 감사, 그리고 구원 받은 기쁨으로 충만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그들의 변화는 즉시로 유전자에게 전달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진리의 말씀과 용서의 약속은 병들어 있던 죄인의 유전자에 활기과 생명을 가져다 주었다.
진리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와 보람과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해 준다. 심한 마음 고생과 인생에 대한 회의를 가진 사람은 그 마음에 생긴 그늘 때문에 유전자가 활기를 잃어가게 되고 그 결과 몸이 병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도 진리를 발견하고 삶의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게 될 때, 유전자는 재생을 위하여 몸부림치게 된다. 진리의 깨달음으로 인하여 살아야만 하는 의미와 목적이 분명하게 될 때, 유전자는 그것에 분명하게 반응하게 되고, 그 결과 시들고 변질되었던 유전자는 재생을 위하여 빠르게 움직이게 된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던 죄인이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때, 그것을 놀라운 능력으로 죄인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 준다.
6.성경이 제시하는 참된 구원론
나는 왜 사람들이 자신이 나가는 교회에 계속해서 다니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분석해본 적이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 해보면 그들이 어떤 특정한 교회에 나가게 된 이유들을 알게 된다. 모태로부터 교인이 된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교회의 교인이 된 것은 나의 부모님이 이 교회에 다니셨기 때문이지요.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이 교회의 교인입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등에 업혀서 이 교회에 다녔고 단 한번도 이 교회가 성서적으로 올바른 토대 위에 서있는 참 교회인가 라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스스로의 연구와 선택에 의해서 교회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단지 모태로부터 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또는 부모님께서 그 교회의 장로내지 권사이기 때문에 그 교회의 교인이 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선택 방법이겠는가? 여러분 자신을 불교 신자라고 가정해 보자. 내가 불교 신자인 여러분 앞에 성경을 펼쳐 놓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라는 분명한 증거들을 소개했을 때, 여러분이 “나는 절에 다니는 불교 신자이고 나의 부모님도 불교 신자이기 때문에 비록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분명하게 깨달았을지라도 나의 종교와 신조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특정 종교를 모태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이 그 종교가 참된 종교라는 것을 보증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밀림 속에 사는 식인종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가서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은혜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을 때, 그 식인종이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조상 대대로 식인종이었습니다. 나의 할아버지도 식인종이셨고 또 그 위의 할아버지도 식인종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당신의 종교가 유일한 참 종교라고 할지라도 나는 나의 종교와 내 부족들의 전통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에게 “당신의 모든 조상들이 식인종이었으므로, 당신 역시 식인종의 전통을 떠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 내가 어떤 교회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또는 나의 부모님이 그 교회의 교인이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가 아닌 더욱 분명한 성서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는 교인이 되어야 한다. “당신은 어떤 이유 때문에 그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다. “내가 이 교회의 교인이 된 것은 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 역시 결코 그리스도인다운 대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여러분은 직장 동료를 좋아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의 믿음을 그 사람의 믿음과 일치시켜야만 하는가? 여러분은 어떤 상점의 점원이 좋기 때문에 그 상점의 단골 손님이 되어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점원이 행하고 믿는 바를 여러분이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교회의 교인들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영혼과 구원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교회를 부주의하게 선택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참 교회와 진리의 관계
어떤 이들은 단순히 자기 집 가까이에 있는 교회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장로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 이사를 간 다음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침례 교회에 다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요즘처럼 교통이 복잡한 때에 멀리 운전하지 않아도 되고, 또한 비싼 휘발유도 절약할 수 있으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묻는다. “집과 교회 사이의 거리가 자신이 어떤 교회를 다니기로 결정할 수 있는 확실한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자신과 가족이 다녀야 할 교회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매우 분명한 지침을 제시해 주고 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 3:15
교회는 진리의 터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어떤 특정 교회에 참석하는 유일의 이유는 부모님이 그 교회의 교인이시기 때문도 아니요, 우리 가족들이 다니기 때문도 아니요, 집 근처에 교회가 있기 때문도 아니요. 우리가 평생동안 다녔기 때문도 아니요, 그 곳에 다니는 사람들이 좋기 때문도 아니요, 그 교회 목사님의 인격이 좋기 때문도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가 성경의 교훈과 진리에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어야 한다. 만약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가 성경이 가리치는 바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루고서라고 참된 진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를 찾아야만 한다.
이떤 분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 기독교계에 300여개 이상의 많은 교파와 교단이 존재하는데, 그토록 많은 교회들 중에서 어떤 교회가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에 세워 놓으신 유일한 참 교회인가를 아는 일이 가능합니까?”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당대의 서기관과 바라새인들로 더불어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주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doctrine, 교리)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l7). 이것이 참 교회를 찾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행하기 원한다면, 그는 “교훈”, 즉 성경의 교리(doctrine)를 먼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주님, 나는 지금 주님께 내 마음을 완전히 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르겠습니다. 혹시 내 생애에 변화를 원하신다면 나는 즐겨 그 변화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또한 이런 질문을 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르침과 교리가 각 교단이나 교파에 산재해 있는데, 어떻게 어떤 가르침과 교리가 성서적인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정말로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놓기만 한다면, 진리를 알 수 있나요?” 선지자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은 약속과 보장의 말씀을 기록해 놓았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여러분이 진리를 알기 원하고, 진심으로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께서 진리를 보여주실 때에 기꺼이 여러분의 생각과 사상과 생애를 고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덧붙이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가납하신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spirit, 성령)과 진정(truth, 진리)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참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성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각 시대를 통해서 하나님의 유일한 참 교회를 통해서 진리가 전수되어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참된 증인이 없었던 시대는 결코 없었다. 그러므로 참 교회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조직으로 구성된 교회가 아니다. 참 교회란 비록 각각 다른 신조와 교파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진리에 마음과 생애를 바친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교회를 뜻한다. 모든 교회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충성된 남녀들을 갖고 있다. 나는 이것을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정직하고 충성된 남녀들을 하나님의 진리 속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참 교회를 찾기 위하여 자동차를 몰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어느 교회가 가장 클까?”를 살펴 보아서는 안된다. 성경 역사를 통해 참 교회는 종종 매우 작았다. 참 교회의 특성은 그 규모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에 대한 충성됨에 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진실된 마음으로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두 종류로 압축하여 묘사하고 있다.
1) 여자의 남은 무리 : 각종 상징을 사용해서 기록된 요한계시록에서 용은 마귀 곧 사단을 의미하는데(계 12:9), 마지막 시대에 사단은 여자의 남은 무리 즉, 하나님이 참 백성(참 교회)와 싸우는 장면이 요한계시록 12:17에 묘사되어 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위에 섰더라” 이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마지막 시대에 마귀가 상대하여 싸우는 하나님의 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증거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마지막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강요될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무리들에게도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14:11,12
2) 바벨론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 : 비록 잘못된 교리와 비성서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벨론이 되어 버린 교회 속에도 나름대로 진리를 굳게 붙잡고 양심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그들을 바벨론 교회들로부터 불러 내어 하나님의 참 교회와 연합하기를 촉구하시는 모습이 요한계시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하늘로서 다른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 계 18:2,4.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증거를 가진” 여자의 남은 무리들이 진리를 전파하고 참된 복음을 전하면서 바벨론의 교회들이 무너졌음을 경고할 때, 바벨론에 속해 있던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은 여자의 남은 무리들이 전하는 진리의 기별을 듣고 자신들이 속해 있던 바벨론 교회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참 교회와 연합하게 된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바이다.
지금까지 살펴 보았던 바와 같이,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참 교회의 특성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오늘날 많은 교파와 교단에서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수많은 구원론들 중에서 어떤 것이 이 마지막 시대에 여자의 남은 무리들이 전하는 구원론인가? 어떤 구원론이 요한계시록이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여자의 남은 무리의 특징과 조화를 이루는 가르침인가?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앞서, 나는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어떤 가르침이 하나님의 계명을 올바르게 다루고 있으며, 어떤 구원론이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여자의 남은 무리의 특성과 올바른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주의깊게 살펴 봅시다!”라고...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구원론, 우리는 신학적으로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얻어 구원 받는 길을 제시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여자의 남은 무리가 믿고 가르치는 구원론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특별히, 오늘날 기독교계에 난무하고 있는 잘못된 구원론이 생겨난 역사적인 배경과, 그 비성서적인 가르침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참된 성서적인 구원론과 비교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글들이 독자 여러분들의 구원과 영생에 놀라운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가르침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복음은 항상 믿음과 순종(행함) 중에서 어떤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그 균형과 조화를 잃어버리는 역사를 되풀이 해왔는데, 그 때마다 신실하고 충성스런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균형을 잃어버리지 않고 진리의 빛을 따라 그들의 발걸음을 옮기는 생애를 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크게 오해함으로 인하여 복음의 균형을 깼었던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인 가르침에 쐐기를 박고 율법의 근본 정신을 밝히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십계명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누어서 설명 하심으로써 복음의 완전한 조화를 밝히셨다. “첫째는 이것이니...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2:29~31. 율법주의의 사슬에 묶여있던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과 사랑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교회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들의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지지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요한복음 9:22. 율법주의에 붙잡혀 있던 유대인들에게 올바른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랑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능력 있는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 교회로 들어왔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율법과 사랑의 관계를 오해하기 시작하였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 사랑만을 존중하고 계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염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요한은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고”(요한일서 2:4) 라고 강력하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율법의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밝혔다.
종교 개혁 운동의 배경
사도들과 제자들의 죽음 이후, 그리스도 교회는 급속하게 세속화되고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중세기에 이르러서는 각종 의식과 예식이 교회 안에서 판을 치게 되었고, 행함과 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신앙이 정착되게 되었다. 중세기의 종교 암흑기가 그 극치에 달했을 때에는 교회가 국가와 손을 잡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교회의 배도와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는 곧 바른 말씀을 전할 수 없었다.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진리를 고수하기 위해서 용감하게 서있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의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평민들과 농민들은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으며, 오직 교회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교인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수많은 잘못된 교리들을 만들어서 교회의 조직과 특권을 강화하고 교인들을 종교적으로 학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종교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6세기에 있었던 위대한 종교 개혁운동에 참여했던 개혁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신 중보자라는 진리를 밝히 드러냈으며, 행함과 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진리를 평민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교회 안에 들어온 각종 우상들을 거절하였고, 성경을 일반 농민들도 읽을 수 있는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개혁자들의 이러한 개혁운동은 로마 교회의 견고한 아성을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진리의 빛 줄기는 사람들의 양심에 분명한 일깨움을 주었고, 사람들은 진리를 받고 기뻐함과 동시에 자신이 잘못된 가르침 속에서 방황하였던 사실을 깨닫고 놀라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교인들의 종교적 양심을 억압하였던 로마 교회의 권력은 진리의 힘에 의해서 점점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개혁자들을 교회로부터 파면시키고 화형대 위해서 불살랐지만, 개혁의 불꽃은 또 다른 개혁자들을 통하여 온 유럽으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손이 위대한 종교개혁의 길을 예비해 두셨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 저곳에서 개혁의 물결이 일어남에 따라서 교황권의 부패상은 더욱 밝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전통과 유전에 의해서 가려져 왔던 성경의 위대한 진리가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서 교회의 성직자가 주는 면죄부를 바라보는 대신에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쳐다보도록 가르침 받았다. 살아있는 믿음이 형식주의를 대신하게 되었으며,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과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보기 시작하였다. 진리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쫓겨나고 지옥에 갈 것이라는 공포의 정죄를 받았지만, 사람들의 양심에 박힌 진리의 말씀은 요동하지 않았다.
종교 개혁자들의 공적과 그들의 실수
전 유럽을 통하여 마틴 루터, 칼빈, 파렐, 벌퀸과 같은 개혁자들이 일어나서 백성들을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으로 인도하였다. 인간에게 구원을 가지고 오는 것은 로마 교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고행과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와 경험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운동의 지도자들은 로마천주교회가 가르치는 행위 중심적 신학의 오류에 대한 반발로 복음을 설명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어떤 저서에서는 행위와 순종에 대한 중요성이 믿음과 올바른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아쉬운 면을 드러내었다. 종교 개혁운동이 로마 천주교회의 오류와 부패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개혁자들의 구원론은 믿음을 강조하는 면으로 치우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마 천주교회가 고수해온 오류에 의해서 가리워졌던 단순한 믿음의 중요성을 밝히 드러낸 것이야말로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이 이룩한 가장 큰 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믿음과 순종(행함)에 대한 조화를 완전히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사실은,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로마천주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개혁보다는 교회 조직 속에 있던 부패와 타락상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는 일에 몰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놀라운 희생과 투쟁적인 개혁 운동에도 불구하고 사도들과 제자들이 전파했던 하나님의 진리가 그들에 의해서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다. 개혁자들은 어떤 교파를 세우기 위해서 개혁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을 보여줌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개혁과 부흥의 정신을 불어넣어 주고자 하였다. 한가지 아쉬운 일은, 그들 개혁자를 따르던 후예들이 선구자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계속해서 개혁을 추진했어야 했지만, 루터의 후예들은 루터 교회를 세웠고, 칼빈의 후예들은 장로교회라는 교단을 세움으로써 하나의 교파로 안주한 결과 종교 개혁운동의 정신은 중단되고 말았다.
밝아지는 빛과 개신교회의 거절
그러나 1700년대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교회에 또 하나의 위대한 개혁자를 보내셨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 웨슬레이다. 요한 웨슬러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하면서, 순종과 선한 행실은 참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맺게 되는 열매라고 가르치는 성화의 가르침을 설교함으로써, 사람들의 시선을 다시 성경의 진리 가운데로 이끌기 시작하였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구원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요한 웨슬레는 믿음과 순종의 중요성을 거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면서 묘사하였다. 그는 한 모라비아 교도의 경건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위선적인 신앙과 행위에 의존하고자 하던 모든 인간적인 면들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오직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온전히 의지해야 된다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한 후, 자신이 가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참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쳤다. 그는 엄격하게 극기하는 신앙 생활을 살았으며, 순종과 절제를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열매로서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 당시 자유주의적인 신앙에 빠져있던 대다수의 개신교회들로부터 상당한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교회의 가혹한 반대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 웨슬레가 전하는 빛을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다니던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수단을 통하여 구원을 얻고자 한다고 조롱하는 의미로 자신들에게 붙이어진 별명인 “Methodist”(방법론자) 라는 이름의 교회를 설립함으로써 종교개혁의 정신을 교파라는 장벽 안에 가두어 두고 말았다(감리교회, Methodist). 감리교회의 선구자인 웨슬레는 위대한 개혁자였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그의 뚜렷한 개혁정신과 성화에 대한 가르침은 그를 따르던 후예들에 의해서 전승되지 못하였다. 감리 교회의 출현 이후, 빛은 점차적으로 밝아져서 천주교회의 유물인 세례를 거절하고 웨슬레의 가르침과 침례의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개혁운동이 또 한번 전진하였지만, 그들 역시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자신들의 교회를 세운 선구자들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교회가 세속화된 신학적 배경과 마지막 시대를 위한 복음
그 결과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는 다시 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교가 되었고, 세속과 타협이 판을 치게 되었다. 물론, 그리스도 교회의 한쪽 구석에는 아직도 종교 개혁자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아서 전진시키는 하나님의 종들이 있지만, 그 숫자는 너무나 적어서 교회 안에 들어온 배도와 타협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리스도 교회가 요한 웨슬레의 성화의 가르침을 거절내지는 그 중요성을 잃어버린 결과로 인하여, 오늘날 교회 안에는 각종 자유주의적인 가르침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사상이 팽배하게 되었고, 율법은 십자가에서 폐하여졌다는 가르침이 온 교회를 휩쓸게 되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행함 위주의 구원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믿음을 강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십계명의 권위를 여전히 인정하였었다. 그러다가 17세기에 와서 요한 웨슬레는 거룩한 열매를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법의 권위를 한층 높이고 믿음과 순종의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십계명에 대한 미묘한 오류들이 기독교회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심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계명에 대한 순종과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율법주의자로 몰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예수 그리스도 당시와 완전히 반대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율법의 의미를 잘못 왜곡하여 율법주의로 빠진 반면에, 오늘날에는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다는 이론 때문에 교회가 도덕적으로 크게 타락하게 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이 희미해지자, 교회는 급속하게 자유주의로 흐르게 되었으며, 세속이 범람하게 되었고, 교인들은 율법을 범하는 죗된 생활을 살면서도 자신은 구원 받았다고 믿는 기만 속에 빠지게 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소위 자유주의들이 교회에 가져온 재앙들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겉으로 듣기에는 십자가의 사랑을 높이는 아름다운 설교를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십자가의 사랑이 율법을 폐하였고 지금은 새 언약의 시대이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에 제재 받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두려운 가르침을 교회 안에 퍼트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단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무효화시키기 위해서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율법에 대한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는 가르침을 교회 안에 퍼트려 놓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십자가는 율법을 범한 사람들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23. 그런데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선언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라.” 로마서 3:23.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류가 범한 죄의 삯을 치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땅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 하였던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구약시대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 양의 죽음으로 상징되었다. 십자가는 죄가 하늘의 왕인 그리스도의 죽음을 몰고 왔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두렵고 엄숙한 경고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새 언약 때문에 율법(십계명)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믿음 속에 빠져 있다. 이제, 율법에 대한 순종과 계명의 중요성은 사라지게 되었고, 사랑과 믿음이 그리스도인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인정되는 시대가 되었다. 복음을 구성하는 믿음과 순종의 균형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 또 다시 깨어진 것이다.
이 깨어진 균형을 말세에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의 주역인 여자의 남은 자손의 특징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요한계시록에 기록해 두셨다. 선과 악의 대쟁투가 종결되는 마지막 시대에 있어서 복음은 완전한 균형을 가지고 전파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완전한 복음만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여자의 남은 무리들이 가진 신앙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말세를 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한계시록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써 여자의 남은 무리의 특징인 율법과 믿음의 완전한 조화를 설명하고 있다.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quot;요한계시록 12:17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12. 독자 여러분께서는 말세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보내주신 이 빛을 따라 마지막 여자의 남은 무리에 참여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어떤 구원론을 믿으며 살아가는가? 우리가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 지를 불문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구원론 중에 어느 하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성경이 말하는 참된 구원론(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2) 율법주의의 구원론, 3) 자유주의의 구원론(신학적인 용어로는 도덕적 패배주의라고 함)
기독교 교회 역사를 뒤 돌아 볼 때, 하나님의 교회를 타락시켜온 두 가지 구원론에 대한 교리가 있는데, 그것은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 이다. 율법주의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 율법에 대한 순종과 선한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 구원의 기초를 놓을 수 있다고 믿는 매우 위험한 교리이고, 이와 반대로 도덕적 패배주의는 율법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폐지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세속적이고 방종한 상태로 이끄는데, 이렇게 믿는 사람은 죗되고 세속적인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 받은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무서운 교리이다. 사단은 이 두 교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집요하게 공격해 왔다.
사단은 유대교회에 철저한 율법주의를 투입시킴으로써, 메시야를 십자가에 달아 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와 죽으심을 통하여 초대 기독교회가 세워졌고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시작되었다. 초대 기독교회의 신앙이란, 자신의 씻을 수 없는 죄를 용서 받은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서 값비싼 향유를 사서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은 신앙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와 사랑 때문에 자신의 생애 전체를 그분의 진리에 바치게 만든 신앙이 초대 기독교회의 신앙이다. 사랑은 그 여인을 진리에 완전히 붙잡힌바 된 의의 종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막 14:9).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한 참된 가르침의 한 실례인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과 사도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회는 형식과 의무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서서히 율법주의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단은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에 천주교회를 통하여 각종 예식과 순례 즉, 행함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를 퍼뜨리는데 성공하였다. 이로 인하여 온 세상은 깊은 영적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전수되어 기독교회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초에 종교개혁운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수립해 놓은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더니 요한 웨슬레 시대에 와서는 복음과 율법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가 회복됨으로써 개신교회의 전성기를 맞이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산업혁명 이후부터 과학과 산업이 발달하고 부에 대한 인간이 욕구가 극에 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러한 세속적 흐름과 경향이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 안에도 스며들어 왔는데, 바로 그 즈음부터 그리스도 교회 안에 “하나님의 도덕률인 십계명을 범하는 생애를 살아도 구원 받을 수 있다” 는 괴이한 가르침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세속화된 교회는 성장과 번영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게 되었고, 그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교인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야만 하였다. 그래서 일부 거듭나지 못한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세상을 향하여 교회의 문을 낮춘다는 그럴듯한 명목 하에 십계명을 폐지시키거나 그 권위를 낮추는 작업에 들어갔는데, 일반적으로 이것을 도덕률(십계명) 폐기론 또는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라고 부른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그러한 노력은 이미 세속과 유행 그리고 돈이 주는 매력에 굴복한 교회들에게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타협의 결과로 인하여,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성경이 인정하는 참된 구원론 뿐만 아니라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가 함께 공존하게 되는 괴이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교회 안에 구원을 약속하는 서로 다른 신앙들이 공존하면서부터, 교인들은 미로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길 잃은 양들이 되고 말았다. “결국에는 다 마찬가지인데, 구원만 받으면 되지 까다롭게 따져서 무슨 소용입니까?” 라고 묻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양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가득 채워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이번 기사에서 우리는, 모든 교파와 종파를 초월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론을 크게 세가지로 분류하여 그 차이점을 비교할 것이며, 어떤 구원론이 성경이 말하는 참 구원론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세가지는 첫번째로 성경이 말하는 참 구원론(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둘째로 율법주의, 셋째로는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이다.
이 세가지 구원론은 서로 어떻게 다르며,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는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다음과 같은 5가지 성서적 구원론(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율법주의자와 도덕적 패배주의자는 어떠한 이해와 신앙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있는 오직 한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거듭남을 통해서 그들 속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는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하지만, 그리스도께 자신의 마음과 생애를 전적으로 바치지 않은 상태에서 즉, 더럽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고자 무모한 노력을 한다. 그들은 세상과 재물에 대한 결정적인 포기와 새롭게 거듭나는 마음의 영적 경험 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지킴으로써 의로운 생애를 살고, 그것에 대한 댓가로 구원을 얻어내려고 애쓴다. 율법주의자의 문제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의 의지와 힘을 의지하는 것이다. 연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달리는 고달픈 마라토너처럼, 결국 율법주의자들은 실패와 좌절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는데, 이것이 율법주의자들의 말로이다.
한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자신이 행한 선한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함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으며, 그분의 은혜를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고, 양심 속에서 속삭이시는 성령의 세미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런 그리스도인들 역시 실제에 있어서는 자신을 의지하면서 사는 율법주의적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율법주의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생활에 있어서는 율법주의적 경험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과 심판에 압도되어 두려움 속에서 성경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지만, 자아와 욕심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반복하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속히 그들의 시선을 십자가로 고정시키고, 자신과 같은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속죄의 은혜를 명상함으로써, 죄와 이기심과 세속적 정신을 버려야만 한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교만과 위선을 버려야 한다. 심령의 비참함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선물을 받을 수 있으며, 율법주의의 함정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말로서, 십계명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무시해 버린다. “십자가에서 십계명이 폐하여졌다. 하나님의 은혜는 율법에 대한 의무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며,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 또한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법은 지킬 필요가 없으며, 지킬 수도 없다” 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가?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은 율법의 유효성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이루리라.” 마태복음 5:17. 순종의 댓가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새겨진 사랑은 하나님의 진리에 온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도록 반응한다는 사실을 자유주의자들(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은 이해해야만 한다.
2.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감사의 정신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한다고 말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의 구원의 기초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고자 법을 지키려고 한다. 행함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행함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종교적 의무가 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8~10.
율법주의자들은 순종하고자 하는 그들의 동기와 목적에도 문제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동과,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선물로서 주어지는 구원에 대해서 깊은 감사의 정신이 원동력이 되어서 율법을 지키기 보다는, 지옥불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이기적 목적이 동기가 되어서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사실은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은 채 율법에 순종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린도후서 5:14.
자유주의자들은 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노력 자체가 율법주의라고 착각한다. 율법주의자들의 문제점은 법을 존중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법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의 기초를 놓으려고 하는데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죄의 유혹과 투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 13:24
3.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서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들을 사랑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서 잡혀온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1. 그 분께서는 죄와 죄인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다루셨다. 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지만, 그 분께서 가지고 계신 죄인에 대한 동정은 언제나 죄인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던져 주었다. 예수께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죄와 죄인을 함께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육체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엄하게 심판한다. 비록 자신들이 극복하지 못하는 죄를 다른 사람들이 범하였을 때일지라도 그것을 확대하고 정죄하는 성향을 종종 드러낸다.
자유주의자들은 죄와 죄인에 대해서 동일한 관대함을 나타낸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죄를 의도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 대해서도 “관대한 사랑(?)”을 나타낸다. 자신의 죄를 교회 앞에서 고백해야 할 죄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다음과 같은 사랑가를 부른다. “당신의 죄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무책임한 사랑의 표현은 죄인들의 마음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죄에 대한 경계와 경각심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자들의 특징이다. 예수께서는 죄인을 용서해 주시면서 동시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죄치 말라”는 말씀으로 그의 생애를 지도해 주셨다. 자유주의자들은 죄인의 생애를 관대하게 봐주는 반면에, 하나님의 진리에 굳게 서서 생애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율법주의자로 정죄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4. 하나님의 성도들은 날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의 생애를 살지만 스스로 의롭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기 1:8. 그러나 욥은 자신이 스스로 완전하다고 말하는 위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가 입으로 나를 정죄하리니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하게 여기는도다.” 욥기 9:20,21. 이러한 태도야말로 하나님의 성도들이 마땅히 가져야 되는 겸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눈을 그리스도로부터 돌려서 세상과 자신을 볼 경우에는 여지없이 쓰러지게 된다. 그러한 경우에도 성도들은 요한일서 2:1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대언해줄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율법주의자들의 경험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악은 행하는도다” 로마서 7:15,19.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극심한 좌절 속에서 외치는 율법주의자들의 절규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불행하게도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의 마음과 생애를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침으로써 얻게 되는 마음의 평화와 구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매우 엄격한 생애를 살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반복하게 됨으로써, 결국에는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실제로 적지 않은 숫자의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좌절, 비관, 자기 실망 등에 빠져서 생애를 불행하게 보내고 있는데, 이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과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엄청난 정신적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버리든지, 심한 경우에는 자살하는 극한 상황에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율법주의자들은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율법이 십자가에서 폐하여졌다는 도덕률 폐기론(자유주의)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덕적 패배주의자(자유주의자들)의 길을 걷기로 신앙을 전향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어떤 면에 있어서 율법주의자들의 경험과 유사하지만, 매우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지 못하는 점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자나 율법주의자가 모두 같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율법이 십자가에 의해서 폐하여졌다는 도덕률 폐기론(자유주의)을 믿고 있거나,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처럼 좌절감이나 신경쇠약 증세에 시달리지 않는다. 자신들의 부도덕하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무시하는 죗된 삶 속에서도 기만적인 행복과 거짓 안전감을 느끼면서 거의 완전한 자기 기만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의 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생애 때문에 자신이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놀라면서 두려워 떨겠는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혹시, 십계명이 폐하여졌으므로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형제자매들이 있는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를 부디 소홀히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5.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들의 마음에 완전한 평화를 소유할 수 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는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편 119:165
율법주의자들은 아무리 애를 쓸지라도 그들의 영혼 속에 평화를 간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육적인 마음으로는 결코 거룩한 율법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정죄에 빠져 들게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속죄를 충분하게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용서에 대한 확신도 소유할 수 없으며, 죄악에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는 영적 스테미너도 잃어버리게 된다.
자유주의 자들은 거짓 안전감에 도취되어, 율법과 성경이 제시하는 원칙에 대한 순종하려고 애쓰는 일은 율법주의자들이나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자유주의적 정신이 팽배해 있다. 자유주의가 교회 안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그 결과 각종 유행과 장신구와 짙은 화장, 그리고 각종 세속적 행습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범람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술, 담배, 도박을 즐기는 사람까지도 집사나 장로 안수를 받게 되는 회괴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는 설교와 십일금과 각종 헌금을 기억하여 철저하게 드려야 한다는 말씀은 점점 더 교회 안에서 듣기 어렵게 되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가 겪고 있는 이러한 증세들은 바로 “자유주의”가 가져온 치명적 병폐라는 사실을 직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얼마나 있는가? 예수께서 천국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신 다음과 같은 비유의 말씀은 지금도 모든 자유주의자들에게 날카로운 경종을 울려 준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태복음 13:44~46
보화가 감추인 밭의 값이 얼마였는가? 농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다. 우연하게 찾은 좋은 진주의 값은 얼마였는가? 장사꾼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다. 영생의 댓가는 자기의 옛 생애를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걷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 길로 들어서는 문을 좁은 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조심하라! 마지막 날에 그대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근거로 해서 그대들의 신앙과 생애를 심판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에게 보내는 호소
복음은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믿음과 행함 그리고 복음과 율법이 완전하게 성서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 복음만이 성도들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으며, 죄인의 성품과 생애를 변화시켜서 하늘 도성 안으로 인도할 수 있게 만든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율법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에게 올바른 복음을 설교함으로써, 그들이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로부터 넉넉히 구원해 내실 수 있는 구세주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소개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켜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아름다운 생애로 이끌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가르쳐 주도록 하자.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우리의 호소는, 자포자기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포기하고 인생을 방종과 자기 만족으로 살아가는 자유주의자들의 진영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유혹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대들의 문제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한 최선의 처방은,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생애를 명상함으로써 그대 자신의 무가치함을 깊이 인식하고, 모든 시험과 기만으로부터 완전한 승리를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간구하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을 향한 우리의 호소는, 율법과 원칙에 철저하지만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위선적인 율법주의자들을 보면서 율법을 경시하게 되는 유혹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은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자신의 생애가 나태하고 방종한 삶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경우,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순종하는 순결한 생애를 살고자 결심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때에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단의 덫인 율법주의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자신도 모르게 십계명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는 거짓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대들이 일단 율법을 경시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그대들의 생애는 아무런 원칙과 표준이 없이 표류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 세워 놓은 인생관과 철학에 의해서 형성될 것이다. 이러한 그대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교회 신앙을 애매모호하게 만들 것이다. 세상과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대가 자유주의를 고집하며 살아가는 한, 그대의 생활은 방종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영원한 파멸이라는 쓰디쓴 후회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형제자매들을 위한 최선의 처방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라는 것이다. 과연 그대들이 믿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은 폐지되었으며,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생애를 살아도 구원을 보장 받을 수 있는지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게 물어 보라. 또한 날마다 십자가와 그분의 은혜에 대해서 깊이 명상하는 일을 잊지 말라. 만일 그대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면,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을 결코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 존재하는 가련한 율법주의자들과 깊은 기만 속에서 만족한 생활을 살아가는 자유주의자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늘 왕국에 이르는 길을 분명하게 발견하게 되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어떤 사람은 자신의 회개한 과정에 대하여 정확한 시간이나 장소나 그 경로를 정확하게 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가 회개하지 않은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그가 그리스도께로 나온 단계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신으로 난 사람은 다 그러하니라.”요 3:8.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나 그 영향은 분명히 볼 수 있고, 감촉할 수도 있는 바람과 같이, 사람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사람의 마음 안에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며, 또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 사람을 만들어 낸다. 비록 성령의 역사가 소리가 없고, 감각할 수 없을지라도 그 영향과 결과는 현저하게 드러난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로와졌다면, 우리의 실제 생활이 그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는 없다. 또한 우리 자신이 행하였던 선한 행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의 날마다의 생애는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고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다른 사람들이 과거의 우리와 현재의 우리 사이에 있는 차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새로 태어나는 변화의 경험은 우리의 품성과 습관과 직장 생활에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품성은 한 순간의 선행이나 일시적인 악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인 말과 행실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없이도 어느 정도까지는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신의 덕망을 넓히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의 생애의 겉 모습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자존심이 우리로 하여금 누추하고 옹졸한 모습을 피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는 우리의 친구들의 눈에 선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악을 피할 수도 있다. 이기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너그럽고 선하게 행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가? 우리의 생각이 누구에게 가 있는가? 우리가 누구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는가? 우리의 가장 열정적인 애정과 최대의 정력을 누구에게 쏟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우리의 생각은 그분께 가 있을 것이요, 그분과 그분의 사업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소유와 몸을 다 그분께 바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닮을 것이며, 그분의 정신을 나타내고, 그분의 뜻을 행하여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기를 소원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사람에게는 성령의 열매인“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맺힐 것이다(갈라디아서 5:22).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행하던 것처럼 정욕을 따라서 행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될 것이며, 그분의 품성을 반사하며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전에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전에 사랑하던 것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교만하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던 자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될 것이다. 허영심이 많고 거만하던 자가 침착하여지고, 근신하게 될 것이다. 술을 마시던 자가 절제하고, 방탕하던 자가 순결한 사람이 될 것이다. 세상의 허영적인 습관과 유행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외모와 의복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자 하지 않을 것이며,“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게 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마음을 단장할 것이다(벧전 3:3).
참된 회개는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켜 준다. 우리는 도적질한 것들을 되돌려 줄 것이며,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가서 그분의 용서와 은혜를 받아들일 때, 우리의 마음에는 사랑이 싹트게 된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모든 의무와 책임이 어렵게 보이지 않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메워주시는 멍에는 쉽고 가볍기 때문이다. 드디어, 의무는 즐거움이 되고, 희생은 기쁨이 된다. 전에는 흑암으로 어두웠던 길이 이제는 의로운 태양에 의해서 환하게 밝아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아름다운 특징들이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서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가장 큰 즐거움이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열성이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끌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지 않은 자들은 스스로 사랑을 조작하여 만들어 낼 수 없다.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마음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새롭게 된 마음에는 사랑이 모든 행위의 원칙이 된다. 사랑은 품성을 변화시키고, 감정을 지배하며, 정욕을 제어하고, 증오심을 사라지게 하며, 정신을 고상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자신의 마음에 품으면, 우리의 생애는 즐겁고 유쾌한 것이 될 것이며,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감화를 끼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매우 조심해야 할 두가지 위험이 있다. 그 하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한 방법으로서, 자신의 행위와 힘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지키는 일을 자신의 힘으로 행함으로써, 경건하고 거룩하여지려고 하는 자는 전혀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이다. 먼저, 성령께서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자신의 열심으로 행하는 모든 일은 이기적이고 더러운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에 받아들일 때에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행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행하는 모든 행위마다 이기심과 불순한 동기로 더럽혀지게 된다.
두번째는 위에서 말했던 위험과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오늘날 기독교계에 매우 편만한 믿음인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벗어난다고 믿는 믿음을 말한다. 즉,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가 되는 것이요, 우리의 행하는 바는 우리 자신의 구원 문제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든지 지키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순종”이라는 것은 단지 외모적으로 행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행하는 봉사과 충성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품성의 표현이며, 사랑의 대원칙을 실현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된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마음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심령에 심어진다면,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실천되지 않겠는가? 사랑의 원칙이 우리의 마음에 심어져서, 우리가 창조주의 형상대로 새로워지면,“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고 하신 새 언약이 성취될 것이다(히 10:16). 그리하여 율법이 마음에 새겨지면, 그것이 생애 가운데서 실천되고, 또한 생애를 꼴지워가지 않겠는가? 순종, 즉 사랑으로 하는 봉사와 충성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참된 증거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라는 말씀과,“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요일5:3, 요일 2:4). 믿음은 사람을 순종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심정으로 순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순종의 댓가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해서는 않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음을 통하여 받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종은 믿음의 열매이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느니라.”요일 3:5~6. 이것이 참된 증거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의 감정과 사상과 목적과 행동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된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한일서 3:7. 의(righteousness)는 십계명에 표현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표준에 따라 판정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고 참람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엡 2:8. 그러나“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17. 우리는 이 두 성경절에서 은혜, 믿음, 행함, 그리고 구원에 관한 균형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오래 전에 말씀하시기를“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라고 하였다(시편 40:8). 그리고 그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시고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하셨다(요한복음 15:10). 또한 성경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르라고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한일서 2:3~6
이 글은 Peace Above The Storm 에서 발췌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행함은 율법주의이다. 믿음만이 구원을 위한 필수 요건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명될 수 있는 진리인가?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말은 우리 모두에게 믿음과 행함의 균형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하나님의 말씀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을 행(순종)하기를 거절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종종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조건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행하고, 진리 안에서 그분과 함께 동행할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분께 간구할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분의 말씀을 진지하게 행(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실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불신하여 불순종하는데, 어떻게 그분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우리의 간구에 대해서 응답해 주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고 있으면서,“믿음, 믿음, 오직 믿음만을 가져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네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그러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 허탄한 사람들아,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약 2:19-20.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생명력을 잃어버린“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우리 자신의 몫을 신실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참된 회개의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게으름 속에 눌러 앉아 있어서는 안되며, 어떤 굉장한 기적을 막연하게 기다려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기도와 기적이 우리의 의무를 대신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길 가운데 분명하게 놓여 있는 의무와 책임들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투쟁, 노력, 그리고 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행하여야 한다. 우리 모두는 이 일을 위해서, 투쟁하고 노력하며 수고해야 하며, 영생으로 향하여 있는 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깨끗한 생활과 순결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강하신 손을 뻗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성경의 원칙과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행하는 자들에게 깨끗한 마음과 순결한 동기를 주실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제자들과 사도들의 믿음을 볼 때에, 우리는 죽음의 순간까지 계속되는 그들의 투쟁과 노력과 수고를 보게 된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간증을 최후의 순간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믿음을 고수하기 위해서 싸워야 할 싸움이 있고, 기울여야 할 노력과 수고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사도 바울은 믿음을 사용하여 싸워야 할 투쟁의 심각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 12:3-4. 그대의 믿음은 죄와 더불어 피를 흘리기까지 싸우도록 우리 자신을 격려해 주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있어서, 믿음과 행함은 서로 손과 손을 마주 잡고 함께 가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 속에는 이 둘이 반드시 조화를 이루면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믿음이 없는 행함이 죽은 것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행함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선한 행위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낼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서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활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은 사랑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행함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행)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
진리 밖에 있는 믿음의 위험성
우리의 믿음은 성경의 원칙과 진리 위에 세워져야만 한다. 만일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진리 말씀의 토대 위에 올바로 세워지지 못했다면, 우리의 믿음은 인간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믿음이 진리 위에 세워져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가 성경에 소개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간증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으니”행 26:9. 바울은 자신이 잘못된 믿음을 근거로 해서 열심을 내어 일을 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까지 동조하게 되었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기 전의 바울의 믿음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바울의 믿음과 소신은 성경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강력한 소신과 열심을 다하여 행하였지만, 그의 그러한 믿음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향한 핍박으로 나타났다.
바울은 잔인한 박해 행위에 앞장서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던 것이다.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는 알지 못하고 행하였더니”딤전 1:13. 믿음이 진리 밖에 있을 때에는“알지 못하고 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 어떤 것을 믿음으로 행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믿음이 진리 위에 올바로 세워져 있는가를 성경으로 확인해야만 한다. 믿음이 진리 위에 세워져 있는가 또는 진리 밖에 세워져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결국 바울은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믿음을 진리 위에 세우게 되었는데, 그때에야 비로서 그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핍박자에서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그는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믿음을 진리 위에 세움으로써, 이 세상이나 죽음이라도 흔들 수 없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
믿음과 행함의 완전한 균형
그리스도인의 신앙 속에는 믿음과 행함이 반드시 균형지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나타나는 선한 행위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우리의 성품과 생애를 완전하게 변화시킬 것이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하늘 아버지의 뜻(성경 말씀)과 그것에 대한 순종(행함)에 대한 설명없이,“믿으라, 믿으라,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외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가르침이다. 믿음에 대한 오해가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가르침 속에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생활 속에서 편히 안주하게 만드는 위험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동의하기만 하면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우리는 다음과 사도 바울의 지적을 경시해서는 않된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2,13.
믿음을 설명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절 가운데 하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선생들아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0,31. 많은 사람들은 이 성경절을 말하면서“믿으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 말씀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균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지만, 그분의 말씀을 순종(행함)치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이 오해할 수 없게 설명되어 있다. 우리는 입술로만 진리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믿는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다고 공언하는 진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진리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생활과 성품을 통해서 증거될 만큼 활동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어쩌면 여러분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예수께서 그대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라”라는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전에 예수께서는 동일한 질문에 대하여,“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되물으셨다. 그때 예수께 질문 했던 사람은“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하셨다(눅10:25~28). 믿음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행함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마음과 정신의 법칙이다.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우리의 애정의 표현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선한 행실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가져온다. 참된 믿음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동의 뿐만 아니라 순종을 동반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참된 믿음의 결과로서 따라오는 행함과 순종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행함을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는 없지만, 참된 믿음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경건한 행실과 순종을 열매로 맺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행함의 함수 관계이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한복음 15:14.
믿음과 행함의 함수 관계를 증명하는 성경절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디도서 1:16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야고보서 2:14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야고보서 2:21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한일서 2:3-4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 1:22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요한계시록 22:14(킹제임스 한글 성경)
마태복음 22장 1~14절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비유를 사용하여 설교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당신의 복음을 끝까지 거절함으로써,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시간이 마쳐질 것과, 복음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것을 말씀하셨다.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11~14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인 “예복”에 대한 공부를 해보자. 이 비유에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예복”을 입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쫓아냄을 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복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예복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순결한 품성을 표상한다. 요한계시록 19장에는, 하늘 왕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 신부로 표상된 교회와 혼인 예식을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분께 영광을 돌리세. 이는 어린 양의 혼인식이 다가왔고 그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 이제 그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는 성도들의 의라.” 요한계시록 19:7,8 (킹제임스 영어 성경역). 이제 “예복”이 상징하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마태복음 22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혼인예식에 참석한 손님들로 비유되었지만,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순결한 교회를 상징하는 신부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식에 참석한 손님들이 입고 있는 “예복”은,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신부가 입고 있는 “흰 세마포”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예복=흰세마포). 그렇다면 예복 곧 흰세마포는 무엇인가?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는 성도들의 의(옳은 행실)라” 요한계시록 19:8. 성경은 흰 세마포를 성도들의 의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세번째 초청을 받고 하늘 왕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복”을 입고 참석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의”의 옷을 입고 참석해야 할 것을 뜻한다. (예복=흰세마포=성도들의 의)
성도들의 의(righteousness, 의로움)란 무엇인가?
순결한 흰세마포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입혀 주셨던 옷이다. 그 옷을 입은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애정과 충성을 하나님께 바치는 생애를 살았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신실한 삶을 살았다면, 그들이 입었던 의의 세마포는 언제까지나 그들을 둘러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하자, 그들과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지게 되었고, 저희를 둘러쌌던 빛의 옷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화과 잎사귀를 엮어서 몸을 가리움으로 하늘의 옷을 대신하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의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입고 있지 않는 의의 옷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선한 행위나 자선으로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가리우려고 한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공로나 행위에 의존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성도들의 의”를 대신할 수 없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여 천사들과 함께 참석할 사람은 무화과 나무의 잎이나 자신이 스스로 만든 옷을 입을 수 없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이사야 64:6). 그리스도께서 친히 준비하여 주시는 예복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늘 왕인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하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이 예복은 진실로 회개하고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만 입혀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역사의 마지막 교회로 표상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권고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의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를 쓰신 상태에서 모든 율법에 일치하는 의로운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모든 계명을 지키는 순결한 삶과 죽음을 통하여 이룩해 놓으신 그리스도의 의를 나누어 받아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성도들이 될 수 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칠 때,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에 굴복되며, 우리의 정신은 그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사로 잡히게 되어 드디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율법에 일치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말로서, 경건의 비밀을 설명하였던 것이다(빌립보서 2:5). 마음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자들만이 성품과 생애가 변화된 삶을 살므로서, 율법의 높은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게 된다.
의(righteousness, 의로움)란 무엇인가? 의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의와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죄이다. 그런데 죄는 무엇인가? 성경은 죄에 대한 가장 명백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한일서 3:4. 죄가 법을 범하는 것이므로, 의는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하였던 것이다(롬 6:6). 물론,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순종이란, 바리새인이 하는 것과 같은 외식적 순종이 아니라, 순결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한 성품은 하나님의 법과 진리에 순종하는 선한 행위로 나타날 것이고, 악한 성품은 율법을 범하고 진리를 거절하는 악한 행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에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줄 것이라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계22:12). 우리가 오직 예수의 이름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임으로써 죄에서 해방되고, 그분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 속에 품음으로써, 변화된 성품을 가지고 거룩한 생애를 살지 않는한, 구원과 영생은 보장될 수 없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했다(요일 3:24).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순결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마지막 절에서 가장 두렵고 슬픈 말씀을 대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임금의 초청을 받아서 혼인잔치에 참석하였지만, 오직 적은 숫자의 사람들만이 잔치에 끝까지 남아 있도록 허락되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손님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채 잔치에 참석하였기 때문이다.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한 사람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무성히 자라나고 있는 가라지들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이 단지 인간적인 도덕가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애를 세상에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하며, 자신의 생애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자들이다. 그들의 생애는 세상 사람들의 생애와 별다른 차이점을 나타내지 못한다. 세상이 그리스도 교회가 높이는 율법을 보고서 교회로 돌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율법을 무시함으로써 세상으로 기울어 지고 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받기를 갈망하지만,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발자취를 따라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영생의 면류관은 바라보지만, 좁은 길 위에 놓여져 있는 십자가는 싫어한다.
비유 가운데 임금이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라는 물음에 그 사람이 “유구무언”이었던 것처럼, 마지막 큰 심판날에도 의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런 핑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런 저런 핑계로 진리와 율법을 거절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지만, 그 날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게는 놀라운 빛이 주어져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구약 성경만이 주어졌지만, 우리들에게는 구약과 신약이라는 놀라운 빛이 주어져 있다. 영생을 위하여 준비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은 두번 반복되지 않는다. 세상 끝이 마쳐지려는 이 때, 예복을 입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초청이 우리 모두에게 들려지고 있다. 누가 그 부르심에 온 마음을 다하여 응할 것인가? 조심하라.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유의하라.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
이 글은 Living the Life of the Lifegiver 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