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이호우 ·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자 특집
견고한 자의식이 빚은 성찰과 울림
-김덕남 시조읽기
정희경(시조시인)
시조의 바람직한 행보는 정형미를 잘 지키면서 내용을 더욱 웅숭깊게 하는 것이다. 튼실하고 엄격한 정형의 그릇 안에서 내연을 더욱 확장해 가는 것은 시조가 가진 역사적, 시대적 사명에 충실한 것이며 더 나아가 시조의 외연 확장에도 기여하는 길이다.
김덕남 시인은 이런 시조의 행보에 그 걸음을 같이 한다. 아니, 긍정적인 생각과 적극적인 자세로 힘을 보탠다. 등단 10년 동안 3권의 시조집 (『젖꽃판』 『변산바람꽃』 『거울 속 남자』)과 1권의 시조선집 (『봄 탓이로다』)을 엮은 그의 시조는 정형에 흐트러짐이 없고 현재의 일상적인 생활에서부터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에까지 그 폭이 넓다. 그의 시조 폭 안에는 사물과 사람에 대한 애정도, 사건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도, 자연에 대한 순응의 자세도 자리하고 있어 그 깊이 또한 깊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겸허한 자세에서 출발한다.
한낮의 타는 땡볕 머위 잎이 축 처졌다/
개미는 그 그늘에 집을 짓고 새끼 친다/
나 문득 의심스럽다, 그늘 된 적 있는지
-「그늘 - 숙맥일기 · 5」 전문
김덕남 시인의 연작 시조 「숙맥일기」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자신을 일컬어 ‘숙맥’이라 지칭하는 것과 시조를 ‘일기’로 쓴다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어 시조를 일기처럼 쓰는 시인, 김덕남 시인이 지향하는 시조의 길이다. 소박하지만 꾸준하고 강한 시인의 모습을 닮았다.
“축 처”진 “머위 잎”과 “개미”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는 마치 자화상을 그리는 행위와 같다. 그 자화상에는 자기반성이 깔려 있다. 그런데 이 시조에서 “그늘”을 만든 “머위 잎”의 행위는 “개미”를 위한 적극적인 행위는 아니다. 오히려 “한낮의 타는 땡볕”에 “축 처져”서 만들어진 “그늘”이라면 그 “그늘”은 어려운 현실을 상징한다. “그 그늘” 즉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집을 짓고 새끼 치”는 “개미”에게 방점이 가 있는 시조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나 문득 의심스럽다, 개미 된 적 있는지”라고 하지 않고 “그늘 된 적 있는지” 라고 했을까? 그것은 ‘그늘’이 가지는 의미의 중첩 때문이다. ‘그늘’은 어둡고 힘든 현실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땡볕”을 피할 수 있는 긍정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으므로 종장에서 어려운 현실을 피할 수 있는 존재의 의미로 ‘그늘’이라는 시어를 선택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새끼를 기르는 “개미”의 의미를 “그늘”로 폭넓게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그늘”보다는 “개미”에 방점이 가 있다는 사실은 다음 시조에서도 알 수 있다.
오 저런! 걸렸구나, 새끼 찾던 어미오리
물의 뺨 후려칠수록 숨통은 조여오고
몸뚱이 파고드는 핏물
죽지에 퍼덕인다
난 엄마의 덫이었다, 가슴팍 얽어 씌운
속살을 다 파먹고 불꽃 속에 밀어버린
잘 가란 그 말을 못해
울음보만 터뜨리던
떨리는 가윗날로 옭아맨 줄 끊어낸다
그렁한 동공으로 나를 보던 청둥오리
물위로 가만 보낸다
대를 이어 살아라
-「청둥오리 - 숙맥일기 · 4」 전문
김덕남 시인의 시조에는 어머니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그런데 여느 시조와는 달리 자의식 속에 어머니가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다. 객관적인 어머니의 삶과 모습이 아니라 회한과 반성을 통해 주관적인 어머니를 그려 울림이 크고 설득력을 확보한다. 첫돌이 되기도 전에 전쟁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김덕남 시인의 성장 배경은 작품 속에 깊이 투영되어 있다. “엄마의 옷고름에 내 손목 묶어 놓고/ 이 밤 자고나면 엄마 얼굴 못 볼까봐/ “사립문 꼭 지켜야 돼”/ 끄덕이며 웃는 달”(「매파가 다녀간 날」 전문)에서처럼 “손목”을 묶었던 “옷고름”은 “엄마의 덫”이었다고 고백한다. “청둥오리”는 “개미”와 그 궤를 같이하는 시어이다. 덫에 걸린 “청둥오리”를 풀어주면서 자신의 덫에 걸린 어머니를 풀어주고 있다. “새끼를 치”고 “대를 이”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과 희생이 김덕남 시인의 자의식 속에 깊이 자리하여 “속살을 다 파먹고 불꽃 속에 밀어버린”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울음으로 보내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자의식은 「위양못」에서도 구현된다.
젖내 문득 그리운 날 위양못 찾아간다/
물속 하늘 날아가도 젖지 않는 백로 날개/
높아서 더 깊어지는 새의 길이 보인다
신음도 진통제도 흘려보낸 못물 아래/
푸드덕 깃을 치며 손 흔드는 고운 엄마/
낮아서 더 넓어지는 물의 길을 읽는다
-「위양못」 전문
“백로”로 은유 된 “고운 엄마”를 자의식의 공간인 “위양못”에서 만난다. “위양못”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신음도 진통제도 흘려보”내고 엄마가 “푸드덕 깃을 치며 손 흔”들고 있다. “높아서 더 깊어지는 새의 길”이 엄마의 길이라면 “낮아서 더 넓어지는 물의 길”은 시인의 길이라 해도 좋겠다. 시인은 엄마의 길인 “새의 길”이 보여 엄마를 그리움으로 보내드리고 엄마는 시인의 길인 “물의 길”을 읽어 편히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높은 엄마와 낮은 시인의 “깊어지고” “넓어지”는 두 길이 세로와 가로의 교차점으로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은 “위양못”이라는 자의식의 공간에서 가능하다. 이는 마치 엄마와 시인의 길이 평행일 수 없다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어 그리움의 승화가 철학적인 의미까지 담고 있다. 대구로 잘 짜인 구조가 그리움과 애틋함을 더욱 넓히고 깊게 하여 여운이 오래간다.
개미로 청둥오리로 백로로 다가오는 어머니는 김덕남 시인에게 있어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더 건강하게, 더 바르게, 더 정의롭게 살피며 살라는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일지도 모른다.
병목을 거머쥐고 그네가 들썩인다
날 수도 내릴 수도 외줄은 길이 없어
명치 끝 시린 절망을 바닥에다 쏟는다
말끔한 출근길에 인사도 깔끔하던
간간이 휘파람도 승강기를 타고 내려
거울 속 마주친 눈길 목련처럼 환했다
실직일까 실연일까 등이라도 쓸어줄 걸
맥없이 주저앉은 무릎 저린 시간 앞에
연초록 바람 한 잎이 어깨 위를 감싼다
-「거울 속 남자」 전문
흔히 거울은 자신의 심연을 비추어 보는 표상으로 존재한다. 이상(李箱)은 그의 시 「거울」에서 단절과 매개의 이중적 속성을 지닌 거울을 통해 ‘거울 밖의 나’인 ‘현실적 자아’와 ‘거울 속의 나’인 ‘내면적 자아’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조도 “말끔한 출근길에 인사도 깔끔하던” 거울 속의 남자와 “병목을 거머쥐고” 있는 거울 밖의 남자를 통해 이상과 현실의 갈등과 괴리를 보여 준다. 그리고 거울 속의 남자를 과거로, 거울 밖의 남자를 현재로 두어 현실 상황에 더 집중하고 있어 주제가 선명하다. “실직”이라는 사회현상을 깊게 성찰한 이 작품이 성공한 것은 “거울”과 “남자”라는 개성적인 소재 덕분이다.
거울 속의 남자와 거울 밖의 남자를 보고 있는 것은 물론 화자인 시인이다. 시인은 그 남자를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고 있다. “등이라도 쓸어줄 걸”을 통해 “맥없이 주저앉은 무릎 저린 시간”을 어찌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있다. 거울에 투영된 사물을 통해 자신을 본다는 것은, 그리고 반성한다는 것은 김덕남 시인의 자의식이 그만큼 깊고 단단하다는 반증이다.
중심을 꺾지 마라 네 몸은 직립이야/
뽀송송 물오르는 백화점 인턴인 걸/
배꼽에 나란한 두 손, 하늘 향해 뻗어야지
억지로 웃지 마라 선거철이 아니잖아/
돌아서면 뻣뻣한 목, 꾼들의 뒤태인 걸/
구십 도 늪에 빠질라 마약같이 혼몽한
-「구십 도」 전문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낮으로 꽃피우죠
흑백이 싫증나면 꽃분홍을 피울까요?
버튼을 살짝 눌러요, 무지개도 피니까
눈 질끈 감으면 짝퉁도 명품처럼
물오른 웃음까지 반반씩 섞을까요?
서점은 흘러간 노래 복사본이 대세죠
잃어버린 시간쯤은 카페서 찾으시길
비포든 에이포든 말씀만 내리세요
대학로 유리문마다 복사꽃이 필 무렵
-「복사꽃 피는 집」 전문
김덕남 시인의 시조에 나타난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은 그가 지닌 건강한 자의식에서 기인하며 기성세대로서의 반성과 성찰이 돋보인다. 그 자의식이 「구십 도」에서는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백화점 인턴”에게 던지는 “중심을 꺾지 마라 네 몸은 직립이야”라는 화두는 “구십 도 늪에 빠”진 “선거철”의 “꾼”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겉으로는 “백화점 인턴”에게 “배꼽에 나란한 두 손, 하늘 향해 뻗”을 것을 주문하고 있지만, 그래서 이 시대 청년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찾으라고 주문하고 있지만, 더 들어가 보면 선거철마다 구십 도로 인사하고 표를 구하나 돌아서면 목이 뻣뻣해지는 정치인들을 “백화점 인턴”에 빗대어 표현한 작품이다.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중심을 꺾지 마라”는 아니, ‘중심을 꺾지 않겠다’는 김덕남 시인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구십 도」가 직설적이라면 「복사꽃 피는 집」은 은근하다. “복사”라는 동음이의어를 활용해 유머와 위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눈 질끈 감으면 짝퉁도 명품”이 되는 세상을 향한 시인의 목소리는 마치 복사꽃처럼 “꽃분홍”이지만 그 속에 내재된 슬픈 현실이 대학로에 즐비한 복사하는 집을 통해 구현된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로에서조차 만연한 사실을 복사꽃 피는 세상으로 역설화하여 그 울림이 오래 간다.
김덕남 시인은 시조를 그냥 쓰는 혹은 짓는 시인이 아니다. 도공이 정성스럽게 도자기를 빚듯 온 힘을 다해 시조를 빚는 시인이다. 좋은 흙을 골라 모양을 만들고 유약을 발라 고온에서 구워내는 도자기처럼, 소재 선택에서 퇴고까지 온 정성으로 시조를 빚는 시인이다.
“새순”이 “톱니”가 되어 “서릿발/ 밀어올”려 “푸른 별을 동경”하는 “조선의 저 무명치마”인 「냉이」는 견고한 자의식을 가진, 시조를 온 힘으로 빚는 김덕남 시인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의 길에 “푸른 별”이 어머니로 시조로 함께하길 기원한다.
- 《개화》 2020. 제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