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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4 절기 중 6 번째에 해당하는 ‘곡우’는 음력 3월(양력 4월 20일께)에 들어 있는 봄의 마지막 절기로, 청명(양력 4월 5일께)과 입하(양력 5월 5일께) 사이에 듭니다. 태양의 황경이 30도에 해당하는 곡우를 전후하여 나무에 물이 오르고,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물이 많이 필요하지요. 이 무렵이면 봄비가 조금 내리기는 하지만 대개 봄 가뭄이 들어 농사에 지장을 주는 경우가 있답니다. 그래서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가 마른다.’(곡우에 가뭄이 들면 그 해 농사는 망친다는 뜻)는 속담이 전해지는데, 그래서 비 오기를 비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지요.
아무튼 ‘곡우 낙종(파종ㆍ곡식의 씨앗을 뿌림)’이란 말과 같이 이 때부터 볍씨를 담그고 모판을 설치하는 등 농촌의 들녘은 농사일로 바빠집니다.
농부들은 못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볍씨를 항아리에 담가 싹을 띄우고, 그것을 모판에 뿌립니다.
이 때 볍씨를 담가 두었던 항아리를 솔가지로 덮어 두는데, 밖에서 부정한 일을 당했거나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은 집 앞에 와서 불을 놓아 귀신을 몰아 낸 다음에야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또 이렇게 귀신을 몰아 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볍씨를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만약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게 되면 싹이 잘 틔우지 않아 농사가 잘못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곡우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 시대 수도였던 한양의 연중 행사를 기록한 김매순의 ‘열양세시기’(1819년)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한강 물고기 중 공지(공미리)라는 게 있는데, 큰 것은 한 자쯤 된다. 비늘이 잘고 살이 많아 회로 먹거나 국을 끓여도 좋다. 매년 3월 초(음력)가 되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미음(남양주시 와부면 미음리)까지 가서야 멈춘다.
이런 현상은 곡우를 전후하여 가장 성하다. 강마을 사람들은 이로써 철의 이르고 늦음을 점친다. ‘공지’는 곡우가 왔다는 뜻의 ‘곡지’(穀至)라는 말이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곡우에 대한 유래와 함께 시절 음식에 대해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와 함께 곡우 무렵에는 흑산도 근처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들이 북쪽으로 충남 격렬비열도 부근까지 올라옵니다. 이 때 잡은 조기 ‘곡우 사리’는 살이 적지만 연하고 맛좋아 아주 인기가 있었답니다.
곡우 무렵은 또한 나무에 잎이 피기 시작하면서 물이 가장 많이 오르는 시기입니다.
이 무렵이 되면 산에 올라 나무에 상처를 내어 거기서 나오는 수액을 받아먹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주로 다래덩굴이나 박달나무ㆍ자작나무ㆍ거제수나무 등에 받은 이 수액을 마시면 잔병이 없어지고 몸에 좋다고 하여 ‘약수’라고도 불렀는데, ‘곡우물’이라고도 했습니다.
곡우물을 채취하는 나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지리산 아래 구례 등지에서 자생하는 거제수나무입니다. 1000 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지리산 약수제’도 바로 이 거제수나무의 수액을 받아 산신령께 바치고 한 해의 평안과 건강을 기원하는 제사로,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경칩 무렵에 나오는 고로쇠 물은 여자 물이라 하여 남자들에게 좋고, 곡우 무렵에 나오는 거제수 물은 남자 물이라 하여 여자들에게 더 좋다고 합니다.
이처럼 24 절기의 하나인 곡우를 전후로 하여 채취되는 수액은 미네랄을 비롯한 무기물이 풍부해 위장병ㆍ신경통ㆍ관절염에 약효가 있대요.
1 년 농사를 위해 못자리 준비로 한창 바쁜 이 시기, 우리 조상들은 곡우물 한 모금도 기쁜 마음으로 마시며 힘든 농사를 견디고, 가족의 건강과 풍년을 하늘에 기원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