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rine'
영어로 성지를 나타내는 단어다. 보통 일본의 신사나 각 문화권 마다 성스러운 장소 또는 사원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로 문득 이번 여행기를 구상하면서 떠오른 단어로 보통 그 나라 마다 깃든 이념과 생각들을 느껴볼 수 있는 곳에 이 단어가 활용되는 듯하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삼봉 정도전과 함께 고려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옮기면서, 성리학의 이념을 담아내고자 경복궁 주변으로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직단'과 조상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는 공간 '종묘'의 위치를 신경 썼다고 한다.
더불어 매주 토요일은 해설사 없이 자유롭게 종묘를 돌아볼 수 있는 날! 이미 여러 차례 다녀왔던 곳이지만 개인적으로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가슴 벅찬 기분을 느끼며 40분 만에 종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날씨가 참 흐린 날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결제하고 안으로 들어와 보니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성인 기준 입장료 1,000원을 내고 안으로 들어오면 종묘의 정문 '외대문'에서 부터 정전과, 영녕전으로 통하는 돌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운데로는 조상신이 지나다닌다는 길과 양쪽으로 왕과 신하가 제례를 위해 오가던 길이 깔려있데, 종묘에 머무는 동안 그에 맞게 걸어보기로 한다.
(1) 경복궁보다 앞서 세워진 조선 왕조의 상징
1392년 조선이 문을 열고 1394년 한양(지금의 서울)을 도읍으로 지정함과 동시에 그 해 10월 종묘를 짓기 시작해 약 1년 만인 1395년 9월에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그 중요성은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을 법 한 "종묘와 사직을 보존 하시옵소서" 대사로 전해지고 있는데, 조상의 영혼을 모시는 공간답게 화려한 색상과 장식을 억제한 대신 장엄함과 엄숙함을 느낄 수 있도록 완성했다.
외대문 바로 앞에 있는 인공 연못에 비춘 나무의 반영과 공간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엄숙함 때문에 절제 그리고 곳곳에 식재된 나무들과의 조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작년 가을 즈음에 약식으로 야간 종묘제례악 행사를 볼 기회가 있을 때 서울 중심부에서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종묘로부터 선물 받았던 그 순간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갔다.
(2) 조선 왕조의 심장부에서 만나보는 고려의 왕?
종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 왕조의 심장부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로 중요한 곳이다. 하지만 그런 곳에 보란듯이 고려 제31대 왕이었던 공민왕을 모시는 신당이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이걸 자료로 접했을 때의 그 의아함은 아직도 생생하지만, 종묘에 찾아 그 실체를 확인했을 때도 너무 신기했다.
공민왕은 당시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부단히 노력했던 고려의 제31대 군주로 당시 그 인물 중 한 명으로 이성계를 발탁한 당사자라는 사실을 자료 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는데, 훗날 조선을 세우고 자신을 중용한 공민왕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그의 자주 정신을 높이 평가해 종묘에 신당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3) 재례를 준비하는 공간 '재궁'
그렇게 오랜 기간 궁금했던 궁금증을 여행기를 준비하며 털어버리고 정전으로 들어가기 전 조선 왕조 당시의 왕과 왕세자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왕실 일가가 재례를 준비하는 공간, '재궁'으로 향한다. 재궁을 감싸안는 듯 식재된 나무들 덕분에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임금과 왕세자가 제례가 열리기 3일 전부터 매일 목욕재계를 하며 하루 전 머물던 공간이다. 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임금이 머물던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 서쪽에 임금이 목욕하던 '어목욕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좀 더 다가가 살펴보면 건물의 용도를 짐작케 하는 것들이 걸려 있었고, 제사 당일 임금과 세자는 서문으로 나와 정전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고 한다.
잠시 이곳에 앉아 정전으로 들어가기 전 그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시간을 그려본다. 적막감이 감돌며 종묘에 들어와서도 가장 조용한 공간으로, 사색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었다. 정전으로 들어가기 전 그들과 호흡을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서서히 몸을 일으켜 정전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4) 종묘의 중심 건물 '정전'
재궁을 나서 정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이 바로 보인다. 연중 보랏빛을 뽐내는 맥문동과 나무들 사이로 궁금증을 자아 내는데 길을 따라 들어가기 전 문득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들로 보이는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종묘제례에 올릴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제물, 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하던 곳으로 그 옆으론 물을 길을 수 있는 우물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가까이서 보니 여전히 물이 고여 있었고 행여나 있을 사고를 미리 막고자 접근을 막아뒀다.
그렇게 동문을 돌아 안으로 들어가니 정전의 그 웅장한 모습을 고스란히 마주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종묘를 찾을 때 특히 정전에 들어설 때는 항상 이유모를 소름이 온 몸을 감싸 안는걸 느낄 수 있었다. 이 공간에 조선 왕조 518년의 역사가 잠들어 있음과 동시에 제례를 위한 단을 쌓아 그 웅장함을 배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이곳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이유기도 하다.
1년에 종묘 정전의 문이 열리는 건 딱 2번, 매년 5월과 11월에 열리는 종묘대제 행사 때뿐이라고 한다. 서울에 올라와 7년을 살고 있지만 나 또한 종묘 정전의 문이 활짝 열리는 모습을 아직 보지 못했다. 특히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5월의 종묘대제가 미뤄져 오는 11월 7일에 종묘대제가 예정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그 모습을 직접 만나보자.
조선 왕조 518년의 역사를 이끈 27명의 왕 중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25명의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진 곳으로, '태묘' 라고도 불리는 정전과, '미니 정전' 이라고도 불리는 영녕전에 나뉘어 모셔져 있다. 특히 정전에 모셔져 있는 신주는 태조를 비롯한 공덕이 높은 19명의 왕과 그의 왕비들만 모셔져 있다고 하는데 문득 그 기준과 각각의 사연들이 궁금해 진다.
(5) 종묘에 신주가 없는 왕 '연산군' '광해군'
왕이 세상을 떠난 후 삼년상을 치른 다음 묘호를 받게 되는데 연산군과 광해군은 그 묘호를 받지 못해 종묘에 신주가 없는 왕도 있었다. 그 두 주인공은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과 15대 왕 광해군이다. 각각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을 통해 쫓겨나고 만다.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궁에서 내쫓고 죽였다는 이유를 들어 아버지의 후궁들을 죽이고 할머니인 인수대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포악했던 군주로 결국 폐위 후 강화도로 유배를 간 후 두 달만에 역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다.
광해군의 경우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14대 왕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 강화를 명분으로 자신의 동생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유폐 시켰다는 것에 명분으로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에 의해 폭군으로 낙인, 폐왕의 수순을 밟고 제주도로 쫓겨난 후 종묘에 신주가 없는 왕으로 남게 되었다.
이런 실제 있었던 이야기 들과 종묘를 함께 돌아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가만히 사색을 통해 종묘의 매력을 만끽하고 있는 나 자신을 자각할 수 있었다. 퇴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쯤 하기로 하고 서둘러 미니 정전이라고도 불리는 '영녕전'을 보러 갔다.
(6) 제2의 정전, 영녕전
정전이 처음 세워졌을 당시 7칸 짜리 건물로,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신주를 모실 공간이 부족하게 되자 정전 서쪽에 영녕전을 짓도록 하는데 사진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영녕전' 이다.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곳으로, 정전의 '태묘'에 이어 '조묘'라고 불리기도 한다.
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왕위나 재위 기간이 짧았던 왕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곳으로, 얼핏 보면 정전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중앙 태실 부분이 한 단 높게 돌출되어 있는 것을 시작으로 지붕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정전의 웅장함과는 별개로 편안함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영녕전에는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신주가 모셔져 있었다.
조선의 6대 왕 단종은 자신의 숙부 당시 수양대군 7대 왕 세조에게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죽었기 때문에 종묘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200년이 지난 후 숙종에 의해 정식으로 복위될 수 있었고 이때 단종이라는 묘호와 함께 영녕전에 추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전보다 아담한 규모 덕분에 편안함이 느껴지는 공간이 순간 서글픔과 억울함이 공존하는 곳으로 변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종묘의 모든 공간을 돌아보고 폐장시간이 다가와 밖으로 나가기 전 크게 뒤쪽으로 한 바퀴를 돌고 나서 정전 방향 쪽으로 돌아 나와 종묘 밖으로 나서 본다. 주로 서울과 수도권 주변으로 널리 퍼져 있는 조선왕릉들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이곳 종묘에서 함축해서 만나본 듯한 기분이 참 묘함과 더불어 서울 속 도심과 단절된 고요함을 넘어 적막감마저 드는 이 공간이 다시 한 번 참 마음에 든다 라고 생각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라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그곳에 발딛고 사는 사람들의 대한 삶의 방식 또한 존중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밑바탕이 되지 못한다면 이 말이 나올 수 없을것 같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더욱 그 부분을 잘 반영하고 있는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인도의 타지마할,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중국의 만리장성, 이탈리아의 콜로세움 등 그곳 문화의 특성을 잘 반영하면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잘 담고 있다는 생각이 갈수록 확고해 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국에 퍼져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담기 위해 작년 10월에 가족들과 다녀온 한라산을 또 올라가야 하는 상황에 부닥쳐 있어 참 난감하기도 하지만 나름의 목표를 달성하고 난 후 여행기 목록을 보고 있다 보면 참 뿌듯함도 배가 되어 돌아올것 같다는 생각이 함께 이번 여행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