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금규(金閨 궁중)에서 나와 어화원(御花苑)에 이르러
높이가 한 길이 되는 귤나무가 결실이 매우 많은 걸 보고 원리(苑吏) 더러 물으니
“저건 남주(南州) 사람이 바친 것입니다. 아침 마다 염수(鹽水)를 그 뿌리에 주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 번성 한답니다” 하고 대답했다.’
고려 시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정원 관리자와 나눈 대화가
그가 쓴 파한집(破閑集)에 보인다.
귤은 그 원산지가 중국 중남부에서 인도에 이르는 아시아 대륙 동남부와
그 주변에 있는 여러 섬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들어와 주로 제주도에서 생산되어 왔다.
조선시대 까지 매우 귀한 과일이었다.
고려사에는 476년(백제 문주왕 2년) 4월 탐라국으로부터 공물을 받았다는 기록과
1052년(고려 문종 6년) 탐라에서 세공으로 바쳐오던
감귤의 양을 100포(包)로 늘린다고 했으며,
1392년(태조 1년) 조선 태조실록에는 그때까지 상공(常貢)으로 받아오던
감귤을 별공(別貢)으로 한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세종실록에는 전라도 남해안 지방까지 유자를 심어
시험 재배하게 한 기록이 있고, 대전회통에는 상벌제도를 두어 감귤재배를 장려했다.
동국여지승람의 제주목 조에 따르면, 감에는 황감(黃柑), 유감(遊柑) 등이 있고,
감귤에는 금귤(金橘), 산귤(山橘), 동정귤(洞庭橘), 왜귤(倭橘), 청귤(靑橘)이 있다고 했다.
고려의 서울이 개경이라 배워 왔다.
북방지역인 개경에서는 기온 차이로 탱자도 안 열린다.
그런데 개경 궁중 화원에 귤이 주렁주렁 열렸다고 이인로는 말하고 있다.
귤의 생산지는 제주가 한계 지점이다.
조선 영조 때의 고증학자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
연번로속집(演繁露續集)을 인용,
그가 쓴 ‘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續集) 제11권 지리고(地理考) 고려(高麗)’ 편에
강주(康州) 지역을 설명한 내용을 보자.
고려의 속군(屬郡)에 강주(康州)가 있는데,
고려에서 남쪽으로 5000리 되는 곳에 있으면서 명주(明州)와 마주 보고 있다.
강주의 이웃 군을 무주(武州)라고 한다. 귤과 유자가 생산된다.
여기서 명주(明州)는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영파부(寧波府)라 했다.
《요사》 지리지에 강주(康州)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현주(顯州) 봉선군(奉先軍)이 통할하는 강주(康州)는
세종(世宗)이 발해 솔빈부의 백성들을 옮겨서 설치하였으며,
통할하는 현은 1개이다. 솔빈현(率賓縣)은 본디 발해의 솔빈부 지역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나오는 고려 위치에 대한 설명내용을 보자.
‘그 성은 북쪽으로 숭산(嵩山)에 의지하였는데,
숭산은 그 형세가 건해방(乾亥方)에서 뻗어 내려오다가
산등성이에 이르러서 점차 나뉘어져 두 줄기가 되어 서로를 감고 돌았는 바,
음양가들은 그것을 일러 청룡(靑龍)과 백호(白虎) 줄기라고 한다. (중략)
숭산 중턱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면, 왼쪽에는 시내 오른쪽에는 산,
뒤는 등성이 앞에는 고개인데, 숲이 무성하여 형세가
마치 청룡(靑龍)이 시냇물을 마시는 형상과 같다’고 기록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 본
강주(康州) 지방의 말(言語)은 어떤 것일까?.
그가 쓴 ‘운서(韻書)에 대한 변증설’에서 추적해 보자.
‘그 후 제(濟) 나라 때에 이르러 중서랑(中書郞) 주옹(周顒)이
《사성절운(四聲切韻)》을 저술하고 양(梁) 나라 오흥(吳興) 사람 심약(沈約)이
이것을 모방하여 《사성유보(四聲類譜)》라는 책을 지었다. (중략)
강동에는 원래 오음(吳音)이 많이 사용되었었는데,
휴문(休門 심약(沈約)의 자(字))이 또 여기에다
무강(武康 무주(武州)와 강주(康州) 지방의 말까지 첨가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오직 오월(吳越)의 방언들만이 심약의 사성(四聲)에 적합하니,
이것이 어찌 온 천하에 통용될 수 있는 것이겠는가?’라 했다.
이로 보아 고려의 주 깃점은 개봉지역에서
하남성, 산동, 강소, 안휘, 절강을 아우르는 대륙 지역임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귤이 열리는 고려,
그 위대한 황제국 고려의 위치를 재 검증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한문수 2009. 4. 22. 1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