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 김동출 수필 「내가 겪은 어떤 번민」
얼마 전에 나에게 일어났던 일임을 고백한다. 날씨 화창하였던 5월의 그 날 오후 3시쯤에 걷기 운동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옆 동 아파트 입구로 잘못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일어난 일이다.
이 일은, 우리 아파트의 태생적 원인에서 기인하고 있다. 우리 아파트는 2003년 9월 6일 오후에 밀어닥친 태풍 '매미' 로 일어난 해일의 피해를 크게 본 마산만 바닷가에 있다. 2010년 4월에 입주한 우리 아파트를 시공한 H 산업개발에서는 종전과 같은 해일이 닥쳐오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를 볼 수 있는 건축 설계방안을 찾아 시공하였다. 아파트 단지 외벽에 토성을 쌓아 지하 1, 2층에는 주차장으로, 아파트 1층과 접한 상층에는 조경하여 정원으로 꾸며 어린이 놀이터와 야외 수영장, 산책 코스 등 주민들의 휴식공간을, 동(棟)과 동(棟) 사이에는 이삿짐이나 큰 화물이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내가 여러 번 이런 일을 당한 것은 부주의한 내 잘못도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우리 아파트 구조의 특성에도 그 원인이 있다.
지난 5월 중순 날씨도 화창했던 목요일 오후 3시쯤이었다. 마을 울타리 안길을 4천 보 정도 걷기 운동을 마치고, 가뿐한 마음으로 조금 전에 나왔던 우리 동(棟) 102 현관으로 귀가하려던 참이었다. 높은 층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불러내려 제일 먼저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고, 문 닫기와 층계 버튼을 번갈아 누르고 돌아서는 순간, 빳빳한 새 지폐 같은 것이 눈에 띄어 얼른 줍고 보았다.
7층으로 오르는 짧은 시간 동안 조금 전에 주운 것을 살펴보니 ‘어라, 이게 뭐지? 얼마 전에 아들이 건네준 L 백화점 상품권과 같은 도안의 「만 원권 사은품 상품권」이 아닌가!’ 필시, 본 동에 사는 어른 중 어느 분이 우리 마을과 이웃한 L 백화점에 다녀오면서 흘리고 간 게 분명하였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 잃어버린 주인을 공개적으로 나서 찾아 줄 수도 없으니 「‘내가 가질까 보다.’ 아니야, 주인을 찾아 주어야 하나? 그런데 어쩌지 이렇게 양심과 욕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짧은 순간에 정직한 엘리베이터는 내가 누른 층 앞에 고민하는 나를 내려놓았다.
일순간 나를 번민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 문제의 상품권을 손에 쥐고 7층의 몇 호 집 앞에 닿으니 아뿔싸. 우리 집이 문 앞이 아니다. 이런 일을 여러 차례 당했기에 금방 내 잘못을 알아차렸다. 걷는데 정신이 팔려 우리 집 현관을 지나쳐 다른 동의 현관을 들어온 것이었다. 황급히 되돌아 내려오면서 또다시 나는 양심과 갈등하면서 불현듯 옛일이 떠올랐다.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여러 아이가 교실로 우러러 몰려와 내 앞에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내보이며, “선생님 화장실 앞에서 주웠어요.” 청년 교사 시절에 시골 초등학교 1학년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당장 공동 경비실에 내려가 “실장님! 금방 제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 원권 상품권을 주웠습니다. 주인 찾아 주십시오.” 그럴까. 아니면 다시 옆 동 엘리베이터 앞에다 ‘이 상품권 주인은 찾아가십시오’ 메모와 함께 붙여 놓을까? 그런데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상황은 명확하게 처리할 수 있는 그런 문제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설렁, 주인을 찾아 준다고 하여도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되레 대면하기를 꺼리는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혼란만 일으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어느새 내 양심은 꼬리를 내리고 비양심적인 내 마음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값비싼 무슨 귀중품도 아니고 지폐같이 주인을 인식할 수 있는 상품권에 불과하니 그냥 습득한 내가 가질까... 잃어버린 주인은 지금 내 손안에 있는 이 상품권을 잃어버릴 줄도 모를 테지만 현명하신 주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고 계실 것인데..., 상품권을 우연히 주운 것도 죄가 될까? 주님께서 이런 일을 만들어 내게 던져주신 뜻은 과연 무엇일까?
운동 잘하고 집에 가려던 정신 멀쩡한 나를 왜 옆 동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타게 하여 상품권을 발견하게 했을까? 문제의 상품권을 발견한 처음에는 이것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현명하신 하느님께서 나를 시험하려 드신 것일 거야’ 생각하며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러나 하룻밤 자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이것은 요즘 신앙생활에 충실하다고 주님께서 우연을 가장하여 내게 보내주신 선물이 아닐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들었다.
주님께서 내게 내려 주신 그 깊은 뜻을 헤아려 보지 못한 나는 결국 양심을 팔기로 하였다. 그날 우연히 습득한 그 상품권을 그 주중에 생필품 구매에 보태어 쓰고 말았다. 대신 상품권 주인의 허락도 받지 못하고(?) 상품권에 상응한 금액을 보태어 주일날 헌금하였다.
이상은 「화창한 어느 봄날에 정신 놓은 내 탓에, 다른 옆 동의 아파트에 우연히 들어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습득한 만 원권 상품권 한 장으로 며칠 동안 갈등 속에 남모르게 번민하였던 나의 비밀 이야기」이다.
내가 주운 상품권은 기실 백화점에서 발행한 무기명 유가증권의 하나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론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만원짜리 지폐 한장 주운 것과 마찬가지일테다.
그러기에 혹자는 이렇게 유치 찬란하고 부조리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내밀한 문제를 글로 올려 쓴 나의 이야기에 저으기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글을 쓰고 나니 체증이 내려간듯 마음 속이 후련해진다.
2023-06-05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공감 만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