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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修證論의 종교학적 이해와 體用論 연구
A Study of Zen Soteriology
and Essence-Function Theory
金 一 權 (Kim Il-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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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차 례│■
1. 서론
2. 禪修證論의 종교학적 접근
1) 불교의 종교경험
2) 見性의 종교경험 구조
3) 解悟와 證悟의 同異 문제
3. 선불교의 體用論
1) 禪門正路의 體用論
2) 禪修證論의 聖俗論적 이해
3) 선불교의 중점적 관심과 衆生 함의
4. 體用論 이해의 다양성
1) 佛性論의 聖俗論적 이해
2) <二諦合明中道說>의 不二論과 非不二論
3) 體用論의 역동적 운용과 제3의 관점
4) 불교의 제관계구조와 體用論의 원용
5. 결론
禪修證論의 종교학적 이해와 體用論 연구
1. 서론
닦음[修]과 깨달음[證], 이 두 주제는 종교적 삶의 얼개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씨줄과 날줄의 상호 연관 속에서 그물이 제구실을 하듯이,
불교인의 종교적 삶은 이 닦음과 깨달음이라는 두 구조 속에서 삶의 網을 엮어간다.
불교는 깨달음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轉化시키고,
닦음을 통하여
종교적 삶을 전개시킨다.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적 삶의 구조는 이와 같이 이념과 실천이라는 두 얼개를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이념에 따라 실천의 양상이 달라지지만, 실천의 과정 또한 이념을 규정하기도 한다.
전자 측면은 불교의 여러 종파들이 보여 주는 실천방법론의 상이함을 설명해 주며,
후자에서 불교의 이념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이유의 하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여러 종파들이 성립되는 배경을 이 이념과 실천이라는 두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하겠지만,
이념의 문제와 실천의 문제는 어느 정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불교의 이념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 보면,
이 구별의 필요성을 금방 느낄 수 있다. 불교의 이념은 成佛, 깨달음[覺], 중생 구제 등등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
어느 것이 진정한 불교의 이념인가?
그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중점적 관심’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에 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대개 한 사상은 그 독특한 ‘중점적 관심(central concern)’을 갖게 마련이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표현될 때도 그에 상응하는 고유한 ‘윤리적 태도(ethical attitude)’를 갖게 마련이라고 할 때,
대승불교의 이념이 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면 선불교가 집중하는 관심은 究竟覺의 證得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실천 노선의 성격도 많이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는데,
적어도 보살행이라는 중생 교화의 논리가 선불교체계의 중점적 관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 준다.
이것은 선불교적인 불교 이해로 불교의 사상 및 역사를 일률적으로 재단하는 것이 지니는 위험성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 일반과 후기 대승불교격인 선불교가 지니는 중점적 관심의 차이를 승인한다는 것은,
그들 각각의 修證論과 어떠한 연관을 지니는가?
그리고 그 수증론 구조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수증론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본고는 이렇게 불교의 修證論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의 천착에 관심을 모은다.
이 修證論은 기본적으로 불교의 종교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먼저 이 경험구조에 대한 종교학적 분석을 시도하며,
이를 통하여 파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시 불교 교리의 한 중요한 설명 기제인 體用論으로 접근함으로써,
불교 수증론이 보여 주는 다양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대승불교 일반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하지 못하고 필요에 따라 선불교와 대비시키는 점 등은,
본고의 관심이 선불교에 모아져 있는 까닭에 피하기 힘든 한계점으로 지적될 것이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본고는 수증론이 지니는 다양한 이해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선불교체계를 불교 전체의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의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체용론의 다양한 운용은
선불교와 대승불교의 수증론의 구조 차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
2. 禪修證論의 종교학적 접근
1) 불교의 종교경험
頓悟漸修論․
頓悟頓修論 등의 頓漸論은 선불교의 ‘
종교적 신념체계(the belief system)’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이때 ‘종교적 신념체계’란 그 전통이 자라나고 처한 역사적․문화적 토대 위에서 독특하게 이루어지는
①신념의 내용(contents of belief)과, 이를 수용하는 태도의
②신념 형식(form of belief)이라는 두 요인의 복합적인 구조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신념의 형식은 절대가치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선험적이고 존재론적인 추구 본성,
곧 인간의 실존적 제약성을 극복하고 삶의 정신적 완성을 추구하는 근원적 열망(primordial human yearning)이 표현된 것이다. 예컨대, 祈福的인 形式은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구체적인 문제를 他者의 힘을 빌려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이며,
求道的 形式은 인간 존재의 실존적 제약성을 자기 자신 안에서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태도이다. 이 노력은 자아의 삶의 자세를
변형시키고 현세적 조건과 삶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재해석하여,
자신과 사회와 우주가 하나의 원칙에 의해
동일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는 신념,
곧 우주론(cosmology)적 질서 내의 진리에 대한 인식을 병행시킨다.
대승불교 일반이
이러한 기복적인 태도나 구도적인 태도를 모두 수용한다면,
선불교 전통은
구도적인 형식의 한 典型을 보여 준다.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태도에 이러한 변별점이 있다는 것은,
선불교가 기존의 불교 전통에서 기복적인 요소를 배제하기 위하여 어떤 선언적인 작업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기복적인 태도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 길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 선언은 선불교의 대전제가 ‘내가 이미 부처이다.’라는 명제로부터 출발하는 것과 상통한다.
이 명제가 선불교에서만 독특한 것은 결코 아니다.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 중 하나인
大涅槃經은 ‘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衆生佛性思想을 도처에서 보여 주며,
大乘起信論 또한 중생의 無明이 永盡하면 究竟覺에 常住한다고 한다.
이렇게 선불교의 전제는 여래장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大乘사상은 이 명제에 이르는 길이 다선적이다.
그것이 對機說法의 방편상일 뿐 본래의 종지가 아니라고 하든 안 하든
간에, 부처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었다.
지장보살의 서원처럼 구경각에 이르는 길을 접어두고 중생 구제에 더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부처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
대승불교의 슬로건이라고 하는 ‘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명제가 분별적인 것이라고 비판받을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생 구제의 菩薩行은 수많은 보살신앙의 융성이 보여 주듯이 매우 고귀한 희생 태도로 중시되었다.
이러한 史實들은 佛敎의 목적이 구경각을 증득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일 수 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또한 구경각에 이르는 체험의 형식도 천태종, 화엄종 등 여러 불교 종파가 독자적으로 구축해 놓은 이론체계에 따르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와 같이 이념과 방법론이 다양하다는 것은 불교의 종교체험 역시 다양하게 경험될 수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왜냐하면, 종교경험이란 이념과 실천의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경험이 종교경험일 수는 없다. 어떤 경험이 종교경험으로 전이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을 종교적 맥락에서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체계, 곧 종교적 세계관 혹은 신념체계가 수반되어야 한다.
有神論 전통의 종교경험이 절대 타자가 전제되는 누미노제(Numinose) 혹은 聖顯(hierophany)으로 설명된다면,
불교의 종교경험은 자아 밖의 존재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아 안에서 절대진리를 발견하는 우주론적 法悅의 경험으로 설명된다.
이런 종교경험의 두 유형은 다른 두 종교적 세계관 안에서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와 같이 어떤 종교경험은 이를 설명해 주는 신념체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하자면, 이론체계가 다르면 그 경험은 동일한 경험 맥락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이런 분석 틀을 상이한 전통 사이가 아니라 불교 전통 내에 적용하더라도 마찬가지 결과를 낳는다.
천태종의 法華三昧나
화엄종의 海印三昧,
진언종의 念佛三昧,
달마선의 一行三昧 등은
동일한 불교의 종교경험을 말하는 것이면서도,
각각이 내세우는 경험 방식은 같지가 않다.
염불삼매는
부처님이라는 절대자의 他力을 매개로 하여 열반에 이르는 방법론을 제시하며,
해인삼매는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보여 주는 것과 같이 求道者의 끊임없는 세간 경험을 통하여 삼매에 이르는 방법론을,
법화삼매는
摩訶止觀의 禪定을 통하여 一念三千의 空觀을 증득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론을 내세운다.
일행삼매는
중생의 佛性을 깊이 믿고 壁觀에 확고히 머물러서 차별과 상대의 입장을 떠나 진리와 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중 他力에 의지하는 염불삼매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自力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선불교적인 경향을 지니지만,
그 禪定의 이론체계를 서로 다른 소의경전에서 구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이와 같이 적어도 후대의 선불교 전통이 확립되기 전까지 불교의 종교경험에는 여러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는 다양성이 허용되어 있었다.그러나 선불교에서는 ‘見性’의 경험만을 궁극적인 종교경험으로 규정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見性’을 말하는 이론체계가 아니면 禪門 정통이 아니라고 확인한다. 敎家의 것이라는 비판은 禪門에서 흔히 하는 비판 중의 하나이면서 매우 혹독한 비판이다. 그러면 이 ‘見性’은 어떤 자리를 말하는가?
2) 見性의 종교경험 구조
‘見性’이란 개념은 유교의 ‘養性’과 대비되는 독특한 불교적인 특성 중의 하나이다.
성품을 본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는 문제는 불교 세계관의 핵심과 연관되기 때문에 결코 쉽게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더구나 선불교가 말하는 見性은 선불교의 종교적 신념체계와 종교경험 구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동하여 있다.
이 말은 불교사상사에서 똑같은 見性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더라도, 그것이 지니는 함의와 용법이 결코 같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이와 같이 見性을 중심으로 불교사상사를 분석하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겠지만, 여기서는 선불교에 국한하여,
그리고 性徹의 禪門正路에서 말하는 見性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見性이라는 말이 지닌 컨텍스트의 특성은 ‘見’에 있다.
‘養’性이 아니라 ‘見’性인 데에 불교적인 특성이 묻어 있다.
‘본다’는 말이 五感의 하나인 眼識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心識을 통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唯識學은 見性의 종교경험을 설명하는 이론적 배경이 된다.
唯識學의 認識論은 見의 주체인 心識을 매우 세분하면서 동시에 心識의 대상인 無明을 세분하여
枝末無明과 根本無明으로 나누었다. 지말무명은 有分別인 六種麤重이며, 근본무명은 無分別인 三種微細를 지칭한다.
이렇게 心識의 분석에 치중하는 것은 유식의 기본 관점이 미혹의 현실에서부터 진여를 고찰하는 順觀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반대로 逆觀의 태도란 法身 혹은 眞如의 입장에서부터 현실을 들여다보는 방식이다.)
현실적으로 범부의 마음은 번뇌로오염되어 있으며, 따라서 자성청정심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유식사상계의 해심밀경은 五性 各別을 주장하는데, 초기 대승불교의 성문․독각․보살승이라는 3승설에다
일천제(無佛性)와 不定種性(未定된 種性)을 추가하여 그들 각각에 차별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오성 각별과 유사한 차별 논리가 성철의 수행이론에 나타나 있다.
六麤는 七地 이하의 일체중생에,
三細는 八地 이후의 自在菩薩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微細無明인 제8아뢰야식까지도 滅盡한 無餘열반의
佛地만이 진정한 究竟覺이며 無念이며 無心인 동시에 見性의 자리임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유식학을 통해서 개념화되는 見性의 자리는 微細妄念인 根本無明을 여읜 상태를 경험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미세망념을 여의었으므로 견성을 얻은 것이 되며, 그런 상태가 常住하는 것을 이름하여 究竟覺이라 한다.’고 하고,
‘이 자리에 이르러서는 無明이 永盡하고 歸一心源하여 起滅動搖하는 것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見性을 얻었다 하며,
이런 마음 상태가 常住하여 더 나아갈 곳이 없기 때문에 究竟覺이라 한다.’라고 하듯이,
見性의 성격은 窮極性과 常住性이라는 두 속성을 내포한 究竟覺이라는 개념 틀로 전환되어 해석된다.
이때, 궁극적이라는 한정사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는 명제를 전제한다.
깨달음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解悟이며,
또 하나는 證悟이다.
해오는 始悟이며 증오는 終入이라고 하는데,
전자가 禪門의 길로 들어선 初發心 단계에서 겪게 되는 종교경험을 말한다면,
후자는 불교의 종교경험 중 더 나아갈 곳이 없는 궁극적인 단계에서 겪게 되는 종교경험을 말한다.
이를 종교학적으로 설명하면, 해오의 경험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俗(profane)의 세계를 떠나 聖(sacred)의 세계를 살아가겠다는 종교적 삶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정하는 回心(conversion)의 경험을 가리키는 반면, 증오의 경험은 聖의 세계 안에서
자신을 궁극 존재와 일치시키는 경험이다.
3) 解悟와 證悟의 同異 문제
그런데, 禪修證論의 證悟와 解悟의 관계는
大乘起信論에서 제기한 本覺과 始覺의 同異 문제와 유사한 대비 구조를 지닌다.
그 둘을 동질세계로 보려는 것이 頓悟漸修의 입장이라면, 頓悟頓修의 입장은 이를 차별시키려 한다.
전자의 관점에서는 그 양자를 동질화하기 위해 本覺과 始覺의 회통론 마련에 매우 고심하여
결국은 初發心이 곧 究竟覺이라는 역설을 승인하기에 이른다.
그 반면에 단박의 깨침만이 있을 뿐이라는 돈오돈수의 관점은 覺이라면
究竟覺일 뿐이므로 始作 혹은 轉換의 의미가 짙은 始覺의 覺을 구경각이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모자라는 구석이 있는
解悟에 불과하다고 본다. 따라서 始覺의 覺은 아직 철두철미한 覺章이라고 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리게 된다.
그러나 중생이 전제되지 않는 본각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으므로
그 본각을 속제의 개념 틀로 이끌어 올 필요성이 요청된다.
이에 속제에서 본각의 자격을 대신할 수 있는 개념이 바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始覺을 始라는 전환의 시점에 주목하는 것은 始覺의 의미를 제한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을 취하는 것이 돈오점수론이다. 이것은 마치 부처님을 더욱 절대적인 인격신으로 퇴위시키고(Deus otiosus)
좀더 손쉽게 중생에게 다가설 수 있는 菩薩들(tangible gods)을 통해서 부처님을 대하는 보살신앙처럼,
本覺을 궁극적인 자리로 퇴위시키고 始覺을 통하여 그 본각의 자리를 대하려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기신론은 중생심의 배경인 심생멸문에서 무구청정인 심진여문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始覺의 四位(不覺, 相似覺, 隨分覺, 究竟覺)라는 수행단계론으로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돈오점수론은 解悟를 긍정하는 맥락에서,
解悟라는 사태는 단번에 일어나지만 수행은 漸修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究竟覺의 證悟는 이 解悟의 관문을 넘어서면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解悟가 證悟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始覺은 本覺과 다른 界가 아니다.
이렇게 始․本 二覺의 不二論을 주창하는 것은 돈오점수의 중심 사상이
‘漸修’, 곧 順觀의 수행론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신론은 또한 ‘本覺이란 명칭이 생멸문 중에는 있지만 진여문에는 없다.’고 하는
전혀 새로운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는 앞에서 애써 역점을 둔 始覺, 本覺의 논리 구조가
중생의 不覺章에서 접근해 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다.
바로 이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頓悟頓修의 논리 구조이다. ‘頓悟라면 頓修이다.’라는 선언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접근된다. 돈오점수의 관심은 돈오가 아니라 漸修에 있지만,
돈오돈수의 주된 관심은 頓悟에 있다.
이때의 頓悟는 本覺의 究竟覺을 지칭한다.
따라서 바로 이 究竟覺을 말할라치면, 頓修이지 않으면 안 된다.
漸修나 解悟의 자리는 不覺章에서 마련된 것이기 때문에 本覺章에서 건립되는 내용이 아니다.
이러한 측면은 見性의 수식어로 頓을 도입하는 것과 관련된다. ‘만약에 佛性을 頓見하면 一念에 成佛한다.
’ 혹은 ‘견성을 하면 當下에 究竟無心이 現前한다.’라고 하여, 見性의 자리를 頓적으로 접근시키는 것은 그러한 예이다.
진제의 관점에서는 本覺일 뿐, 어떠한 수식이나 형용도 불가하는 戱論寂滅의 세계를 말할 뿐이다.
그런데 중생계에서 그러한 頓見的 體系를 소통시키는 방법이 여의치 않다. 그 방법이 희론적멸적이면 모르되,
중생계에 발언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중생계에는 그런 담론체계를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계에 頓見的 문제의식을 던지려 한다.
見性의 자리를 매우 신비화시키는 이해는 그런 고심의 흔적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究竟覺 그 자체의 비환원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微細無明인 제8아뢰야식까지도 滅盡한 無餘열반의 佛地만이
진정한 究竟覺이며 無念이며 無心인 동시에 見性의 자리임’을 말하는 것은 그러한 맥락이다.
이렇게 解悟와 證悟를 同으로 보든 異로 보든 간에 悟에 두 가지 성격이 있음은 인정된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관점에 주안점을 둘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서로 상반된 입장은,
일단 見性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見性을 구경각의 證悟로 보는 관점은 見性이라는 종교현상의 구조적 분석(phenomenological structure)과
아울러 그것의 비환원적 성격 규정이라는 문제에,
解悟를 수용하는 관점은 어떻게 見性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과정론(processing structure)에 관심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頓悟頓修와 頓悟漸修는 애초에 똑같은 것을 두고 달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심거리를 두고 말한 이론이므로 논쟁 성립의 정황이 충족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 서로 엉킬 수밖에 없는 것은,
선불교의 이념과 실천문제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점적 관심이 다른 사상이 그에 상응하는 상이한 실천 태도를 표명하는 것을 사상의 구조라고 할 때,
선불교 내에서 서로 다른 관심거리를 지닌 만큼 각각이 내세우는 실천방법론이 동일할 수는 없다.
더욱이 禪門의 정통성을 확인하려 들 때, 이 문제가 이념 논쟁의 성격으로 비화될 것임은 불가피하다.
서로 다른 맥락을 바탕으로 구축된 실천방법론을 공존시키지 않고 어느 한쪽을 배제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형식과 내용, 이념과 실천, 증오와 해오 등의 여러 대비 구조가 見性을 둘러싼 이해거리에 포진되어 있는데, 이를 총체적으로 혹은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대비 구조들이 불교의 독특한 不二論적 맥락에서 운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不二論은 중국 三論宗 이래 활발하게 개발되어 온 體用論이라는 논리 도구를 통하여 한층 역동적이 된다.
3. 선불교의 體用論
1) 禪門正路의 體用論
선불교의 不二論과 體用論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禪修證論의 문제 제기 배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철의 頓悟頓修는 기본적으로 修行者의 문제라고 한다. 또한 성철의 禪修證論은 ‘覺과 不覺의 엄격한 구분이 그 수증론의
핵심 전제 가운데 하나이며, 이것은 覺의 초월시 내지 신비화라기보다는 實修의 현장에서 그런 엄격한 구분이 늘 타협 없이
前提되어야만 수행의 생명이 상실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성철이 내세우는 돈오돈수의 경험 주체가 일반 중생과 구별되는 수행자 집단임을 승인한 언표들이다.
이 승인을 위해 ‘돈오돈수’와 ‘돈오돈수說’을 구분하기도 한다. 전자는 부처님의 경지이며,
후자는 아직 깨치지 못한 중생들, 곧 보통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설법이라고 한다.
이를 體用으로 설명하여 전자는 體의 영역에서, 후자는 用의 영역에서 접근되는 세계로 이해한다.
體(②)는 不二論이요,
用(①)은 二元論이 기본 전제가 된다.
또한 信章(믿음의 마당)은 不二論이요,
修章(닦음의 마당)은 二元論이다.
信章은 상식의 二元을 거부하고 不二로 일관하지만,
일관하는 바로 그때 修章이 시작되며,
修章은 다시 二元으로 돌아가 信章의 不二를 거부한다.
한 단계를 거친 修章의 二元은 信章 이전의 二元과는 다르다.
그리고 그 다음에 修章의 二元이 다시 證悟의 경지에서 不二(⑥)로 된다.
이 悟章(깨침의 마당)의 不二는 信章의 不二와는 또 다르다.
여기는 실력이 있는 不二라고 한다.
이러한 체용론을 필자가 이해한 대로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선불교의 체용론
①用의 二元論 | ②體의 不二論 | |||
③상식의 二元論 | ④信章의 不二論 | ⑤修章의 二元論 | ⑥悟章의 不二論 | |
수행자 이전 | 수행자 이후 | 돈오돈수한 자 | ||
못깨친 이의 마당 | 깨친 이의 마당 | |||
⑦體ː用이 體 노릇하는 體 (用의 體化) =깨져야 할 體 | ⑧用ː차별의실천 | ⑨體ː不二요 空이요 緣起요 中道 | ⑩用ː不二의 실천 | |
解悟 | 證悟 | |||
돈오돈수설 | 돈오돈수 | |||
일반 중생 | 제자 | 스승 | ||
俗의 삶 | 聖의 삶 |
이 도식의 역동성은 두 가지 二元論과 두 가지 不二論이 서로를 물고 무는 연쇄고리로 구조화된 데 있다.
상식의 二元論(③)은 수행자 이전의 俗(profane)의 세계로, ‘믿음’이라는 계기를 통하여 不二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 믿음은 스승, 조사, 부처에 대한 믿음이므로 종교적 삶으로 전화되는 聖化(sacralization)의 계기이다.
그런데 이때의 不二(④)는 본질상 깨쳐야 할 體인데, 用이 體노릇을 하는 假體로 이해된다.
이 假體에 대한 用(⑤)은 차별의 실천으로 드러나고,
이 마당이 修章이라고 불리는 수행자의 二元論 세계이며, 아직 못깨친 이의 단계이다.
여기서 究竟覺이라는 깨침을 통하여 다시 한번 도약하게 되는데,
이때서야 비로소 진정한 不二論의 세계인悟章의 體(⑨)로 들어서며,
그 깨침의 힘이 悟章의 用(⑩)으로 드러나不二의 실천을 산다고 한다.
결국, 信章의 不二論은 解悟에 해당하며,
悟章의 不二論은 證悟를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이 설명 틀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用의 세계와 體의 세계는 엄연히 구분되어 있으며,
不二論이라고 하더라도 用의 信章에서 말하는 것과 體의 悟章에서 말하는 것은 같은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二元論 역시 수행자 이전(아마 일반 중생)의 것과 수행자 이후에 修章에서 겪게 되는 것을
동일한 이원론의 관점으로 재단해서는 안 됨을 강조한다. 이를 좀더 거시적으로 말하면,
用과 體의 두 세계로 나누는 작업은 역시 用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분별적이란 것이다.
깨친 이의 體 마당에서는 그러한 分別이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2) 禪修證論의 聖俗論적 이해
이상의 體用法 맥락을 종교경험의 구조 안에서 이해하기 위해 종교학적인 聖俗 논리로 전환시켜 보자.
내가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이 이미 淸淨法身인 부처임을 證悟할 수 있는가?
이 究竟覺의 자리를 頓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에 동의하고 이를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일반인의 俗(profane)의 범주를 일탈한 聖(sacred)의 범주에 사는 修行者가 되어 버린다.
修行者는 선방에서 용맹정진을 하든 세속에서 보살행을 행하든,
그가 사는 세계는 중생들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행위는 聖을 경험하기 위한 方便으로 얘기될 뿐이다.
달리 말하면, 수행자의 삶은 究竟覺을 증득키 위한 목적론적 삶이 된다.
그는 信章의 믿음을 받아들이면서 겪게 되는 修章의 二元論을 깨뜨리고,
悟章의 돈오돈수를 깨치기 위해 더욱 용맹정진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전개되는 삶은 더 이상 俗의 세계가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聖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렇게 본다면, 깨친 이의 세계라고 말하는 體와 못깨친 이의 마당이라고 말하는 用의 두 영역은
모두 聖에 의해 존재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체험하고자 하는 ‘聖의 경험(구경각의 증득)’과,
그가 살아가는 ‘聖의 세계(수행자로서의 삶)’에서 말하는 두 ‘聖’은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같다면 체와 용이 모두 聖의 측면에서 말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다르다면 聖을 다시 세분하든지 體用論을 다시 적용시켜야 한다.
이 문제 천착에 앞서 聖俗論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성스러움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내놓은 R. Otto의 누미노제(Numinose) 개념이나 M. Eliade의 聖顯(hierophany) 개념이
모두 神적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이들이 聖俗 논리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絶對 他者와의 만남에서 얻게 되는
종교경험의 메커니즘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法悅적 종교경험 내용을 설명하는 틀로 聖俗을 원용하는 것에 찬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聖과 俗을 인간 삶의 두 가지 양태 또는 삶의 존재론적 두 정황을 뜻하는 것으로,
곧 인간 삶의 내면에 자리잡은 두 개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본다면,
상이한 두 전통 사이의 전제가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경우 모두 진실한 삶과 성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가르친다.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고 그 의미를 부여받는 상황 그것이 聖이며,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삶의 정황 그것이 俗이라는 견해를 빌리자면,
위에서 말한 修行者가 되는 순간부터의 삶은 분명 聖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된다.
信章, 修章, 悟章이 모두 聖의 세계에서 이야기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위에서 말한 體用論 적용이 간과한 어떤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먼저, 이상의 체용론 시각이 철저하게 수행자 중심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데 있다.
‘깨친 이의 體用과
못깨친 이의 體用은 그 내용이 서로 달라 이중적인 의미로’ 파악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유교사상이 비교적 못깨친 이에게 큰 비중을 두는 데, 비해 불교 이론은 항상 깨친 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깨친 이의 體는
不二요
空이요
緣起요
中道이므로
체와 용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지만,
못깨친 이의 體는
항상 깨져야 할 체이며
못깨친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진정한 체,
즉 깨친 이의 체로 돌아가는 일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체용 논리의 본격적인 연구는
그것이 원래 道를 닦는 사람들의 修道이론이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
또 ‘체용 논리를 수행자들의 믿음과 닦음과 깨침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논리’라고 말함으로써,
그 이후에 전개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스승은 깨친 이이며, 제자는 못깨친 이)
논의에서 못깨친 이가 곧 修行者 집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상의 논의는 信章의 不二論을 경험한 자들,
곧 수행자들에게 의미 있는 메커니즘이 된다.
또한 그들이 다시 俗의 세계로 되돌아오기 위해서는
悟章의 不二論(⑨)을 거쳐야 함을 보여 준다.
修章의 二元論(⑧)에서 행해지는 실천은 못깨친 이의 것이므로
올바른 不二論이 될 수 없다. 그러하다면,
그 수행자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 일반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3) 선불교의 중점적 관심과 衆生 함의
일반 중생에도 크게 두 가지 범주가 있다. 하나는 불교신앙인 집단이며,
다른 하나는 비신앙자 집단이다.
비신앙자 집단에도 소위 이교도와 무신자들이 있다.
이미 초기 대승불교 발전 과정에서 비신앙자들을 一闡提(icchantika)라고 하여 성불 불가능한 자들로 배격했다가,
涅槃經의 佛性思想 발전에 힘입어 그들도 성불 가능한 존재임을 선언한 바 있다.
또한 처음엔 소승도 제한했다가 그들도 성불할 수 있음을 法華經의 三乘一乘思想이 보여 준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사용되는 대승불교의 衆生 개념은,
불교를 수행하는 자나 신앙하는 자 혹은 敎外者를 구별하지 않는다.
또한 그 證得의 단계를 따라 八地 이후면 菩薩이란 계위를 주기도 하며,
부처님의 化身 개념으로서 수많은 보살들이 중생들의 서원을 들어 주기 위해 현현하기도 한다.
이때의 보살을 두고 究竟覺을 증득하지 못하였으므로
여전히 중생이라는 도식은 대승불교의 중점적 관심에서 벗어난다.
이들의 존재가 중생과 부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이
法身佛,
化身佛,
報身佛,
應身佛 등의 佛身論이다.
그런데, 선불교에 와서는 그 깨달음에 대한 철저성으로 말미암아 菩薩은
부처와 중생의 매개 기능을 상실하고 중생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버린다.
이제 남는 것은 부처와 나라는 대결 구도뿐이다.
見性을 근본으로 하는 禪宗의 深玄한 宗旨는 三賢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十地大聖(菩薩)도 見性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보살의 계위조차도 구경각에 이르지 못한 중생의 단계이므로, 보살의 권위를 禪僧들에게서는 찾을 길이 없다.
이 권위 부정은 ‘殺佛殺祖’에까지 이른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통하는 어떤 권위가 있다면,
아직 그는 究竟覺에 이르지 못한 자이다.
일체의 권위를 여의고 자신에게서 진리를 발견하려는 선불교적 태도가 반영된 결과이다.
이처럼 구경각만을 중점적 관심으로 두는 선불교의 태도는 결과적으로 중생의 범주를 한정시킨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가 究竟覺을 증득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구제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중생 개념은 그 설자리가 매우 좁아져 버린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대목이다.
중생 구제의 강력한 이론적 배경이 되었던 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이념이 선불교에 와서는 分別心에 속박된 발언이라는
죄목으로 배격된다. 도대체 한편으로는 보리를 구하고, 한편으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것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단 말인가?
내 자신이 이미 부처이며 일체 삶이 부처行인데, 무엇을 구제하고 무엇을 구한단 말인가?
선불교의 태도에서 ‘求’하는 대상을 둔다는 것은 이미 어떤 권위를 수용한다는 말이므로 禪門정신에 위배되며,
‘救濟’할 대상이 있다는 발상 역시 不二정신에 철저하지 못한 소치이므로 성립할 수 없다. 修行의 과정에 있는 자는
그 자신이 아직 못깨친 신분이므로 중생 교화를 내세울 수 없으며, 究竟覺을 증득한 자라야 교화 중생의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이 究竟覺을 증득했다고 선언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부모를 살해한 대역 중죄는 오히려 참회할 수 있으나 大般若를 비방한 죄는 참으로 참회하기 어렵다(大法眼 從容錄 4).’고 하면서 지옥을 천만 번 갈지언정 得道를 사칭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발언은, 비록 禪門의 正統 異端 시비를 가리자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만큼 자신 있게 득도하였노라고 말할 수 있는 자의 量産을 억제하는 기제가 있음도 사실이다.
究竟覺 以前의 절대 요건으로 제시되는
動靜一如,
寤寐一如,
熟眠一如의
三關突破를 이룩한 자가 과연 있느냐,
그것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느냐 하는 등의 문제는 논 외로 하더라도,
과연 그러한 자가 ‘얼마나’ 되느냐의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숫자의 개념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선불교의 중점적 관심이 見性卽佛, 곧 究竟覺의 證得에 있기 때문에,
중생 구제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자가 억제되는
선불교 修證論의 메커니즘은 그 관심에 상응하는 사회적 태도의 반영일 것이다.
결국, 선불교가 함의하는 중생 개념에서 구제 대상으로서의 중생이 설 여지는 매우 좁다고 할 수 있다.
禪門의 修證論은 못깨친 이들을 깨침의 자리로 이끌기 위한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이때 말하는 못깨친 이들을 衆生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들은 이미 어느 정도의 단계에 들어선 修行者들이다.
다시 말하면, 돈점논쟁의 공간적 범주는 修行 현장을 중심으로 하는 영역이다.
돈점론의 초점은 解悟의 가치 부여 문제로 모아진다고 볼 수 있는데,
돈오점수론에서는 이 解悟의 기능을 긍정적으로 인정하여
초발심 단계의 修行者들을 올바르게 이끄는 방편으로 삼은 반면에,
돈오돈수론에서는 이 解悟가 證悟를 뜻하는 것이 아닌 이상
修道上의 일대 障碍인 解碍에 불과하므로 절대 배제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선수증론의 당사자는 覺에의 문제의식을 지닌 수행자들이며,
修行의 길로 접어들지 않은 일반 대중들이 개입될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따라서, 수행자가 아닌 불교신앙인 자격으로 究竟覺의 경험에 참여하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일천제도 성불할 수 있다는 대승의 여래장사상 전통이 선불교 안에서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 문제를 대승불교의 체용론을 통하여 살펴보자.
4. 體用論 이해의 다양성
1) 佛性論의 聖俗論적 이해
이전에 이미 역사적 과정을 거친 佛性論을 선불교 구조 안으로 다시 들여오는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일반 중생이 見性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시키는 것은 불교의 보편주의적 평등정신이나
탈권위주의적인 현대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중요하리라고 여겨진다.
이 작업은 禪修證論의 체용론적 구조를 새롭게 조망하는 것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실마리는 다시 衆生의 함의를 다선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대승불교의 중생 개념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요구되는 모든 삶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究竟覺을 위해 용맹정진하는 수행자이든,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신앙인이든,
아니면 단순히 祈福을 위해 부처님을 찾는 일반인이든, 그들은 모두 부처님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중생이다.
이를 聖俗論으로 말하면,
俗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이들이 중생 범부일 것이며,
부처님의 세계는 俗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聖스러운 영역이다.
부처님을 통하여 얻게 되는 신비경험은 그것이 證悟이든 解悟이든 聖을 경험하는 것이다.
중생이 俗을 살다가 부처님의 한 설법으로 삶의 정황이 달라진다면,
이도 역시 聖을 경험한 것이 된다.
부처님의 가피력을 통하여 자신의 삶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聖을 통하여 俗을 聖化시키려는 것이다.
聖化를 거친 삶은 이전의 삶과 구분된다. 물은 물이로되 예전의 물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이와 같은 聖化를 聖의 입장에서 말하면,
聖顯(hierophany)이며 俗化라고 하게 된다.
聖스러움이 俗의 세계에 그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聖化와 俗化의 긴장(tension)이 늘 상존하는 것이 종교적 삶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聖의 경험이 특정한 방식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불상의 미소를 보고도 경험할 수 있으며,
경전을 읽다가도 설법을 듣다가도 경험할 수 있다.
반드시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론 그때 聖의 경험 정도가 같은 것이라고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엄격한 훈련을 통해 이르는 聖의 경험과 삶의 현장에서 부단히 겪는 聖의 경험이 같을 수는 없다.
그 경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태도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한 경험 정도가 다르다고 해서 聖의 경험이 아닌 것은 아니다.
聖의 경험이 지니는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다양성은 體用論이 말하려고 하는 종교경험의 구조를 잘 보충하여 준다.
불교의 體적 접근이란 불교의 聖스러운 경험을 俗에 드러내는 방식일 것이며,
用적 접근이란 俗을 聖으로 傳變될 수 있는 잠재태로 바라보는 방식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體의 영역은 聖의 세계, 곧 부처님의 세계를 뜻하고,
用의 영역은 그 부처님의 聖스러운 세계가 요청되는 중생의 삶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중점적 관심이 體用峻別이 아니라 體用不二에 있듯이, 體와 用이 서로 별개의 영역으로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聖과 俗도 서로의 상호관계 속에서 각각의 자리가 유의미해진다는 聖俗辨證法의 동시적 계기를 머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聖과 俗의 변증법적 전환이나 體用不二적 관점은 다음과 같은 체용론의 다양한 용법을 통하여 더욱 분명해진다.
2) <二諦合明中道說>의 不二論과 非不二論
體用論이 불교 동점 이후 본격적으로 운용되는 것은 초기 종파불교 중 하나인 三論宗의 二諦合明中道說에서 엿보인다.
이것의 내용은 인식론적으로는 三種二諦說을 세우고, 본체론적으로는 五家體用法을 제시한다.
아마도 이 삼론종의 논의는 체용론을 불교 空觀 내지 中道論 해석에 처음 적용시킨 작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식론적 <二諦合明中道說>이란
眞諦(第一義諦,
空諦,
聖諦)와 世諦(俗諦, 有諦, 凡諦)라는 二諦를 合論하는 中道를 三種二諦로 설명한 것이다.
三種 중 제1단계는
①說有 世諦 ―
②說無 眞諦의 대비이며,
제2단계는
③說有說無 二並 世諦 ―
④說非有非無 不二 眞諦의 대비이고,
제3단계는
⑤說有無二 說非有非無不二 世諦 ―
⑥說非二非不二 眞諦이다.
<표 2> 三種二諦說의 二諦合明中道說
차 원 (三種二諦) | 世諦(俗諦, 有諦, 凡諦) | 眞諦(第一義諦, 空諦, 聖諦) |
用 | 體 | |
제1단계 | ① 說有 世諦 | ② 說無(空) 眞諦 |
諸法實錄有(凡夫, 凡諦) | 諸法畢竟空(諸法性空) (諸佛 賢聖, 眞諦) | |
제2단계 | ③ 說有說無 二並 世諦 | ④ 說非有非無 不二 眞諦 |
眞俗 生死涅槃 有無 二邊 | 非眞非俗 非生死非涅槃 非有非無 不二 | |
제3단계 | ⑤ 說二(有無二)說不二(非有非無不二) 世諦 | ⑥ 說非二非不二 眞諦 |
偏(二)과 中(不二)의 二邊 (俗諦中道와 眞諦中道) | 非偏(非二)과 非中(非不二)의 中道第一義諦 (二諦合名中道) |
제1단계는 有에 집착하는 범부의 有見을 타파하기 위해서 無를 眞諦로 하는 것이며,
제2단계는 諸 法空이라고 하는 二乘人(성문․연각승)의 滯空의 병을 파하기 위하여 不二를 진제로 하는 것이고,
제3단계는 다시 이 不二論의 입장, 이른바 有得보살의 有所得 병을 파하기 위한 것이다.
곧 有得보살은 ‘범부는 유를 보고 이승은 공에 집착한다.
그러나 나는 제법이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니며, 생사도 아니요 열반도 아님을 알고 있다.’고 하여,
유무의 二와 비유무의 不二를 밝힌다.
그러나 아직 有所得을 잡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 無所得의 진제를 설하여 第一義諦로 삼은 것이라 한다.
이러한 논법의 역동성은 二元論과 不二論의 대비 구조보다는,
不二論과 非不二論의 전환 구조에서 보인다.
제2단계 不二論이 二元論을 전환시킨 것이지만,
제3단계에 이르면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니기도 하지만 둘이 아닌 것도 아닌,
不二論조차 타파된 非不二論의 마당을 진제로 삼는다.
곧, 不二論은 非不二論으로 轉化될 때 비로소 완결된다.
그렇다면 非不二論은 어떤 것인가?
不二라는 맥락이 二元論을 애써 극복하려는 태도라면,
非不二의 의미 맥락은 다시 二元論을 긍정하는 자리이다.
선불교의 체용론(표1)은 그 관심사가 수행자 중심이었듯이,
수행자가 두 가지 二元을 극복하여 두 가지 不二로 전화되는 과정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信章․
修章․
悟章의 설정은
悟章의 不二論을 향하여 준비된 단계이며,
非不二論을 위해 마련된 체계는 아니다.
非不二論적 맥락에 관심을 두는 구조라면
不二論을 넘어 다시 二元의 세계를 지향할 것이다.
三種二諦說의 3단계는 非不二論을 眞諦體로 삼고
不二論을 俗諦用으로 삼는다.
인간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불교가 부정한 것이 아니라면,
不二論으로 완결될 수는 없다.
體와 用을 나누는 것조차 用의 영역의 일일 뿐이며,
究竟覺에 들어선 體의 영역에서는 그러한 분별조차 없다는 태도는
여전히 不二論적 컨텍스트에 젖어 있는 말이다.
소위 用의 세계와 교섭하지 않는 순수한 體란 존재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부처가 法身으로서만 기능한다면 이 세상과는 아무런 因緣이 없는 존재일 뿐더러,
報身佛․
化身佛
․應身佛 등
여러 佛身論의 역사가 徒勞로 돌아갈 것이다.
3) 體用論의 역동적 운용과 제3의 관점
다음은 다섯 종류의 體用法을 말한 본체론적 <二諦中道爲體說>이다.
諸法實相은 言忘慮絶하여 일찍이 眞俗의 어느 것도 아니므로 이름하여 體라고 하는데,
이 二諦의 體도 五家가 있다고 한다.
제1家는 有를 體로 하고 空을 用으로 하는 것으로, 인식론적으로는 有가 本이요 空이 末이라는 입장이다.
제2家는 空을 체로 하고 有를 용으로 하는 것으로, 세간법이 모두 공으로부터 생하는 것이므로
존재론적으로 空이 本이요 有가 末이라는 입장이다.
제3家는 二諦가 각기 체를 달리한다는 것으로, 世諦 假有를 세제體로 하고, 空無有相을 진제體로 하는 입장이다.
원문에는 언급이 없으나, 各 體가 있으면 各 用이 있을 것이다.
제4家는 二諦가 비록 一體이긴 하나 有로써 約하면 속제가 되고, 空으로써 약하면 진제가 된다는 입장이다.
제5家는 僧郞의 中道를 體로 하는 것으로,
不二而二이므로 二諦의 理가 밝혀지고 二而不二이므로 中道의 義가 선다고 하는 입장이다.
여기서는 眞俗을 用으로 하고(眞俗爲用),
非眞非俗을 中道體로 한다(非眞非俗爲二諦體).
이것은 非有非無를 體로 삼는 眞諦中道와는 다른 용법으로,
非眞非俗을 體로 삼는 새로운 차원의 二諦合明中道이다.
이를 다른 차원과 구별되는 진리라 하여 아예 第三諦라 하기도 한다.
제3제란 眞俗 二諦의 분별조차 극복한 단계로, 正反合의 合命題를 뜻한다.
<표 3> 五家體用法의 二諦中道爲體說
五家爲體說 | 體 | 用 | |
初 家 | 認識論的 | 有 (本) | 空 (末) |
第2家 | 存在論的 | 空 (本) | 有 (末) |
第3家 | 二諦各體 | 二諦各體 (世諦假有 世諦體, 空無相 眞諦體) | [二諦各用] |
第4家 | 二諦一體 | 二諦一體 | 約用有二 (約有 俗諦, 約空 眞諦) |
第5家 | 中道爲體 | 非眞非俗爲二諦體 二諦以中道爲體 (=第三諦) | 眞俗爲用 [二諦相卽義, 中假體用義] |
不二而二(二諦理明), 二而不二(中道義立) |
이러한 논법에서 우리는 體用法 구조의 역동적 운용을 얻을 수 있다.
본체와 현상을 고정 불변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관점에서 보면,
본체는 體의 세계요 현상은 用의 세계가 된다.
사실상 體用의 體 개념은 어떤 궁극적인 지향처 내지 근원 자리라는 성격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二諦中道爲體說 제1가와 제2가를 보면,
有와 空에 대한 체용이 서로 뒤바뀌어서 적용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體․用이 有․無처럼 존재론적 측면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의 관점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인식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용론을 적용할 때는 무엇을 체로 보고 무엇을 용으로 두는가 하는 관찰자의
제3의 관점이 수반됨을 간과할 수 없다.
위의 다섯 단계를 구분시키는 그 무엇이 체용을 적용시키는 관점에 해당한다.
三種二諦說(표 2)의 단계 전환에도 이 같은 체용론의 역동성이 적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제2종에 와서는 제1종의 이제가 합해져서 용이 되고, 이 용에 대한 체가 새로이 설정된다.
제3종에서는 다시 2종의 이제가 합해져서 용이 되고,
이 용에 대한 체가 설정되면서 인식론적으로는 가장 깊은 단계를 점하게 된다.
이와 같이 體와 用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서로 바뀌기도 하고,
또 體用이 거듭해서 體用이 되기도 하는 데에서 體用論의 역동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體用은 서로 수준이 다른 두 차원이 아니라 같은 수준의 서로 다른 두 측면으로 이해된다.
체는 용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용도 체가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게 된다.
이를 연기법에 따른 체와 용의 相卽相入性이라고 할 만하다.
易學적 입장에서는 체와 용을 陰과 陽의 相補적 측면으로 취급한다.
따라서 體를 더 근원적인 것으로 보아 用의 세계를 열등한 것으로 파악하는 가치론적 시각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되어야 할 것은 용의 영역이 아니라 관점의 문제이며, 지향되어야 할 것은 체의 영역이 아니라 관점의 개발이다.
결국 體用論 운용의 역동성은 제3의 관점이 전제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데 있다.
이것은 體用論이 어떤 고정된 영역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는 유연성(flexibility)을 지닌 분석 틀임을 말한다.
부연하면, 體와 用이라는 적용 대상이 지니는 두 가지 특성,
곧 本體와 作用이라는 두 영역의 속성을 개념화한 것인데,
바로 이때 그 체를 체로 있게 하고 용을 용으로 있게 하는 제3의 관찰자 시점(the third viewpoint of observer)을 필요로 한다.
이 제3의 관점은 무엇을 主體로 내세우고 무엇을 그에 따른 客體로 설정하느냐 하는 관심의 내용을 반영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두 범주 사이의 관계를 체와 용으로 자리매김할 때, 거기에는 이미 그 관계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든
아니면 관찰자가 이해하고 싶어하는 내용이든 간에, 이해(understanding)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이와 같이 체용법은 우리가 어떤 문법의 구조를 이해하려고 할 때 동원되는 도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관찰자의 시각은 대개 體나 用의 영역에 이미 숨어 있어 잘 드러나지 않는 특성을 지니므로 간과되기 쉽다.
예컨대, 체와 용을 ‘부처’와 ‘중생’으로 볼 때와 ‘부처’와 ‘수행자’로 볼 때, 그 두 대비 구조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는
이미 ‘중생’과 ‘수행자’에 내장되어 있다. 이때 각각의 의도를 드러내면 전자는 衆生佛性論 혹은 중생 구제 혹은 부처님의
가피력 등이, 후자는 見性成佛 혹은 禪修證論 등이 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보려고 하는 관점은 다양하게 숨어 있다.
이렇게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상 구조 이해에 매우 중요한 제3의 관점을 다각도로 개발함으로써 여러 가지의 체용관계를
도출해 낼 수 있음을 위 삼론종의 체용론이 보여 준다. 이를 원용하여 불교의 여러 측면을 체용론으로 풀어 본다면,
다음과 같은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4) 불교의 제 관계 구조와 體用論의 원용
먼저 개념의 축을 부처, 조사 혹은 스승, 수행자, 일반 중생으로 범주화해 보자.
물론 이것조차도 관찰자마다 축의 내용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다음 내용은 이 네 축의 체용관계를 보인 예이다.
가. 體用論의 이중적 사슬 구조
<표 4> 體用論의 이중적 사슬 구조
축 관 점 | A. 부처 | B. 祖師․스승 | C. 修行者 | D. 일반 중생 |
관 점 ㉮ | 체 | 용 | ||
관 점 ㉯ | 체 | 용 | ||
관 점 ㉰ | 체 | 용 | ||
관 점 ㉱ | 용 | 체 |
<표 4>는 ㉮ ㉯ ㉰ ㉱ 관점에 따라 체용이 서로 연쇄고리화 되는 방식을 보여 준다.
어느 한 축이 다른 축에 대해 體 역할을 하기도 하고, 用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동일한 관점의 반복은 아니다.
㉯차원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信章, 修章, 悟章의 修行 문제가 중시되며,
㉮차원은 스승이 부처를 대신해서 수행자들의 體 노릇을 하는 관계를 보여 준다.
B축(조사․스승) 입장에서 보면 부처에 대해서는 용이 되고,
수행자에 대해서는 체가 되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지닌다. 이런 이중적 구조는 어느 축에서나 가능하다.
㉰차원은 일반 대중과 불교의 가르침을 관계 짓는 구조를 보여 준다.
수행자들이 자아 완성을 위한 古典主義的 苦行 과정을 통해 일상적인 중생의 삶을 聖化(곧 敎化)시키는 의미를,
혹은 중생들이 그들을 의지처로 삼아 그들의 종교경험을 俗化(곧 일상화)시키는 종교의 의미를 말해 준다.
불교의 出家 전통은 바로 이런 구조로,
수행자 자신들이 聖스러운 길을 걸어감으로써 世俗의 중생에게 종교적 삶의 의미를 일깨운다.
㉱차원은 이상의 연쇄고리 구조에서 하나의 파격이다. 다른 세 가지 관점이 종교 안에서 바라본 것이라면,
㉱는 종교 밖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다시 논하겠다.
나. 體用論의 다양한 적용
<표 5> 體와 用의 다양성
축 관 점 | A. 부처 | B. 祖師․스승 | C. 修行者 | D. 일반 중생 |
관 점 ① | 체 | 용 | ||
관 점 ② | 체 | 용 | ||
관 점 ③ | 체 | 용 | ||
관 점 ④ | 체 | 용 | ||
관 점 ⑤ | 체 | 용 | ||
관 점 ⑥ | 체 | 용 | ||
관 점 ⑦ | 체 | 용 | ||
관 점 ⑧ | 체 | 용 |
<표 5>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불교의 종교적 구조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보여 준다.
①차원이 부처님을 체로 하는 불교에서 중생의 범주를 매우 폭넓게 해석하는 구조 또는 부처님의 절대성이 강조되는 맥락이라면, ②차원은 그 관심의 범위가 수행자에 집중되는 선불교적인 것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곧,
②의 관점은 禪수증론에서 佛地가 아닌 것은 모두 구경각이 아니므로 보살이나 解悟 등의 방편성을 일체 거부하는
돈오돈수적인 맥락을 보여 주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⑥차원은 ㉯차원(표 4)과 마찬가지로 수행자들의 수행문제를 말하는데,
㉯가 기존의 敎學체계가 이루어 놓은 권위를 일체 부정하고
實修의 현장을 중시하는 선불교적인 노선을 분명히 보여 주는 구조라면,
⑥은 좀더 폭넓은 수증론을 수용할 수 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③, ④, ⑤는 불교라는 종교의 중심이 부처임을 말하는 것이다.
③의 구조는 조사가 부처의 역할을 대신하는 관계를 보여 주지만,
조사도 결국은 부처의 세계 안에 있음을 말한다. 또한 대승불교의 다양한 보살 전통은 이런 구조인데,
보살은 부처를 대신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홍포하는 전령들이다.
④는 수행자의 求道 동기가 成佛에 있음을 강조하는 맥락이기도 하면서, 또한 교단의 체계에서 벗어나
개인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여 주는 관계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다음으로,
⑤가 부처에 대한 절대 신념체계를 뜻한다면,
⑦은 불교 교단의 형성 구조를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⑧은 覺과 不覺의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다.다.
사회 문화 중심 관점의 體用論
<표 6> 역설적 체용론
축 관 점 | A. 부처 | B. 祖師․스승 | C. 修行者 | D. 일반 중생 |
관 점 ⓐ | 용 | 체 | ||
관 점 ⓑ | 용 | 체 | ||
관 점 ⓒ | 용 | 체 | ||
관 점 ⓓ | 용 | 체 | ||
관 점 ⓔ | 용 | 체 |
<표 6>은 종교적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관점에서 종교를 생각하는 맥락이다.
이 구조는 인류 문화사에 기능하는 종교문화에 대한 관점을 제공하며, 종교도 사람들의 삶을 떠나서는
의미를 지닐 수 없음을 유념하는 관계 유형이다.
ⓐ~ⓔ 관점들은 중생이 체가 되고 부처가 혹은 불교가 용의 영역이 되는 구조이다.
이것은 聖의 영역이 아니라 俗의 견지에서 바라보는 방법이다.
ⓐ는 인간학적 견지에서,
ⓔ는 사회학적 관심에서 바라보는 관계 구조이다. 환언하면,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불교가 해줄 수 있는 긍정적인 기능을
인간이 일상화시킬 수 있다면 그만큼 그 삶이 풍부해질 것이며, 도처에 깔려 있는 사회 문제들의 해결 방안들을
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면 불교의 대사회적인 기능은 제고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는 현대사회에서 불교의 지도자들이 지니는 상징적 기능과 역할에 대한 것을,
또는 중생들이 자신들의 祈福 욕구에 관련되는 많은 보살들을 만들어 내는 종교문화에 대한 것을 설명한다.
ⓒ는 세속에서 가장 가깝고 광범위하게 만날 수 있는 불교문화 또는 스님들과의 관계를 보여 주는데,
그 관계 맺음의 주체 역할이 신도들 또는 일반인들에게 있음을 설명한다.
이상을 부연하자면, 현재의 삶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종교는 하나만이 아니다. 특히, 현대와 같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이런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불교는 그런 다원사회에서 기능할 수 있는 선택 대안의 하나일 뿐이다. 이런 관점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현장 컨텍스트에서 종교를 바라보게 한다. 학문이란 이런 사회 현장의 관심을 반영한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이 禪門의 實修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의식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학문이란 원래 용의 세계의 일이라고 규정지어서도 곤란하다. 사회사의 관점에서는 학문이 體 기능을 하고,
종교가 用의 영역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불교학을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사회 현장의 관심이 반영되는 결과이다.
따라서 사회 현장의 문제의식을 위한 것이라면 불교의 어떤 현장이든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 관심을 차단해서는 곤란하다. 종교가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개방되어 있듯이 사회도 종교의 모든 영역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종교와 사회의
體用不二적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 또는 사회에 주체를 두는 체용적 이해는 다른 관점과 전혀 다르게 접근되는 구조이다. 이런 시각이 탈권위적이고 다원주의적인 현대 세계관에 연동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어느 축이든 體와 用의 두 가능성을 동시에 머금을 수 있다는
體用의 二重性 구조는 마치 인드라망(Indra Net)의 한 매듭을 집어들면 서로 다른 모든 존재들이 서로 비치는 것과 같이,
어느 존재도 절대적이지 못하고 상호의존적이 되고 마는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과 잘 어울린다.
5. 결론
하나의 종교적 신념체계는 그 전통이 자라나고 처한 역사적․문화적 토대 위에서 독특하게 이루어지는 신념의 내용과,
이를 수용하는 태도의 신념 형식이라는 두 요인의 복합적인 구조로 구성된다. 달리 말하면, 어떤 종교사상의 구조는 그 전통이
주로 역점을 두는 중점적 관심과,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실천 태도라는 두 측면을 통하여 드러난다.
닦음과 깨달음이라는 불교의 修證論 주제는 그러한 종교사상의 형식과 내용에 대응되는 두 요소들이다.
이 修證論의 체계적 설명은 體用論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된다.
이에 우리는 선불교의 修證論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선불교가 어떠한 중점적 관심을 가지는지,
그리고 거기에 따른 실천 태도는 어떠한지를 주목하게 된다. 돈오돈수론이 철저한 見性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나
돈오점수론이 解悟의 방편성을 수용하는 것은, 그들 각각이 지니는 중점적 관심에 상응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좀더 거시적으로 보면, 이들 두 이론 모두 수행 현장의 문제의식을 기본적으로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修行者 중심의 수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대승불교의 일반적 문제의식은 凡俗을 살아가는 衆生들의 삶의 현장에서 부처의 구원론을 전개하고 싶어한다.
일천제도 성불할 수 있다는 여래장사상의 보편주의 정신은 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대승불교의 이념을 재확인한 내용이다.
불교가 세계 종교로 성장하면서 보여 주는 세계 각지로의 포교운동은 그러한 대승불교의 보편주의 정신에 바탕한 것이며,
그 운동의 주된 관심사가 중생 구제에 있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선불교와 대승불교의 주된 관심 대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그들의 수증론 구조나 그에 따른 體用論체계도 달리 마련되고 있음을 시사한다.見性의 구조를 분석한 선불교의 體用論에 따르면, 깨친 이의 마당이 體의 不二論 영역으로, 못깨친 이의 마당이 用의 二元論 영역으로 구별된 전제 아래에서,
두 가지 二元論(상식의 二元論과 修章의 二元論)과 두 가지 不二論(信章의 不二論과 悟章의 不二論)이
悟章의 不二論을 궁극적인 귀착점으로 삼는 단계론적․가치론적 연쇄고리로 구조화되어 있다.
이러한 가치론적 구조는 解悟(信章의 不二論)와 證悟(悟章의 不二論)라는 자리가 어떻게 구별되고 연결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 준다.
동시에 究竟覺의 證悟 자리를 지향하는 단계론적 구조는 수행자가 무엇을 향해서 가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런데, 이 선불교의 體用論을 종교경험의 구조를 분석하는 聖俗論으로 환원시켜 보면,
信章․修章․悟章이 모두 聖의 세계에서 이야기되는 영역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 같은 측면은 이 체용론 도식이 信章의 不二論을 경험하면서 聖의 범주를 사는 修行者들에게 의미 있는 메커니즘임을 뜻한다.
따라서 修行者로서의 경험과 삶을 공유하지 않는 일반 중생이 이 구조에 참여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점은 선불교의 신념체계가 求道적 신념 형식을 지향하고 있는 것임을 다시 확인하는 예가 된다.
결국, 信章의 不二論과 修章의 二元論을 넘어 悟章의 不二論을 지향하는 體用論 구조는,
修行者에게 주된 관심을 두는 선불교의 수증론체계를 잘 드러낸 분석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그러한 분석 틀로는 대승불교의 관심 내용을 담아내기가 어렵다
. 왜냐하면, 중생에 대한 보편주의적 관심은 悟章의 不二論을 넘어서 다시 二元의 세계를 지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三論宗의 二諦合明中道說이 보여 주는 體用論 구조는 그러한 非不二論 지향을 담아내고 있다.
三論學의 三種二諦說과 五家體用說은 不二論으로 귀결되는 眞諦中道도 中에 치우친 것이라고 하여 이를 넘어선
새로운 第三諦를 제시하는데, 이것이 非偏(非二)과 非中(非不二)의 中道를 體로 삼는 二諦合明中道論이다.
二元論도 거부하지만 不二論도 거부하여,
眞俗을 用으로 하고 非眞非俗을 中道體로 하는 이 수증론 구조는,
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중국 대승불교의 중점적 관심을 담아낸 것이다.
여기에는 기복적 태도와 구도적 태도라는 두 가지 종교적 신념 형식이 모두 수용되어 있다.
결국 二諦合明中道說에서는 二元論의 대립을 해소시킨 不二論을 다시 한번 轉化시켜,
二元論을 다시 긍정케 하는 맥락의 非不二論을 마련한다.
不二論으로 완결시키지 않고 非不二論으로 나아감으로써 소위 用의 세계(俗의 世界)와의 교섭을 지향한다.
이러한 非不二論的 體用論은, 體와 用이 고정된 영역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3의 관찰자 관점에 따라
서로 뒤바뀔 수도 있으며 체용이 거듭해서 체용이 될 수도 있는 역동적 구조를 지닌다는 점과,
아울러 用이 體에 비해 열등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相補적인 관계에 있는 相卽相入의 緣起論적 특성을 지니는
분석 도구임을 이해할 때 가능해진다.
體用論의 특성은 그 적용의 다양성과 유연성에 있다. 본론 후반부에서 體와 用의 다양성,
그리고 體用의 역동성을 통하여 불교의 제반 종교 구조를 분석하였다.
이 분석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聖의 영역을 體로 두는 용법과는 달리 俗의 衆生을 體로 삼는 관점은,
종교와 사회의 不二관계를 지향하는 것이면서, 현대의 다원화 세계관 또는 보편주의적 평등 이념과
잘 어울리는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不二論과 非不二論의 合明은 오늘날에 다시금 재론되기를 요청한다.
끝으로, 오늘의 현대사회에 불교의 신념체계가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불교의 종교경험 세계관,
곧 불교의 수증론 이해 문제와 연동되어 있으며,
이는 다시 체용론의 다양한 운용을 통하여 많은 시사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심은 선불교체계를 불교 전체의 맥락에서 바라보게 하여, 선불교가 지닌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