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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일 평화철도 정책위원장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춘교(春郊) 류동열 선생
류동열은 1879년 3월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에 류쿠국(현 오키나와)이 신흥 제국 일본에 병탄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열여덟에는 조선 26대 왕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조선이 자력 근대화와 식민지 나락의 갈림길에 서 있던 때다. 우리는 흔히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 바람처럼 거칠고 굴곡진 인생을 살다 간 사람, 혹은 시운을 만나 시대의 영예를 누린 사람을 ‘풍운아’라 부르거니와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류동열이 그런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걸어간 생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노라면 보통의 위인 혹은 ‘풍운아’와는 현저하게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과연 그의 삶을 일관되게 관통한 고갱이는 무엇이었을까. 망국의 전야(前夜)에 태어나 일제 장교,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와 볼셰비키, 우익 정치인과 월북 종교인 등으로 살다 간 ‘풍운아’ 류동열의 삶과 투쟁, 그 파란만장한 장면들을 재구성해 본다.
# 첫 번째 장면
류동열은 열아홉 살 때 사촌 형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했다. 유학을 간 것인지, 새로운 문명을 탐승하기 위해 ‘신세계 아메리카’로 간 것인지, 왜 정치의 중심지인 워싱턴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였는지, 함께 간 사촌 형은 누구이고 훗날 무엇을 했는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시만 하더라도 외국, 특히 지구 반대편에 있는 신흥 자본주의국가 미국을 방문한다는 것이 범상치 않은 일이었을 텐데 스스로든, 언론이든 이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은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하던 그가 느닷없이 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성성학교에(成城學校) 입학했고, 이를 계기로 군인이 됐다는 사실이다.
# 두 번째 장면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류동열은 1903년 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한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태 전이다. 만약 미국에 있을 때 미래를 내다보는 신통력을 가진 그 누가 있어 “앞으로 일본이 동아(東亞)의 주역으로 떠오를 것이고, 그 중심에 군부가 있을 것이니…”라고 예언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었다.
졸업 후에는 일본군 육군 견습사관으로 일본 황실 근위사단에서 시보로 근무했다. 1904년 러일전쟁 때는 대한제국 파견 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해 평안남도 선천 부근에서 러시아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대한제국군과 일본군을 오가며 활동한다.
조국과 민족이라는 가치를 일절 배제하고 입신양명의 견지에서만 보자면 류동열은 시류를 타도 제대로 탄 것이고, 줄을 잡아도 보통 줄을 잡은 게 아니다. 오늘날 변절과 배신, 출세주의, 기회주의의 대명사처럼 된 다카기 마사오(한국 이름 박정희)나 나카지마 잇켄(한국 이름 정일권) 등의 입장에선 친일의 원조요, 제국군대의 대선배가 아닌가. 그러나 친일 출세의 대로가 보장된 류동열이 선택한 길은 독립운동이었다.
▲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류동열 선생 묘비. 애국열사릉에는 사돈 최동오, 딸 류미영, 사위 최덕신도 함께 안장돼 있다.
# 세 번째 장면
일단 류동열은 대한제국 육군 장교 신분으로 복귀했다. 노백린·이동휘 등과 효충회를 결성해 친일파 대신들을 암살하려 시도했다. 1907년 4월에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 이동녕·김구·이상재 등과 함께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창립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해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반일독립운동에 본격 가담했다.
1909년 군복을 벗은 후에도 국채보상운동·애국계몽운동에 활발히 참여했고, 그해 10월26일 안중근이 조선 병탄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격살하자 그 배후의 한 사람으로 지목돼 검거됐다. 안중근의 이토 격살은 당시 일본과 조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언론과 정치계의 주목을 받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런 사건의 배후 인물로 류동열이 지목돼 검거됐다는 것은 일제의 모함과 사건 확대조작을 감안하더라도 보통의 인물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는 혐의는 아니었다. 독립운동가 류동열의 비중을 짐작하게 하는 하나의 징표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그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 네 번째 장면
그는 중국에서도 조선독립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신민회 부회장 자격으로 안창호 등이 참가한 칭다오회담에 참석해 일제에 무력으로 항거할 것을 주장하다가 일경에 체포돼 조선으로 송환당했다. 1911년 8월에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윤치호·양기탁·이승훈 등과 함께 1심에서 최고형인 10년을 선고받았다.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뒤에는 길림성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난 1917년에는 연해주에서 김립·문창범 등과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 결성에 참여했다. 1918년 3월 하바롭스크에서 개최된 조선인 인민혁명가대회에 이동휘·김립·이동녕·양기탁 등과 함께 참석해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1918년 5월에는 한인사회당 군사부장 겸 군사학교장에 임명됐다.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하자 1918년 7월 한인사회당에서 조직한 한인적위대의 지휘관으로 이만 전투에 참가했다. 같은해 9월4일 하바롭스크가 백군에 함락되자 탈출했으나 김알렉산드라 등과 같이 도피하던 중 백군에 체포돼 즉결 재판을 받았으나 다행히 풀려났다.
조선 경내에서는 일제의 탄압을 피할 수 없어 중국과 러시아를 주활동 무대로 삼아 독립운동을 펼쳤던 류동열에게 민족주의나 볼셰비즘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조선독립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어떤 선입견이나 배타의식 없이 나라의 독립에 도움이 된다면 그 누구와도, 그 어떤 노선도 기꺼이 손을 잡고 자신의 길로 선택했다.
# 다섯 번째 장면
3·1 운동 전야인 1919년 2월에는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에 안창호·김좌진·이승만·김규식 등 39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3·1 독립운동 직후인 4월에는 13도 대표가 모여 조직한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의 참모부총장, 노령 대한국민회의정부(大韓國民會議政府)의 참모총장에 각각 선임됐다. 군인 출신으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광복군(光復軍) 양성에 주력했다.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대회(高麗共産黨大會)에 참가해 고려혁명당 중앙위원이 되면서 잠시 임정을 떠났다. 1926년 4월 만주 길림성에서 고려혁명당이 창당되자 중앙당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한 뒤 다시 임시정부로 돌아온 류동열은 국무위원으로 선임됐다. 1935년 남경에서 김규식·지청천·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가했다. 1938년에는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이 통합을 추진할 때 통합된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에 임명됐다.1939년 10월25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내각 참모총장에 선출됐다. 1940년 중경에서 광복군이 창군되자 참모총장이 돼 임시정부의 군사정책과 활동을 주관하게 된다. 이처럼 류동열의 활동은 해방 직전까지 주로 임시정부, 그중에서도 군사활동에 집중돼 있다. 이는 그가 정규 사관 교육을 받은 군인 출신이라는 점과 일제에 무장항쟁을 주장했던 평소 소신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 여섯 번째 장면
1945년 8월 드디어 해방의 날이 왔다. 1945년 상해 임정요인들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류동열은 이번에는 정치인으로 변신해 우익진영에서 활동했다. 광복군 참모총장의 연장선상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가 된 국방경비대 창설에도 관여했다.
1950년 6월 38도선 전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던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비화했다. 남과 북에 각각 정통성을 주장하는 정권이 들어설 때부터 예견된 사태였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과 북의 정치공작원들은 이른바 ‘모시기 공작’을 통해 김규식 등 남북협상에 참여한 인사들과 출옥 인사들을 북으로 데려가는 작업을 서둘렀다. 이를 두고 남쪽에서는 ‘납북’이라고 규정하지만 과연 그럴까.
평생을 군인으로서 사명감과 무인의 풍모를 잃지 않았던 류동열이 북에서 온 사람들이 가잔다고 순순히 따라나섰을 리 만무하다. 물론 정치공작원들의 설득에 감화된 것인지, 다른 우익 정객들처럼 해방 직후 남쪽 정치상황에 환멸을 느껴 월북을 단행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그가 걸어온 삶의 족적을 미루어 짐작하기에 자신의 뜻에 반해 억지로 끌려가는 상황을 감내하지는 않았으리란 추론은 가능하다.
▲ 정용일 평화철도 정책위원장
전쟁 당시 72세였던 류동열은 1950년 10월18일 평안북도 희천의 어느 농가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죽고 난 다음에도 분단된 조국의 남과 북에서 모두 최상의 대우를 받았다. 북에서는 열사로 추증돼 평양에 있는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남에서는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남과 북, 그 선택의 기로가 육체적 생명뿐만 아니라 멸문지화(滅門之禍)도 무릅써야 했던 분단시대에 그에 대한 남과 북의 예우는 극히 이례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