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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雲門寺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 아래 넓은 장군평의 평지자락에 있는 사찰로서 동화사의 말사이다. 사찰은 산지 가람에 속하지만, 형태면에서는 평지가람의 형태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신라 진흥왕 21년(560), 한 신승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진평왕 30년(608년) 원광국사에 의해 1차 중창되었으며, 원광국사(圓光國師)는 좌우명을 묻는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 세속5계 (世俗五戒) '를 준 곳으로 유명하다.
또 운문사는 고려시대에는 일연(一然)스님이 이곳 운문사 주지(住持)로 추대된 뒤 머무르며 '삼국유사 ( 三國遺事 )'의 집필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 왕건(王建)이 후삼국 통일 후 은혜의 사찰인 이곳에 '운문사 (雲門寺)'라는 이름을 내려 준 곳이기도 하고, 고려 제일의 명필로 손꼽히는 탄연(坦然)스님의 왕희지체 비문(碑文)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호거산 운문사(虎踞山 雲門寺) ... 호거산의 "거(踞)"는 웅크릴 " 踞 "이다. 운문사 북동쪽에 위치한 호거산(虎踞山)은 호랑이가 의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과 닮았다 해서 불러진 이름이다. 운문사란 짙은 안개가 펼쳐져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문(門)임을 의미한다. 풍수상 일반적으로는 명산(名山)을 뒤로 하여 건물을 앉히는데 비하여 운문사는 특이하게도 호거산(虎踞山 ... 웅크릴 踞)을 앞에 두고 자리하고 있다. 호랑이가 의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는 호거산 아래의 넓은 분지인 장군평에 자리잡은 운문사는 평지(平地)사찰이다.
연꽃의 花心
전체로 보면 남쪽의 운문산, 북동쪽의 호거산, 서쪽의 억산과 장군봉이 이루고 있는 높고 낮은 겹겹의 높고 깊은 산줄기가 꽃잎처럼 감싸안은 형국이라서 운문사를 연꽃의 화심(花心)에 비유하곤 한다. 호랑이의 기세로 보면 화랑(花郞)의 자리가 맞고, 연꽃이라면 단아함이 넘치는 비구니 도량이라는 점과 잘 어울린다. 이러한 산세를 잘 보려면, 운문사 북쪽의 북대암(北臺庵)에 오르면 된다. 바위 벼랑에 제비집처럼 자리 잡은 북대암에서 내려다 보면 운문사는 바로 연꽃자리에 터를 잡았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운문사 가는 길
운문사는 여성 스님들이 수도하는 비구니 사찰이다. 250여 명의 비구니(比丘尼)가 수행의 삶을 이어가는 사찰은 어느 곳보다 차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운문사는소나무로 시작된다. 일주문으로 향하는 오솔길의 아름다움이 명망 높은 사찰마다 빼 놓을 수 없는 자랑이 되지만, 운문사(雲門寺)의 솔향기 가득한 길은 찾는 이의 눈높이를 맞추듯 아담한 소나무들이 가지런히 이어진다.
운문사 가는 길에는 아름다운 숲이 있고, 너른 호수가 있고, 계곡도 있다. 들판을 넘어 고갯길로 올라가면 호숫길, 운문댐으로 만들어진 운문호(雲門湖)도 넘실대고 있는, 이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 이만한 곳도 없다. 청도의 운문사는 나무와 숲이 좋은 산사이다. 이 숲길은 울창하고 아름답다. 운문사 4개 암자로 향하는 길에서도 울창한 숲터널을 만나지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펼쳐진 솔숲, 짧게는 수령 100년 안팎부터 길게는 수령 200~300년의 소나무가 빽빽하게 자라있다.
눈보다 마음을 여는 것이 더 중요해서일까, 천년 세월을 버텨온 가람에 드는 이러한 숲길에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기둥은 물론 솔가지 하나 반듯하게 펴진 것이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휘어진 소나무는 모두 서쪽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솔숲에는 벤치가 놓여있고, 그 옆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있다. 솔숲길은 더위를 식혀줄 뿐 아니라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속진(俗塵)의 때도 씻어준다. 솔숲 길을 지나면 바로 운문사이다. 운문사는 지리산 남원의 실상사와 마찬가지로 평지에 지어진 사찰이다. 하지만 가람을 두르고 있는 산이 높고 산뿌리는 넓다. 동쪽으로는 운문산과 가지산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서쪽으로는 비슬산, 남쪽으로는 화악산, 북쪽으로는 삼성산이 운문사를 감싸고 있다. 어떤 눈 밝은 선승(禪僧)이 이러한 아늑한 터를 찾아냈을까?
이 푸른 소나무에 박힌 상처는
아리따운 자태로 말하든, 늘씬한 각선미로 말하든, 늠름한 기상으로 말하든, 연륜의 무게로 말하든 운문사 소나무는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소나무이며, 조선의 힘과 자랑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운문사(雲門寺) 소나무는 조선의 아픔과 저력, 끈질긴 생명력까지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운문사의 노송(老松)들은 그 밑동이 마치 대검으로 찍히고 도끼로 파인 듯한 큰 흠집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일제 말기 "대동아전쟁" 때 송진을 공출하기 위하여 송진을 받아낸 자국이다. 그들은 석유 등 전쟁물자가 부족해지자, 그 대용(代用)을 위하여 이 송진으로 송탄유(松炭油)를 만들어 자동차를 운전할 정도로 발악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소나무는 그래도 죽지 않고 여기 이렇게 사철 푸르게 살아 있지 않은가. 왠만한 소나무는 그 칼부림, 도끼부림에 생명을 다했을 것이련만, 조선의 소나무는 그 아픔의 상처를 드러내놓고도 아리따운 자태로 늠름하게 살아있지 않은가. 저 푸른 소나무에 박힌 상처는 우리가 극복해낸 역사적 시련의 성처일 뿐이다. 아무리 모진 시련도 우리는 그렇게 꿋꿋이 이겨왔다. 이곳 운문사를 찾거들랑, 이 숲길을 걸으면서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해서도 느껴 볼 일이다.
운문사의 창건
운문사의 내력은 무엇보다도 운문사 주지이었던 일연(一然)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 원광서학(圓光西學)과 보양이목(寶壤梨木)에 자세히 나와 있다. 또 1718년(숙종 44), 채헌(彩軒)이라는 스님이 쓴 ' 호거산운문사사적기 (虎踞山雲門寺事蹟記) ' 가 있어 그 자초지종을 알 수 있는데, 간혹 앞뒤가 말이 맞지 않는 것도 있고, 또 정치사적 변고는 감추어버렸기 때문에 재구성이 필요하다.
사적기에 의하면, 557년(신라 진흥왕 18)에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한 도승(道僧)이 지금 운문사 5리 못미쳐 있는 금수동(金水洞) 계곡에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더니 홀연히 득도하여 도우(道友) 10여 명과 산세의 혈맥을 검색하고, 다섯 개의 갑사(五岬寺)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오갑사는 현재의 운문사인 대작갑사(大鵲岬寺)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 9000보(步) 지점에 가슬갑사(嘉瑟岬寺), 남쪽 7리 지점에 천문갑사(天門岬寺), 서쪽 10리 지점에 대비갑사(大悲岬寺), 북쪽 8리 지점에 소보갑사(所寶岬寺) 등이 었다. 사방의 갑사들은 오늘날 모두 폐사되고, 서쪽 대비갑사만 대비사(大悲寺)로 개명하여 남아 있다.
그런데 대작갑사(大鵲岬寺 .. 현재의 운문사)를 창건한 목적은 흉맥(凶脈)을 진압하기 위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운문사 동쪽에 솟아있는 산을 지룡산(池龍山)이라고도 부르지만, 옛날 명칭은 호거산(虎踞山)이라고 하였으니, 곧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인 것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본다면 용맹한 호랑이가 흉맥을 누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산 정상에는 호거산성(虎踞山城)이 있다. 위와 같이 도승(道僧)이 다섯 갑사를 지은 것은 이 지역이 교통상의 요충지이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대작갑사 외에 나머지 네 갑사도 역시 흉맥을 진압하는 지세로 교통상의 요지에 입지를 이용하여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원광법사 圓光法師
557년에 창건된 운문사를 첫번째로 중창한 사람은 원광법사(圓光法師)이었다. 삼국유사의 일연(一然)스님은 삼국유사의 제5권 의해(義解)편에서 첫머리에 원광법사를 논하면서, ' 원광서학 (圓光西學) '에 대하여 이례적으로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이 글을 쓰고 있던 바로 그 자리(운문사를 말함)의 일인지라 이처럼 세심한 배려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연스님에 의하면, 원광법사는 600년(진평왕 22)에 귀국하여 경주 황룡사에 머물다가 대작갑사에 와서 3년간 머물다가 가슬갑사로 옮겨 갔다. 그는 가슬갑사(嘉瑟岬寺)에서 일생의 좌우명을 묻는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에게 그 유명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려주었다. 운문사는 절 입구의 도로변에 기념비를 세워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며, 옛 선인들의 지혜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고 있다. 세속오계(世俗五戒)는 후에 신라의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의 중요사상으로 자리를 잡는다. 특히 다섯 번째인 살생유택(殺生有澤)은 불가에서 살생을 금지하는 계율(戒律)을 전쟁터에서 적용할 수있도록 이념적으로 틔워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슬갑사는 운문사 입구 마을인 신원리에서 가지산 석남사로 넘어가는 운문령에 있는 문복산(文福山) 기슭의 절터로 추정되는데 주춧돌 10여 개가 남아 있어, 80년대에 경북대학교에서 발굴 조사하였으나, 가슬갑사라고 할 증거가 될만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원광법사가 대작갑사를 중창하였다는 증거는 될 수 없는 기록이다. 일연(一然)스님은 삼국유사, "원광서학"과 "보양이목"조 끝 부분에서 원광법사와 운문사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기록하고, 김척명(金陟明)이라는 사람이 거리에 떠도는 얘기를 잘못 듣고, 보양스님의 기록과 뒤섞어 기록하는 탓에 원광법사와 운문사가 연관있는 것처럼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세속오계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
어진 선비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 한 동네에 사는 추항(芻項)과 친구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서 말하였다. " 우리들이 덕망있는 선비와 교유하기를 기원하면서,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으면 아마도 욕을 초래하는 일은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하니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 도(道)를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 " 이때 원광법사가 수(隋)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가슬갑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이 찾아가서 아뢰었다. " 속세의 선비로 무지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한 말씀만 해주시면 평생토록 경계로 삼겠습니다 " 원광법사가 말했다.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어 거기에 열가지 조항이 있으나, 너희들은 다른 사람의 신하된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에는 다섯 가지 계(戒)가 있다. 첫째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고(事君以忠), 둘째는 효도로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요(事親以孝), 셋째는 믿음으로 벗과 사귀는 것이요(交友以信), 넷째는 싸움터에 나아가서 물러남이 없는 것이고(臨戰無退), 다섯째는 살생을 가려서 하는 것(殺生有澤)이다. 너희들은 이를 실행하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귀산과 추항이 말하였다. " 다른 것은 잘 알겠습니다만, 이른바 살생(殺生)을 가려서 하라는 것만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 원광법사가 다시 말하였다. " 매월 재(齋)를 올리는 여섯 날과 봄,여름에는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하니, 이는 시기(時期)를 가리라는 말이다. 부리는 가축(家畜)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것은 말, 소 그리고 닭을 말하는 것이다. 미물(微物)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하니, 이는 바로 대상(對像)을 가리라는 것이다. 또한 꼭 필요한 양만큼만 얻고 많이 죽이지 말라는 말이다. 이것이 곧 세속의 좋은 계명이다 " 귀산이 말하였다. "지금부터 이를 받들어 두루 행하여 감히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고 하였다. 그 후 두 사람은 모두 군대에 종군하여 모두 국가에 특출한 공로를 세웠다.
보양국사(寶壤國師)의 중창
가슬갑사 이후 통일신라 250년 간은 오갑사(五岬寺)의 사정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어느 때인가 이름도 방대한 오갑사는 폐사가 되었고, 후삼국(後三國) 전란 중에 운문사는 다시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된다. 운문사의 두번째 중창자는 보양국사(寶壤國師)이었다. 보양국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이며 지식(知識)이라고도 한다.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전해받고 돌아오다가, 용궁에 들어가 불경을 염송하고는 금라가사(金羅袈裟)을 얻었다. 그리고 용왕의 아들 이목(璃木)을 데리고 온 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에 ' 작갑사 (鵲岬寺) '를 지었다.
보양국사와 王建
보양국사가 당(唐)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주석한 곳은 밀양(密陽 .. 당시 推火)의 봉성사(奉聖寺)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동정(東征)을 하여 청도의 경계까지 쳐들어갔는데, 산적의 무리들이 견성(犬城... 伊西山城)에 들어가 거만을 부리며 항복하지 않았다. 왕건(王建)은 산 아래로 내려와 보양스님에게 방책을 물으니 스님은 이렇게 묘책을 가르쳐 주었다. 대저 개라는 짐승들은 밤을 지키지, 낮을 지키지 않으며, 앞을 지키지 뒤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니 낮에 그 뒤쪽(북쪽)을 치시오..
바로 이 보양스님이 운문사를 전설을 남기면서 중창한다. 보양스님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바다를건너는 중 해룡이 그를 용궁으로 청하여 금라가사(金羅袈裟) 한 벌을 주고, 그의 아들 이복(璃木)에게 스님을 모시고 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창건하라고 하였다.
보양스님이 귀국하여 폐사가 된 운문사(雲門寺)를 일으키려고, 산 북쪽에 올라가 살펴보니 뜰에 5층황탑(黃塔)이 보였다. 그래서 뜰로 내려왔는데 그 황탑은 자취없이 사라지고 만다. 보양스님은 다시 산으로 올라가 탑이 있었던 자리를 내려다보니 까치들이 땅을 쪼고 있었다. 이때 보양스님은 "작갑(鵲岬)"이 곧 "까치곶"이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다시 산에서 내려와 까치가 있던 곳을 파보니 무수한 전돌이 나오는데, 그것으로 탑을 쌓으니 한 장도 남음이 없었다.
이리하여 보양스님은 여기에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고 이름하였으며, 얼마 후 왕건은 후삼국으로 통일하였는데, 보양스님이 작갑사를 창건하였다는 말을 듣고 오갑(五岬)의 밭 500결(結)을 절에 하사하고, 937년(태조 20)에는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賜額)을 내려 주었다. 고려왕조의 창립과정에서 군사적으로 한몫을 한 운문사는 왕건의 입장에서는 은혜의 사찰이며, 치국에서 본다면 지방을 다스리는 한 거점으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밭 500結을 내려주었으니, 운문사의 사세는 그것만으로 알 만한 일이다. 500結이라는 수치가 얼마나 큰 것인가는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청도군의 간전(墾田)이 모두 3,932결이라고 했으니, 그것의 1/8에 해당하는 사실만으로도 어림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왕건(王建)이 운문(雲門)이라 이름지어 내린 것은 당나라 때의 고승 운문문언(雲門文偃)을 가리키는 것이다. 유명한 "운문어록"의 운문스님을 기리는 뜻이다. 운문스님은 ' 만약에 석가모니가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오만을 부린다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겠다 '라고 호언할 정도로 대단한 스님이었다.
지금 운문사에는 보양스님이 쌓았다는 전탑(塼塔)은 남아 있지 않는다. 그러나 운문사 작갑전(鵲岬殿)에는 사천왕상이 4개의 돌기둥에 정교하게 조각된 석주(石柱)가 남아 있어 이것이 보물 제3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사천왕 석주는 추측컨데, 전탑의 1층 탑신부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 안동지방에 많이 남아있는 전탑 중 특히 조탑동의 5층전탑의 구조에서 사천왕의 위치와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양스님이 ' 5층황탑 (五層黃塔) '이라고 한 것은 전탑의 상륜부가 금색으로 단청되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
이목소 (璃木沼)의 전설
이처럼 신비한 전설의 소유자인 보양스님의 이적(異跡)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 이목소 (璃木沼)의 전설 '로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목(璃木)은 보양스님이 중국에서 돌아올 때 바다에서 만난 해룡(海龍)의 아들 이름이다.
璃木과 梨木 이목과 이목
이목(璃木)은 절 곁의 작은 못에 살면서 법화(法火)에 게으르지 않았는데, 어느 해에 날이 몹시 가물어 채소들이 모두 말라죽으므로, 보양스님은 이목에게 부탁하여 비를 내리게 하니 흡족하게 해갈되었다. 그런데 천제(天帝)께서 하늘의 일을 무단히 가로챈 이목을 죽이라고 천사(天使)를 내려보냈다. 이목은 보양스님에게 달려와 구원을 요청하였다. 보양스님은 이목을 마루 아래 숨겨두었는데, 이내 천사가 물에 내려와 이목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보양스님은 손가락으로 뜰 앞의 배나무를 가리키며 이목(梨木)이라고 하였다. 이에 천사는 그 배나무에 벼락을 내리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문에 배나무는 거의 죽어가게 되었는데, 이목이 어루만지니 곧 다시 청정해졌다. 그 나무가 근년에 다시 넘어졌다. 어떤 사람이 그 나무로 방망이를을 만들어 선법당과 식당에 설치하였다. 그 방망이 자루에는 명(銘)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전설을 유치한 이야기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큰스님 보양과 샤머니즘 속의 영물(靈物)이 이렇게 행복하게 만나고, 서로를 도와가며 이목이라는 동음이어(同音異語)를 재미있게 풀어가면서 생명이 있을 리 없는 한 계곡의 움푹 파인 작은 못에 이목소(리목소)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은, 비록 작은 정서이지만 인간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될 일이라 생각한다.
지금 운문사 극락교 아래에 있는이목소는 냇돌이 굴러 소(沼)의 자취를 잃어가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짙은 초록색을 발하는 깊은 못이었다고 한다. 운문사 학인스님들은 밤낮으로 이목소 앞에서 세수를 한다고 한다. 한겨울에도 새벽 3시가 되면 어김없이 이목소 개울로 나와 얼음을 깨고 낯을 씻는다. 조석으로 몸을 같이하는 이 개울에 그러한 전설이 있고 없음에도 정서적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이다. 그냥 세숫터라고 했을 그 자리가 이목소로 된 것이다.(유흥준)
운문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운문사를 감싸고 있는 낮고 긴 담장을 지나야 한다. 경내 전체를 담장을 둘러놓아 공간의 폐쇄성(閉鎖性)이 느껴지지만, 그것을 보완해 주는 것은 바로 낮은 담장이다. 운문사의 입구인 2층의 종루(鐘樓)의 좌우를 길게 이어 운문사 전체를 감싸고 있는 담장인데, 운문사의 경내를 한 눈으로 담을 수 있는 개방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폐쇄성(閉鎖性)과 개방성(開放性)의 조화로운 어울림이다.
이곳 운문사에서 " 차사창건 삼대법사(此寺創建 三大法師) "라 하여 운문사의 3대 창건주로, 원광법사, 보양국사 그리고 원응국사(圓應國師 .. 3차 중창자. 뒤에 언급)을 꼽고 있다. 원응국사에 의한 운문사 중창으로 운문사는 " 나라의 500 선찰(禪刹) 중 제2의 선찰 "이 되었다고 한다. 바로 운문사의 전성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문사의 영광은 여기에서 끝을 맺는다. 원응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나자, 무신정권 하에서 민란과 노비반란이 전국에서 일어날 때 이곳 청도와 경주지역에서도 신라부흥운동과 ' 김사미의 란(金沙彌의 亂) ' 이 크게 일어났다. 여기에서 운문사는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는 운문사가 아니라 운문적(雲門賊)으로 등장한다. 12세기 말, 고려 무신정권하에서 일어난 농민과 천민의 항쟁은 대단한 것이었다. 1176년 공주 명학소의 망이,망소이의 천민항쟁으로 시작된 일련의 항쟁 가운데 1193년, 명종 23년에 경상도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은 전에 없었던 규모이었다. 그것이 "고려사" 명종 23년 7월조에 다음과 같이 가록되어 있다.
남적(南賊)이 봉기하였다. 그 중 가장 극심한 자는 운문(雲門)에 거점을 두고 있는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 .. 현재의 밀양)에 거점을 두고 있는 효심(孝心)이다. 이들은 떠돌아다니는 자(流亡民)들을 불러모아 주현(州縣)을 공격하였다.
여기서 운문(雲門)이란 당시 지명이 아니었으니, 운문산이나 운문사를 지칭하고 있다. 운문사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의 효심(孝心)이 연합전선을 편 이 농민항쟁은 지방관, 토호, 사원에 대한 수탈에 대한 반발을 넘어서 경상도 일대를 장악하면서 중앙정부와 대결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더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대공세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김사미는 이듬해 2월, 개성에 사람을 보내어 편안히 살 수 있게만 해준다면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이에 왕은 죄를 묻지 않겠다며 심부름꾼을 돌려보내고, 병마사에게 위무토록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김사미는 안심하고 항복하였으나, 병마사는 김사미를 즉시 죽여버리고 잔여 농민군의 소탕에 나섰다. 정부의 기만책에 분노한 농민군들은 운문산으로 숨어들었으며, 험악한 산세를 배경으로 하여 완강하게 버티었다. 이 농민항쟁은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나라에서는 이들을 운문적(雲門賊)이라고 했다.
운문산의 그런 봄과 겨울이 열 번이나 바뀌도록 운문적이 된 농민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운문산을 떠나는 자가 생기기는 커녕 오히려 산으로 들어오는 유망민이 다욱 불어났다. 그것은 "고려사" 신종3년(1200년) 4月條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말해주고 있다. 밀성(密城 .. 지금의 밀양)의 관노(官奴) 50여 명이 官의 은그릇을 훔쳐 운문적(雲門賊)에 투항하였다.....
一然스님 .. 운문사의 住持가 되다.
김사미와 효심의 농민군 봉기 때 운문사가 누구의 손에 장악되었는지, 그 피해가 어떠했는지에 대하여는 아무 기록도 남아 있지 않는다. 다만 농민항쟁이 마무리되고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간섭기로 들어가는 1277년, 72세의 일연(一然)스님이 운문사의 주지(住持)로 임명되었다.
이미 대선사의 승계를 제수받은 일연스님은 강화도 선월사(禪月寺), 영일의 오어사(吾魚寺), 비슬산의 인홍사(仁弘寺)의 주지를 거쳐 충렬왕의 명으로 운문사에 주석하게 되었다. 이후 5년간의 주지생활 시절, 일연스님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유산인 "삼국유사"를 집필하였다. 1282년, 일연스님은 다시 충렬왕의 부름으로 개경 광명사로 올라가서 국존(國尊)에 책봉되고, 잠시 고향 경산(慶山 ..당시 章山)에 내려와 90세 노령의 모친을 봉양하다가 모친이 타계한 후, 군위 인각사에서 8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채헌이 지은 "운문사사적기"는 원응국사 이후의 역사는 기록하고 있지 않는다. 다만, ' 4비(碑), 5갑(岬), 5탑(塔), 4굴(窟)이 있었는데 파괴되었다 '고만 적고 있다. 5갑은 5갑사를 말하고, 4비는 신도비, 사액비(賜額碑), 행적비(行跡碑), 위답노비비(位畓奴婢碑)인데, 그 중 노비비는 절집의 奴婢들이 신분해방을 부르짖으며 일어날 때 그 봉기의 상징으로 파괴한 것이니 이해할만 하다. 또 사액비도 왕건이 운문사라는 이름을 내리면서 절의 토지와 노비를 획급한 내용까지 적혀 있었을 것이니 그 운명을 노비비와 함께 했을 것도 같다. 그런데 원응국사의 신도비는 오늘날까지 건재하건만, 행적비는 틀림없이 일연스님의 행적비일터인데,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위 사진은 운문사의 암자인 북대암(北臺庵)에서 내려다 본 운문사의 전경이다. 운문사 경내에 들어오면 야트막하게 싼 아담한 돌담이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이 있어야 할 자리를 막고 호거산(虎踞山)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모든 사찰이나 궁전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반하여 유독 운문사만이 남향(南向)에 자리하여 있다. 풍수적으로 호랑이가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운문사를 향하고 있는 모습으로, 북향을하면 골짜기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보게 되어 재물이나 富에 인연이 멀다는 의미에서 절을 뒤로 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이 때문에 운문사는 산을 바라보며 등을 내보이고 있다. 찾아가는 중생들은 운문사의 뒷모습부터 보게된다.
운문사의 가람 배치
운문사의 가람배치는 두 구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불이문(不二門)을 경계로 북쪽에 법당 등의 전각이 들어서 있고, 남쪽에는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가 자리한다. 벌 바로 옆으로 계곡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데, 서쪽은 능선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어 사찰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면적이 협소하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동쪽과 남쪽으로 전각이 확대되어 불사가 이루어졌다. 대웅보전은 북쪽에 있고, 그 왼쪽에 응진전과 조영당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요사가 있다. 대웅전에서 마주 보는 위치에 만세루가 있으며, 그 오른쪽에 비로전과 오백전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만세루에서 남쪽으로 약간 뒤로 물러서서 작압전이 있고, 그 동쪽으로는 관음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칠성각이 '一'자형으로 들어서 있다.
범종루 梵鐘樓
범종의 장엄한 소리는 중생을 착한 길로 인도하여 해탈의 길로 승화시켜주는 의식구이다. 또한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이다. 항아리 모양의 종신부에는 화려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상하대(上下帶)에는 보상당초문이 돌려새겨져 있고,9개의 유두는 꽃모양으로 조각되었다. 이곳 운문사에는일주문(一柱門)이 따로 없기 때문에 범종루 아래로 법문을 들어서야 한다.
처진 소나무
운문사(雲門寺)는 어리석은 마음을 온전히 깨우고 그 마음을 읽어줄 것만 같은 품이 너른 절집이다. 경내에 들어서자 그 이름 유명한 ' 막걸리를 마신다느 소나무 '가 예의 처진 가지를 내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은 품세이다. 나무 아래로 가지를 뻗은 모습이 풍성하고 너그러운 품을 지녀 보는 이의 발길을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운문사 노송(老松)은 1966년 '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 '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수령 약 500년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높이는 6m 정도이지만, 가지는 마치 우산을 펼쳐 놓은 듯 사방으로 10여m 이상이나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땅에 닿지 않도록 지주를 받쳐 놓았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한때 키가 작고 밑동부터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소나무를 말하는 반송(蟠松)으로 부르기도 하였지만, 이 나무는 2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보고 있다. 높이가 6m에 이르는데 희한하게도 가지가 모두 땅바닥들 향해 뻗어 있다.
처진 소나무란 소나무의 한 품종을 가리킨다. 흥미로운 일은 해마다 봄철이 되면 이 소나무에 스님들이 12말의 막걸리를 부어 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솔가지마다 반짝거리는 윤기로 눈이 부시다고 한다. 현재 사방으로 뻗은 가지를 군데군데 석주로 받치고 있으나, 노쇠했다는 느낌은 전혀 없이 아직까지 싱싱하기만 하며, 해마다 솔방울이 달리고 새가지가 뻗고 있어 신기함을 더해주고 있다.
비각 碑閣
원응국사비 圓應國師碑
원응국사의 3차 중창
청도 운문사를 세번째로 중창한 것은 원응국사(圓應國師. 1052~1144) 이학일(李學一)이었다. 학일스님은 전북부안군 보안면 출신으로 승과에 합격한 후 宋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선사, 대선사의 승계(僧階)를 밟아 인종 즉위년에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다. 그의 법맥은 가지산파이었으니, 오늘날까지도 운문사는 그 법통을 그렇게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왕사가 된지 3년 후 학일스님은 운문사로 가고자 하였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하다가 4년 후인 1129년에 결국 운문사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나라에서는 " 신수리, 신원리, 이원리의 토지 200結과 국노비(國奴婢) 500명을 운문사에 획급하여 만세토록 향화(香火)를 받들게 하였다 "고 하니 운문사의 사세는 여기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운문사사적기에 의하면, 원응국사가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가람의 위용을 갖추어 사찰 경내 사방에 장생표주(長生標柱)를 설치하고, 전결노비비(田結奴碑碑)까지 세우니 "나라의 500선찰(禪刹) 중 제2의 선찰"이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 시절이 운문사의 최고 전성기이었으며, 고려왕조가 개국 이래 끊임없이 추구해온 中央 文臣貴族의 문화가 활짝 꽃피는 문화적 전성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운문사의 영광은 여기서 끝을 맺는다. 원응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나자, 고려의 무신정권 하에서 민란과 노비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고, 이때부터 운문사는 운문적(雲門賊)으로 불리우게 된다.
보물 제31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높이 230cm, 너비 91cm의 크기이다. 현재 碑을 받치고있는 귀부(龜趺)와 머릿돌인 이수는 결실되었고, 세 조각으로 절단된 비신(碑身)만이 복원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원응국사의 행적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문도(門道)들의 법명이 있다. 건립연대는 그 부분이 파손되어 확실히 알 수는없으나, 원응국사가 입적한 다음 해에 고려 인종이 국사로 봉하고, 윤언이(尹彦肄)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대략 1145년 이후로 추정된다. 윤언이(尹彦肄)는 윤관장군의 넷째 아들로 당대의 문사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 등을 통하여 탄연(坦然 ... 고려의 최고 명필)스님이 글씨를 쓴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금석적 가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설송대사비 雪松大師碑
임진왜란으로 병화(兵禍)를 입은 운문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이는 설송대사(雪松大師. 1676~1750)이었다. 지금 원응국사비 곁에 있는 설송대사비를 보면, 1754년(영조 30)에 세워진 것인데, 글은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짓고, 글씨는 형조판서 이정보(李鼎輔)가 쓰고, 전액(篆額)은 승정원 도승지 이익보(李益輔) 3형제가 써서 이채로운데, 이들은 모두 월사 이정구의 현손들이었다.
대웅보전 大雄寶殿
운문사에 대웅전이 두 개인 이유
처진 소나무와 만세루 사이를 지나 넓은 광장 맞은 편에 1994년에 신축한 대웅보전이 있다. 절집에서는 법당에 석가모니부처를 주불(主佛)로 모시면 ' 대웅보전 '이라 하고,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면 ' 대적광전 ' 또는 ' 비로전 '이라고 한다. 아미타불을 모시면 ' 무량수전 ', 미륵부처를 모시면 '미륵전'이다. 어느 부처님이 주불(主佛)이냐에 따라 법당의 이름이 다른 것이다.
이 신축한 대웅보전 안에는 원칙대로 석가모니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일반 사찰과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운문사에는 이 대웅보전 말고도 대웅보전이 하나 더 있다. 만세루 남쪽 옆의 대웅보전이 그것이다. 1105년(고려 숙종 10)에 원응국사에 의해 건립된 뒤 수차례에 걸쳐 중창된 보물 제 835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인데 최근 2006년 또 한번 보수를 한 건물이다. 그런데 이 건물에는 석가모니가 아닌 비로자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비로전'이나 ' 대적광전 '으로 바꾸어야함이 당연하다.
언제부터 이 대웅보전에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상태로 존속되어 오면서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되어 문화재청에서 관리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94년 새로운 대웅전이 신축되자 옛 대웅보전의 현판을 '비로전(毘盧殿)'으로 바꿔 달았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을 마침내 비로전으로 바로 잡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옛 대웅보전이 보물로 지정 등록된 문화재이기 때문에 사찰에서 마음대로 이름을 바꿀 수 없다면서 문화재청에서 제동을 건 것이다. 즉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지만 바로자나불이 제작 연대가 대웅보전 건물보다 앞선다는 증거가 없으며 대웅보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정된 것이니 비로전이라고 이름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 붙인 비로전 현판은 떼어지고,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이 다시 걸렸다. 따라서 한 개의 절에 대웅보전이 두 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연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잘못 이름이 붙여진 채로 후손들에게 계속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 보물은 건물 자체가 보물이지 이름이나 현판을 보고 보물로 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현판을 바꾸어 단다고 보물 자체를 훼손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불당의 이름을 정하는 것은 사찰의 주인인 불교 종단에서 정할 일이지 국가에서 그 이름까지 관여할 일은 아닐 것이다. 남의 집에 세들어 사는 듯한 비로자나불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 1994년에 새로 건립된 대웅보전은 팔작지붕에 앞면 7칸, 옆면 5칸의 큰 규모로 운문사의 중심을 이루는 본당이다. 안에는 삼세불(三世佛)인 과거 연등불과 현세 석가모니불, 미래 미륵불을 봉안하였다. 좌우의 협시보살로는 관음, 문수, 보현, 대세지보살의 4대 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1653년(조선 효종 4)에 지은 건물로 건축연대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이 잘 나타나고 있어 보물 제8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단은 막돌로 쌓고, 상단석은 장대석으로 된 갑석을 놓아 정연하게 마무리하였으며, 정면 가운데 잘 다듬질된 4단의 계단을 놓았다. 현재의 대웅보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에 중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주춧돌은 자연석이며 그 위에 민흘림의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부분에 창방과 평방을 짜 맞추어 하부 구조를 구성하였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주두(柱頭) 위에는 주심포를 놓았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는어간에 4구, 옆칸에 3구씩의 공포를 짜 놓았다. 정면의 창호는 모두 꽃살무늬 창호인데, 맞은 편 금당(金堂)의 꽃살창호와 함께 매우 아름답다.
석수 石獸
석수(石獸)는 궁궐, 사묘(祠廟), 능묘(陵墓)의 앞에 세워두는 짐승의 석상이다. 이와 같은석수는 석인(석인)과 더불어 중국의 진한시대부터 유래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때부터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왕릉 등에 방향과 시간을 맡아 능을 보호하는 수면인신사(獸面人身像)인 십이지신상, 문관과 무관이 형상을 한 문인석, 무인석 등과 함께 석사자를 배치하였다. 또한 옳고 그름과 선악으로 가릴 줄 안다는 상상의 짐승인 해태는 중국에서 이 모양을 본떠서 법관의 관을 만들었고, 한국에서는 정사(政事)는옳고 그름을 가려서 하라는 의미에서 궁전 좌우에 세웠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국보 제162호로 지정된 무령왕릉 석수를 꼽을 수 있다.
대웅보전 창살문
극락의 문, 우리나라 사찰의 꽃살문은 아름다움과 장엄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문살이 발달한 동양에서 우리의 꽃살문은 매우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중국의 문살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과 장식성이 풍부하다. 그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고 우선 놀라게 되지만 이내 식상해지고 만다. 일본의 문살은 격자의 간결한 의장에 세련된 선미(禪味)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 문살이 예리하고 엄격하여 신경질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의 꽃살문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갖게 한다.
이에 비해 우리의 꽃살문은 오래 접해도 실증이 나지 않는다. 또 담담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도무지 실증이 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아름다움이 문살 속에 숨어있다. 우리의 꽃살문은 중국과 일본의 문살처럼 긴장이 필요없다. 편안한 가운데 아름다움의 쾌감을 주는 아주 독특한 장식 미술품이다. 문은 이쪽과 저쪽 공간을 연결하여 준다. 이쪽과 저쪽은 벽으로 차단되어 있다. 그 연결 통로가 바로 문이다. 사찰의 저쪽은 신성한 부처가 사는 극락의 세계이다. 이쪽은 고통을 안고 중생이 살고 있는 사바의 세계이다.
중생들은 이승의 티끌을 털고 부처님이 사는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경계는 지극히 환희가 넘쳐나는 곳이다. 이곳은 아름답지만 장엄으로 장식되어야 한다. 최상의 장엄은 언제나 그 소재가 꽃이 된다.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以心傳心)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전했을 때의 자비로운 미소도 연꽃을 매개로 하였다. 불교의 최고 경전인 법화경이나 화엄종의 명칭에도 꽃이란 글자를 사용하였다. 불교에서 꽃은 법이고, 진리이다.
그 꽃(즉, 불법)과 문(門)이 결합된 사찰의 꽃살문에서 유교사회이었던 조선사회의 비주류(非主流)들의 소박하고 순수한 심성이 묻어나고 있다. 조선시대 사찰의 꽃살문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독특한 한국성을 지닌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고려시대의 불교가 귀족적(貴族的)이었다면, 사찰의 꽃살문의 기교도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불교는 건국 이후 수백년 동안 천대받고 소외된 채 대중 속으로 들어간 민중불교이다. 대중들의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정서를 꽃살문을 통해 담아냈다. 거기에는 긴장이나 격의가 없다. 포근함과 다정다감이 배어 있을 뿐이다. 사용된 선(線)역시 우리 야산(野山)의 과장없는 능선, 시골길의 돌담길, 논두렁, 밭두렁의 선과 꽃을 닮고 있다. 때문에 화려하기 보다는 너무나 소박하다.
비로자나불과 후불벽화
이 비로자나불의 조성 시기에 대하여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양식으로 보아 고려 말 조선 초로 추정하고 있다. 지불(紙佛)로 조성된 이 불상은 나발(螺髮)의 머리 형태에 가부좌한 오른발을 풀어 앞으로 조금 내민 자세가 매우 편안하게 보인다. 이러한 불상의 자세는 오대산 상원사에 봉안된 문수동자상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본래 이 불상을 봉안하였던 목조 대좌는 낡아서 현재 조영당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 후불탱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과 석가여래불이 좌우로 협시(脇侍)한 삼신불탱이며 1755년에 조성한 것이다.
대웅전 불단 大雄殿 佛壇
불상을 모셔놓는 단을 불단(佛壇)이라고 한다. 수미(須彌)라는 말은 수미산(須彌山)에서 따온 것이다. 수미산은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높이가 8만 유순(약 80만km)이나 된다. 불상을 올려놓는 단을 수미단이라고 한 것은 부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수미단 곳곳에 수미산을 상징하는 무늬를 새겨넣는데, 상중하 3단에 연꽃, 구름, 만(卍)자를 새기기도 하고, 수미산에 산다는 짐승이나 사자, 호랑이, 코끼리, 물고기, 거북, 가재 등을 조각하기도 한다. 보통은 정사각형으로 만들지만, 팔각형이나 육각형인 것도 있다.
육각형은 육바라밀, 팔각형은 팔정도를 의미하며, 정사각형의 사각은 동서남북을 상징한다고 한다. 상,중,하 3단 중 상단과 하단은 각각 16단의 작은 단으로 꾸미는데, 이 작은 단은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대보리심을 상징한다. 위로 향한 16단은 혜문(慧門)의 16대 보살을, 아래로 향한 16단은 정문(定門)의 16대 보살을 뜻한다. 여기에 법(法), 계(界), 체(體), 성(性), 지(智)를 합하여 "금강계 37존"이라고 부른다.
악착보살
대웅보전은 반야용선(般惹龍船)이다. 이 자비스러운 배가 고해(苦海)의 바다를 건너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실어다 준다. 운문사 대웅보전 천정에는 반야줄을 잡고 악착같이 극락세계로 가려고 하는 악착보살이 매달려 있다. 줄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이 천진한 아기의 모습이다. 이름 그대로 이 生에 기필코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악착같이 정진하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으로, 악착보살이 외줄에 매달린 것은 오로지 수행자로서의 일념으로 한길만을 걷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악찰보살이 매달린 용 모양이 조각된 1m 가량의 길이로 날렵해 보이는 편인 이 조각품을 반야용선이라고 한다. 악착보살은 경전에 나오는 보살의 명호가 아니라 이야기 속의 어떤 악착스러운 보살에게 붙여진 별명인데, 이 보살의 이야기는 설화와 관련된 문헌 기록에는 보이지 않고, 다만 같은 내용이 구전을 통하여 전해내려 오고 있다고 한다. 구전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옛날, 청정하고 신심이 깊은 이들을 서방의 극락정토로 인도해 가는 반야용선(반야용선)이 도착하였을 때, 이용선에 타야할 어떤 보살이 자식들과의 마지막 작별인사로 그만 너무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이 보살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용선이 떠나가고 있었기에 보살은 용선의 밧줄에 악착같이 매달려서 서방극락정토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악착보살"이 되었다고 한다.
불교에서 반야용선은 중생들을 태워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배이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피안의 세계로 이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모든 이들이 그리할 수 없기에 생전에 덕을 쌓고 부처에 의지하면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으로 갈 수 있다고 길을 열어 놓았다. 그 피안의 세계로 가는 반야용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악착같이 매달린 동자의 모습 ... 반야용선에 오르지 못했지만, 줄이라도 매달고 가고 싶어하는 애처로운 중생의 모습이다.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동호 銅壺
보물 제208호로 지정되었으며, 고려시대의 구리 항아리이다. 크기는 높이가 55cm, 입지름이 19.5cm, 복경(腹徑)이 31cm, 밑지름이 23cm이다. 넓은 어깨와 굽이 달린 항아리로 거의 우너통형에 가까우며, 감로준(甘露樽)이라고도 한다. 단아한 형태에 전체가 흑색을 띠고 있는 이 항아리의 용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찰에서 사용하는 불구(佛具)의 하나로 추정된다. 동호의 몸체 전체 좌우에 견고한 손잡이 고리가 달려 있는데, 여의두문(如意頭紋)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항아리의 둥근 뚜껑 중심에 손잡이가 달려 있는데 꼭지 위에 여섯 장의 복련(覆蓮)형 연꽃잎이 있고, 그 위에 십자모양의 화염무늬(火焰紋)를 장식하였다. 항아리의 어깨 부분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따르면 "함옹삼년육월일 개조동해중삼십근도감대덕성념 (咸雍三年六月日 改造童海重三十斤都監大德成念)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함옹3년"으로 보아 고려시대인 1067년에 개조하였고, 무게는 30근이라고 되어 있는데, 항아리의 제작 시기는 이보다 앞선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로 여겨지고 있다.
동호의 뚜껑 부분
전체적으로 검은 색조를 띠고 있으며 항아리처럼 둥글고 벌어진 몸체의 저면에는 약간 밖으로 벌어진 높은 굽이 있다. 몸체에는 아무런 장식(裝飾)이 없고, 양 어깨 부분에 고리형의 손잡이가 돌출되었으며, 손잡이 안으로 둥근고리가 달려 있다. 직립(直立)된 구연부(口緣部)를 가진 뚜껑은 위로 가면서 납작해지다가 중앙에서 2단의 굴곡을 이루었고, 솟아오른 높은 손잡이 위에 각각 연꽃과 화염보주(火焰寶珠)를 투각한 화려한 모습의 뉴(紐)가 부착되었다. 이러한형태의 대형 항아리는일반적인 용도보다 사찰의 공양(供養) 법구(法具)로 특별히 제작된 불기(佛器)의 일종으로 추정된다.
금당 앞 석등
따로 일주문(一柱門)이없는 탓에 범종루 아래로 법문에 발을 디딘다. 운문사는 신라(新羅) 진평왕 때 창건된 고찰이다. 신라의 원광법사(圓光法師)가 화랑(花郞)들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전수한 장소로, 그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이다. 고려시대에는 일연(一然)스님이 주지(住持)로 있으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밑그림을 그리고 완성한 곳 또한 운문사이다.
특히 운문사(雲門寺)는 우리나라의 대표 비구니(比丘尼) 사찰로 학승(學僧)들이 공부하는 대가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운문사는 일반관람객이 둘러볼 수 있는 공간과 스님의 도량으로 구분되어 있다. 일반인들의 발걸음을 일부 제한하고 있는 까닭은 이곳에 국내 최대 규모의 운문승가대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1958년 비구니(比丘尼) 전문강원(專門講院)이 개설된 이래 많은 졸업생들이 배출되었으며, 현재에도 25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정진하고 있다. 학인스님들은 '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 一日不作 一日不食 '의 청규를 엄격하게 실천하고 있다. 세속(世俗)과 떨어진 여승(女僧)들이 수도하는 도량답게 절집의 품은 가지런하고 정갈하다.
운문사 대웅보전 남쪽에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인 금당(金堂)이 있다. 금당이라고 편액하였지만, 부처를 모신 불전은 아니고 스님들이 생활하는 요사이다. 이 금당 앞에 보물로 지정된 석등이 있으니, 이를 금당 앞 석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석등을 보려면 스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 금당(金堂)은 본래 금법당(金法堂)이라고 불렀다. 초창은 원광국사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보양국사가 중창하고 원응국사가 1105년 3중창할 때 전체를 괴목(槐木)으로 건립하였다. 이 때는 금단청을 한 인법당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12년 지금의 건물로 개축하였다. 이 금당은 현재 승가대학의 강의실 겸 학인스님들의 요사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석등은 우리나라 석등의 기본 형태인 팔각형의 석등이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지대석은 네모난 형태이고 그 위의 부재는 모두 팔각을 이루고 있다. 지대석과 연화대석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아래받침돌(하대석)에는 여덟 장의 잎을 새긴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놓인 가운데기둥(중대석)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으며, 위받침돌(상대석)에는 각 면마다 연꽃이 새겨져 있다. 화사석에는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경쾌한 모습이며, 꼭대기에는 보주(寶珠 ..연꽃봉우리 모양의 장식)가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석등은 각부의 균형이 잡혀 있고, 조각도 우아한 아름다운 석등이다. 상하대석 연꽃모양의 장식적 요소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수법으로 석등의 존성연대가 8세기 이후라는 것을 짐작케 하고 있다.
빈자일등 貧者一燈
일반적으로 석등은 하나만 세우는 것이 경전의 정신에 맞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 시등공덕경(施燈功德經) "이라는 경전에 .. " 가난한 자가 참된 마음으로 바친 하나의 등(燈)은 부자가 바친 만(萬) 개의 등보다 더 준대한 공덕이 있다 " 라는 구절에서 근거한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 여인의 등불(貧者一燈 또는 貧女一燈)이라는 설화를 통해서 등불을 밝히는 우리의 마음을 다듬어본다.
석가모니 당시 사위성에는 홀로 사는 아주 가난한 노파(老婆)가 있었다. 하루는 온 성 안 사람들이 기쁨에 겨워 환호하고 있는지라 노파가 그 까닭을 물었다. 이에 사람들은 " 오늘이 부처님께서 사위성으로 오시는 날이라 밤이 되면 수많은 등불을 밝히며 부처님을 맞을 것 "이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노파는 등불을 밝힐 기름을 살 돈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하지만 그 노파는 곧 한탄을 떨쳐버리고 구걸을 해서라도 부처님에게 공양(供養)할 등불을 밝히리라 마음을 먹었다. 노파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전 두닢을 겨우 구걸하여 기름집을 찾아 갔다. 기름집 주인은 기름의 쓰임새를 물었다. 노파가 답하기를 " 부처님 계신 세상에 태어났지만, 너무 가난하여 지금껏 아무 것도 공양하지 못했는데, 오늘 부처님을 맞아 하나의 등불이나마 밝혀 공양하고자 한다" 고 하였다. 기름집 주인은 크게 감동하여 갑절이나 많은 기름을 주었다.
노파는 기쁜 마음으로 등불을 밝히고 기도하였다. ' 저는 가난하여 이 등불 밖에는 공양할 수 없습니다. 부디 이 공덕으로 오는 세상에 성불(成佛)하여 그 지혜의 빛으로 모든 중생의 어두운 마음을 밝게하여지이다 ". 밤이 깊어짐에 따라 다른 등불은 하나 둘 꺼져갔으나, 노파의 등불만은 더욱 밝게 빛났다. 날이 밝아오자 부처님의 제자들이 신통력으로 꺼지지 않는 등불을 꺼지게 하였다. 모든 등불이 꺼졌지만 노파의 등불만은 꺼지지 않았다. 부처님은 " 마음씨 착하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밝혀진 등불이기에 꺼지지 않는 것이다. 이 등불의 공덕으로 그 노파는 오는 세상에 반드시 성불할 것이다. 한결같은 정성이 깃든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고 하면서 이 노파가 30겁(劫) 후에 수미등광여래(須彌燈光如來)라는 이름의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남겼다.
작압전 鵲鴨殿
작압(鵲鴨)은 처음 보양국사가 지었고, 1105년 원응국사가 3중창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는데, 이름 그대로 까치집 모양을 하고 있으며, 경내의 전각 중에서 가장 작은 건물이다. 이건물의 편액은 작압(鵲鴨)이라고만 되어 있으나, 편의상 작압전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편액은 1910년에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작압의 원형은 신라시대에 조성한 전탑(塼塔 ... 벽돌을 쌓아 만든 탑) 형식의 불전이었다 (위 사진 .. 1900년대에 촬영한 사진). 훗날 세월이 흘러 무너지자 1935년 무렵에 벽체의 벽돌을 제거하고, 목조건물의 형태로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다. 지금처럼 전각의 형태가 아닌 전탑(塼塔)의 모습이었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전각도 평면이 사각형인데다, 지붕의 꼭대기에는 보주(寶珠)가 설치되어 있는 등 불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아울러 이는 곧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大鵲岬寺) 창건의 연기(緣起)를 말해주는 것이다. 아마도 작압전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작압(鵲鴨)이라고 하는 것도 본래 전각이 아니라 전탑이었기 때문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작압전 안에 있는 석조여래좌상과 사천왕 석주는 발견 당시 절반 가량이 흙 속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본존불의 좌대 속에서 발견된 사리함 명문에 의하여 신라 경문왕 때 조성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즉 "함통육년(咸通六年)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사리함과 사리구가 수습되었는데, 함통(咸通) 6년은 신라 경문왕 5년인 865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작압전은 신라 말기의 작품임을 알 수 이는 것이다. 석조 여래좌상은 보물 제317호, 좌우 2위씩 전부 4개가 있는 사천왕석주는 보물 제 3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전탑(塼塔)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1900년대 초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지붕이 기와로 덮여진 전탑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목조건물이 세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1987년 전각이 기울어져 해체 수리를 하게 되었다.해체 복원 당시 그 안에 봉안되어 있던 석불좌상의 대좌 아래에서 사리석함과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위 사진).
석가여래좌상 ... 보물 제317호
석조여래좌상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졌으며, 불상의 높이는 63cm이고, 무릎의 폭이 25cm,이며, 대좌의 높이가 41cm, 광배의 높이는 92cm이다. 불상의 전면은 흙으로 칠하고, 종이를 바른 위에 호분을 도장하였었으나, 근래 호분을 벗겨내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대좌는 상, 중, 하 3석이고 하대석은 평면 6각형으로 각 모서리에 1개 각면에 2개씩의 18엽, 단판연화를 조각하였다. 중대석도 한 돌로 된 6각형이나 거의 없어졌고, 상대석은 평면 타원형으로 양 옆에 당초문, 그 위에 14엽 연판을 조각하였다. 광배는 주형으로 두광에 연화문을 조각하고, 외연에는 화염문을 조각하였다. 대좌는 풍화 탈락이 매우 심하나, 광배는 비교적 완전하게 보존되어 아름다운 조각을 볼 수 있다.
사천왕 석주(石柱) .. 보물 제318호
작압전 내 좌우 벽면에 있는 사천왕 석주(四天王 石柱)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현재 보물 제3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주 형태로 다듬질된 석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진 형태로, 작압전 내부에 대칭으로 각각 2기씩 전부 4기가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높이는 114cm, 118cm, 122cm, 128cm로 조금씩 다르다. 이 사천왕상들은 모두 무인(武人)의 복장으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으나,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또한 원형의 두광(頭光)을 지니고 악귀(惡鬼)를 밟고 서있는 자세로 천의(天衣)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지물(持物)로는 보탑(寶塔)을 지니고 있는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 외에 나머지 3위의 천왕은 칼고 봉(棒), 삼고(三納), 금강저(金剛杵) 등을 지니고 있어, 현재 이들 사천왕의 각각의 명호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이 사천왕 석주(石柱)가 언제부터 이 자리에 배치되었는지 잘 알 수 없는데, 본래부터 이렇게 자리잡고 있었다고는 보기가 어렵다. 이 작압전의 원형(原形)은 외형(外形)은 불탑(佛塔)이면서, 내부는 불전으로 꾸며져 석조여래좌상을 봉안하였는데, 이 석주가 작압전 창건 당시 외벽에 배치되었는지 혹은 지금처럼 내벽에 놓였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만세루 萬歲樓
만세루(萬歲樓)는 팔작지붕에 정면 7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조선시대 초,중기에 건립된 누각으로 임진왜란 때 대웅전은 소실되었으나, 만세루는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35년 지붕을 수리하였고, 1980년 지붕이 붕괴되어 다시 보수하였다.
건물의 네 면을 창호 없이 모두 개방한 것이 운문사 만세루의 특징이다. 만세루의 용도는 옛날 북쪽에 있었던 대웅전을 향하여 위치하면서 법회나 설법 시사용하였던 건물이었던 것으로추정되고 있으며, 면적을 약 200평의 대규모이다. 사찰 입구에 범종루을 짓기 전에는 종각을 겸하여 사용하였다. 당시 사용하던 운문사 대종(大鐘)이 만세루이 있으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뉴 부분은 떨어져 나갔고. 종신(鐘身)에 보살 입상 2구가 새겨져 있다. 또한 상단에 원형의 테를 두르고 범자(梵字)를 새겼으며, 운문사대종(雲門寺大鐘)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만세루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천정은 서까래를 노출시켜 연등천정(椽등천정)으로 하였다. 가구형식은 정면 평주(平柱)와 측면 평주의 줄을 맞춘 격자 위에 고주(高柱) 없이 평주만으로 축(軸)을 이루고 대들보나 퇴보를 사용하지 않았다. 모두 한칸 씩 짧은 평보를 걸고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운다음 중보를 얹고 그 위에 다시 대공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게 하였다.
만세루의 건축 양식을 보면, 기단은 막돌쌓기의 기단으로 건물에 비하여 비교적 낮은 편이고, 건물 내부 바닥의 마루판도 일반적인 누각에 비하여 높지 않은 편이다. 주춧돌도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막돌초석이며 덤벙주초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위에 원형의 민흘림 기둥을 세웠고, 기둥 윗몸에는 창방을 끼웠으며, 윗몸 위에는 비교적 굽이 낮은 주두를 놓고 이익공을 짜 올렸다.
처마는 모두 활주(活柱)를 세워서 안정되게 하였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서까래를 노출시켰다. 가구(架構) 형식은 옆면과 앞면에 평주(平柱)의 줄을 맞춘 격자 위에 고주(高柱) 없이 평주만으로 축을 이루고, 대들보나 퇴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모두 한 칸씩 짧은 평보를 걸고 그 위에 동자그둥을 세운 다음 중보를 얹고 다시 대공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게 하였다.
명부전 冥府殿
오백전 五百殿
오백전(五百殿)은 원광국사가 창건하고, 보양국사가 중창할 때부터 있었던 전각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1105년, 원응국사가 중창한 건물이 지금의 취사장 옆에 있었는데, 언제인가 허물어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중건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팔작지붕으로 앞면 4칸, 옆면 3칸의 규모이다.
오백전 내부에는 중앙의 불단에 석가여래상을 봉안하고, 좌우에 미륵불과 제화갈라보살을 협시로 안치하였다. 또한 그 좌우로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이 오백나한상은 본래 청도 적천사에 봉안되었던 나한상으로, 어느 때인지 알 수 없으나 운문사로 이운(移運)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정확한 근거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불이문 不二門
솟을대문 형식에 홑처마로 맞배지붕을 올린 1칸의 문으로, 양쪽에는 자연석으로 담장을 쌓아 홑처마의 기와를 얹었다. 부이(不二)란 둘이 아닌 경계를 말하며 절대 차별이 없는 입지를 말한다. 이 문을 해탈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서 3층석탑 東, 西 3層石塔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으로 높이 5.4m로써 대웅전 앞에 있는 이 석탑은 자리의 지세(地勢)가 행주형(行舟形 .. 전복되기 쉬운 배 모양)의 흉맥이라 하여, 그 지세(地勢)를 누르기 위하여 양쪽에 탑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비로전 앞에 동서(東西)로 건립된 2중 기단 위의 3층석탑이다.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한데 붙여서 짰고, 중석에는 각 면에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2 주(柱)씩 있다. 갑석은 넓어서 안정되어 보이고, 상면에는 경미한 경사가 있으며, 중심에 각형(角形)과 호형(弧形)의 받침이 있다.
옥개석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고 밑의 받침수는 각층 5단이며,꼭대기에는 각형 1단의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양 탑에 노반(露伴)이 있으며, 서탑에는 다시 그 위에 복발(覆鉢)과 앙화(仰花)가 남아 있다. 이 석탑은 붕괴 직전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보수하였는데, 이때에 팔부중상 등 일부를 새로운 석재로 보충하였다.
(西) 삼층석탑
팔부신중상 팔부신장상
(東) 삼층석탑
팔부신중상 八部神衆像
이목소 璃目沼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국에서 불법을 수학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西海)에서 용왕(龍王)을 만났는데, 용궁에서 설법해 주기를 청하였다. 용왕은 설법을 해 준 답례로 금라가사 한 벌을 보시하고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 지금 삼국이 혼란하여 아직 불법(佛法)에 귀의한 군주가 없지만, 만약 내 아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 작갑(鵲岬)에 절을 지어 살면 도적을 피할 수 있고, 또한 몇 년이 안 되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 후 보양국사는 작갑 어귀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도장궤를 주며, " 내가 원광이다 "하고는 사라졌다. 이에 보양국사는 허물어진 절을 일으키기 위하여 북쪽 고개에 올라가서 내려다 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었다. 보양국사는 "작갑(鵲岬)"이라고 한 용왕의 말이 생겨나서 그곳을 찾아가 땅을 파보니 예전의 전돌이 수 없이 나왔다. 이것을 모아 탑을 이루니 남은 전돌은 하나도 없으므로, 옛 절터임을 알고 그 곳에 절을 세워 이름을 작갑사(鵲岬寺)라 하였다.
한편 이목은 항상 절 곁에 있는 작은 연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음으로 돕고 있었다.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 밭에 채소가 마르자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지방이 흡족하였다.천제가 하늘의 법칙을 어겼다 하여 이목을 죽이려 함에, 보양국사가 침상 밑에 이목을 숨겼다. 천사가 보양국사에게 이목이 있는 곳을 물으니 보양국사가 뜰 앞의 배나무를 가리키자, 그곳에 벼락을 내리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 후로 이목이 살던 작은 연못을 이목소라고 한다.
북대암 北臺庵
북대암은 운문산성(일명, 지룡산성) 바로 아래 세워져 있으며, 산성과 암자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고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북대암은 운문산에서 최초로 세워진 암자이다. 최초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창건자도 신승(神僧)이라고 하기도 하고, 보양국사(寶壤國師)라고 하기도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그는 처음 이곳에 와서 3년만에 오작갑(五鵲岬)을 짓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현존하는 건물은 제일 위쪽에 축대를 쌓아 산신과 독성(獨聖)을 모신 곳이고, 그 옆에 칠성각이 있고, 그 아래에 법당이 있다. 북대(北臺)는 운문사에서 보면 북쪽인 까닭에 그리고 제비빕처럼 높은곳에 지어져 있어서 북대(北臺)라고 부른다.
高嶽峨巖 智人所居 碧松甚谷 行者所棲
높은 산 험한 바위는 지혜있는 사람이 거처할 곳이요
푸른 솔 깊은 계곡은 수행하는 자가 깃들 곳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