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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물리학과 반야심경에서
공(空)이란?
현윤선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나? 오늘날 우리 인류는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가장 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약 20만 년 전 북아프리카 에티오피아 동쪽 고원에서 시작되어 몇 차례 멸종의 위기를 극복하고도 지금에 이르렀지만, 오늘날 우리 인류 앞에 펼쳐진 여러 위기 상황들을 볼 때는 우리 인류는 미래마저도 장담하지 못하게 되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오늘날 우리 인류는 과거에 겪었던 적과는 다른 ‘인류 공멸’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적을 만났다. 인구과잉으로 인한 자원과 식량 부족, 석유와 석탄 같은 화석연료의 지나친 남용으로 기후재난과 생태계의 파괴, 새로운 유행병의 출현, 그리고 핵전쟁의 위협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게 펼쳐 있다. 이처럼 우리 인류는 최악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후재난에 의한 인류 멸망에 한 발짝 더 다가갈지, 핵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새로운 파국을 맞이할지, 과학기술에 의한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우리 인류가 기계문명에 굴복할지, 아니면 우리 앞에 다가올 파국에 대비하여 가장 최선의 방법을 찾아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지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만든 이도 우리 자신이며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우리 스스로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불교를 비롯한 거의 모든 종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 너무나 달랐던 시대에 생겨났다. 그 당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우주는 무엇으로 이루어졌으며, 무엇에 의하여 지배받는지를 몰랐으며. 또한 지구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으며, 계절의 변화와 낮과 밤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조수간만의 차이는 왜 생겨나는지, 또한 태양은 왜 그처럼 뜨거우며, 달은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밤하늘 밝게 빛나는 수많은 별들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떠한 원리와 법칙에 지배받고 있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우주란 무엇이며, 나를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들은 어떠한 진화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지 알지 못했다.
그 당시에 우리가 지금 알고 있던 만큼 그들이 알고 있었다면, 오늘날 같은 종교가 생겨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치나 종교, 이념이 아니라 과학이다. 정치와 이념, 종교는 어느 한 시대나 어느 한 지역을 이끌고 지배하고 있었을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과학은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생활방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사고방식, 그리고 자연을 대하는 세계관까지, 과학은 우리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면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은 자연에 숨겨진 법칙과 원리를 찾아내는 학문으로서,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현상에서부터 태양과 달을 비롯한 행성들의 운동,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수많은 별들의 탄생과 죽음, 서로 다른 은하들의 충돌, 블랙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우주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나 자신뿐 아니라 우주에 대한 모든 것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처럼 과학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지구 밖 저 멀리 우주에서 일어나는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현상들 속에 숨겨진 법칙과 원리를 찾아내는 학문이다.
이처럼 과학은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생활방식뿐만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세계관과 의식마저 바꾸어 버렸다. 그것은 농업 중심의 생활방식에서 산업 중심의 세계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제는 정보산업혁명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과학의 급격한 발전은 세상의 모든 것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으며, 수십억 년을 이어온 지구의 생태계마저도 크게 변화시킴에 따라 우리 인간은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가장 극적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는 모든 힘을 다룰 줄 알게 되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세계와 마주해야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도 제어하고 통제하지 못하게 되는 ‘역사의 특이점’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과학은 대자연 속에서 자신이 지나온 모습을 알게 하여주었고, 광활한 우주에서 자신의 존재와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과학은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 답을 주었다. 이처럼 과학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면 이번 지면을 빌려서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개념을 물리학과 뇌과학을 통해서 살펴본다.
1. 공(空)이란?
반야심경의 중심사상은 공(空)이다. 공(空)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비다’, ‘없다’, ‘영((零)’을 나타내는 ‘순야(산스크Sunya)’를 한자로 번역한 것으로서, 명사형으로 공성(空性)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공(空)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 근본이다. 아공(我空)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아(自我)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몸은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공(法空)은 모든 법은 인연에 의해 생기고, 또 인연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니, 모든 것은 연기의 원리에서 인정될 뿐 모든 것은 본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법무아(諸法無我)란 우주 만물은 실체가 없으니, 자아(自我)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因緣)의 가합에 따라 생겨나고 존재하며 또 사라지는 것이니, 자아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법(法)'은 산스크리트어의 '다르마(dharma)'를 옮긴 것으로서, 유상(有相)과 무상(無相), 즉 의식의 대상이 되는 일체의 모든 존재를 가르키는 말이다. 또한 '무아(無我)'는 산스크리트어의 '아나트만(anatman)'을 옮긴 것으로서, 변하지 않는 참다운 '나'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 끝없이 변화하고 생하고 멸하므로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은 모든 물질적 현상뿐만 아니라, 수시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이나 다양한 감정, 의식 등 모든 것은 끝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어느 한순간에도 본래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상(無常)이란 모든 것은 생겨나고 사라지면서 끝없는 변화의 흐름속에 존재하는 것이어서 잠시도 어느 순간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 만물은 끝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존재할 뿐이니 일체의 모든 것은 본래 성품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空)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것이 아니라, 본래의 성품이 없다는 것이니 이를 바르게 보는 것이 참된 공(空)을 보는 것이다.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절대 진리. 즉 공에도 유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유도 공이고 무도 공이고 보살도 공이고 부처도 공이고 무상(無上) 지혜도 공(空)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철저한 공이다. 그런데 철저한 공은 결국 곤경에 빠뜨릴 수 있고,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승중관학은 이론과 실천, 양쪽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일체법은 ‘가명(假名)’이라는 용어를 쓴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인연에서 생겨나는 일체의 모든 것은 무자성(無自性)이고, 진정한 실유(實有)가 아니고 그저 가명(假名)의 유라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말한 것처럼 ‘여래가 설하신 삼천대천세계는 곧 삼천대천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삼천대천세계라는 것이다.’
용수대사는 중론(中論)에서. ‘만일 모든 법이 인과 연의 화합으로부터 생긴다면 이 법은 일정한 성품이 없으며, 만일 법에 일정한 성품이 없다면 곧 그것이 마침내 공(空)이요, 적멸(寂滅)이니,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벗어나므로 이를 임시로 중도(中道)라고 부르는 것이다.’하였다
그러므로 중도는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비유(非有)가 무(無)인 것은 일체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겨나므로 무(無)이다. 비무(非無)가 유(有)인 것은 일체법은 가명(假名)이기 때문에 유(有)이다. 제법실상은 바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다. 이러한 공성(空性)을 깨닫는 것은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 즉 견성(見性) 또는 깨달음(覺)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공(空)에 대해서 보다 넓은 관점으로 살펴보면,
1. 반야심경에서 공(空)의 의미
반야심경에서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하여, 모든 물질적 현상(色)뿐만 아니라 감각(受), 생각(想), 행위(行), 인식(識) 및 신비스러운 대상인 마음까지도 텅 빈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공(空)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는 살아있는 공(空), 즉 활공(活空)이라고 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형상이 있는 것(有相)과 형상이 없는 것(無相) 등 일체의 모든 것은 공(空)으로부터 생겨나온 것이라 한다. 우주 만물은 이러한 공(空)에서 생겨 나왔다 하여, 이를 ‘공(空)의 현현(顯現)’이라 한다.
이러한 공(空)을 시간적으로 보면 우주 만물은 수많은 인연의 가합(假合)에 따라 생겨났다 다시 돌아가면서 끝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고 하여, 이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며, 공간적으로는 일체의 모든 것은 자아(自我)란 실체가 없는 존재라 하여, 이를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한다.
이와 같은 공(空)은 반야심경의 핵심사상으로서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도 일시적인 화합에 지니지 않으니, ‘나’라고 할 그 무엇도 없는 것이므로 자아(自我)란 실체가 없다는 것이며, 또한 법공(法空)이라 하여 세상의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존재하게 하는 법마저도 본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눈으로 비춰지는 모든 물질적 현상은 본래 실체가 없는 상(相), 공상(空相)이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은 망념된 상(相), 환상(幻相)이니, 안과 밖의 모든 것은 본래 실체가 없는 공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주 만물은 생겨나고 다시 돌아가면서 끝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니, 이 세상에는 바뀌지 않는 것이란 없으며, 변하지 않는 것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우주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으며, 영원한 것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마저도 영원하지 않은데 어떻게 영원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결국 우주 만물은 시간적으로 봐도 공간적으로 봐도 실체가 없는 공(空)한 존재이며, 또한 밖에서 비춰지는 모든 물질적 현상도, 안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생각도 본래 실체가 없이 공한 존재(空寂)라는 것이다. 이는 색(色)도 공(空)도 본래 모습이 아닌 것이니, 이는 모두 다이고 또한 모두 다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은 반야의 지혜로 비추어 보면 실체가 없는 상(相), 공상(空相)이기에, 진실한 모습이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2. 우주론에서 본 공(空)이란
오늘날 천체물리학에서 말하는 우주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주는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울러 ‘우주’라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은 결국 찾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우주는 왜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로만 이루어졌는지,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입자들은 왜 세 가지 기본입자인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로만 존재하고, 그들은 왜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는지, 또한 모든 자연활동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힘은 왜 중력과 전자기력, 약력과 강력으로만 존재하고, 그 힘들은 왜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시간과 공간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비밀스런 그 어떤 것은 없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은 결국 찾을 수가 없을 것 같다.
현재로서는 우주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그리고 미시세계를 탐구하는 양자역학으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채워줄 만한 만족스러운 답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도 늘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 할 수 없는 절대 무(無)에서 생겨 나왔다가 다시 절대 무(無)로 돌아가게 된다.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우주도 언젠가는 다시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우주의 운명이다.
빅뱅 우주론(Big Bang theory)에 따르면, 지금의 우주는 137억 년 전 온도와 밀도가 매우 높은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 물질과 힘도 존재하지 않은 절대 무(無)에서 생겨났다. 이 무렵 우주는 초고온 상태로 있다가 ‘인플레이션(Inflation)’이라는 초특급 팽창으로 아주 짧은 순간에 빛보다 빠른 속도로 팽창을 하였다. 이러한 인플레이션이 끝나고도 팽창을 거듭하여 온도가 내려가자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기본입자(전자와 양성자, 중성자, 전자)들과 모든 물리 현상들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힘들(중력과 전자기력, 약력과 강력)들이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빅뱅 우주론(Big Bang cosmology)’이다.
우주 초기에는 온도와 압력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조그만 점에 불과하였던 것이 아주 짧은 순간 대폭발에 의하여 빛보다 빠른 속도로 급격히 팽창하여 온도가 내려가자, 시간과 공간, 물질과 힘이 분리되어 생겨난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이다.
우주는 지금도 그 정체가 알려지지 않는 암흑에너지에 의하여 빠르게 커지고 있으며, 그 팽창 속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빠르게 커지고 있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도 언젠가는 그 어떤 물질도 사라져버린 매우 차갑고 쓸쓸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주를 이루고 있는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는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 생겨나와 다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지구와 태양, 별과 은하들도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 생겨나와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다가 다시 돌아간다. 또한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도 언젠가는 그들이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며, 그들을 이루고 있는 원소들은 새로운 생명체를 이루는데 다시 쓰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 만물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 무(無)에서 생겨났다 다시 절대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우주라 부르는 것에 ‘자아(自我)’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주에도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데, ‘나’라고 하는 자아는 존재가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이와 같이 우주 만물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이를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하는 것이다.
197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스티븐 와인버그는 <최종이론의 꿈>에서 “어떤 사물이 실재하고 그 사물들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이 실재하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고 하였다.
3. 물리학에서 본 공(空)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물질의 기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선(禪)문답 같은 질문에 부딪치곤 한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어떤 특정한 곳에서 어떤 특정한 순간에 난데없이 물질의 형태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필이면 그 순간에 거기에서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같은 것은 우주에 존재에는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낳는다.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왜, 그 어떤 순간에, 그와 같은 조건과 원인이 생겨났을까? 왜 그와 같은 방식과 그와 같은 물질들이 생겨났을까? 왜 그와 같은 성질을 띠고, 그와 같은 법칙을 따르며 생겨났을까? 왜 생명체라고 하는 것은 생겨나게 되었을까? 그러면 나는 누구이며,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1) 시간적(時間的) 관점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리적 변화를 하듯, 생물학적 진화를 하듯,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끝없이 흐르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며, 그것이 우주 만물의 참모습이다. 영원할 것 같은 우주도 늘 일정하게 존재하였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137억 년 전에 아주 조그마한 점에 불과하였던 것이 급격한 팽창으로 온도가 내려가자 모든 물질을 이루는 세 가지 기본입자들(전자와 양성자, 중성자)과 모든 물리적 현상들을 지배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힘들(중력, 전자기력, 약력과 강력)이 생겨나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태양과 달, 그리고 저 멀리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수많은 별과 은하들을 생겨나게 하였다. 우주는 지금도 알 수 없는 암흑에너지에 의해서 빠르게 팽창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욱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우주도 언젠가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매우 차갑고 쓸쓸한 상태로 그 삶을 다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그동안 절대적 존재라고 알고 있던 시간은 장소에 따라 다르게 흐르고, 변하지 않는 모양으로 믿었던 공간마저도 물체의 질량에 의해 달라진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등가 원리에 의하면 질량과 에너지는 서로 변환할 수가 있다. 이처럼 우주를 이루고 있는 물질과 에너지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까지도 끝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우주 만물의 본래 모습이니, 우주에는 일정하게 정하여진 것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주 만물은 끝없이 변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 만물은 끝없는 변화의 흐름속에 존재하는 것이니, 이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는 것이다.
(2) 공간적(空間的) 관점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물질은 분자들로 이루어졌고, 분자는 원자들로 이루어졌으며,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진 핵과 그 주위를 감싸는 전자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원자핵을 이루고 있는 양성자와 중성자들은 더 근원적 입자인 쿼크(quark)와 쿼크의 매개 입자인 글루온(gluon)이 진동하는 에너지의 형태로 존재한다. 결국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은 진동하는 에너지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을 들여다보고 쪼개어 보면 실체가 없는 텅 빈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자의 크기를 지구에 비교하여 보면, 원자가 지구 정도의 크기라면, 양성자는 축구장 정도의 크기이며,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는 쿼크는 사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최소단위인 원자를 살펴보면 원자핵은 원자 크기의 10-10m정도이며, 핵 주위의 전자 또한 진동하는 구름처럼 핵 주위를 감싸고 흐른다. 이처럼 우주 만물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의 세계는 알고 보면 텅 빈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역학의 개척지 중 한 사람으로 원자의 구조를 밝히는데 공헌한 닐스 보어(Niels Bohr)는 이를 두고서 ‘무대이자, 관객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텅 빈 존재이니, 이를 제법무아(諸無我)라는 것이다.
(3) 뉴턴의 세계관
우리가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거시세계는 고전역학의 세계, 다른 말로 뉴턴역학의 세계라고 한다. 뉴턴역학은 우리가 날마다 마주하는 물체의 운동을 기술하는 것으로서, 뉴턴은 물체에 작용하는 중력과 운동의 3법칙을 미적분이라는 수학적 체계를 세워서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지구 밖 저 멀리 태양과 달, 행성들의 운동을 설명하였다. 우리는 뉴턴역학을 통하여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보고 이해한다. 우리는 뉴턴역학으로 설명되어지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세계관은 수천 년 이상 우리의 의식과 사고 속에 고착 내지 한정되어 멈추어져 있었다. 그것은 뉴턴역학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결정론(決定論)과 분리 가능성, 그리고 사물의 실재성(實在性)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자연의 진실한 모습인 줄 알고 왔었다. 그러나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의 세계인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뉴턴이 말한 결정론(決定論)이란 모든 물체들은 일정한 법칙과 원리에 따라 움직이므로, 이 법칙과 원리를 알게 되면, 물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미리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물의 객관적 실재성’이란 사물들은 객관적인 물리적 실재가 존재하며, 이는 누가 보더라도 일정한 모양과 형체를 가진 물리적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물의 객관적 실재란 관찰자와 관계없이 사물의 객관적인 실재가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분리 가능성’이란 모든 물체들은 서로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독립된 개체로 존재한다는 것으로서 우주를 이루고 있는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도 서로 독립적이며, 이것은 따로 분리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뉴턴은 사물의 실재성과 분리성, 그리고 결정론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데 반하여,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시공간이라는 하나의 조화로운 관계로 봐야 하고, 물질과 에너지도 서로 변환할 수 있음을 나타내어 우주를 이루는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는 통일된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로 봐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4) 아인슈타인의 세계관
아인슈타인은 두 개의 상대성이론(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하여 지금까지 절대적인 존재라고 믿어왔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시-공간(時空間)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조화로운 세계로 바꾸어 버렸다. 시간은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으며, 공간도 비틀어지거나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서,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와 의식마저 왜곡시켜 버렸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 아니라 관찰자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시간의 흐름은 절대적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측자에게는 다르게 흐른다는 것이다.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빛에 가까운 속도로 달리는 물체에서는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두 지점 사이의 길이는 줄어든다. 이것은 자신을 낳은 부모보다 나이가 많을 수가 있으며, 같은 날 동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서로 다른 시간의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기이한 ‘쌍둥이 역설(twin paradox)’을 낳았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물체의 크기는 그 물체에 작용하는 중력을 변화시키며, 그 물체 주변의 시간과 공간까지도 변화시킨다. 물체의 질량이 클수록 중력 또한 커지고, 시간을 느리게 하고 공간을 왜곡시킨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은 서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조화로운 관계로 봐야하며, 또한 전혀 다른 물리적 존재로 보이는 물질과 힘 또한 서로 관련지어서 하나로 봐야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 물질과 힘은 서로 상의적인 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전체성을 지닌 조화로운 세계로 봐야한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그 유명한 질량-에너지 등가원리(E=mc2)를 발표하여 질량은 에너지로 서로 변환하며, 에너지는 일정 수준의 물리적 조건이 충족되면 질량으로 변할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는 물질과 에너지는 모습만 달리할 뿐 근원적으로는 같다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이란 물질적 현상과 근원적 본질은 서로 다르지 않으니,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은 물질적 현상과 근원적 본질은 서로 같은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물질적 현상인 색(色)과 근원적 본질인 공(空)은 모습만 달리할뿐 서로 같은 것이라 한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등가 원리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질량과 에너지는 모습만 다를 뿐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5) 양자역학의 세계관
우리가 날마다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는 고전물리학, 다른 말로 뉴턴역학으로 설명되는 세계이다. 뉴턴은 중력과 운동의 3법칙을 세워서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리 현상뿐만 아니라 지구 밖 태양과 달, 행성들의 궤도 운동을 설명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뉴턴역학을 통하여 세상에 일어나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러한 뉴턴역학의 세계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음을 안다. 뉴턴역학의 세계는 큰 대상들에게는 아주 훌륭하게 서술하지만 작은 대상들, 즉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이 밝혀졌다.
독일 출신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1900년 12월 14일, 약 200여 년 동안 뉴턴역학이 지배하던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새로운 물리학인 양자론을 발표하였다. 고전역학이라고 불리는 뉴턴역학은 사물의 객관적 실재성과 분리성, 그리고 결정론 등으로 나타낼 수가 있으며, 그것으로도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리 현상들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날마다 마주하는 거시세계, 즉 뉴턴역학의 세계에서는 성립하지만,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의 세계인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합당하지 않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플랑크가 발표한 양자론의 핵심적인 내용은 물체를 움직이는 에너지는 연속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덩어리처럼 불연속적으로 움직인다. 빛을 포함한 모든 전자 복사에너지는 다양한 크기의 에너지가 덩어리처럼 불연속적으로 움직이는데, 이와 같은 에너지 덩어리를 ‘양자(量子, quantum)’라고 불렀다. 그동안 물체를 움직이는 에너지는 물처럼 연속적으로 흐르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플랑크가 발표한 양자론은 에너지는 연속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조각난 덩어리처럼 불연속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전역학을 떠받치고 있던 뉴턴역학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고, 그동안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설명하던 고전역학은 깨졌으며, 이제는 새로운 물리학인 양자역학으로 대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양자역학은 1920~1930년대에 거의 완성되었으며. 거의 모든 과학을 통하여 가장 잘 검증된 이론이며, 그 예측 가운데 틀리거나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라나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양자역학을 다루는데 익숙하고, 늘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만 그 해석에는 불편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면 왜 지난 100년 동안 검증을 마쳤고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자유롭게 쓰고 있으면서도 왜 양자역학의 세계를 받아들이기를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일까?
양자역학의 세계는 우리 대부분 알고 있는 상식적 세계를 거부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세계는 우리의 고정된 사고에서 벗어나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부정할 정도로 기이하고 역설적이기까지 하여 우리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불가사의한 현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사물은 객관적 실재가 존재하고, 하나의 대상은 동시에 여러 곳에서 있을 수 없다. 또한 하나의 사건이 빛보다 빠르게 아주 먼 거리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세계는 물리적 대상은 관찰 때문에 거기에 존재한다고 한다. 즉 관찰이 물리적 대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 특정 장소에 있다는 사실은 오로지 관찰될 때 비로소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양자역학은 관찰에 의존하지 않고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세계는 “만일 당신이 원자처럼 작은 대상이 특정 위치에 있음을 관찰하면, 당신의 관찰 때문에 그 대상이 거기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서 아인슈타인은 동료 물리학자들에게 당신이 달을 볼 때만 달이 있냐고 농담 삼아 묻기도 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양자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관찰 여부에 상관없이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또한 거시 세계에서는 하나의 대상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대상이 여기 혹은 저기에 있을 수 있고, 동시에 여러 곳에서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여기에서 하는 행동이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빛보다 빠르게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관찰은 아주 멀리 떨어진 다른 대상의 행동에 설령 두 대상을 연결하는 힘이 전혀 없더라도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영향미침을 ‘도깨비 같은 작용’이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지만, 오늘날 이 현상은 ‘영향 미침’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이룩해 놓은 성과를 높이 평가하며 그것을 이용하지만 정작 모든 과학의 기반이 되는 양자역학의 세계는 이해하지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양자역학은 우리가 보는 모든 세계를 부정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개공(一切皆空) 즉 모든 것은 공하다는 명제와 같이, 우리가 날마다 마주하는 모든 물리적 대상들은 실체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제법무아(諸法無我)나 제행무상(諸行無常), 즉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4. 뇌 과학에서 본 공(空)의 관점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수많은 생각과 다양한 감정, 의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1.4kg 밖에 나가지 않는 작은 뇌다. 이처럼 수시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이나 다양한 감정, 의식을 포함한 모든 정신활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뇌 속에 있는 신경세포인 뉴런(neuron)들의 전기에너지 흐름에 의해서 비롯된다.
우리의 뇌속에는 약 천억 개나 되는 신경세포인 뉴런들이 있으며, 각각의 뉴런들은 수백에서 수만 개로 주위의 뉴런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생각과 감정, 의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까지도 이러한 뉴런들이 주고받는 전기에너지의 흐름에서 비롯된다. 결국 우리의 모든 행위뿐만 아니라 수많은 생각과 다양한 감정, 의식 등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모든 것은 뇌 속에 있는 신경세포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전기에너지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주 만물은 실체가 없이 공(空)하다는 것을 시간적으로 보면 지구상의 모든 것뿐만 아니라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수많은 별과 은하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우주는 137억 년 전 조그마한 점에서 시작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진화하였으며, 공간적으로 보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은 본래 텅 빈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더라도 현재 나의 모습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오랜 지구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생물학적 진화과정을 거쳐서 지금에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의 ‘나’라는 존재도 기나긴 진화의 여정속에서 잠시 그 모습을 나타냈다가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거쳐 가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뇌 과학적으로 보더라도 수시로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과 다양한 감정, 의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는 뇌 속에 있는 신경세포인 뉴런들이 정보를 서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전기흐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나’ 와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뿐만 아니라, 지구와 태양, 그리고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도 알고 보면 실체가 없는 텅 빈 존재(諸法空相)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은 본래 실체가 없는 공(空)한 존재이기에 일체의 모든 것은 텅 빈 상(相), 공상(空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는 모든 것은 시간적으로 보든, 공간적으로 보든 실체가 없는 공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주 만물은 공(空)하다고 하지만, 이러한 공(空)은 비운다고 비워지는 것이 아닌 것이니, 참된 공의 이치를 터득하라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공성(空性)을 깨닫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중심사상은 공(空)이다. 일체의 모든 것은 자성(自性)이 없으니, 이를 공(空)이라 한다. 우주 만물은 결국 공(空)한 존재라는 것을 보는 것이 해탈이자, 완전한 자유이다. 그러므로 공(空)의 참뜻을 깨달으면 스스로가 자유로워지고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공(空)을 깨달으려면 공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그 뜻을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