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하(梁在廈, 1906~1966)
본관 남원(南原) 자는 건초(建初). 1906년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에서 출생하였다. 1930년 3월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1932년 12월까지 신문기자로 활동하였다. 이어서 1933년 10월 동아일보사로 이직하여 1940년 8월 강제 폐간될 때까지 경제·사회부 기자로 근무하였다.
이 시기에 사회문제와 관련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영아살해의 참변, 범죄상으로 본 조선여성」(『삼천리』, 1932. 4.), 「중대화하는 재일 조선인 문제」(『삼천리』, 1932. 9.), 「세계 각국의 이혼법제와 조선이혼법의 과거 현재 및 장래」(『동아일보』, 1933. 11. 3.), 「조선 의무교육실시운동의 구체안」(『조선통신』, 1935.) 등이 있다.
1941년 2월, 강제 폐간된『동아일보』의 전통을 잇는다는 명목으로 잡지 『춘추』창간을 주도하고, 1944년 10월까지 발행인을 지냈다. 『춘추』는 일부 논문과 문학란에 충실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으나, 총독과 조선군사령관의 신년사와 훈시를 게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정책을 선전하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청년조선의 영예 : 자라가는 육군지원병제도」(『춘추』 2권 신춘호, 1941. 2.), 「고조된 지원병 열 청년조선의 의기앙양」(『춘추』 2권 2호, 1941. 3. 27.) 등을 게재하여 지원병제도 및 징병을 독려하고 찬양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조선인과 바다」(『춘추』 4권 6호, 1943. 6.)에서는 “조선청년들 높은 기상을 가지고 바다로 가자. 그리고 이 대전(大戰)에서 대승을 가져와야 하겠다”라고 하여 전쟁 참여를 선동하였다.
1941년 10월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1년 12월에는 주식회사 조선춘추사 이사로 선임되었다.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1945년 10월 5일 창간된 일간지 『신조선보』의 주간으로 활동하였다. 『신조선보』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사상계몽에 주력하면서 좌우익의 양편 논객들의 글들을 골고루 싣고자 하였으나 운영난으로 폐간되었다. 이후 안재홍이 『신조선보』를 인수하여 1946년 2월 26일부터 『한성일보』로 제호를 변경해 발행하였으며, 이 신문에서 편집인, 발행인,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문경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방응모(조선일보 사장), 안재홍(한성일보 사장), 백관수(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사장) 등의 언론인들과 함께 1950년 9월 17일 납북되었다. 이후 북한에서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고 1959년 1월에는 숙청되어 감금당하기도 하였다.
196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춘원 이광수, 위당 정인보, 안재홍 전 민정장관 등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거나 월북한 저명인사 62명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 평양시 용성구역 용궁1동 재북 인사 묘역에 안치되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_
참고문헌
『경향신문』(1950.6.2; 6.6)
『동북아 한인언론의 발자취: 1945∼1949』(이신철 외, 성균관대출판부, 2013)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대한민국 의정총람』(국회의원총람발간위원회,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