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대승불교는 부파 시대의 불교가 고타마시타르타당시의 초기 불교의 활동성·순수성·일반성을 상실하고
아비달마라고 하는 고정적·번쇄적·전문적인 훈고해석에 빠져버려
중생제도(衆生濟度)라는 불교 본래의 사명을 망각해 버린 것을
그 본래의 자세로 되돌리기 위해서 일으킨, 말하자면 불교 부흥 운동이라고 한다.
물론 대승불교만 하는 주장이지 역사적 근거가 있는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초기불교의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에서는
힌두교와 융합한 대승불교를 타락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승불교 운동의 발생과 그 추진역(推進役)에 관해서는 사실 아직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기존에는 부파불교중중 대승과 교리가 유사한 대중부불교에서 대승불교가 기원했다고 보거나
(대중부 기원설), 대략 서력 기원전 1세기경부터 재가(在家)를 중심으로 한
혹은 불탑(佛塔)을 수호하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재가불탑 기원설 이루어졌으며
그 지역도 남인도에 원형(原型)이 생겨서 북인도에서 확립되었다고 보았다.
대승불교는 수행을 통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말하는데
이러한 실천의 이론적 뒷받침이 되는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화엄경(華嚴經) 등
경전도 대승불교가 나타난 이후에 작성되었다고 학자들은 추측했다.
그러나 폴 헤리슨*이나 그레고리 쇼펜*, 사사키 시즈카(佐佐木閑)*, 안성두* 등을 중심으로 나오는
신 학설에서는 여러 고고학적/역사적 자료들까지 근거로 하면서 기원후 4세기까지 대승/부파간 구분이 없고,
대중부 외에도 설일체유부, 법장부 등 여러 부파와 부파의 아가마 와 논서에서
대승 사상과 관련된 교리들과 더불어 대승 운동이 있었다는 사료들이 많다는 점,
초기 대승문헌에서 아란야에서 엄격하고 보수적인 은둔 수행을 하는 출가자들이 중심이 되는 점,
고고학/문헌학적으로 성립연대가 기원전으로 올라가는 대승경전 유물들,
특히 대승불교의 근간인 반야사상과 관련해 기원전으로 올라가는 반야경 유물의 발견과
반야사상 관련 문헌의 문헌학적 분석 등을 통해 반야사상을 비롯한
대승불교의 근간사상의 연대가 소급되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한 부파불교 기원설, 아란야 은둔 수행승 기원설, 법사 기원설, 종교적인 선정 중
종교적 체험에 기원했다는 설, 경권(경전 두루말이) 신앙설 등 새로운 학설들을 내놓았다.
물론 가라시마 세이시(辛嶋静志) 교수처럼 기존의 대승불교 대중부 유래설에 대한 재검토와 보완을 언급하면서
대중부 기원설에도 근거가 있음을 주장하는 학자와 학설들도 많으며, 현재로선 재가불탑 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본토인 일본에서조차 사사키 시즈카(佐佐木閑) 교수 이후로는 사라졌다.
보살가나설은 설 자체의 근거부족과 그레고리 쇼펜, 나티에, 사사키 시즈카 등 국내외 학자들의 비판,
특히 이 설 자체가 재가불교 교단 운동이 전통적인 출가불교 교단을 압도하는 일본불교계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측면이 강함이 밝혀진 이후 영향은 남았을자언정 설 자체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아직도 종종 통용된다.
한편으로는 기존 인도 사상계에 존재하던 우파니샤드를 비롯한 브라만교 쪽 전통사상이나 자이나교 사상 당시
인도에 유입되던 조로아스터교 등 이란계 외부 종교들의 영향도 받았다. 이는 후대에 밀교로도 이어지는데,
이런 영향관계는 국내 학술논문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일 정도로이미 국제적으로도 정설이다.
이러한 대승불교 사상은 2세기 사람 용수(나가르주나)가 본격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중관파의 시조인 나가르주나는 공 사상의 개념을 체계화하는 등 대승불교의 기본 틀을 닦았다.
이후 시간이 흘러 그를 계승하는 제자들과 바수반두(세친)등 대승 논사들이 등장하면서
대승불교, 더 나아가 후대의 밀교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이 때문에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은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차이점만 부각하여
대승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용수교'라고 하거나,
부처가 아닌 조사의 가르침만을 따르는 '조사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승불교 역시 석가모니의 사상에 기초하는 데다가 현 상좌부불교 역시
석가모니 당대 오리지날이 아니며,
동남아 민간신앙부터 대승불교까지 다양한 사상과 교류하며 변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