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희 같은 천들이 나긋나긋 풀밭 위에 앉아있다. 천연의 색을 입은 옷감은 들꽃과 어울려 우아함을 더한다. 수줍게 쪽물 들이고 바람에 팔랑거리는 실크는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다. 언덕에서부터 미끄럼을 타고 가배놀이로 한껏 자태를 뽐내는 천의무봉의 속살들이 아찔하다. 풀밭 위로 한바탕 바다가 너울거리고 윤슬이 반짝인다. 봄꽃이 지고 초록이 짙어질 무렵 통도사 서운암으로 오래 벼르던 염색체험을 왔다.
염색체험은 재배한 쪽을 채취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잎사귀를 따서 절구에 넣고 즙을 내어 염색하는 것이다. 무명천에 고무줄이나 끈으로 홀치기 하여 쪽물에 주물러 펴보면 얇은 망사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난다. 동일한 옷감에 물을 들이더라도 담금질 횟수나 시간에 따라 조금씩 다른 푸른색 계통의 스펙트럼을 풀어놓는다. 하늘색, 파란색, 퍼런색, 시퍼런색, 새파란색, 푸르스름한색, 쪽색, 남색. 어쩜 저렇게 많은 푸른색들이 있을까? 이른바 청출어람이란 말도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하찮은 풀에서 눈부신 쪽빛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가 있어야 할까.
아들은 어릴 적부터 병약했다. 칠삭둥이로 태어나 온갖 잔병치레는 독차지였다. 모세기관지염을 시작으로 천식과 만성비염으로 성할 날 없이 골골댔다. 유치원 때에는 사흘이 멀다 하고 결석을 했고 거의 매일 병원을 드나들었다. 말문이 늦게 트이다 보니 말귀도 어두웠다. 미숙한 시력 탓에 두꺼운 안경을 껴야 했고 그 때문에 행동은 더 굼떴다. 더딘 발육 때문에 우리 부부는 아이 걱정에 늘 노심초사했다.
쪽은 마디풀과에 속하는 일년생 식물이다. 봄에 씨를 뿌려 음력 팔 월경, 새벽이슬이 내리기 전에 쪽을 베어 항아리에 담는다. 구운 굴 껍질로 석회를 만들고 쪽 담은 항아리에 그것을 넣은 후 당그레질을 한다. 침전된 색소 앙금에 잿물을 넣고 저어가며 열흘 정도 발효시키면 색소와 석회가 분리되면서 거품이 생긴다. 이 과정을 꽃물 만들기라 한다. 양질의 쪽물을 만들기 위해선 쪽의 성장과 숙성이 중요하다. 한 가지라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식의 성장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들은 학업에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집안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또래들과의 사회성도 떨어졌다. 만화와 게임에 빠져들었고 묻는 말에만 겨우 대꾸할 정도로 말수는 줄어들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속앓이하는 것도, 어리숙해서 늦된 것도 속상했다. 자식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거나 기다려주기는커녕 남들과 비교하며 안달을 놓고 다그쳤다. 그럴수록 아이는 고슴도치처럼 자꾸만 자기 안으로 침잠해 갔다.
아들의 학업성적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다행히 책읽기를 좋아하고 만화 그리기도 좋아해서 애니메이션과를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진로선택과정에서 남편과의 갈등이 화근이 되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결국 아들은 원치 않았던 경영학과를 가게 되었고 공부하고는 완전히 담을 쌓고 말았다. 매사에 더욱 시큰둥해졌고 남편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어쩌다 남편과 한자리에 있을 때면 어색하고 서먹한 분위기에 숨이 막혔다
꽃물이 만들어지면 비로소 염료물감으로 사용할 수 있다. 쪽 염색은 천연염색 중 그 과정이 상당히 까다롭고 어렵다. 천을 물들이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말리기를 반복한다. 꽃물에 천을 담그면 처음에는 연녹색이었던 것이 청록색, 파랑, 짙은 청색으로 변한다. 심해처럼 그윽한 쪽빛을 내기까지 담금질과 말리기를 반복해야 한다. 쪽물을 얻는 과정은 대장간의 풀무질과도 같다. 하나의 연장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쇳덩이를 수없이 단야鍛冶하고 모루에서 수백 번의 망치질을 거쳐야만 한다. 쪽물은 시간의 풀무질이 만들어낸 인고의 연장이다.
고된 담금질이 쪽빛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얼마 전 여행에서 돌아온 아들은 카페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전문학원에 등록하고 레스토랑에서 일을 한다. 몸은 힘들지만 해볼 만하다며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가끔씩 남편과 대화를 하고 또래들하고도 어울린다. 제 안의 심정을 곧잘 털어놓기도 한다. 자신을 단련하는 시간을 이겨내고 스스로 꽃물을 만들고 염색을 들이기 위한 갈음질을 하는 것일까. 아이가 만들어낼 색깔이 궁금하다.
요즘엔 손쉽게 염색을 할 수 있다. 화방이나 문구점에서 염료를 구입 할 수 있고 색깔도 다양하다. 천을 염료에 적시고 헹구어 말리기만 하면 금세 염색이 된다. 채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다. 기계로 염색한 옷감들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으나 천연염색은 그 맥을 겨우 잇고 있다. 하지만 자연에서 얻은 색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쪽 염색 옷을 입으면 아토피 등 피부병 치료에도 좋다고 한다. 푸른 천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볼 때면 매사에 조급하고 황량했던 내 마음도 치료가 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다. 뭐든지 빨리 결과를 봐야 하고 진득하니 기다리는 것은 손해를 보거나 어리석은 것이라 생각한다. 중국 사자성어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이 있다. 노인이 산을 옮기듯 하라는 뜻이다. 가우디가 설계한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은 백 년이 넘도록 아직도 짓고 있다. 유럽에서 일어난 슬로시티 운동은 느림의 미학을 실천한 것이다. 때론 느린 것이 가장 빠른 것이 될 수 있다.
손톱 밑에 파란물이 들었다. 아들의 마음에도 멍이 들었을지 모르겠다. 성급한 부모 밑에서 감내해야 했던 시간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식에 대한 기대감과 어쭙잖은 욕심 때문에 조급하게 다그치고 나무라기만 했다. 모든 게 때가 있다. 이제는 아들도 자신만의 꽃물을 만들고 색을 입히려 한다. 비록 더디지만 고운 쪽빛의 천이 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힘찬 날갯짓으로 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으리라.
해는 한나절 품을 팔고 발걸음이 바쁘다. 구름 그림자 슬쩍 쪽빛 위에 걸터앉는다. 푸른 화선지에 수묵화 한 폭을 그려놓고 바람이 초록으로 수런거린다. 초여름 암자가 시나브로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