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돋보이는 책이 있다. 『두 지평』이 바로 그런 책이다.”
현대 성경 해석학 고전의 귀환!
성경 해석학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은 획기적인 기획!
“나는 이 책이 여러 학문 분과의 학생들과 학자들에게,현대 신학의 몇몇 주요 분야를 가장 빼어나게 설명해 주는 책으로서 무한한 가치를 증명해 보일 것이라고 확신한다.”_제임스 토랜스
성경 읽기와 이해
경전은 종교의 근간을 이루는 문서이며,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하는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탐구하였고, 그 결과에 따라 누군가는 신앙에 몰두하는 방향으로, 누군가는 회의적인 방향으로 변해 가기도 했다. 읽기는 독자의 입장에서 저자의 입장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읽기를 통해 발생한 이해는 변화를 수반한다. 그렇기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해석의 문제를 고민해 왔다.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기독교인의 고유한 성경 이해 방식이 있는가?
철학적 해석학과 성경 해석
고대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세속 철학이 기독교 신학을 타락시킨다는 우려를 담고 있는 이 말은 이후에도 많은 신앙인의 내면에 막연한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문화적 배경과도 동떨어진 언어 사용과 이해는 불가능하며, 이는 성경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계시의 의미, 진리의 객관성과 주관성에 관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특별히 18-19세기 근대를 거치며 계속하여 일어났고, 20세기에는 이 문제의식을 종합하여 해결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 오랜 해석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에서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해석학을 발전시켜 나갔고, 티슬턴의 작업은 그 연장선에 있다.
왜 하이데거, 불트만, 가다머, 비트겐슈타인인가?
그렇다면 왜 티슬턴은 하이데거, 불트만, 가다머, 비트겐슈타인이라는 네 사상가를 골랐는가? 티슬턴이 보기에 이 넷은 자신이 활동하는 영역 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당대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삶의 자리, 전이해, 언어 규칙 등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안에 관해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티슬턴은 이 사상가들의 저작을 꼼꼼히 읽어 나가며, 이들의 작업이 성경 해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상세히 분석한다. 1차 저작을 읽으며 영향사를 분석해 나가는 티슬턴의 장점은 이 책에도 녹아 있으며, 이러한 작업을 통해 각 사상가의 특징 및 기여와 한계를 드러낸다. 성서학자답게 불트만을 냉철하게 평가하면서도 불트만이 오해받는 부분과 신약학계에 기여한 바를 분명히 짚어 내며, 철학자들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단순히 그 사상에 묻어가지 않고 신학자로서 통찰을 내보인다.
지평 융합과 진리를 향한 열정
티슬턴은 현대를 살아가는 영국 성서학자로서 성경 본문의 고유한 지평과 독자의 고유한 지평 모두를 존중한다. 그는 지평 융합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이 융합을 향한 길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해석에 참여하는 지평 모두를 존중할 때 그 길이 열린다고 본다.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성경을 존중하는 정서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성경 해석과 그 결과에 따라 두드러진 삶의 양상을 보일 때가 많다. 티슬턴이 한국 기독교계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그의 논의가 한국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있는 정서에 파고들어 그들이 진정으로 성경과 해석자인 그들 자신을 존중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평 융합의 길은 단순히 성경 텍스트를 이해하는 길일 뿐 아니라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길이 될 것이다.
■ 독자 대상
- 깊이 있는 성경 해석과 이해를 필요로 하는 목회자, 신학생
- 현대 철학과 신학의 주요 사상가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을 찾는 그리스도인
- 성경, 신학, 철학을 넘나드는 전문적 논의를 즐기는 독자
- 성경의 세계와 오늘의 삶을 심도 있게 연결하기 원하는 독자
[책 속으로 추가]
그렇다면 전이해가 신약 해석학에서 가지는 중요성이 특별히 신학에 호소하거나 아주 편협한 철학적 근거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 현상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피할 수 없다. 성공회 교리위원회 보고서인 『그리스도인이 믿는 것』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는 준거틀, 성경 밖의 근원에서 유래하여 자신만이 가정하는 유형을 따르지 않고서도 자신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성경을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
_4장 해석학과 신학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에는 여러 차이점이 있지만, 하이데거도 후기 비트겐슈타인처럼 언어가 인간의 삶에, 진정 인간의 삶 속에 자리한 특별한 맥락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이런 맥락을 삶의 형식에 근거한 언어 게임이라 부르든 현존재의 세계성에 근거한 ‘세계’라 부르든 그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언어는 의사소통 혹은 ‘담화’로 이해해야 한다.
_7장 하이데거 초기 사상에서 다루는 또 다른 주제들
특정 철학의 개념을 인용하는 것은 신약성경 해석자가 본문을 꿰뚫어 보는 자세한 통찰을 갖게 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반면, 그렇게 특정 철학의 개념을 인용하면, 한쪽에 치우치고 부분만을 본 해석이 나오게 되어 결국 보완이 필요해진다. 그 해결책은 철학적 탐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철학적 탐구를 포기한다면 불트만의 연구 결과가 지닌 유익한 측면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오히려 해결책은 다른 여러 전통에서 다양한 개념을 가져온 뒤, 각 개념이 이룰 수 있거나 이루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는 자세로 비교하는 것이다.
_10장 불트만의 해석학과 신약성경
루터는 본문 해석이 단순히 해석자 자신의 사상과 태도를 반영한 것에 그치지 않으려면 본문과 해석자 사이의 충분한 거리나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 말씀 ‘아래’ 놓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하지만 루터는 본문이 해석자를 파악하고 해석자에게 말을 건네며 해석자는 본문의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평 융합 역시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가다머의 작업은 이 두 측면을 통합해야 한다는 것을 이론 차원에서 실증한다.
_11장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과 그 해석학이 신약성경 해석에 시사하는 의미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을 신약성경 해석에 적용하는 것을 좁은 의미의 문법 발화 논리에 주목하라는 요구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신약성경 전체를 인식과 상관없는 차원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신약성경 저자들이 볼 때, 기독교 신앙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넘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_14장 비트겐슈타인, “문법”, 신약성경
해석학의 목표는 지평 융합을 향하여 꾸준히 전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목표는 각 지평의 특수성을 온전히 고려하고 존중할 때에 비로소 이룰 수 있다. 이는 곧 본문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본문이 말할 수 있게 함을 뜻한다.
_15장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