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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의존교회130614a (안 돼)―이 근호 목사
3절부터 이게 어렵다고 여겨지는지 쉬운 일인지 한번들어 보세요.
살후 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살후 2: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여기에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인물이 찍어서 누구냐 하는 이름 같은 것은 없고 별명, 기능, 그런 것을 가지고 멸망의 아들이라 하고 그런 것들이 나타난 뒤에야 그 후에 주의 강림이 주어진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이 대목을 보면서 사람들은 누구야? 여기 이 사람 누구야? 당연히 궁금해 하겠지요. 궁금해 하는 것이 일종의 반칙인데요.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가 누구이지? 하나님 앞에 그자가 누구인지 물으면 혹시 네가? 네가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봐라 하면 우리가 어찌 하리요! 우리가 어떻게 대책해야 되겠습니까? 여기에 나오는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 불법의 비밀, 사단, 역사, 표적과 기적과 불의의 속임수, 여기에는 절대로 나 자신은 여기에서 빠집니다. 나는 여기에 절대로 해당되지 않습니다. 라는 증거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출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제출할 수 없는 겁니다.
나는 절대로 멸망의 자식이 아닙니다. 라고 따질 자신이 없거든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내가 지목해 줄 테니까 참 중요한 대목이죠. 말씀은 쉽게 말하면 설계도입니다. 어느 집을 짓는 평면도가 있다면 방이 네 개 있다고 치면, 방1, 방2, 방3, 방4,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1번이 있다가 2번한테 장롱은 내 방에 들어올 거야, 2번이 약이 올라서 아니야, 내방이야! 3번이 있다가 내 방이 아담해서 장롱 들이기 좋아! 4번이 있다가 내가 안방이야! 이렇게 나올 때 1,2,3,4 중에서 누가 안방을 차지 하겠습니까? 서로 가위 바위 보 하겠어요? 투표하겠습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설계도가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딱, 1번이 안방이야 하고 지정하는 순간, 2번 3번 4번은 그 입 다물라! 이렇게 되겠지요. 오늘 성경 본문에서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에서 쭉 뒤에 나온 것을 보면 여기에 불법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불법의 사람이 1번, 2번, 3번 4번이 이것을 물을 자격이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물을 자격이 안돼요. 너야! 묻는 너야! 이렇게 지적을 받으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불법의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가룟유다 있잖아요. 가룟유다가 나갈 때 가룟유다가 ‘아이고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제가 볼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갔습니까? 어떻게 했어요? 예수님이 가룟유다한테 지목했지요. ‘어이 시간됐네, 너 할 일해야지? 날 팔아먹는 것’하란 말이야 원래 설계도대로 가룟유다가 그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물론 나중에 주께서 평하기를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다 하고 후담을 붙이지만 태어나게 하신 게 누구입니까?
주님이 태어나게 하고 뒤에 와서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러면 가룟유다의 입장은 어떻게 됩니까? 너의 입장이라는 것을 너는 고수할 하등의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이 여러분, 굉장히 섭섭하게 들리십니까? 이것을 섭섭하게 듣지 말고 우리가 감사히 들어야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를 지목해서 너, 천국 가! 할 때 제가 천국 갈 그런 입장이 못 되는데요. 하는 똑같은 멘트를 우리가 주님 앞에 해야 됩니다.
‘너, 마귀 짓 해!’ ‘정말 섭섭합니다. 다른 사람 놔두고 왜 저한테 마귀 짓을 시킵니까?’라고 그것을 섭섭하게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야, 너 천국 가!’하면 ‘아 참, 섭섭하네! 다른 사람 놔두고 왜 내가 천국 가야 됩니까?’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없겠지요?
그래서 성경 말씀을 볼 때, 지금 까지 제가 언급한 것을 추려보면 성경말씀을 볼 때에 얘는 누구이고 쟤는 누구입니까? 할 수 있는 입장에 우리가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항상 전제로 해야 돼요. 그냥 이 역할 해야 될 사람은 여기에 있고 또 이러한 시험에 빠지지 않을 역할을 할 사람은 또 따로 있는 거예요. 다만 자기가 받은 기능을 주님의 설계도 안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그냥 꾸준히 자기 기능대로 발휘하고 그 다음에 성경과 비교해 보면 아, 내 기능은 이 기능이구나! 하고 눈치 채고 알아 채면 그것으로 게임오버 끝나는 문제에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그런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지 마시고요. 모든 것은 지정된 자리가 있습니다. 가의 F열, 이런 것 있잖아요. 지정된 자리가 있듯이 사람들이 지정된 자리가 있으니까 그 지정된 자리에 대해서 자기의 담당한 역할을 할 뿐이에요. 예를 들어서 불법의 사람이 너다! 하면 ‘제가 왜 불법의 사람입니까? 저는 절대로 불법의 사람이 아닙니다.’ ‘한다면 바로 너 지금 나한테 대들잖아!’ ‘대들만하니까 대 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법의 사람이야!’ ‘저 천국 가는 사람 봐!’ ‘얘, 너 천국 가!’하면 ‘제가 왜 천국가야 합니까? 심심해서 못살겠습니다. 저는 안 갑니다.’그런 소리 안 하고 ‘고맙습니다.’라고 하잖아요. 거봐, 고맙다 하잖아! 쟤는 쟤 기능에 고맙다고 하는데 너는 뭔 통뼈라고 네 기능 왜 마다 하느냐? 그러니까 너는 불법의 사람이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약을 올려도 약에다 약을 쳐 발라서 올려버려요.
이것을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우리끼리 의논할 문제가 아니다. 인간끼리 비교해서 야, 너 자리가 어디야? 내 자리야! 하면서 인간끼리 좋아할 문제들이 아니고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배당을 받았으면 그게 좋다 나쁘다를 우리가 평할 그런 입장이 못 된다 이 말입니다.
‘야, 나는 천국 가서 너무 좋다!’ 그거 수상해요. 천국 가서 좋은 게 아닙니다. 주께서 천국 가는 그 자리를 너는 그 역할을 하라고 한 주님이 좋은 거죠. 내가 어떻게 주님께 잘 보여서 내가 천국 가는 게 좋은 게 아니라 나는 천국 가야만하는 그런 기능을 주님한테 할당받은 것이 기분 좋은 겁니다. 무슨 할당받았어요?
우리는 어떤 할당을 받은 게 있는데 그게 어떤 할당이라 하는 것은 항상 감사로 끼어들죠. 성경 보면서 불법의 사람이 나오리라! 예, 주께서 알아서 나오게 하셨겠지요. 이것도 감사합니다. 그 다음에 사단이 임하여서 불의를 쫓는 사람들을 미혹한다. 주께서 하래서 했겠죠. 우리가 뭐 알겠습니까? 그 다음에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은 따로 있다. 주님이 알아서 따로 뽑아 놨겠지요. 주께서 하는 일에 대해서 무슨 티를 걸고 할 그런 입장이 못 됩니다. 하면 그 사람이 자기 일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전폭적으로 동의하는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마리아가 임신했다? 개인적으로 섭섭하지만 마리아는 임신하고 난 뒤에 주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했거든요. 굉장히 간단한 말이지만 우리는 평소에 이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아요. 언제 쯤 떠오느냐 하면 꼭 자기 뜻대로 안되고 취직도 안 되고 돈벌이 안 될 때 마치 주님 앞에 시위라도 하듯이 불평을 터뜨리고 싶은데 내가 사람이 좋아 참는다는 식으로 ‘고마 주 뜻대로 하이소! 아이참 더러버’그럴 때만 주 뜻대로 나오죠.
기쁨의 주 뜻대로가 아니고 ‘뭐 할 수 있습니까? 주께서 그렇게 내 뜻을 뭉갠다는데 나도 마음은 내키지는 않지만 주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내가 구차하게 따라갈게요.’ ‘너 인상이 별로 안 좋은 인상인데?’ ‘뭐 인상이 안좋아요? 방긋한번 웃어볼까요?’이런 식으로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기 기능을 배당 받을 때는 모든 순서를 반드시 누구나 겪었습니다. 기름 받은 엘리야 사르밧 과부가 얼른 기름받아 줬다 했지요. 그 뒤에 가게 되면 자기 애가 죽는 현상이 일어나지요. 얼마나 화를 냈습니까? 참기름 조금 줘 놓고 자기 애 죽이고.....
인간은 그냥 좋은 것 받아 챙겨서 내것 만드는 불법을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왜 불법입니까? 라고 물으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언약이 아니기에……. 요즘 어느 영화를 보는데 이런게 있어요. 영화 이름을 제가 잊어 버렸지만 불법 다운로드를 어떤 남자가 했어요. 지적을 하게 돼요. 불법 다운로드 안됩니다. 굿 다운로드를 해야지 불법은 안됩니다.
우리는 언약을 위반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그 자리는 언약을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은 언약대로 주님의 개입으로 성취했을 때에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두지 않고 끊을 수 있는 그런 혜택을 입게 되는 겁니다. 언젠가 강의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천국은 오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이 땅에서 만들어 진다고 했지요.
쉽게 이야기해서 악마가 있는 곳에만 천국이 있습니다. 악마 피해서 다른 곳에 천국은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악마한테 시달리는 가운데 천국은 피어오르는 거예요. 싹이 어디서 나옵니까? 죽은 자리에서만 싹이 나오죠. 안 죽으면 싹이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죽은 자리에서 싹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싹이 나왔던 사람은 싹이 나오면서 쭉 둘러보세요. 분명히 내가 싹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안됐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순간, 자기를 돌아보고 환경을 돌아보세요.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영생을 얻을 만한 그런 혜택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여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힘으로 영생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런 것이 전혀 우리에게 허락된 적이 없어요. 우리 힘으로 안되기 때문에 더욱더 영생이 주님의 공로로만 돌려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환경문제에 대해서 절대 우리에게 양보하는 법이 없어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손을 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거저 영생을 주는 겁니다. 100% 내가 내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돌리는 것이 뭐냐? 그게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이 나타나는 장소가 어디 이냐? 바로 나쁜 인간, 파렴치한 인간 이게 아니고 내가 바로 언약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불법이기 때문에 내 안에 주께서 말씀을 씹어서 영생이 나오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다시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보면 여기 불법의 사람이 있고 멸망의 아들이 있다, 야, 이게 누구지? 네가 찾기는 왜 는데? 너야, 너! 아 맞습니다. 제가 불법의 사람이고 제가 멸망의 아들입니다. 라고 인정할 때 구원은 우리가 이것을 피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피할 이유도 없는데 주께서 자신의 성취로서 이 불법 속에서 영생을, 천국을 펴내는 겁니다.
이러한 말씀 해석의 원칙이 어디서 일어났느냐 하면 구약에서부터 일어났는데 오늘 강의 하면서 구약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구약하기 전에 7절을 봅시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라고 되어 있고 4절 끝에 보면 ‘하나님 성전에 앉아’라고 되어 있지요. 그 다음에 9절에 보면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라고 되어 있지요. 그 밖에 많이 있지만 세 가지만 이야기 해 봅시다.
사단 있고 불법 있고 그 다음에 성전이 있지요? 이 용어들이 구약에 들어 있는 용어에요. 구약에 있는 용어를 가지고 오늘날 교회가 성전이 어디지?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이라 하는 인간이 있단다. 그러면 이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면 벌써 수사망이 좁아졌지요. 모든 교회에 피뢰침을 다는 거예요. 그리고 의자가 놓여있는 성전을 특히 주목하게 되면 어떤 사나이가 그리고 벌써 조건들이 좁아졌잖아요. 성전이라 하는 예배당에 의자가 있어야 되고 세 번째는 거기 어떤 사람이 앉아야 되고 네 번째가 뭐냐? 거기에 앉아서 새벽 2시 45분에 ‘나는 하나님이다.’ 이런 소리를 할 때 그 인간을 불법의 인간으로 우리는 규정하고 체포할 수 있지요.
만약에 그 인간이 체포가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체포 후 하고 난 뒤에 30분후에 다른 예배당에서 똑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생겨 버리면 불법의 사람이 몇 사람이 됩니까? 여러 사람이 되어 버려요. 여러 사람이 되어서 서초 경찰서에 잡혀가서 누구야 누가 불법의 사람이야? 나야, 나! 까불지 마 나야! 하고 싸우면 투표할까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단, 불법, 성전이 어디에서 나온 개념입니까? 이것이 구약에서 나온 개념이잖아요. 그러면 이 개념을 할 때 이 단어를 뽑으면 안돼요.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사단 둘둘 말아서 불법, 성전 둘둘 말아서 언약이 여기에 엮여져 있습니다. 불법을 하나 싹 빼내면 거기에 덩달아서 그 당시에 어떤 율법에 의해서 불법이라고 규정 하느냐 하는 그 쪽 언약의 규칙도 따라 나오게 되어 있어요.
성전 같으면 성전을 쏙 빼 내면 성전만 달랑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이럴 경우에만 성전입니다.라고 하는 그때 성전이 있는 다윗 시대에 언약적 규정이 있어요. 그것을 떼어버리고 그냥 성전이라고 하면 여기도 성전인데 의자 하나 놔둘까요? 앉아 볼래요? 앉아서 나는 하나님이다. 하면 사진 번쩍 번쩍 찍고 하면 그만 체포해야 되겠네요. 만약에 사람이 등장해서 체포되면 다른 사람은 좋아요. 왜? 이미 불법의 사람이 체포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요. 왜? 이미 따로 모셔놨으니까 이미 살인자는 체포되었으니까 다른 사람이 살인해도 그것은 살인 안한 게 되어 버려요.
불법의 사람을 찾겠다는 것은 나는 빼주세요! 하는 일방적인 것인데 언약에 의하면 우리는 빠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불법의 사람이 구약에서 언약적으로 집단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단수 개념을 가지고 전체를 포괄적으로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하나 개개인에게 어떤 원칙을 인도한 것이 아니고 그 집단에는 누구나 동일하게 보편적으로 동일한 원리원칙으로 예외규정없이 모두 에게 다 적용하는 것이 하나이기 때문에 거기에 적용되는 모든 사람도 언약 때문에 하나로 간주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기드온 전쟁할 때 처음에 2만2천명 왔잖아요. 만2천명 돌려보내고 만 명 남지요. 만 명 나갔습니까? 안 나갔습니다. 그래서 물을 먹되 개처럼 핥아먹는 사람 있고 떠서 먹는 사람 있는데 그거 다 떼어놓고 몇 명 남았습니까? 300명이죠. 그런데 300명인데 전쟁을 하면서 300명의 여호와의 칼을 받아라! 이랬습니까? 뭐라고 외치느냐 하면 오른손에 나팔 들고 왼손에는 횃불이 담긴 항아리를 들고 마지막 결정적인 타임 때에 이것을 항아리가 깨지니까 횃불 등장했고 여기는 기상 나팔을 불렀다 이 말입니다.
그럴 때 뭐라고 외치느냐 하면 기드온의 칼이여! 기드온 외 300명, 기드온이 뺀 것, 이렇게 안했어요. 그냥 기드온의 칼이에요. 여호와의 칼이요. 기드온의 칼이요. 하나님은 기드온과 함께 있습니다. 라는 뜻이거든요. 그것을 듣던 나머지 300명이 삐졌으니까 왜? 나는 이야기 안 하는데? 왜, 내 이름은 붙여서 누구누구의 칼이라고 내 이름은 안 했는데? 이렇게 삐졌습니까? 그 전쟁의 아이디어가 다 누구에요?
하나님에게는 나왔고 그것을 누가 수납했습니까? 기드온이 수납했고 그렇다면 300명은 자기의 의사나 자기의 결정권, 선택권 모조리 묵살되어 버리고 오직 누구에게 종속됩니까? 기드온 전쟁에 기드온의 칼에 종속되는 거예요. 그게 언약적 구원의 방식입니다. 제발 네가 나서지 말라! 니가 너의 구원의 대표자가 되지 말라는 거예요. 내 구원에 내가 대표자가 돼서 내가 구원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나를 포함해서 어떤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우리한테 허락한 적이 없어요.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는 내 이름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나는 기도 한 시간했고 두시간 했고 그게 의미가 없어요. 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배당받은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농사를 지어도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고기를 잡아도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목사를 해도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장사를 해도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으니 장사했다 농부다 어부다 하는 사적인 개념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언약적인 것이거든요. 이게 집단적이고 포괄적인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개체는 이것에 대들게 되지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움직입니다. 이것은 개체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가고 난 뒤에 주변 나라를 살펴봤어요. 거기에는 개체성이 성립되지요. 왜? 애굽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애굽에서 헤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나안 땅에 와 보니까 주변에 애굽적인 것, 비언약적인 요소들이 가득 차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애굽에 살던 그 본성이 어디 갑니까? 그대로 발휘되지요. 발휘되니까 그때부터 집단적 개념이 아니고 자기만이 살고자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바로 비언약이에요. 비언약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불법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불법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는 그 타이밍, 기간이 잡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본인이 처음부터 불법이기 때문에 불법이 불법이라고 하는 그 불법은 불법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이여, 제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대로 쓰여 졌으면 고맙겠습니다. 라고 할 경우만 언약인데 그런 경우는 시간이 굉장히 짧아요. 방금 기드온 이야기했지만 기드온도 안하려고 했어요. 자꾸 이 핑계, 저 핑계 데고 기적을 보여 주시면 하겠습니다. 자꾸 뺐다 이 말입니다. 왜냐 하면 자기는 개별자로 남고 싶은 거예요. 포도원 방앗간 주인이잖아요. 자기는 방앗간 주인으로 살고 싶은 거예요. 괜히 나대고 싶지 않다 이 말이죠.
그냥 방앗간 주인으로 살고 싶은데 주께서 역할을, 기능을 주니까 기능이 강하니까 어쩔 수 없이 했거든요. 그 순간만 불법이 뭐다 하는 것을 아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불법이 뭔지 모르죠. 원래 불법이니까 그래서 언약이 작용이 임할 때만 불법을 아는데 언약의 작용이 사라져버리면 나는 나다 개별자로 주장합니다. 그러면 이 개별자가 오늘 본문에 불법의 사람이 있는데 누구지? 이렇게 묻는 네가 불법이야! 네가 불법인데 누구보고 찾아? 다시 말씀드리면 불법의 사람은 포괄적 개념입니다. 특정 인간이 예배당에 가서 의자 앉았다고 되는 게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증거가 우선이지, 누구입니까? 불법의 사람? 그게 중요한게 아니에요.
이제 본격적으로 강의 합니다. 레위기 20장 봅시다. 기드온의 칼이라고 했을 때 나중에 기드온이 왕으로 등극됩니다. 기드온은 그것을 거부하고 도망치지요. 기드온은 전쟁에 승리했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불법에 가려있어요. 왜? 기드온의 취지를 도무지 이해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나타났지만 사람들은 십자가, 십자가 입에 달고 있지만 정작 본인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어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는 거거든요. 주님에게만 의미가 있으니까 주님에게만 의미가 있고 자기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뭘 잃는 다든지 손실 봤다는 것이 그것도 의미 없어요. 사람이 법을 지키고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현재 확보된 것을 잃지 않겠다는 마치 잃었을 경우에 나타나는 참혹한 사태가 겁이 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어줌으로서 정작 내가 잃지 않고 싶은 것이 보존될까 싶어서 그렇게 하거든요. 그게 바로 구약적으로 보게 되면 불법이에요.
제가 말한 것이 불법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법 아닌 사람이 없어요. 그럼 불법적인 사람인데 어떻게 천국 갑니까? 그러니까 주님의 공로로만 간다니까요 언약은 주님의 몸으로 이미 성취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새삼스럽게 거기에 가담할 이유가 없어요. 우리는 자꾸 가담하고 싶은데 가담하는 그 심보가 굉장히 수상하다 이 말이죠.
그 언약완성에 가담해서 실제로는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그것을 챙기는 수단으로서 주님을 자꾸 활용하고 이용하는 것으로 된다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나가! 아니요. 더 돕겠습니다. 나가라니까 내가 다 이루었다니까 제가 다 이루웠다는 것을 좀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싫다 소리 하지 말고 증거해도 내가 알아서 해! 좀 빠져! 빠지면 저는 불법적인 사람밖에 더 됩니까? 그러니까 너는 구원받은 거야! 그러니까 너는 예수그리스도만 증거하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 증거하겠다고 나오는 것이 증거가 아니라 나는 주님이 하는 일에 전혀 보탬이 안 돼! 라는 말을 하는 그 멘트가 주님을 증거하는 순간입니다. 구약에는 그렇지 않아요.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한 데 모으려고 했는데 구약에서는 그런 것 다 실패했잖아요. 그러니까 신약에서는 그냥 너 자리 있어! 모아봤자 기껏 구약밖에 안되니까 구약은 이미 실패한 것이 확인된 것이고 따라서 너는 너의 자리에 있어! 하면 내가 너한테 찾아가서 주의 일을 증거하는 기능을 너한테 맡길 테니까 괜히 너 잘나서 맡겼다는 그런 소리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신약이죠.
그래서 레위기 20장부터 봅니다. 거기에 보면
레 20: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 20: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무릇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레 20:3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레 20:4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본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제가 이 대목을 보면서 묻고 싶은 것은 몰렉이라는 신을 좀 섬기면 어떤데요? 몰렉을 섬긴다고 하늘의 별이 주저앉고 해가 지고 그렇습니까? 좀 섬기면 어떤데요?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들었습니까? 안식일을 지키라 하면 어기면 어떤데? 어겨 보자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좀 어겨보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뭘 하라 하는 것은 너희들은 내가 하라 하는 것을 절대로 못하는 그런 속성을 타고 났다는 겁니다. 내가 주는 명령은 어떻게 노력해도 어떻게 근처 까지 왔다 할지라도 근처에 갈 수도 없지만 아무리 네가 근사하게 지킨다 할 지라도 너가 그렇게 지킬 수 없는 그런 존재로서 이미 너는 나한테 부름을 받은 거예요.
그러면 하라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스라엘을 묶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이라는 것이 어떤 역할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묶는 띠, 띠 언약, 사람들을 묶어주는 띠와 띠가 없는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성을 독보이게 하는 겁니다. 이 차이성 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비로소 언약이 나오고 그 언약은 뭐로 구성되어 있느냐 하면 ‘희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우상을 섬기면 돌로 칠 것이요 했으니까 돌로 치면 기분 좋게 치는게 아니잖아요. 화를 내시면서 분노하면서 진노 하시면서 돌로 치잖아요. 너는 죽어 없어져 마땅해! 그렇다면 그 진노와 한은 무엇에 근거 하느냐 하면 희생에 근거해서만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가 주어지는 겁니다.
애가 학교에서 돌아 왔는데 엄마가 오자마자 화를 내더라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엄마가 저렇게 화를 유발할 정도의 행동은 기억이 안 난다 말입니다. 엄마는 그렇게 화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물어야 되겠지요. 엄마 왜 화를 내십니까?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레위기 20장에 사람들로 하여금 언약 자체, 거룩하지도 않은 너희들을 거룩하다고 규정짓게 만드는 게 그것이 대체 무엇입니까?를 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과격해 보이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명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거예요.
데살로니가후서 오늘 본문 같으면 멸망의 아들이 있고 불법이 있고 사단의 역사가 있고 할 때 우리는 이렇게 하잖아요. 하나님이여! 왜 이렇게 화내시고 행동을 급하게 하십니까? 하나님, 침착하세요! 세상 안 꺼집니다. 하나님 쪽에서 그렇게 나대게 되면 우리가 불안하잖아요. 왜 그래요 하나님! 사단이라는 그러한 부정적 개념과 불법을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할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제시합니까? 그 만큼 십자가 피가 소중하다는 것을 너희들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사단을 이야기하고 불법, 마지막 심판, 불 심판을 이야기함으로서 우리 보기에는 멀쩡한 세상, 공중에 그냥 비행기 날아다니고 내일 비올지 모르지만 구름이 있지만 저녁되면 시원하고 얼마나 살기 좋습니까?
이 살기 좋은데 여기에 사단이라느니 불법의 멸망이라는 끝장, 막장 개념들을 동원시키는데 주님, 왜 이러십니까? 진정하세요. 정신 차리시고 주님이 이렇게 침착하지 못하면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너무 상황을 급작스럽게 몰아가지 이상해! 라고 할 때 우리는 뭔가 잊고 살고 놓치고 있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의 분노는 오직 하나님 자기가 희생을 했다는 거예요. 막대한 희생을 했다는 겁니다. 온 천하보다 더 값비싼 희생을 치룬가에 대해서 그 값을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받아 내겠다는 겁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 몸뚱이만 귀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 솔직히 말해서 장난입니다. 사실은 장난이에요. 교회? 장난치는 겁니다. 성경보기, 기도하기 다 장난입니다. 농담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고 히죽히죽 웃어가면서 그렇게 하나님처럼 심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인간이 언제 심각해지느냐 하면 자기로 인하여 누구한테 피해를 줬을 때 사람은 얼굴이 하해집니다. 어찌 저찌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내가 이렇게 파렴치한 놈이었는가? 나는 내가 그런 인간이라고 예전에는 전혀 생각을 못했는데 내가 이정도로 못됐나? 할 때는 아득해 지지요.
주께서 그런 사태를 일으켜 주신다면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신사였고 너무 숙녀였고 내 인생이 가치 있는 인생을 꾸리는데 있어서 나는 내가 아는 이성과 양심과 도덕으로 얼마든지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지하철에 사람들이 밀리고 사당동 내리고 방배동 가고 있는데 자리는 없지요. 숨이라도 쉬려고 하는데 내 앞에 어떤 아저씨가 있는데 보니까 오래 잘 폼이에요. 푹 자고 있어요. 내 옆에 있는 할머니는 할머니 임에도 불구하고 안자고 정신 바짝 차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나보다 먼저 앞을 차지하고 있던 30대 아줌마가 있다 말이에요. 제가 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앞에 할머니가 내렸다 말입니다. 그러면 나보다 먼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던 그 아줌마가 앉아야 되는데 그 할머니가 내리면서 살짝 비껴주면 되는데 뒤를 밀치면서 안에 사람들을 밀쳐서 틈이 생겨서 이때다 하고 싹 앉았을 때 앞에 있는 아줌마가 딱 쳐다볼 때 그게 가시 방석입니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했지? 내가 왜 이래? 내가 미쳤어! 내가 이렇게 나뿐 인간이 아닌데 왜 갑자기 나뿐 인간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내가 나쁜 인간이 아니라 하는 것은 5분 전까지 내가 다듬은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그때 그때하다 자기 좋은 쪽으로 다듬는데 하지만 나의 정작 주인은 내 이성이 아니라 내 몸입니다. 내 신체입니다. 내가 피곤하면 이것은 본성도 튀어 나와서 먼저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그럴 때 쫙 보게 되면 제일 늦게 와서 여기 앉으시겠습니까? 할 수도 없어요. 치워라! 인간이 다 들어나서 양보하면 원상회복 되는 줄 알고 그만 치워라! 앉아 있어 내가 더러워서 안 앉는다! 이렇게 나오면 다른 사람이 다 듣는데 얼마나 창피합니까?
그런데 그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나를 몰랐단 말이죠. 진정 내가 누구인지 내가 몰라요. 왜? 계속 사건들이 줄줄이 대기 상태에 있는데 지금 우리가 놓친 게 뭔가 하면 내가 나빴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이여 애초부터 나쁜 놈이라서 나는 피를 흘려야 된다는 희생의 의미 우리가 충분히 그 깊이와 높이를 중요시 않고 우리는 평소에 중요시 않고 장난삼아 농담 삼아 그냥 흘러버리고 자기 잘난맛에 거기에 전력을 다하면서 인생을 살아온거예요.
그런데 고맙게도 그런 작은 사건을 통해서 내가 인간 말종입니다. 하고 스스로 절망하는 기쁨을 줘요.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동시에 모든 스트레스와 무게, 그동안 착하게 살아야 된다는 그 무거운 짐도 한꺼번에 다 쓸려 내려가서 남는 것은 지저분한 내 껍데기 밖에 없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그 존재의 가벼움, 얼마나 그 순간, 기분이 좋은 몰라요. 이것을 모델을 삼아서 피를 흘린거예요. 잘난체하는 것을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니고 바로 아무 것도 아닌 그것을 모델로 삼아서 피를 흘린겁니다.
그러한 생각은 성령께서 주선하지 않으면 그런 생각이 도저히 들지를 않습니다.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그다음부터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리에 앉아서 괜히 학생들 가방 들어준다고 이리 주세요. 이리 주세요. 아니 왜요? 아니 그럴 일이 있습니다. 내가 그냥 있기에는 도저히 내 양심이 허락지 않습니다. 양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요. 양심이 착한 양심입니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양심이에요?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희생없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절대로 생명나무가 어림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언약에 개입합니다.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몰렉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그것을 우리는 평소에 언젠가는 그리워하고 그것과 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란 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너를 저주하고 저의 자식을 죽이거든 그때 가서 섭섭해 하지 마라! 모든 것이 너에게 주어진 배당이다. 우리의 기능적 배당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참 좋은 점은 하나님 하겠습니다. 손을 든다고 해서 언약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안겼다는 것, 그냥 너는 언약적으로 살아야 돼! 하고 그냥 일임했다는 것 하나님께 맡기고 얻어잦을 것은 맞고 때릴 것은 때리고 인도하면 인도 받고 그렇게 한 거예요. 똑같은 원리 원칙이 오늘날 데살로니가후서에도 그대로 주어지는 겁니다.
언약이란 자신의 노력으로 신에게 나가고자하는 그것과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그 가운서 튀어나옴으로 말미암아 우리 힘으로 언약을 이룬 것이 아니고 진노 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희생의 덕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언약의 튀어나옴입니다.
그 다음에 성전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성전에 앉았다는 말, 신약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신약에는 구약적 개념의 성전이 불탔기 때문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성전에 앉아할 때 그 성전이 어느 성전이냐 이 말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이 성전을 어느 성전으로 보느냐 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보거든요.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돔으로 되어 있는 성전은 누가 차지하고 있느냐 하면 이슬람에서 무슬림들이 차지하고 있어요. 무슬림이 차지하고 있는 이상은 일반인들이 못들어 갑니다. 일반인들은 못들어가서 그 의자에 앉을 수가 없어요. 어떤 미친 인간이 몰래 들어가서 앉아서 내가 하나님이다. 하면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하고 쫓아내 버려요.
이 말씀은 특정 자리를 성전이라고 할 경우에는 이 말씀은 절대로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있다는 것은 성전에 앉아있는 자라고 규정시킬 그러한 새로운 사건을 주님이 강림하시기전에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시는 거예요. 제가 지금 까지 이야기한 것은 인간이 만든 성전에다가 의자를 놓고 누가 앉기만 해라 인간적으로 연출이 이것은 성사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6절에 나옵니다.
살후 2:6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살후 2:7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여기 막는 자가 있다, 그래서 막는 자가 있어서 할 때 자는 자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람이 아니면 누구입니까? 사람이 아니면 뭐냐? 언약과 관련된 어떤 분이에요. 그러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죠. 예수님이냐 예수님의 영, 성령님이 하시는 거예요. 결국 보니까 여기 나오는 모든 말씀은 누가 성취시킨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말씀대로 알아서 착착 진행시키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목사님, 그러면 그것을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알아보기는 뭘 알아봐요? 그것을 알아봐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요? 멱살 잡고 끌어당길거예요?
이것은 알아보라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니까요 지금도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고 있어요. 또 그 일을 하는 맘모스도 있고 쉽게 예를 들면 제가 어렸을 때 일인데요 어릴 때 어른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동지인데 팥죽좀 끓여서 알맹이 넣고 동네도 하나 주고 우리식구 먹자! 어른들이 하는 것은 할머니 하고 할아버지하고 우리 어머니 하고 식구가 많았거든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냄새가 나요 보니까 벌써 고모들이 팥죽을 부엌에서 끓여서 다 먹었어요.
팥죽을 어떻게 끓이느냐 하면 우리 조카나 아들들은 부엌에 못 가잖아요. 엄마랑 할머니랑 이야기하고 있는데 냄새가 나요. 벌써 끓이고 있어요. 우리는 몰랐지요. 하여튼 맛있는 것은 고모 둘이가 다 먹어요. 우리 엄마가 전을 구우면 할아버지 먹기 전에 교복입고 와서 먹고 했거든요. 우리가 이것을 왜 알아야 됩니까? 저 인간이 불법의 사람이야 저게 멸망이야 그것을 왜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요. 팥죽을 끓이는 것을 누가 합니까? 주님이 알아서 끓이고 우리는 얻어먹으면 되는데 우리가 그것을 왜 알아야 되는데요. 자, 하나님이 하시나 한번 찾아보세. 찾아보기는 뭘 찾아봐요? 찾아보기 전에 이미 우리 고모들이 지금 움직이고 있는데 팥죽 다 끓이고 있는데 지금 이 순간, 이 말씀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불법이 일어나고 있고 주님이 막고 있고 그것을 우리가 일일이 다 캐치해야 됩니까? 그것을 캐취한다고 어디로 가야돼요. 브라질을 갈까요? 어디 아마존으로 갈까요? 이태리로 갈까요? 알라스카 있다면 알라스카 가야되고 이태리에 있다면 이태리가야하고 비행기가 아깝다 언제 다 쫓아다닙니까?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에 맡은 자신의 기능만 할 뿐이지 옆 사람의 불법에 대해서 우리가 다 찾아서 확인도장받을 이유는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믿어야 돼요. 이 말씀대로 주께서 지금 착착 진행 중입니다. 믿으면 될 문제인데 이것을 우리가 자꾸 확인하려고 하는데 확인해서 뭐 할 건데? 확인하면 믿음 좋다고 소고기 사 먹습니까? 이거 확인해서 뭐하는데요? 우리가 알 것은 그들이 그런 불법을 할 때 우리도 마찬가지로 언약에 관심도 없고 희생에 관심도 없고 십자가에 관심도 없고 나는 내 육체에 따라서 좋은 대로 살뿐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우리가 이런 인간인데 십자가 희생의 힘이 바로 이런 지저분한 나를 파렴치한 나를 구원했다는 사실이 곧 사건화 시켜서 우리에게 일깨워준다면 그것은 말씀의 기능 속에 그 역할을 지금 하게하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구약의 언약이라는 것은 반드시 성도가 언약백인가 아닌가를 구분해 주잖아요. 그 구분하는 원리가 여기 있는 성전이나 불법이나 이 시대도 똑같이 적용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잖아! 또 그러니까 성도 아니잖아! 그렇게 구분하는 방법이 이 방법이에요. 우리가 나서서 성도이라고 확인할 이유는 없다 이 말이죠.
성도의 기준은 언약에 있습니다. 새언약,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 있기 때문에 십자가 생각안하고 만날 불법의 사람 색출작전 수배한다고 그것만 찾아다니면 그것은 본인이 불법의 사람이에요. 정작 주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는데 그것을 감사히 여기면서 있는 자리에서 나같은 인간도 구원받다니 참 부끄럽습니다만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면 그런 사람들 주변에 뭐가 불법인지를 다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왜 구태여 차비 써가면서 불법의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그런 오지랖 떨지마세요.
지난주일 설교때 제가 뭐라고 설교했습니까? 강아지, 안 묶고 다니는 아줌마 카메라 들고 찍으려고 따라다녔고 했지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자, 불법으로 강아지를 묶지 않고 공원 다니는 것은 벌금 낸다 이 말이죠. 그럼 나는 어때요? 나는 강아지도 안 좋아하고 강아지도 없으니까 그 사람 입장에서 나는 법을 지킨게 되지요. 그러면 나는 착한 사람입니까? 아니죠. 율법이 견양한 것은 십자가 이지 나는 개 작 묶고 다닌다든지 아예 개를 안 키운다고 그것을 자랑삼아 내 새우라고 율법이 있는게 아니에요.
결국은 우리는 우상숭배자이며 나밖에 모르는 자인데 주님의 희생과 결부되었기에 우리는 그 덕분에 영생 얻는다는 것을 우리는 불법적인 사람들 속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예요. 카메라 들고 갔는데 그 뒤에 소식 궁금 하지요? 그 다음부터 벌써 4번 갔는데 그 아줌마는 보이지 않았어요.
서울 의존교회130614b (안 돼)―이 근호 목사
성전에 앉는 경우가 구약에서는 왕의 경우에만 성전에 앉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제사장이 들어가겠지만 구약 언약에 의하면 왕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성전이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 성전에 앉아야 되는데 데살로니가후서에 성전을 만들고 성전에 앉는 인물은 뭐라고 주장을 하느냐 하면 내가 다윗 언약에 따라온 메시야입니다. 하는 경우에만 성전에 앉을 수가 있어요.
그런 힌트를 지금 성경은 주고 있는 거예요. 성전에 앉아서 내가 하나님이다. 하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구름타고 오실 그 메시야입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무엇과 라이벌이 되느냐 하면 진짜 강림하시는 주님은 강림과 라이벌이 되겠죠. 주님이 오실 때 바로 나보고 성경 말씀은 나보고 주의 강림이라고 한 겁니다. 라고 우기면서 나오겠죠. 그러면 그 사람이 그런 주장을 하는 그 자리가 무슨 자리가 되느냐 하면 그 자리가 바로 성전이 되는 겁니다.
성전이 어떤 이태리 터키의 어떤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메시야입니다. 자칭 메시야하면 안되지요. 나는 메시야 맞습니다. 주께서 오신다는 메시야가 납니다. 라고 설치는 그러한 자리, 그러한 환경, 그러한 기회, 그러한 주장이 성전이 되는 거죠. 특정 자리가 성전이 아니고 그런 주장이 유포되면 유포된 그 모든 것이 뭐가 되느냐, 성전이 되는 거죠.
만약에 이만희가 내가 메시야다 한다면 이만희가 과천에 있으면 과천이 성전이 되겠고 이만희가 대전에서 집회하면 대전이 뭐가 되겠어요? 거기가 성전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언약개념에 다른 요소, 성전요소는 부차적으로 같이 따라 가는 거예요. 하나의 개념 있으면 그 개념 뒤에는 언약 뒤에는 언약이 둘둘 감아서 같이 붙여 다니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마리아가 임신했다, 마리아가 애를 임신했다, 애를 임신한 게 아니에요. 마리아는 언약적인 메시야를 임신했죠. 반드시 그냥 보통 애기가 아니고 언약적인 요소가 같이 묶어져서 이해를 해 주시라 이 말입니다. 사단이 나타났다, 사단이 어떻게 생겼는지 사단이 나타나면 카메라부터 찾아서 찰칵 찰칵 사진 찍는다고 하는데 사단은 그렇게 찍는 대상이 아닙니다.
사단이 나타날 때는 여기에 9절에 보면
살후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살후 2: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여기에 거짓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를 인정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내가 받은 기적은 진짜 성령기적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이렇게 다 하지 스스로 이것은 거짓 기적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거짓기적이고 사단의 역사라는 것을 눈치 채고 알아채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파헤칠 수 능력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면 이미 십자가로 데려가요. 언약의 완성에 데려가면 언약의 완성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십자가 아닌 모든 기적적인 것들을 현혹시킬 때 그것이 사단의 역사가 되고 기적이 되는 겁니다.
해석이 굉장히 쉽지요. 내 쪽에서 출발하면 해석이 중구난방 아무 것도 안돼요. 자기만 똑똑하고 자기만 믿음 좋고 자기만 훌륭하고 자기만 지혜롭고 이렇게 되어 버려요. 우리를 십자가에 데려가면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나도 저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면서 그들이 사단의 역사에 놀아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만약에 어느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하는데 전부 다 놀라워라 그럴 수가? 40일 기도하니까 저런 암이 낫다니 전부 다 놀라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는 암에 걸려도 나는 암을 낫기를 기도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십자가 알았으니까 후딱 죽여주세요! 저는 이렇게 기도 할 뿐입니다. 할 때 사람들은 뭐라 하겠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믿음이 없지! 봐 저 사람은 벌써 병 나았잖아! 그럼 우리는 이야기하지요. 병 나으면 뭐합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대체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중풍 병자가 예수님께 병이 나으려고 지붕을 뚫었잖아요. 그때 중풍병 낫기 위해서 왔잖아요. 그런데 정작 주님께서는 뭐라 이야기합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나? 이렇게 했거든요. 중풍병자가 의도 했던 것을 친구들이 수용하지 않습니다. 수용하지 않으면서 주께서는 정작 주고자 하는 자신의 의무를 그 중풍병자에게 해 버렸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병을 나으려고 기도 했다가 나갈 때는 어떻게 했죠? 나, 용서 받았다는 입장으로 나가잖아요. 그게 오늘날 우리의 입장이에요.
하나님, 이것 좀 도와주세요. 저거 어떻게 해 주시고 하다가 정작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세상에 내가 죄가 용서받았데! 라는 기쁨으로 나간다면 그게 바로 주께서 의도적으로 우리의 세속적인 것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주께서 바꿔치기한 주님의 작업입니다. 그 사람 눈에는 비로소 뭐가 보이겠습니까? 사단의 역사가 보이죠. 병 나을 수 있데, 주님이 하면 병도 낫고 다 된데 하는 이야기, 사단의 역사로서 눈에 이제 띠는 겁니다.
성전이야기, 사단이야기를 다시 하겠습니다. 구약개념에서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어떤 나라가 만들어 지는데 이스라엘입니다. 유다나라, 그런데 이 성전은 어떤 공간이냐 하면 성전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 빈 공간입니다. 비어있습니다. 비어있고 정기적으로 어떤 행사만 일어납니다. 양 잡고 제사지내는 행사만 있죠.
여기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에 하늘나라 보좌가 있고 그 보좌에 누가 앉아 있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왕으로서 여기에 앉아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 성전의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왕의 자리에요. 왕의 자리 같으면 이렇게 비워놓지 말고 직접 여호와께서 오시면 되잖아! 이렇게 되잖아요. 만약에 여호와께서 오셔 버리면 이것은 새언약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서 다 저주 받아요.
다 저주 받아버리면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지지 않아요. 천국이 텅텅 비어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드는 일이 실패 된다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왕이 여기에 임할 때는 백성들이 죽지 않고 영생을 얻는 그런 최종적인 언약이 완성될 때만 비로소 새 이스라엘도 만들어 지고 하나님이 왕으로서 등극하는 그때가 된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말하는 성전은, 예수님이 임하는 성전은 몇 번지입니까? 주소가 어디 입니까? 예루살렘 몇 번지에요? 요한복음 2장에서 제자들이 46년간 지으려다 못 지은 성전을 바라보면서 주님, 한번 보세요. 뭐? 야, 대단치 않습니까? 와! 대단하지요? 아니 대단치 않는데! 아니, 46년간 지은 성전이 있는데 저게 하나님의 성잔 맞잖아요? 아니, 저거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지을게!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이 생각한 성전은 시간과 공간에 묶여있는 성전입니다. 공간적으로 특정 부동산을 차지해야 생겨날 수 있는 성전, 거기에 46년간 벽돌로 건물로 올라가고 있는 그 성전, 그것을 하나님의 기도 하는 집이라고 생각했고 메시야는 필히 그 성전에 임할 것이라고 유대인들은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헐어버려라 할 때 그런 공간개념에 무엇을 집어넣습니까? 시간 개념을 집어넣었죠. 몇 일만에? 3일만에, 그러니까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이 장소에 이 특정 장소 위에 하루 이틀 사흘, 해가 세 번 지고 뜨면 바로 이 성전만큼 성전이 지어진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결국은 이스라엘이 멸망해야만 마땅한 그 사고방식을 제자들도 동일하게 지니고 있다 이 말입니다.
제자들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우리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거예요. 어느 교회가 예배당 지으면서 ‘주님이여, 여기에 모셨습니다. 주께서 여기 지성소에 계시옵소서!’ 하는 이런 흐뭇한 마음으로 짓는 거예요. 다 짓게 되어 있어요. 남자는 올라가고 여자는 내려가고 옛날에 한 때는 그렇게 했거든요. 하나님의 일이 성전이고 예배당이고 기도 하는 집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한 공간이라 하는데 그런 개념이 바로 제자들이 실패하고 예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그 아이디어를 같은 육체를 지닌 우리가 똑같이 지금도 발휘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조상 숭배할 때 성소의 티브이 놓던 자리를 병풍만 치면 지성소가 되는 것처럼, 잘 안하지만 심방을 한번 가게 되면 참 좌석 배치가 참 곤란해요. 어디 앉을까요? 하면 ‘여기입니다.’ 다른 집사님이 ‘거기 제일 말석 같은데 여기와 앉으세요.’ 나는 여기 앉지도 못하고 저기 앉지도 못하고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주여, 몇 일만에 주께서 강림하십니까? 언제 강림하십니까?’
이러한 시간과 공간 개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끝난 이야기에요.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한 성전은 사람이 만든 성전에 주님을 모셔오는 방식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자기 몸 자체가 성전 되는 식으로 오는데 그 특징은 뭐냐? 공간과 시간을 묵살해 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머리는 그리스도요, 우리의 몸은 지체가 되는 이것은 2013년도 상관없고 2015년도 상관없어요.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부터 만들어 지고 사건화 되는 그것이라면 어떤 자리에 있던 관계없이 그것은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제가 목요일에 강의가 있어서 어제 잤는데요. 체육관 하시는 기흥에 있는 분이 있는데 제가 간다고 하니까 따로 전도 하실 분을 아주머니를 모셔놓고 저를 기다린 거예요. 복음도 전하고 방에서 주무시라고 부부가 해 줬는데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체육관 하시는 분이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자기는 너무나 이상하다는 거예요. 특정 시간에 특정 공간에 나가서 예배를 드려야 그게 예배인데 이렇게 하면 그게 무슨 예배냐? 이렇게 이야기를 하기에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대로 해서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다고 했는데 보세요. 부부 있고 애들까지 하면 네 명, 아줌마까지 하면 다섯 명 되네요.
주의 이름으로 말씀으로 모이면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주머니가 고맙게도 그것을 수용을 해요. ‘아, 그렇구나, 이 젊은 부부가 나를 위하여 그렇게 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것을 깨닫지 못했는데 아, 항상 성경으로 돌아가야 되겠군요.’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듣는 제가 얼마나 감사한지요.
성경은 주님께서 이루고 우리는 혜택 보는 그런 식으로 해석입니다. 다른 해석은 기대하지 마세요. 성경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도 혜택보고 있는 거예요. 혜택 보는데 어떤 혜택이냐 하면 제발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마라! 라는 식으로 항상 그것을 우리한테 주시하는 거예요.
사단의 역사? 사단의 역사를 우리는 찾으러 가세! 가기는 뭘 가요? 우리 쪽에 먼저 십자가 바로 보면 비로소 모든 것을 주님의 복음을 장난삼아 하는 것 모든 것이 눈에 다 들어보는데, 본인이 나는 파렴치한 인간입니다. 나는 인간도 아닌데 십자가로 구원을 하다니 라는 짧은 1초, 2초되는 짧은 그 순간, 뭐 십자가 걸고 십자가 주장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보니까 십자가를 빙자한 사단의 역사로 다 들어온다 이 말이죠.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그것이 행함이 되어 버리고 십자가 믿는 그것이 뭔가 꿍꿍이속이 있고 십자가 믿어줄테니까 내 원하는 것을 해 달라는 반대급부 장사속이 눈에 다 들어오는 거예요. 성전은 그렇게 되었고 그러면 이제 사단을 이야기해 봅시다.
사단을 이야기할 때는 구약어디 까지 가느냐 하면 창세기 2장, 3장입니다. 창세기 2장, 3장에서 사단의 역사는 뭐냐 하면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분리시키는 겁니다. 처음에 에덴동산은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한 장소에 있었거든요. 한 장소에 있었다는 말은 그게 항상 중장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면 뭐가 중앙이 아닙니까? 인간은 중앙이 아니에요. 인간은 변두리에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중앙으로 생각하고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인 내가 중심이 되겠다! 하는 것은 그것은 이미 선악쪽에 속했기 때문에 나온 망발이죠. 선악쪽에 속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세상은 인간 중심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보면 전부 다 자기중심이에요. 하나님이 나한테 해 준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합니까? 만들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를 미워하지?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을 왜 니가 결정하느냐? 니는 중앙이 아닌데 너는 변두리인데 그러면 변두리는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중앙을 중앙답게 유지 하는 거예요.
따먹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바보 짓하는 거예요. 따먹으면 따먹고 난 뒤에 인간될줄 알았죠. 보다 더 뛰어난 인간, 아이언맨, 슈퍼맨 될줄 알았죠. 그런데 따먹는 순간, 본인은 흙이 되고 말았어요. 여기 있는 내가 인간이 아니고 인간되느냐 안 되느냐 결정권은 중앙에서 결정되는데 우리는 따먹는 순간 내가 중앙이 되고 싶어서 내가 ‘갑’이 되고 저게 ‘을’이 되고 싶어서 자기가 따먹는 순간, 인간 자체가 날아가 버리고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얼른 생명나무를 보호해서 다시 인간을 만드는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거예요. 생명이 육신 되어 오신 거예요. 그 인간 외에는 다른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흙이에요. 이것을 누가 아느냐? 사단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방법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에 새언약의 완성에 의해서 성령을 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용서함이 담겨있는 새로운 피조물 만드는 이 소식에 대해서 쉽게 말해서 인간은 어떻게 해도 죄가 되고 오직 주님께서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죄인이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단은 못 듣게 하기 위한 모든 유혹꺼리와 재미난 즐거운 꺼리를 이것을 못듣게 파장을 조장하여 온갖 것들을 다 할 때 그게 바로 십자가가 있을 경우 에에만 눈에 띄는 사단의 역사입니다.
사단의 역사라고 해서 뿔 달리고 피 흘리면서 오는 게 사단의 역사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살아있음을 감사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수작들이 사단의 역사입니다. 왜냐 하면 사단은 이 중앙 지점에 기어이 자기 인간을 거기다가 세우려고 하는 겁니다. 사단은 알아요. ‘하나님, 아들이여! 우리를 멸하러 왔지요?’ ‘그래 잘 아네! 귀신아, 나가라!’ 다 나가버렸죠. 귀신이 나가는 이러한 현상도 귀신 나갈 때 사진 찍어서 아니면 수배한다고 귀신이 나가는 것이 아니고 부적갖다 붙이면 그것은 돈만 날리는 거구요.
사단의 역사, 귀신의 역사를 알아채는 방법은 우리 자신이 그동안 사단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보면 그게 자연스럽게 십자가 복음을 감사치 않게 하기 위한 모든 것들이 사단의 역사라는 것이 이게 눈에 들어옵니다. 사단의 역사는 그렇게 별나지 않아요. 어제 아주 고요하고 자연스럽고 침착하고 경건스럽고 다 그런 거예요.
대표적인 사단의 역사가 뭐냐 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런 겁니다. 한번 적어 볼게요. ‘우리는 또는 나는 ( )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게 왜 사단의 역사냐? 나는 하고 괄호를 딱 열어놨어요. 나는 부처? No, 마호매트? No, 공자? No, 나는 예수 믿는다! 할 때 여기 나는 안 닫혔죠? 나는 구원받는다는 기정사실화 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모든 제자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지금 사단이 베드로 너를 취하려고 덤벼들지요. 그러면 베드로가 구원받은 것은 누구 기도 덕분입니까? 주님 덕분인데 베드로가 뭐라 합니까? 내가 죽기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 말이 베드로는 이게 사단 편에 섰다는 것을 본인이 몰라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이여! 주님이 그렇게 죽을 수 이유가 없습니다. 하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했지요. 베드로본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 한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게 사단의 역사인지 몰랐던거예요. 나, 베드로는 그런데 이게 문제인거예요. 나는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겠다 하는 것이 사단의 유혹입니다.
인간이 구원받을 것 같으면 생명나무를 허락했겠지요.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아이고, 일 저질렀어? 선악과 따먹었어? 아이고 걱정하지마! 생명나무 내가 준비할 테니까 치료약, 해독제야! 생명나무 먹으면 너 선악과 따먹은 것 다시 원상회복되고 너는 안 죽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지금도 하나님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다는 생각이 푸득푸득 막 들지요? 구원받겠다는 게 사단의 생각이고 나는 기어이 살겠다는 것이 사단의 생각이에요. 나는 괄호열고 세수 믿겠다! 이러면 안되고 이 괄호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이 나와 구원이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사단의 유혹이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꽂힘으로서 깨닫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나를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할 수 없고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는 구원받아야 되는 역할과 기능을 담당자로서 뽑힌 거예요. 너는 딴소리 하지 마! 너는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그것만 이야기해! 라고 뽑혀서 구원받은 것이지, 구원위주로 예수님을 우리가 채택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연예인들이 나는 진짜 사나이다 에서 대하고 또 군에 갔습니다. 돈 주니까 그 일하지 돈 안 주면 아무도 그 일 안 합니다. 가보니까 자기 아들뻘도 아니고 스무 살 먹은 애가 반말 찍찍하고 나이 45살 먹은 사람보고 세상에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너는 조수고. 나는 사수고 어떻고 하고 있다 말입니다.
그런데 와 가지고 너 와봐! 이게 아버지뻘한테 어디 반말이야 너 한번 맞아볼래? 이렇게 되어 버리면 군대라는 언약이 깨져요. 그런데 선교사는 저거 받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말 들어요. 그래도 군대라는 질서를 복종해 줘야 되거든요. 예수님의 자기 고유의 절차가 있어요. 왜냐? 천국을 염두에 두어 두면 면류관을 반납해야 돼요. 어린양의 보좌도 높이고 예수믿님만 영광받는 그 질서입니다.
그게 법이에요.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는 나도 구원받아야지 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로서 발각을 당하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어야지! 하는 이 자체가 사단이 쳐놓은 덫이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야 되는데.....
또 마귀의 시험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존재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것도 문제에요. 아까는 내가 구원받겠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예수님의 존재, 예수님의 존재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구원하지 않는데 사람들이 자꾸 자기 하고 엮으려고 하는 것은 자기 존재, 나의 존재와 주님의 존재를 엮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구원은 예수님의 존재가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구원해요. 피가 구원합니다. 피가 구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피 앞에서 뭐가 돼야 됩니까? 나의 존재는 가치가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마땅히 죽어야 될 죄인이 돼야 돼요. 그런데 ‘나, 하나님! 여기 있습니다. 어떤 존재를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나는 주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이러면 구원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것은 사단이죠. 하나님을 믿는 것, 조물주를 믿는 것,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를 만남으로서 내 존재가 나중에 구원받는다는 이런 아이디어가 이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 다 있어요. 어떤 특정한 존재가 나타나면 영웅적인 존재에 초월적인 존재에 위대한 능력에 의해서 나라는 존재는 끌려가서 같이 합일해서 여기 산다. 모든 종교를 구성하는 하나의 매뉴얼이에요. 그것은 하나의 양식입니다. 예수라는 이름만 적어내면 서류접수 됩니까?
예수님 존재로 구원받는다면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그냥 소리만 지르면 됩니다.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죄를 범하지도 않는 죄인입니다. 맞잖아요. 범죄를 한적이 없는데 죄인이 되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죄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구원은 국물도 없다는 겁니다. 죄 안에 들어오라 이 말입니다. 나도 들어갈테니까 너도 죄안에서, 우리 죄안에서, 우리 지옥에서 만나자 이 말입니다. 저주 안에서 만나자!
너 저주를 내가 받을 테니까 너는 저주 안에 있으면서도 저주가 너한테 주어지지 않는 방식으로 구원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저주 받아야 됩니까? 네가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고 나라는 존재는 주님의 존재, 메시야 존재를 만나면 구원받겠다는 이런 바리새인, 사두개인 같은 아이디어 자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었잖아요.
사단의 결정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 알 때 가장 사단이 사단다운 모습을 드러내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 주어질 때 언약 주변에 가장 사단다운 모습이 드러납니다. 언약 중에도 마지막 언약이 뭐냐? 새언약,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때 비로소 사단의 모든 기능은 어쨌든 십자가를 못전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사단이 생기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일을 하면 그게 사단이에요. 십자가의 피를 못 전하게 만들면 그게 사단인데 십자가 피 대신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주의 아들이고 그분의 존재는 삼위일체 중의 한분이고……. 그래서 구원받습니까? 그러면 삼위일체 알면 의인되어 버립니까?
여러분, 삼위일체 알면 의인돼요? 열심히 공부해서 삼위일체를 알고 파악하면 구원받습니까?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그거 삼위일체 모르면 지옥 갑니까? 아니 강도가 주님을 처음 만났는데 언제 과외 받아서 오늘 밤에 낙원갔습니까? 속성입니까? 강도야! 강도야! 주님이 죽으시면서 일어나봐라! 삼위일체 아나? 빨리 받아 적어, 바쁘다 그 다음에 십일조, 안했어? 그래 그건 봐줄게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몰라도 돼요. 참 오랜만에 복음 이야기하는데 삼위일체를 몰라도 된다니까요.
사람이 삼위일체를 알게 되면 그 안 것 가지고 그것으로 구원의 밑천으로 삼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또 사단의 역사에 빠진 거예요. ‘주여, 삼위일체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 아무 소용없는 기라 삼위일체 안다고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이렇게 나오면 괜찮아요. 그런데 신학박사나 신학교수들이 이렇게 나오는 사람 봤습니까?
삼위일체 가르치는 교수가 여러분, 삼위일체 소용없어요. 예수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교수가 있으면 뺨에 뽀뽀해 줄게요. 이미 다 이룬, 다 끝난 상황이에요. 끝난 상황을 마귀는 미흡하다고 치고 들어오는 겁니다. 주님은 다 끝나도 네가 그것을 모르면 안 돼! 마귀가 그런 소리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간질이는 겁니다. 니 구원받고 싶지? 구원받고 싶지? 그러면 예수 믿으면 구원받아! 우리를 구원 못받아 환장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기어히 우리가 지식을 안에 집어넣어서 그 소유한 지식이 나의 구원이 되는 양 그렇게 착각하게 만들 때 마귀는 히죽히죽 웃고 있어요. 걸려든 거예요. 그거!
여러분, 알았던 지식이요, 나이 80에 치매 걸려보세요. 자기 아들 이름도 모르는 주재에 무슨 예수란 남의 이름 왜 압니까? 물어보세요. 누구입니까? 몰라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 벌리신 효과입니다. 주님이 토네이도잖아요. 토네이도 태풍 들어오면 집 날아가지요. 날라간 집이 우리에요. 괜히 다 파괴돼요. 괜히 우리의 자존심과 명성과 가치는 주님의 토네이도가 도니까 전부 다 날아갔어요. 그 날아간 자들이 다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물어요. 당신은 왜 멀쩡한데 여기 집에서 판자 붙들고 있습니까? 다 이거 토네이도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주를 증거하는 거예요. 당신은 왜 이렇게 삽니까? 다 주님께서 십자가 져서 나를 망쳐놨어요. 내 자랑도 못하고 이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방법이에요. 12제자가 다 도망갔습니다.
도망간 거 다 헛된 거예요. 다 집어넣어요. 반모 섬에 집어넣고 야곱이고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고 너는 반드시 로마에 가야돼! 로마 갈 때 그냥 보내지 않고 태풍불어서 죽을 판 살판 만들지요. 그것 때문에 죽을 판 살판 만들어서 되지도 않는 우연히 도사가 왔는데 자기가 도사를 아를서 던졌거든요. 알아서 던지니까 야 도사까지 하는 것 보니까 신인모양이다. 해서 자기 넙죽해서 또 복음전해서 그 사람 구원받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본인이 저 사람 꼬셔야지 가 아니라 자기는 지금 빨리 죽고 싶은데 죽은 싶은 인간을 데려오라하니까 곳곳에 거기에 그리스도의 성전이 만들어 지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이미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은 곳곳에서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또 찾아가지는 마세요. 가보면 없습니다. 토네이도는 현장에 가면 이미 사라지고 없어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뭘 붙잡으려면 이미 없어요. 안 붙잡으면 주께서 이미 어느 새 안 붙잡는 그 자체가 구원받은 효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안목이 있을 때 여기 10절에 보면 살후 2: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것을 방금 이야기한 십자가 새언약 중심으로 생각 않고 기존 교회 중심으로 봐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정통적인 개혁주의 정통적인 교회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것이 여러분들이 인간들이 만든 것같이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해서 모든 불의와 이단들을 다 추방하고 남기고 떼어내고 떼어내서 액기스 남긴 것이 우리 칼빈주의 개혁주의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 가치에 대해서 반대하는 자들은 데살로니가후서 10절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모든 속임수의 멸망의 자에 들 것이며 우리의 교회 와서 우리교회 설교를 안 듣는 사람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모든 교회가 다 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사단의 역사입니다.
11절에 봅시다. 여기에 사랑이 나오는데 사랑은 반드시 질투와 비교해야 됩니다. 지난 오늘에 설교했지만 남자는 여자를 이해 못해요. 남자는 누리고 살 수 있습니다. 왜? 그냥 주는 거니까 그런데 여자는 사랑을 원한 게 아닙니다. 질투가 있는 사랑을 원하기 때문에 이것은 뭐냐? 'only you' 오직 나만을 사랑할 때 사랑이에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을 할 때 구약의 사랑은 이 사랑이 아닙니다. 무슨 사랑입니까? 오직 너만을 사랑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입니다. 신명기 4장 24절에 질투하는 하나님인데 인간들은 사랑을 받아 보관하기 위해서 옆에 사람도 사랑해 주고 하나님도 사랑해 주고 부인도 사랑해주고 자식도 사랑해 주고 사랑을 받아 축적하고 채워놓고 나 이만큼 받았다 자기 자랑하는 거예요.
그 사랑은 전부 다 자기 정당화에 불과한 겁니다. 오직 하나만 사랑하거든요. 하나만 사랑한다는 것은 이것은 필히 배척과정이 반드시 동원되게 되어 있어요. 너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사랑에 반응하지 못한 여호와도 사랑하고 바알도 사랑하는 이런 인간은 어떻게 되겠어요? 전부 다 제거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무도 주님의 사랑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딱 한분 있었습니다. 누구냐?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좋아한다고 하니까 주님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받아 챙겼지요. 하지만 막상 주님이 떠날 때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사랑은 아무런 자기 구원에 도움이 안됐어요. 다 쓸데없이 되어 버렸거든요. 그래서 여기 13절에 보게 되면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그 다음에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그 다음에 뭐라 나오죠? ‘너희를 택하사’ 참 지독합니다. 이것은 영생 주기로 작정한데만 하기 때문에 사랑이 주어지는 겁니다.
할머니가 손자를 키우면서 저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만 참 할머니한테 고맙기도 하지만 섭섭한 것도 참 많았어요. 뭐냐 하면 옛날에 곶감이 귀했는데 곶감이 먹고 싶었는데 설날에 곶감을 먹으니까 손목을 탁치면서 네가 왜 먹어? 사촌 동생 주려고 하는데 네가 왜 먹어! 할 때 얼마나 섭섭한지 몰랐었어요. 하더라도 손목치지 말고 얘야, 너 많이 먹었잖아! 내가 나중에 사줄게 좋은 말로 해도 되는데 화를 내면서 손을 탁 치면서 곶감이 안 떨어질 수가 없어요. 뚝 떨어지니까 네가 왜 먹어! 그 순간 느끼는 것이 차별대우, 참 음악이 흐르면서 눈물을 흘리죠. 아! 세상이 이렇구나! 사랑 받지 못한 자의 처량함을 느꼈죠.
하나님이 택했다는 것은 곶감은 너한테만 주는 거다 할 때만 의미가 있는 거예요. 99마리 양은 그 양은 죽던지 말든지 관계없어요. 한 마리밖에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백마리 양보다 더 기뻐해요. 택했던 당사자들을 구원했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이 안 섞였기 때문에 주님은 대 만족인겁니다. 그 만족스러움에 네가 참여하라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선택에 대해서 다시 감사히 여기면서 우리는 뭐 주님이 사랑하면서 돈도 못 벌게 하고 왜 내 뜻대로 안되고 만날 사랑은 받아 챙기는 건데 주님은 선택, 그런 것, 돈 좋아하면 돈 달라하고 집 좋아하면 집 달라하고 오직 너에게는 용서하시는 이 선택적인 사랑만 너희에게만 주시는 거예요. 이게 편애입니다. 철저한 편애입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그 다음에 에서는 미워하죠. 그 미움이 없으면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미워하는 자들이 반드시 있어요. 여러분들이 사랑 받았거든 한번 둘러 보세요. 전부 다 미움 받았어요. 전부 다 미워하는 거예요. 허리를 탁쳤다? 그게 자기가 치고 싶은게 아니고 주님의 미움 받아 친거예요. 허리를 탁쳤다? 움켜진 게 아니고 허리를 탁 쳤다 이거든요. 윤창중이가 술 먹고 그렇게 한 것이 주께서 미워서 그렇게 허리치게 한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날 때 반드시 질투하는 사랑, 너만을 사랑했다는 선택적 사랑으로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또 사랑 받았어! 끝! 챙겨 놓지 마시고 우리도 딴 것 보다도 그 사랑만 사랑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안 되고 주께서 일부로 치워놓을 때 저리가 허락 안 해! 치워놓으니까 비로소 우리는 놓쳐버린 그 주님의 질투어린 사랑을 그 순간은 깨닫게 되지요. 깨달으면 뭐합니까? 돌아서면 마찬가지인데요.
그래서 말씀은 우리가 지켜서 보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은 따로 계셔서 우리에게 소낙비를 계속 주는 거예요. 이제 곧 장마가 오는데 장마가 작년으로 끝났습니까? 장마는 6월이 되면 늘 오잖아요. 늘 매일같이 우리에게 만나를 주듯이 선택적 사랑을 주고 있어요. 그런 것이 오거든 말씀의 장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다음에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여기 성령과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이 동원되어야 되지요. 왜, 사랑과 성령이 동원돼야 됩니까?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아시면 우리가 명심하면 됩니다. 내 힘으로는 구원이 안 됩니다. 라고 하면 돼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성령 생활입니까? ‘안 돼!’ 이게 성령 생활이에요. 안 돼 이게 성령생활아닙니까? 안되지만 해 볼까? 해 보지 마세요. 쓸데없는 겁니다. 애초부터 안 된다는 것을 알면 되는데 안 되는 것을 기뻐하면 성령의 일이고, 그래도 해 봐? 이러면 슬슬 또 사단의 유혹에 빠진 거예요. 진짜 너무 생각해 보니 간단하네요. 두 장 안 돼요. 아예, 액자로 만들어 가지고 교인 끌어 들이는 겁니다. 안 돼! 아예 구원자체가 안된다니까요. 너희구원은 어떻게 구원받았냐? ‘안 돼’가 구원해 줘요. 혹시 묻거든 너희구원은 어떻게 구원받는데? ‘안돼!’가 구원 받게 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냥 사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안 되거든요. 주변에 마귀의 종들이 깔려있어요. 깔려서 우리가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기만을 기다리는 거예요. 눈을 돌리면 ‘안 돼!’가 뭐로 바뀝니까? “그래 나는 할 수 있어!”로 바뀝니다. 학생들 시험칠 때 기도 많이 하잖아요. 주여! 아는 문제 나오게 하옵소서! 또는 주여 아는 것은 쓰게 하고 모르는 것은 못쓰게 하옵소서! 하나마나하는 소리 있잖아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주여! 안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면 다 되게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는 눈에 팍팍팍 정답이 나올 수도 있어요. 우리는 뭘 해도 안 되는데 안 되도 이렇게 사는 것은 주께서 되게 하신 덕분으로 이만큼에라도 사는 겁니다.
욕심 한 번 더 내? 좀 더 욕심을 내봐? 이렇게 되면 사단의 역사가 안보이고 주님한테 원망이 되고 십자가 져도 소용없네! 이런 불만이 나오고 내가 예수 믿었는데 얻어 생기는 것도 없고 내가 예수 믿지 말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선택해 놓고 아무 효과도 없고 뭐 선택한 값을 안 하고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살후 2:14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복음이라 말 했는데 세자로 하면 새언약이죠. 복음은 예수님의 존재가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쳤고 그것은 다 사단의 역사이고 복음은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십자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죠. 3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든 했죠. 부활이 아닙니다. 재림도 아니고 강림도 아니에요. 뭐에요? 복음은 십자가 에요. 십자가는 사람의 능력으로 도저히 알 수가 없고 성령의 기쁨이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게 그게 바로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영원한 비밀이고 그 비밀이 우리를 구원한 겁니다. 복음은 십자가이기 때문에 이 십자가는 새언약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는 내 살과 피를 마시는 데 내 살과 피는 누구에 의해서 찢겨지고 누구에 의해서 찢겨지고 누구에 의해서 찢겨지고 누구에 의해서 흘려진 겁니까? 바로 우리의 손에 의해서 찢겨지고 흘려진 사람에 의해서 흘려진 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동원해서 죽게 만들어 놓고 그 죽은피를 오히려 자기가 죽은 사람을 살리는 희생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언약적으로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따라서 복음으로 주의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그 영광 받는 것에서 우리가 하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일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으니 매일같이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성령께서 확신시키는 겁니다.
‘주여! 뭘 할까요?’ ‘하지 마! 된 돼!’ 오늘 참 좋은 것 배웠습니다. ‘전도할 까요?’ ‘하지 마! 안 돼!’ ‘그러면 헌금 할까요?’ ‘네가 무슨 헌금을 할줄 알아!’ ‘봉사 할 까요?’ ‘봉사, 하지 마! 안돼!’ ‘그럼 청소나 하겠습니다.’ ‘청소는 하되, 그게 봉사라고 하지 마라!’ 자기가 보기에 더러우니까 청소하면서 이건 봉사가 아니야, 이건 봉사가 아니야! 인간이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칙칙 해 놓고 이것은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야 이런 거 나오죠. 주먹질하면서 칙칙 입에서 소리 내면서 이것은 입에서 내놓고서는 이것은 죽먹질 빠르게 해서 나온 소리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실컷 살고 이렇게 살면서도 그 산 것으로 절대로 구원되는 게 아님을 우리에게 분명히 일깨워야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약인데 우리는 언약대신 우리의 행함을 내세우면서 살아가는 그 속성을 또 다시 발휘했습니다. 참 주님 보시기에 가찬치도 않은 행동을 우리의 육체적인 본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찾아와서 오직 십자가 복음으로만 구원됨을 늘 깨우쳐 주시고 감사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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