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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 너무 관대, 바보같다"…콜럼버스 편지 인쇄본 경매 나온다
1493년 편지, 이달 크리스티 매물로
낙찰가 20억원 이상 예상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 소식을 알리기 위해 쓴 편지의 인쇄본이 처음으로 경매에 등장한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번 달 크리스티 경매에 1493년 콜럼버스가 썼던 편지의 희귀한 라틴어 번역본이 매물로 출품된다고 보도했다. 이는 콜럼버스가 쓴 편지의 초기 인쇄본으로, 경매 낙찰가는 150만달러(약 20억3000만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콜럼버스의 전기 작가인 펠리페 페르난데스 아르메스토는 이 편지에 담긴 사건을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은 항해에 대한 최초의 보고"로 표현했다. 이 편지는 당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소식을 엘리트 유럽인들에게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초기 인쇄기를 사용해 찍어낸 것이다. 가디언에 따르면 이번 경매에 출품되는 편지는 스위스에서 거의 100년 동안 개인 소장품으로 보관됐다.
크리스티는 이 편지에 대해 "구할 수 있는 가장 초기 콜럼버스의 편지"라면서 당시 콜럼버스의 편지는 국제적으로 출판돼 최초의 '미디어 열풍'을 촉발했다고 설명했다.
콜럼버스는 1492년 스페인을 떠난 지 33일 만에 아메리카 대륙인 서인도 제도의 산살바도르섬을 발견했다. 그의 발견은 사실상 유럽의 식민지 뱃길을 연 것으로 볼 수 있다. 콜럼버스는 유럽으로 돌아온 후 1493년 스페인 왕실 재무상에게 이 편지를 보냈다.
콜럼버스는 편지에 "선단을 이끌고 인도로 항해했고,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사는 섬을 발견했다"며 "무엇보다도 왕과 여왕을 위해 (이 섬들을) 점령했다"고 썼다. 이어 그는 자신이 본 섬의 풍부한 자연을 칭찬하고 그곳에서 만난 원주민들을 "매우 소심하며 너무 의심하지 않고 관대하며 바보 같다"고 묘사했다.
역사가들은 이 편지를 유럽의 신대륙 식민지 개척의 시작을 알리는 선전물로 보고 있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의 제프리 심콕스 교수는 "당시 인쇄기 덕분에 이 편지가 널리 퍼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며 "스페인 왕실은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최첨단 기술을 사용해 다른 유럽 왕실에 사본을 보냈다"고 말했다. 이후 이 편지에 담긴 뉴스는 외교채널뿐 아니라 상업 채널을 통해서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같은 대학의 중세 역사학 교수 테오 루이스는 "이 편지는 콜럼버스가 홍보에 얼마나 능숙했는지를 보여준다"며 "그가 서쪽으로 항해해 인도의 섬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린 것이 이 편지의 영향력이었다. 그러나 이는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미국 미네소타 대학의 콜럼버스 전문가 윌리엄 필립스 교수는 "콜럼버스는 자신이 성취한 업적을 인식하지 못했다"면서 "이 편지는 자기 홍보이자 선전이었고,15세기판 '가짜뉴스'"였다고 평가했다.
이탈리아 출신인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의 후원을 받아 서쪽으로 항해했다. 그는 아메리카의 섬에 도착했지만, 자신이 동아시아 지역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으며 숨질 때까지 그 믿음을 고수했다.
한편 콜럼버스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극과 극이다. 유럽 입장에서 본 콜럼버스는 신항로를 개척한 탐험가이나 아메리카에서는 원주민을 착취하고 물자를 수탈해 유럽 제국주의 식민 통치의 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미국에서는 콜럼버스 동상과 기념물이 철거됐으며, 많은 주에서 연방 공휴일인 '콜럼버스 데이'(10월 두 번째 월요일)를 '원주민의 날'로 바꾸어 기념하기로 결정했다.
김동원_우리의 현실, 그리고 시의 소란(발췌)/ 갈 수 없는 미래 : 백무산
갈 수 없는 미래 백무산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콜럼버스가 원주민들을 만났던 때의 감동을 일기장에 이렇게 남겼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다. 점잖고 살인이나 도둑질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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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수 없는 미래 / 백무산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콜럼버스가 원주민들을
만났던 때의 감동을 일기장에 이렇게 남겼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다.
점잖고 살인이나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악에 관해서 전혀 모른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고·······그리고 항상 웃는다"
그 감동을 스페인 국왕에게 편지에 담아 보냈다
"그들은 아주 소박하고 정직하고 아낌없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들은 자신보다 타인에 대한 애정이 더 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훌륭한 노예의 자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냥개를 풀었고
금을 가지고 오지 않는 자들의 팔을 자르고
저항하는 수만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
노예 없이 문명은 발전할 수 없기에
이 나라 콜럼버스의 후계자들이자
진보개혁가들은 이런 정책보고서를 작성했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에서도 묵묵히 일하는 진정한
애국자들입니다
그들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존중해서 계속 묵묵히 일하게 해야 합니다.
빈곤 없이는 국가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 우리의 현실, 그리고 소란_백무산의 신작시(발췌) _ 김동원/ 시인
콜럼버스는 우리에게 신대륙의 발견자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시는 그 사실보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서인도제도의 사람들에 주목한다. 시는 그곳의 사람들이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인성의 이상향을 실현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게 보면 콜럼버스는 인류가 이루어야할 미래의 꿈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그들에게서 인류의 이상향을 꿈꾼 것이 아니라 "훌륭한 노예의 자질"을 본다. 노예없이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미래의 꿈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왔었지만 인류는 그 미래를 걷어차 버렸다.
걷어찬 미래의 꿈은 노동자들의 현실에서도 반복된다. 현실의 "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에서도 묵묵히 일"하고 있다. 이제 그들의 성실에 부응하여 노동자를 공정하게 대우하면 세상은 곧바로 이상적인 사회가 된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존중해서 계속 묵묵히 일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빈곤 없이는 국가가 발전할 수없"다면서 노동자에 대한 지속적 착취를 통해 세상을 굴려가려 한다. 더더욱 슬픈 것은 이러한 입장을 '정책 보고서'에 담은 것이 자본가가 아니라 '진보개혁가'들이란 점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노동자가 존중받는 세상을 꿈꿔야 할 사람들이다. 시인은 그러한 세상에 대한 미래의 꿈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성실한 노동자들이 그 꿈의 절반을 이미 세상으로 가져왔으나 세상이 그 꿈의 나머지 절반을 걷어차 버렸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시 243-244/ 론 260-261)
콜럼버스는 악질적인 노예사냥꾼 - 한겨레:온
서구정복자의 시각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은 종종 콜럼버스를 ‘좌절하지 않는 탐험가’로 묘사한다. 심지어 ‘신대륙을 발견한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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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정복자의 시각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은 종종 콜럼버스를 ‘좌절하지 않는 탐험가’로 묘사한다. 심지어 ‘신대륙을 발견한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콜럼버스가 없었다면 오늘의 아메리카도 없었고 역사의 진보도 불가능했다고 강조한다.
역사 속 콜럼버스는 자신의 제안을 불신했던 이탈리아, 포르투갈을 떠나 황금과 성경으로 스페인 국왕을 설득했다. 스페인제국 이사벨 여왕은 당시 포르투갈보다 먼저 인도항로를 발견함으로써 세계 제국을 욕망했다. 그리하여 콜럼버스를 지원했는데 콜럼버스는 4차례에 걸쳐 중남미 일대를 침탈하였다.
실제로 미국의 모든 역사 교과서에는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한 인물로 설명하고 매년 10월 12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2003년 홍윤서가 쓴 『전쟁과 학살, 부끄러운 미국』 (말, 2003년)에 따르면 미국 전역에선 10월 12일을 ‘콜럼버스의 날’로 기념해 성대한 행사를 치른다고 한다.
콜럼버스의 날’을 기념하는 미국 문화는 참혹하게 희생당한 아라와크(Arawak) 인디언 역사를 부정하는 관점이다. 나아가 서구 기독교 문명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시각이다. 실제로 인디언 원주민들은 서구의 관점과 달리 대단히 수준 높은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 멕시코 마야(Maya) 문명, 아즈테카(Azteca) 문명, 페루 잉카(Inca)문명은 주요 사례들이다.
15~16세기 스페인제국이 중남미 대륙을 침략하면서 인디언 원주민들이 구축한 경제 질서가 상당수 파괴당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시설 중에는 잉카 시대에 구축한 관개시설이 아직까지도 페루 해안 사막지대 농사에 활용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스페인제국이 침략하기 이전에 이미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는 토목공사와 도로망이 크게 발달하였고 방직 기술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옥수수와 고구마, 그리고 감자와 담배도 당시엔 오직 신대륙에서만 재배되었다. 신대륙 침략 이후 유럽으로 전해졌고 곧이어 전 세계로 보급되었던 농작물이다.
미개한 사회제도라는 통념이나 상식과 달리, 인디언 원주민들은 이미 절대주의 왕정 체제 아래 잘 조직된 계급사회를 정치제도로서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당히 수준 높은 사회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콜럼버스가 기록한 항해일지를 보면 인디언들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낯선 사람에 대해 친절함과 온화함 그리고 나눔의 정신을 기꺼이 실천하고 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반면에 콜럼버스를 비롯해 산타마리아호에 탔던 스페인 선원들은 오직 황금에 눈먼 교활한 약탈적 상인들로 묘사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다음은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쓴 『미국 민중저항사 1』(일월서각, 1986)에 나오는 콜럼부스 항해일지 일부분이다.
아라와크족 인디언은 우리에게 먹을 식량과 물을 가져다주었으며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고 무기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에게 칼을 보여 주자 칼날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좋은 하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50명만 있다면 아라와크족 인디언 모두를 정복하여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콜럼버스는 1495년 대규모 노예 약탈을 시작으로 모두 네 차례 인디언을 학살하고 약탈했다. 남자, 여자, 어린이 할 것 없이 1,500명 인디언을 스페인 선원들과 무서운 개가 지키고 있는 우리 속에 가두었다. 감금한 인디언 가운데 500명을 강제로 배에 태워 스페인으로 데려갔다.
스페인으로 오는 도중 선박 안에서 인디언 200명이 굶주린 채 병들어 죽었다. 나머지 300명은 스페인에 도착해 가톨릭 부주교에 의해 경매에 부쳐졌다. 그때 콜럼버스는 인디언들을 ‘사용 가치가 있는 노예’로 생각했다. 그는 ‘주 하느님 성령의 이름으로’ 계속 노예를 붙잡아 보낼 것을 다짐하곤 했다.
1498년에는 카리브 인디언 600명을 노예로 팔기 위해 스페인으로 강제 납치하려 했다. 그러자 인디언 원주민들은 콜럼버스 군대를 피해 집을 버리고 마을을 떠나 피신해야 했다. 그 결과 카리브해 아이티에서는 1492년에 700만~800만 명에 이르던 원주민들이 1510년에는 6만 5,800명으로 1540년에는 250명으로 급감했다.
새로운 질병의 유입도 있었지만 콜럼버스를 비롯해 백인 정복자 코르테스, 피자르가 저지른 학살과 납치, 약탈로 인해 뿌리 뽑히고 착취당한 결과였다. 유대인 이상으로 학살이 자행된 콜럼버스의 정복은 “2억 년 전 고생대 이후 가장 심각한 파괴였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콜럼버스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상점 점원으로 일했던 시간제 직공이었다. 그러던 그가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황금과 향료를 가져오겠다는 약속을 받고서 배 3척과 90명이 넘는 선원을 지원받았다. 배 세 척은 니냐(Nina)호, 핀타(Pinta)호, 산타마리아(Santa Maria)호였다.
당시 스페인 국왕이 제시한 조건은 새로 발견한 땅에서 콜럼버스가 총독 지위를 얻는 것과 획득한 이익의 10%를 소유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1492년 최초의 항해에서 콜럼버스는 카리브해 바하마제도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아라와크족 인디언들에게 큰 환영과 함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 스스로 아라와크족 인디언들을 “믿지 못할 정도로 순진하고 욕심이 없으며 함께 나누어 가지려는 사람들”로 묘사하였다.
<노예 사냥꾼> 콜럼버스는 자신에게 투자한 스페인 상류 지배층, 바로 왕족과 상업부루주아들을 위해 스스로 약탈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원주민들을 잡는 대로 잔인하게 살해하거나 불에 태워 죽였으며 황금 대신 노예사냥으로 끌고 갔다. 콜럼버스와 그 부하들은 14세 이상 원주민들에게 3달에 한 번씩 황금을 가져오게 지시했다. 지시에 따라 황금을 갖다 바친 인디언들에겐 목에다 구리증표를 걸어 주었다. 그런데 구리증표를 목에 걸지 못한 인디언들은 발견 즉시 손목이 잘리어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아라와크족 인디언들은 스페인 약탈자들에게 저항했지만 콜럼버스가 다녀간 2년 동안 25만 명에 가까운 인디언들이 대량 학살과 수족 절단으로 참혹하게 죽어갔다. 이는 당시 아이티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자신의 칼날이 어느 정도 날카로운가를 시험해 보기 위한 단순한 이유에서 인디언들을 10명씩, 20명씩 칼로 베어 죽였다. 심지어 장난삼아 길거리 어린 소년의 목을 자르는 만행도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실제로 인디언들은 황금을 캐기 위해 광산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갔으며 동물처럼 사육되고 학살당했다.
놀라운 사실은 콜럼버스 스스로 자신의 잔악한 행위를 ‘영원한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였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오리엔탈리즘이 지배하는 서구 기독교 관점에선 콜럼버스가 자행한 학살 만행을 정당한 행위로 미화하고 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콜럼버스 이후 스페인 정복자들은 코르테스(Cortes)가 멕시코 아즈텍문명을 일군 인디언들을 무참히 파괴, 학살했다. 코르테스는 스페인 출신으로 16세기 아즈텍문명을 파괴하고 멕시코를 정복해 스페인 영토로 복속시킨 인물이다. 잔인할 뿐만 아니라 방탕한 인물이었다.
이어서 약탈자 피자르(Pizarro)는 페루 잉카족 인디언들을 대량 학살하였고 신대륙 청교도들은 버지니아와 매사추세츠에서 포하탄족과 피코트족 인디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오늘날 서구 문명의 화려함과 물질적 풍요로움 이면에는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망각 속에 잊힌 인디언들의 고통스러운 역사가 참혹하게 깔려 있다. 콜럼버스 역시 탐험가로서 기억하기보다 황금에 눈먼 ‘노예사냥꾼’으로 기억하고 가르치는 것이 역사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태도이다.
선량한 인디언 원주민들을 사냥하고 노예로 끌고 갔으며 인디언 재산을 약탈하고 무고한 생명을 학살한 제국주의 침략자 콜럼버스는 결코 ‘신대륙 발견의 영웅’이거나 성자聖者일 순 없다. 그것은 ‘침략’을 ‘신대륙의 발견’으로 기록한 유럽의 세계관이자 백인 정복자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유럽 제국이 침략하기 이전에 2,000만 명에 달했던 인디언들이 1/10로 인구가 급감한 것은 유럽에서 들어온 전염병이 그 원인이다. 그렇지만 콜럼버스를 이은 코르테스(Cortes), 피자르(Pizarro)를 비롯해 백인 정복자들이 저지른 학살과 파괴도 그 주요한 원인이다. 실제로 이들은 마야문명을 깡그리 짓밟고 마야인을 짐승처럼 도륙한 백인 전범들로서 잔인하고 교활한 침략자들이었다.
2차 약탈을 떠나기 전 콜럼버스가 드린 기도는 역설적이게도 이러했다.
“영원하신 하느님, 우리의 주님이시여, 불가능함을 극복하면서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저희들에게 승리를 주소서!”
* 이 글은 2006년 글쓴이가 <우리역사 바로읽기>에 쓴 내용을 다시 수정하고 다듬은 글임을 밝힙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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