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 . 53
김년균 시인
내가 김년균(金年均) 시인을 만나 것은 오래 전이었지만 가깝게 만나 것은 신세훈 문협 이사장 시절에 그는 부이사장을 재임중이었고 나는 사무처장으로 발탁되어 출근하면서부터 누구보다도 돈독하게 유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문협에서 사무국장을 거쳐서 부이사장에 동반 출마해서 당선되었으나 신세훈 이사장과의 갈등으로 사무실에서 자주 볼 수가 없었다.
그후 다시 문협 임원 개선 선거가 다가오자 그는 나와의 만남을 통해서 차기 이사장으로 출마하고 싶다는 의견과 함께 협조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무처장으로서 엄격한 중립이 요구되므로 직접 도와줄 수는 없고 간단한 정보나 전해주는 정도의 협력으로 그와의 우의를 지속했다.
그는 신세훈 씨가 추천하는 후보와는 러닝 메이트를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기조 씨쪽으로 부이사장 러닝메이트로 가게 되고 거기에서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해 선거를 3개월 정도 앞두고 신세훈 씨는 나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과 비하로 괴롭힘을 참다 못해서 사직서를 내고 지방에 내려가서 좀 쉬고 있던 차에 그동안 친분이 있는 동료 및 선배 문인들 권유로 시분과회장에 출마해서 김년균 시인과 공조로 선거운동을 하게 되었다.
당시 성기조 입후보 예상자는 석사 논문 표절 시비로 문협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제명 처분을 받고 출마가 불가능 하게 되자, 김년균 시인을 대타로 내보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이사장 후보로, 나는 시분과회장 후보로 정식 등록하고 선거운동을 전개해서 결국 승리의 환호를 울리게 하여 문단의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와 나는 4년간의 임기를 함께 마치고 그는 퇴임하고 문협 명예이사장으로 올라가고 나는 다시 부이사장에 도전하여 당선하고 지금 그 임기를 수행 중에 있다. 요즘도 가끔 문협 행사에서 만나고 있다.
김년균 시인은 1942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하여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72년 『풀과 별』에 「출항(出航)」「작업」등이 이동주 선생의 추천으로 등단하였다. 그의 시풍은 삶의 이상과 고뇌, 또는 인간의 한을 다룬 작품들을 발표했으며 연작시「사람」을 10년 넘게 꾸준히 발표하여 인간의 다양한 삶의 양태를 추적하고 있다. 최근에도 『무슨 꽃을 피우는가』를 상재해서 문단에 회자(膾炙)되기도 했다.
그는 시집으로 『장마』『갈매기』『바다와 아이들』『사람』『풀잎은 자라나라』『그리운 사람』『나는 예수가 좋다』『자연을 생각하며』등이 있고 그가 평생을 두고 시적 대상으로 창출하는 ‘사람’ 연작시집에『아이에서 어른까지』『사람의 마을』『오래된 습관』『하루』『숙명』『우리들이 사는 법』『무슨 꽃을 피우는가』등을 상재하였다. 그리고 수필집도 『날으는 것이 두렵다』『사람에 관 명상』등이 있다.
그는 이러한 문학적 업적을 높이 평가 받아서 한국현대시인상, 들소리문학대상, 예총예술문화대상, 윤병로문학상, 윤동주무학상, 진을주문학상 등 국내 유명한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김동리 선생을 만나 얻은 직장이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편집기자였다. 앞자리에 이문구 씨, 옆자리엔 양인자 씨가 앉아 있었다. 거기서 3년을 지냈다. 그동안 나는 선생님의 주례로 결혼을 했고 문단에도 등단했다. 그 후로 선생님께서 이사장을 그만 두는 바람에 잠시 떨어져 있었으나 이문구 씨를 내세워『한국문학』을 창간하자, 다시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나는 편집장으로 10년 넘게 일했고 교과서 회사(지학사)로 직장을 옮겨 ‘오늘의 세계문학’ ‘한국문학총서’ 등 교양도서와 학생들의 독서교육 잡지인 『독서 평설』등을 만들기도 했다. 문학사상사로 가서 전무이사와 편집인을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30년만에 첫 직장이었던 문협으로 되돌아 왔다. 이곳에서 사무국장, 편집국장, 부이사장, 이사장을 지냈으며 이곳이 나의 마지막 직장이다.
--2009. 7. 19. 『독서신문』에서
그는 이처럼 문학과 문단 주변에서 한생을 살아왔다. 그래서 그는 ‘문학은 구원의 빛이다. 문학이 있으므로 하여 인간의 심성이 아름답고 향기롭게 다듬어 지고 세상도 지혜롭고 평화롭게 발전한다. 그러한 문학과 함께 지낸 생애, 특별하지 않은가. 그러니 나에게 문학이 숙명일 수밖에 없다.’는 그의 문학적인 삶을 정리하고 있다.
그는 ‘사람 연작시집’ 『숙명』‘시인의 말’에서도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격이 주체인 동물, 또는 가장 이지적이고 도덕관념을 갖춘 만물의 영장, 그리고 가슴에 만 섬의 생각을 지닌 이상적 존재 이렇듯 많은 표현이 필요한 사람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상스럽게도 말을 줄여왔다. 어쩌면 누워 침 뱉는 격이란 생각 때문일지라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본다. 사람은 어쨌든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이다. 사람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자주 이야기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도 사람답게 바로 잡히게 될 것이고 사람이 제 역할을 다할 때 사람의 의미나 가치도 더욱 뚜렸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사람’에 관한 많은 사유(思惟)가 연작시를 창작케 했는가 싶기도 하다.
그가 문협 이사장 재임시 해외한국문학시포지엄에 동행한 일이 많았다. 일본 북해도에서 남쪽 후꾸오까까지 일주를 하거나 베트남 사이공에서 북쪽 하롱베이를 거쳐서 앙코르 왓트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서안을 거쳐 실크로드의 돈황까지 여행하면서 주제를 발표한 일들은 그와의 꿈같은 세월의 추억이 되고 말았다.
그가 이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중에 징계처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성기조 선생은 아무래도 김년균 이시장에게 암암리에 다양한 수럼청정(?)의 압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를 별탈 없이 묵묵히 소임을 완수한 것은 그의 과묵하고 순정적인 성격에서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나와의 약속을 끝내 실현시키지 못한 아쉬움도 하나 남아 있다. ‘선거관리규정’에서 등단년도의 조정(30년에서 25년으로)은 개정하지 못하고 다음 선거를 실시하게 된 점이다. 그로 인해서 내가 이사장 입후보의 꿈을 접어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퇴임 후 경기도 양주군 백석으로 이사를 갔다. ‘시골에 내려와 자연을 벗삼아 살고 있다. 시인이 살기에 이만큼 좋은 곳은 없을 듯하다’는 그의 글로 보아 조용한 여생을 준비하는 것 같다. 소문에는 건강이 약간 좋지 않다는 전언이었는데 그래서 시골행을 택했나.
그 길을 닦아 오신 왕손의 후예로,
죽어도 살아계신 사육신의 후손으로
억만년 기리는 황홀한 피가 온몸에 출렁이는
김령인(金寧人)으로 꿋꿋이 사느니
하늘이 보소서. 영원히 살피소서.
그의 작품 「후예-金寧人」의 일부이다. 나의 초기 작품에도 ‘유인김령김씨지묘(孺人金寧金氏之墓)’라고 내 어머니의 묘지 (床石)을 묘사한 부분을 그가 읽고 김령김씨 피가 흐른다는 동지적인 농담을 한 바가 있다. 맑은 공기 마시면서 몸조리 잘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