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00 등산회 봉화(奉化) 닭실마을(酉谷里) 청암정(靑巖亭) 일원 탐승 안내
1. 운행노정(路程)-대공원역→대구부산고속도로 진입→동대구JC→경부고속도로 진입→금호 JC→중앙고속도로 진입→서안동휴게소(휴식)→영주IC 진출→28번 국도→36번 국도→닭실마을→축서사→봉화북지리 마애불좌상→오전약수(중식,)→춘양목군락지→각화사→춘양→대구
2. 주요 탐승 문화재
닭실마을[대구에서 161.5km, 2시간 0분]-경북 봉화(奉化)의 닭실(酉谷) 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 즉 '금계포란'의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풍수지리상 영남의 손꼽히는 명당으로 삼남의 4대 길지[안동 내앞, 하회, 경주 양동]중 하나로 손꼽힌다. 또한, 마을 주위로 물길이 돌아나는이수삼산의 형태로 물줄기 두 개가 만나기 때문에 홍수가 나도 범람하는 경우가 적다고 한다. 안동권씨의 집성촌으로 입향조는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성종9-1548,명종3, 贊成)로 알려져 있으나, 실지 이 마을에 제일먼저 정착한 이는 권벌의 5대조이다. 충재 권벌 이후로 마을이 번성하여 그를 입향조로 알고 있는 이가 많아진 탓이다. 멀리 국도에서 보아도 밀집한 고가가 쉽게 눈에 띄는 모양새가 반가의 집성촌임을 쉽게 짐작하게 하는 닭실은 충재 종택이 있는데, 이 종택에는 5개의 서책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262호인 근사록, 261호인 충재일기 7책, 보물 896호인 중종에게 하사받은 책들, 901호인 호적단자, 902호인 서첩과 글씨인데, 책을 좋아 했던 선비의 종택에 어울리는 보물인 듯하다. 닭실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이 찾는 곳은 청암정(靑巖亭)이다. 청암정은 종택에 딸린 정자로 연못 한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 지어져 있다. 아마도 낯익은 모습은 영화 ‘스캔들’의 촬영 장소이기 때문인 듯하며, 청암정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터전인 바위가 거북 모양이라고 한다. 처음 지을 당시 청암정의 안쪽방에 온돌을 만들었는데, 지나던 고승이 거북의 등에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말을 전하는 바람에 온돌을 없앴다고 한다. 마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삼계서원(三溪書院)이다. 충재 권벌을 배향하고 있는 곳이다. 닭실이 있는 봉화는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성한 곳이다. 금강송 춘양목의 고장으로 불릴 만큼 소나무가 많은 봉화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소나무 반출 금지의 경고문을 볼 수 있다. 송림하면 떠오르는 먹거리가 바로 솔향 짙은 송이버섯인데, 이곳 봉화는 강원도 양양과 더불어 송이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봉화군 축서사(鷲棲寺)[닭실 청암정에서 16.7km, 41분]-경북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1 소재 문수산 깊은 산중에 해발 800미터 가까운 축서사가 있는데, 독수리 축(鷲)’자에 ‘살 서(棲)’자를 사용하여 문수보살이 사는 문수산의 독수리라는 의미로 지혜로운 독수리처럼 불법을 익히고자 했던 의상대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절집 이름이다. 신라 의상대사가 673년 창건했는데 이 절을 짓고 나서 3년 뒤에 영주에 부석사를 지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축서사는 부석사와 너무나 닮아서 이 절을 ‘부석사의 큰 집’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짐작이 가게 만든다. 축서사의 문루에 오르면 서쪽으로는 소백산이, 남쪽으로는 청량산이 우뚝 솟아 장엄하게 물결치면서 그 사찰의 장엄함을 한껏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웅대함이 부석사보다 뛰어남에 놀라게 될 정도로 절 앞마당으로 펼쳐진 경치에 감탄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국내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부석사와 함께 또한 마치 허공에 선듯 건너편으로 펼쳐지는 소백산맥의 꿈틀거리는 산세가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에 소생 개인적으로는 부석사의 장쾌한 전망에 절대 뒤지지 않은 경관임을 사랑한다.
봉화군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축서사에서 10.7km, 33분]-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657-2 소재, 국보 제201호(1980. 09. 16), 삼국시대 불상. 지림사(智林寺) 남동쪽에 있는 자연암벽을 파서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것으로 신라 시대의 거대한 마애불좌상이다. 네모진 얼굴에 고졸한 미소를 나타내고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흥원인(興願印)을 짓고 있는 큼직한 두 손은 투박하면서도 근엄한 위용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은 넓은 무릎과 무릎을 덮어 내린 상현좌, 불상 주위에 새긴 化佛들과 함께 7세기 전반기의 삼국시대 불상 양식을 나타내고 있지만, 얼굴이나 체구에 표현된 부드러운 조각 기법으로 보아 실제 제작연대는 7세기 후반기로 추정된다. 1947년 6월 수월암(水月庵)(현智林寺) 부지 정리 중 발견되었다. 본 불상의 보존관리를 위하여 1982년경에 목조 맞배 보호각을 신축하였으며, 1983년 보호각에 단청을 입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식: 한미식당[☏054-672-2400] [마애여래좌상에서 11km, 17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63-1. 토종닭백숙, 감자전, 막걸리, 복분자주 기타.
오전(梧田)약수탕[마애불에서 11.5km, 18분]-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소재. 조선 제8대 성종(1470~1483)때 발견된 이 약수는 가장 물맛이 좋은 약수를 뽑는 대회에서 전국 최고의 약수로 선정된 기록이 있습니다. 이 약수는 오전리 후평장과 춘양 서벽장을 오가던 곽개천이라는 장사꾼이 쑥밭에 누워 자다 만병통치의 약수가 있다는 꿈을 꾼후 옆을 보니 약수가 솟고 있었고 이 샘이 오전 약수이라 한다. 이 약수를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당시는 이곳이 풍기군에 속했음)를 지낸 주세붕 선생이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과 같은 물이다" 하고 약수터 옆 바위에 "맑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라"는 휘호를 남겼는데(인생불로 요산요수) 약수의 성분은 탄산성으로 오색약수, 필례약수와 같은 계통이다. 혀 끝을 톡 쏘는 맛이 타 약수에 비해 뛰어나고 청량감을 비교할 데가 없습니다. 위장병과 피부병, 심장병에 특효가 있다하며, 이곳에서 약수를 이용해 조리한 백숙은 전국의 제일이라 해도 과하지 않은 바 권할 만한 별식.
춘양목 군락지[춘양목산림체험관, 오전약수탕에서 6.5km, 11분]-오전 약수 가까운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는 두내약수 주변에 서벽관광휴양지, 춘양목산림체험관, 춘양목군락지 등 볼거리가 많은데,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산 121-3(054-679-6552)에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있다. 금강소나무는 소나무의 재질이 금강석(다이아몬드)같이 단단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광물질에서 강도가 가장 높은 금강석에 견줄 만큼 나무로서 재질이 단단하다는 말이다. 서벽리의 금강소나무 군락지의 소나무 수령은 80년∼200년 내외인데, 지난번 숭례문 소실 후 복원을 위해 금강소나무가 필요한 것으로 밝혀지고 그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서 많은 국민들도 알게 되었다. 서벽리의 소나무 군락지 산책은 1시간 30분 정도의 코스이지만 30분 내외 탐방 에정이다. 코스를 따라 돌다보면 번호가 매겨진 금강송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금강송은 그루당 500만~600만원이며, 그 중 상태가 좋은 것은 800만 원도 넘는다고 한다.
각화사(覺華寺)와 태백산 사고지(史庫址)[춘양목군락지에서 12.5km, 23분]-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559번지 소재 각화산 중턱에 있는 각화사는 경북 봉화군 춘양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산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춘양면에서 각화사로 들어가는 길은 온통 사과밭으로 되어 있어 사과철이 되어 향기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길을 가면 산길이 끝나는 곳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각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 말사이며 천년고찰인데, 원래 춘양고등학교에 자리하고 있던 남화사가 폐사되어 각화산 기슭에 옮기면서 옛절 남화사를 생각하는 의미에서 각화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각화사 뒤편 약 1km 지점에 있는 태백산 사고지(太白山史庫地)는 사적 제348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126 - 5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1606년에 건립하여 약 300여 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여 왔다. 조선왕조실록은 848책으로, 1910년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조선총독부와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사고지의 건물배치는 능선에 둘러싸인 경사진 지형에 남쪽으로 축대를 쌓아 실록각과 선원각을 타원형의 담장 안에 동, 서로 배치하고 담장 밖으로 폭쇄각(추정) 근천관이 있어 따로 떨어져 70m 높이의 대지 위에 한 채의 건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