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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조선 11대 중종의 무덤인 정릉.
정릉은 아버지 선릉과 함께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의해 파헤쳐졌다. <연려실기술>은 중종의 외모를 언급하면서 뒷통수가 넙적해 모자가 잘 안 맞았다고 서술했다. 사진 문화재청
<연려실기술>에는 임진년(1592) 왜병들이 파헤친 선릉과 정릉(靖陵)을 조사한 과정도 상세하게 적혀 있다. 선릉은 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 씨의 무덤이고, 정릉은 성종의 아들 11대 중종(1506~1544·재위 1506∼1544) 무덤이다.
조선 조정은 사건 발생 6개월 만에 도감을 설치하고 피해 실태를 조사했다. 그 결과 선릉과 정릉 모두 관이 불탔으며 선릉에서는 두 구의 시체가 모두 사라졌고 중종릉에만 시체가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조정에서는 무덤 속 시신을 훼손한 것으로 미루어 단순히 보물을 탈취하기 위한 도굴이 아니라, 왕조에 위해를 가하기 위한 일본의 계획적인 만행으로 최종 판단했다. 조사관들은 정릉에서 발견된 시신에도 의구심을 표했다. 중종이 승하한 지 50년이 다 됐는데도 시신은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관이 모두 불탔는데 시체만 남아 있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과 함께 왜적이 다른 무덤에서 시체를 파서 갖다 놓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이 과정에서 조사관들은 중종 시신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내시나 상궁 등 과거 중종 주변의 인물들이 왕의 외모특징을 묘사한 기록을 제시하고 있어 흥미롭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중종의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이상이었으며 몸집도 중간 정도였다. 얼굴은 길죽하고 코끝이 높았으며 이마 위에는 녹두보다 약간 작은 사마귀가 있었다. 수염은 붉었지만 그렇지 많지는 않았다.
특이한 점은 뒤통수가 깎은 듯 평편해서 갓 쓰기가 불편할 정도라는 것이다. 몸에는 항상 부스럼이 있었고, 평소 침을 많이 맞아 몸 곳곳에 흉터도 많았다고 <연려실기술>은 기술하고 있다.
절대권력자였던 조선왕들은 대체로 주색을 가까이 했지만 5대 문종(1414~1452·재위 1450~1452)은 금욕주의자에다 평생을 책 속에 파묻혀 산 공부벌레였다. 지나치게 엄격한 자기 통제는 스스로를 단명케 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문종은 어릴 때부터 대궐에서 공부만 했다. 아버지 세종은 “세자가 늘 궁에만 있고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으니 건강을 잃을까 염려 된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문종은 물질적,육체적 욕망을 짓눌렀다. 그는 “임금이 향락을 탐닉하면 천 년을 살아도 만족하지 못한다”면서 “부귀한 집의 자제는 남녀의 정욕과 식욕으로 몸을 망치는 자가 많다. 늘 여러 아우를 보면 훈계하고 타이르지만 내 말을 따르는지는 모르겠다”고 주위에 하소연했다. 문종의 가계는 권력욕에 휩쌓인 그의 아우 수양대군에 의해 몰살당한다.
<연려실기술>은 “문종의 외모는 수염이 길어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며 그의 용모에 대해서도 단서를 남겼다. 어진이 남아 있는 증조부 태조나 친동생 세조는 수염이 빈약하게 그려져 있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25대 철종 어진(보물 제1492호)은 군복 차림이다. 몇 점 안되는 어진 중 유일한 군복본이다. 임금도 군복을 입고 다녔을까, 만일 착용했다면 언제부터일까. 조선 말기 문신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에 따르면 원래 조선의 임금들은 군복을 입지 않았다.
임금의 군복착용은 어려서부터 병서를 탐닉하고 군대놀이를 좋아했던 사도세자(1735~1762)가 군복을 즐겨 입었고, 이어 22대 정조(1752~1800·재위 1776∼1800)가 이러한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화성에 행차할 때 군복을 입기 시작한데서 비롯한다.
정조가 군복을 처음 착용하자 재상 김재익이 나서 “전하께선 이 어인 복장이시오”라고 비아냥댔다. 이에 대해 정조는 “임금이 말을 탈 때는 소매통이 좁은 옷, 즉 군복을 입어도 된다”고 되받았다. 이로부터 임금이 말을 타고 행차할 때는 으레 군복을 착용하게 됐다고 <임하필기>는 기술했다.
시대적 흐름을 거부하다가 병자호란이라는 대환란을 초래한 조선 16대 왕 인조(1595~1649·재위 1623~1649)는 그래서 조선을 통틀어 가장 무능한 왕으로 비판받는다. 그런 인조는 애초 왕이 안 될 수도 있었다. 반정 전 여러명의 추대 후보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소설문학의 선구자 김만중(1637∼1692)의 <서포만필>에 따르면 인조는 한 여인의 도움으로 운 좋게 왕위에 올랐다. 인조반정 세력들은 광해군이 1617년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 김 씨를 폐위하자 왕 내쫓아내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누구를 차기 왕에 옹립할 지는 의견이 분분했다.
뜻밖에도 왕은 반정의 주역이었던 김류(1571~1648)의 부인에 의해 낙점됐다. 다음은 <서포만필>의 내용이다.
“하루는 장릉(능양군·훗날 인조)이 김류의 사저를 찾았다. 능양군이 막 문을 나서자 김류의 부인이 나와 ‘지난 밤 꿈에 어가가 집을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곤룡포를 입은 분이 아까오셨던 젊은 분’이라고 귀띔했다. 김류는 크게 놀라면서 추대 논의를 마침내 마무리지었다. … (중략) …
부인은 손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김류의 판단이 계속 미뤄지자 부인은 꿈을 핑계 대 김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능양군은 가까스로 왕(인조)이 됐던 것이다. 김류 부인이 다른 후보를 점찍었다면 우리 역사도 바뀌었을까.
반정 성공 후 인조는 외사촌인 능천부원군 구인후(1578~1658)를 시켜 어머니 인헌왕후(1578~1626·추존왕 원종의 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했다.
“능천부원군이 명을 받들고 내려가보니 성모(인헌왕후)는 방에 앉아 있고 인평대군(인조의 셋째 아들)이 인열왕후(인조비) 품 안에서 젖을 먹고 있었다.”<서포만필>
우리나라에서 국가적으로 큰 행사가 있으면 임금은 정복인 곤룡포를 입고 옥을 늘어뜨린 면류관을 쓴다. 하지만 그 유래는 그리 길지 않다. 조선후기 학자 정동유(1744~1808)의 만필집 <주영편>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곤룡포와 면류관을 만들어 입을 줄 몰랐다.
원나라 말 혼란기에 명옥진(1331~1366)이 서촉지방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대하’라 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이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1328~1398)은 군사를 보내 대하를 토벌하고 명옥진의 아들 명승을 고려로 귀양 보낸다.
명승은 아버지 명옥진의 곤룡포와 면류관, 영정을 보관하고 있었다. <주영편>은 “조선 태조가 신묘에 제향을 올릴 때 면류관과 곤룡포를 착용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명승 집안의 것들을 본뜬 것”이라고 서술한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2.뒷통수가 넙적해 갓이 안 맞았던 중종…지존의 모습과 생애2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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