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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상의 원천은?
수운이 세상을 구제할 뜻을 굳히게 되는 본격적인 계기는 을묘천서 사건이다.
1855년 암자에서 독서를 하고 있던 수운은 밖에 낯선 스님이 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운이 스님을 바라보자, 스님은 수운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금강사 유점사에서 온 사람으로, 무슨 일로 하여 백일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마지막 날에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고 보니 탑 위에 이상한 책이 놓여 있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으나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범상한 책이 아닌지라 주인을 찾아주기 위하여 각처를 돌아다니다가 오늘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선생님을 뵙고 느낀 바가 있어서 실례를 하였습니다.
부디 이 책을 선생님께 전하고자 하니 받아 주십시오.
”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을묘천서 사건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은 가르침을 받고자 경주 용담으로 밀려드는 제자들에게 반상과 귀천, 적서와 남여 차별 등 일체의 차별을 없애고 모두 평등한 존재, 거룩한 하늘님과 같은 존재로 대할 것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선생을 중심으로 형성된 초기공동체는 가장 이상적인 평등공동체 그 자체였다. 그 같은 정경은 선생을 ‘서학쟁이’라고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보수유생들의 눈에조차 가히 혁명적인 모습으로 비춰졌던 것 같다.
“귀천과 등위를 차별하지 않아 백정과 술장사 같은 천한 이들이 다투어 모여들고, 남녀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유박( 薄, 집회소)을 설치하여 가르침을 펴니 홀아비와 과부들과 같이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돈과 재물을 좋아하여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도우니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이 기뻐하였다(「동학배척통문」, 1863)”
동학 탄생의 사상적 배경은 어떤 것일까?
동학은 첫째, 우리의 고유사상이던 풍류도(風流道=國風)를 뿌리로 삼아 성립되었다. 풍류도는 ‘포함삼교(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을 지향한다. 모든 사상과 두루 소통하면서 뭇 생명을 다 살려내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사상인 것이다. 동학은 이 같은 풍류도를 후천 시대의 개벽적(開闢的) 상황에 맞게 재정립하여 부활시킨 것이다.
동학을 낳은 두 번째 사상적 원천은 바로 신라 천년 역사를 지탱해온 대승불교(大乘佛敎)라 하겠다. 그 가운데서도 원효(元曉, 617~686) 스님의 화쟁사상(和諍思想) 및 그 실천적 불교운동은 수운의 사상적 고뇌 및 실천과 통하는 바가 많다. 삼국 간의 정복전쟁시대, 즉 피로 날이 새고 피로 날이 지던 전쟁시대를 산 원효와 “백성들이 단 한 철도 편안한 날이 없었던” 조선 말기를 살았던 수운은 모두 암울한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새로운 사상가로 우뚝 섰다.
셋째, 동학이 나오게 된 근원에는 부친 근암(近庵) 최옥(崔 , 1762~1840)으로 이어져 내려온 퇴계학(退溪學)이라는 학문적 전통이 있다. 수운은 어렸을 때 부친을 스승삼아 유학(儒學)을 깊이 공부한 바 있는데, 부친 근암공은 경주 일대의 선비 4백여 명과 교류할 정도로 유명한 학자이자, 퇴계학을 정통으로 계승하고 있던 선비였다.
넷째, 동학 성립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사상은 바로 서학(西學)이다.
흔히들 서학을 천주교 즉 종교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오해다. 서학은 천주교만을 가리켰던 것이 아니라, 서양학문 또는 서양문명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를 비롯해 서양의 학문, 정치경제, 과학기술 등이 모두 망라돼 있는 개념이 서학인 것이다.
이 같은 서학이 동학을 창도하는데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젊은 시절의 수운은 몰래 천주교 신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과 교류한 흔적이 있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있던 다양한 서학 서적을 탐독했었다.
이처럼, 동학은 그냥 저절로 솟아난 것이 아니었다.
유불선 삼교사상을 사상적 창조의 기반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당시 가장 첨단사상이던 서학마저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조선후기 민중사상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정감록』사상도 포용해 마지아니했다.
이런 사실은 동학의 사상적 기반이 매우 깊고도 다양함을 말해 주며, 수운 선생의 학문적 축적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