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련(大連)의 해물식당
(사진 : 첫번은 대련의 개선문광장격인 8각거리 로타리, 두번째는 승리광장, 다음부터는 해물식당 겉,
그리고 일층 홀 속의 작은 수산시장 진열장.)
주말을 끼고 2박3일에 요동반도(遼東半島) 대련과 여순을 다녀왔다. 1904년 로일(露日)전쟁 격전지라 평생 한번은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서울에서 떠나는 단체여행은 골프여행 위주인데다 체재기간도 길어 내게는 맞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조사를
해보니 의외로 비행기 값이 쌌다. 왕복 20만 원 이하이고, 심지어 어느 비행사 하나는 13만원을 받고 있었다. 어, 제주도 왕복
비행기 값이네 ! 그래서 달랑 괴나리 가방 하나만 끌고 떠났다. 비행기는 뜨자마자 앉는다. 다 왔다고 한다. 히야, 이거 원,
50분 만에 오네. 이거 해외여행 맞나 ?
대련은 알고 보니 인구 5백만의 큰 도시였다. 중국 동북부(만주)에서 제일 큰 도시로, 하르빈과 함께 경제중심이기고 하다.
도심도, 교외도 길이 시원하게 뚤렸고, 차도 많다. 다만, 서울과 다른 것이 그런 차가 거의 다 중고차라는 것이다. 도시 속에
파리의 개선문 광장을 닮은 8각 방사형 도로 중심이 20여 개소나 있다 한다. 처음 칭니와(靑尼窪)라는 조그만 어항(漁港)을
19세기 말, 부동항(不凍港) 획득에 혈안이 된 러시아가 남만철도를 건설하면서 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이 곳을 조차하여 자기나라
말로 ‘멀고도 멀다’는 뜻의 달니(Dalny)라고 부친 뒤 ‘동양의 파리’를 만들 요량으로 당시로는 최신식 도시설계를 했다. 물론
구체적으로 도시계획을 실천에 옮긴 것은 그 후에 온 일본이지만 이다. 오늘날의 대련(다렌, 大連)이라는 이름은 그 뒤에 지은
것이다.
승리광장이라는 근래 만든 대광장(大廣場)은 천안문광장보다 더 넓고, 여의도광장보다도 넓었다. 무엇에 대한 승리인가
궁금하였는데, 아마도 중국 국공(國共)전쟁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다만 세련미가 아직 없다. 대련은 서울보다 더 면적이
넓은데도, 아파트들 가운데 새로 지은 것은 20층 이상의 고층이 많았다. 러시아식 건축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한국
KOTRA에서 만든 간략한 소개책자에 여기 동북부 중국인은 ‘고집이 세고, 다소 무식하고, 세련됨이 떨어지고, 문화가 떨어지고,
돈보다 명예나 권력을 쫓고, 그래서 관(官)이라면 떤다. 상술이 발달한 중국 양자강 남쪽사람들은 그래서 동북부 사람들을 우직하다고
여긴다.’고 나와 있었다.
대련에는 일본관광객이 많았다. 일본에서 들어오는 여객기가 하루에 여러 편 있었다. 일본인들은 느긋이 자기네 땅처럼 활보하고
다닌다. 시민들도 반일감정이 거의 없다. 아니, 친일감정이 확 눈에 들어온다. 길에서 길을 물으면 웬만한 사람은 일본어로
알려준다.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큰 소리로 천천히 가르쳐준다. 초등학교에서 좀 배운 일본어 실력이 일깨워진다. 일본이 그곳에서
중국과 전투를 벌인 적이 없어서, 그리고 도시를 건설하고 조용히 물러가 주어서, 다시 관광차 와서 돈을 뿌리고 가서 그렇단다.
중일합작회사도 유달리 여기가 많다한다.
큰 길거리에 한국음식점들이 여기저기에 보였다. 몇 년 전 그곳에서 한국음식점을 하던 서울남자가 생각난다. 시작한지 2년이
되었는데, 잘 되어 또 한군데에 음식점을 낸다고 하였다. 돈 없는 그곳 사람들이 어떻게 비싼 외식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중국은
식문화(食文化)가 우리하곤 달라요. 먹기를 좋아해요. 가족끼리 외식을 좋아하고, 중국식 코스요리 시키듯 여러 가지를 시킵니다.
우리 같으면 육개장 하나 시키지만, 그곳 사람은 그것 외에 빈대떡, 만두, 곰탕, 비빔밥, 숙주나물, 콩나물, 가지나물, 김치,
백반 등을 하나씩 시켜요. 그래서 서울보다 싼 값이지만 합하면 수지가 맞거든요. 교포 손님보다 그들이 더 좋습니다.” 대련에 2백
여 한국음식점이 있다 한다.
항구도시가 아닌가. 그러니 어째 해물요리를 놓질손가. 택시타고 “완바오(Wan Bao)!"하면 해물음식점에 데려다 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했다. 시내는 대개 중국돈 8원이란다. 택시 값이 1불이다. 만보(완바오)해선방(万寶海鮮舫) 간판이
아주 큰데, 5층 건물 전체가 식당이다. 아주 화려하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데, 밖에서 보니 방마다 휘황차란하게 불이
밝고, 손님들로 꽉 차 있다. 옛날에 한번 스페인 마드리드 시내 중심가에서 프라도미술관 내려가는 길 옆 고급음식점 생각이 난다.
그때는 스페인 정신분석학회가 산도 페렌치(Sandor Ferenczi) 추모학술대회를 해서 조직위원회 국제학술위원 감투를 쓰고
건들대며 참석하던 때다. 원래가 어느 공작의 저택이었던 4층의 城 건물을 개조해서 층층마다 수 백 명이 들어가는 대연회장으로 만든
곳이었는데, 이 만보해선방이 꼭 그런 모양이었다.
예약을 꼭 하고 가라고 하였지만, 전화도 걸 줄 몰라 그냥 온 것이 후회가 된다. 그래도 무조건 밀고 들어갔다. 즐비하게
늘어선 안내양들 가운데 우두머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1층 홀로 안내한다. 홀 안에 ‘자갈치 수산시장’이 있었다. 마음껏 골라
즉석요리로 먹으라는 것이다. 맛있게, 의젓하게, 실컷 먹고 마셨다. 평생 제일가는 해산물요리를 맛보았다. 그리고 관광객으로서
각오한 만큼의 출혈을 하였다.
숙소인 후라마호텔(Furama Hotel, 富麗華대반점) 7층의 방에서는 대련港이 내려다 보인다. 아, 저기로 로일전쟁 때
일본군 제2군이 상륙한 곳이구나. 당시 구로끼 가메모도(黑木爲楨)대장 휘하의 일본 제1군은 한반도 평택으로 상륙해 신의주 근처
압록강을 건너 한번 전투를 치루고 북진하였다. 그리고 오꾸 야스까다(奧保鞏)대장 휘하의 제2군이 이 대련만으로 상륙해 대련 북쪽
남산(南山)과 금주(金州) 전투에서 호된 값을 치루고 요동반도를 북진하여 요양에서 제1군을 만나 함께 요양회전(遼陽會戰)을
치렀다.
다음 날 대낮에 차를 타고 남산 언저리를 가보았는데, 산세가 평야에서 쑥 가파르게 올라가 정상공격에 꽤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을 것을 알았다. 아, 여기 이 남산전투에서 노기 마레스께(乃木希典)대장의 장남인 가쓰스께(勝典)중위가 소대장으로 싸우다가
기관총탄에 맞아 전사하였구나. 당시 일본군은 기관총과 기관포가 적었다. 그저 한 발씩 쏘는 소총이 주무기였다.
자, 시간도 많지 않은데 어서 여순(旅順)의 옛 러시아군이 난공불락을 장담하던 요새를 가 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