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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리에 이르는 길 원문보기 글쓴이: 知友
1. 진정한 자유(自由)란
명상이나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는 수행자분들에게
수행자 여러분
정말로 참 답답한게 있습니다.
그게 뭔가하면, 수행자 여러분중
줄창 남의 생각과 관념의 노예가 되어있는 분이 많다 이말입니다.
그분들이 깨달음에 대해
정의하고 쓰는 말들이나
애독하시는 글을 보면
다 그핵심요지는
결국<진리,그건 이런거라 하더라>는
남의 생각을 옮긴것들입니다.
즉, 깨달음이란 이런거다,
깨달은 사람은 이래야 한다 등등
우리들이 책에서 보거나
다른 훌륭한 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의 내용자체가 나쁘다는게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것은
내 스스로
깨달음을 누리는 진리의 주체이면서도
다 하나같이
남들이 말하고 쓴 이렇다 카더라 하는
이야기에만 얽매이고 있고 갇혀 있는게 저는 참 이해가 안갑니다.
깨달은 사람은 화를 안낸다 하더라.
깨달은 사람은 남의 책이나 글을 비판하지 않는다 하더라.
깨달음은 늘 평화와 행복속에 있어야 한다더라.
깨달은 사람은 항상 자기를 남에게 양보하는 상태라 하더라.
깨달은 사람은 달라면 다 빌려주고 떼어도 아무말을 안한다 하더라 .....등등.
그러나 위와같은 깨달음에 대한 생각들이나 깨달은자의 상태에 대한 관념과 생각들은
우리들이 지금 즉시 다 내다버려야 할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개념정의와 말들이
다 하나같이 본성에 대한 한정(限定)이며
그렇지 않은 우리들의 언행에 대한 반작용에 불과한 또하나의 제한(Limitation)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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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관련 더 추가 말한다면>
우리 교육문제가 다 그렇게
남이 이야기를 두고
맞히는 것 때문에도 그런 영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객관식 문제 그리고 주관식 문제를 보세요
남의 생각(출제자 의도를)을 맞히는 문제이지요
대체 진리란게 무엇입니까? 성경말씀처럼 그것은 지금 우리들을 모든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진리를 알고 진리가 되면
생사나 마음의 고통이나 스트레스나 무지나 미혹이나 편견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살아있는 순수한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왜 자유스러움이 지혜가 되는가?
그것은 자연적 상태로 존재하는 것들은 그대로 존재의 최고 지혜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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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들은 아직도
깨달음이란 이런거다 혹은 저런 상태다,
깨달은 자란 이런 상태에 있다
혹은 저런 경지를 유지해야 한다는
한정과 정의에 푹 빠져 있다 이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정말 무서울 정도로 오염이 되어있어요.
그러니
자기가 아는 자유,
자기가 가지고 살아온 그수준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자유란 한계안에만 갇혀 있을 뿐,
진짜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뭐고
자유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한번 진심으로 털어놓고 얘기해봅시다.
그런 나의 내면적인 판단속의 깨달음이란
정의에 대한 한정과 <이래야 한다>는 구속이 정말로 우리를 자유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입니까?
화내야 할때 화내지않고 비판해야 할때 비판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고요히 행복속에 잠겨있는게 부처입니까? 그게 저능아지 어떻게 지혜로운 부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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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박약아 시설에 가니
주변상황이 어떻든간에
무조건 가만히 웃고있는 그런 아이들이 많더군요.
사람이 가진 오욕칠정이 다 진리입니다.
진리란 제대로 쓰고 누리라고 원래부터 있는것이지 없던것을 사람이 만들어 가진게 아닙니다. 사람이 그것을 잘못쓰는게 문제지 그자체가 잘못된 게 아니다 이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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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칠정 (五慾七情) 이란?
오욕(五慾)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다섯가지 욕심.
식욕(食慾) : 먹고싶은 욕심 물욕(物慾) : 가지고 싶은 욕심 수면욕(腄眠慾) : 잠자고 싶은 욕심 명예욕(名譽慾) :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 색욕 (色慾) :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이성에 대한 욕심
칠정(七情)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일곱가지 감정.
희(喜) : 기쁨 노(怒) : 화가 남 애(哀) : 슬픔 락(樂) : 즐거움 애(愛) : 사랑 오(惡) : 미움 욕(慾) : 욕망 |
능엄경에 부처님이 하신 말씀 중에,
“내가 손가락을 누르면 해인(海印)이 빛을 발하지만,
그대가 마음을 움직이면 번뇌가 먼저 일어난다.“ 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삼계의 윤회는 음욕을 근본으로 하고
육도의 오고감은 사랑을 뿌리로 한다.“
세상사람들은 재가자건 출가자건,
도를 닦는 사람이건 안닦는 사람이건,
대개 자기의 성품을 밝히지 못한 사람으로,
모두 오욕 가눙데서 흘러가고 있다고 합니다.
불교신자도 아니면서 거창하게,
불법을 설파 하려는 것은 아니고,
오욕칠정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아니면 얼마나 얽매여 있는지 궁굼해서
인용해 보았습니다.
오욕으로부터 칠정이 생기고,
칠정은 다시 오욕을 붙들어 맨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살이가 이 토록 많은 것에 얽매여져
살아 지는 삶이지요.
부억칼을
사람해치는데 쓴다고
칼이란 다 나쁜거라 싸잡아 말할수 있습니까?
화내야 할때
화내지못하면 저능아고
비판해야 할때
똑바로 비판하지 못하면
올바른 진리를 가르킬수가 없습니다.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우리자신을 자각하는게 깨달음입니다. 깨달은 자가 누구입니까? 모든것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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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들은 아직도 깨달음이란
이래야 한다는 남들의 체험이나 정의에 얽매여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우리들 체험속에 이렇고 저렇고 그런 상태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이 만든게 진리입니까?
이쪽이 나쁘다하니 저쪽으로 가서 있는게
<그게 아니다>하며 치우쳐 있는게 진리입니까?
누차말씀드렸듯이
진리는 바로 우리란 주체 즉, 우리들의 <나>입니다.
그것이
모든것을 누릴수 있고
모든것을 다 가지고 있으며,
모든것을 존재하게 하며
그래서 모든것이
인식의 차원속에 나오고 들어가게 하는 문이며
모든것을 의미짓고 규정하는 관점입니다.
그런데 대다수 우리들은
아직도 스스로 진리임에도
자기가 가진것을 자유스럽게 쓰지못하고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에 매여
오히려 그런 죽은 지식으로
남을 평가하고 저울질하며 비판하면서
스스로 자신
즉 살아있는 부처를 옭아매고
그어떤 관념과 생각안에 계속하여 가두고 있습니다.
너무나 한심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두려워 그렇게 자기가 배워가진것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합니까?
자연스럽게 화날때 화내세요.
그러나 그화낸 감정은 솔직하더라도
그감정의 후폭풍(누구를 계속 상대개체로서 미워함) 에만 빠지지 마세요.
화날때 화 안내려 하고
고통스러울때 그 고통을 억누르려 하니
어떻게 그렇게
자기모순되는 가장최악의 자학(스스로 괴롭힘)을 할수가 있습니까?
그게 바로
속병이되는겁니다.
오히려 화낼때 화는 내더라도
그화를 내는 나를 끝까지 지켜보세요.
그러면 그화는 금방 사라집니다.
그리고 다음번엔 똑같은 상황에서
보다 더 자신의 내면에 대해 깨어있게 됩니다.
부처가 다똑같이 하나도 안틀리는 판에박힌 성격을 가졌습니까?
그렇게 부자연스럽고 붕어빵처럼 다똑같은 거라면 전 부처되기 싫습니다.
내가 가장 나답고 그러면서도 내방식으로 우주를 장엄할때 그게 바로 살아있는 부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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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가르침이나
남의 언행을 존중은 하지만
그것에 올인(All-in) 하지않는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살아있는 하나의 실체로서
성부 성자 성령의 힘이 (법보화신의 부처님이)
오묘하게 조화되어 나타난 나자신을 바라보세요.
전체가 개체로서 나타난 이상
그개체의 오욕칠정을 부인하지 마세요.
다만 그것이 개체관점일뿐
전체관점측면에서는 허상임을 알고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사람입니다.
자기가 가진것을 다누리며
그것에 빠지거나 매이지 않으니까요.
이제는 우리가 진리에 대해 가진 가짐들을 좀 버려봅시다.
그리고 우리들 있는 그대로를 풍요롭게 살아봅시다.
넘치는 생동감으로
울고 웃고 화내고 풀고 뛰고 싸우고 합시다.
그리곤 깔깔대며 웃어봅시다.
절대로 모든것을 다가진 <나>, 바로 내자신을
뭐가 다 사라진 자리라느니,
일체가 다끊어져서 공하다느니 하면서 진리를 어떻다고
단 하나의 상태로 한정하거나
어떤 체험만을 깨달음이다라고 박제화하지 맙시다.
지금 그체험을 누리고 있는 존재가 바로 누구입니까?
그깨달음의 상태조차도 만들고 있는 장본인이 바로 누구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변할때,바로 그럴때
진정 우리들은 아주 깊게 삶이란 존재의 참맛과 행복을 누릴것입니다.
여태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체험속의 일상적인 행복은
우리들이 진짜 누릴수 있는 <존재그자체의 기쁨>에서 본다면
아주 미미한것이며 극히 일시적인 것으로서 상상으로 만들어진
인공조미료같은 가장되고 꾸며진 행복에 불과합니다.
그건 진짜 행복이 아닙니다.
울고싶으면 실컷 울때 사람은 행복한거고,
화내고 싶을때 화산처럼 화내보는게 바로 존재의 진정한 참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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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바닥까지 그래보면
그다음엔 존재한다는 이놀라운 사실에 대해
오직 경탄이 터져나올 따름입니다.
맨날 오직 한가지 담백한 것만 골라먹는 사람보단
가끔 맵고 짜고 얼큰한 것도 먹어보는 사람이
맛의 세계를 더잘 이해하는 겁니다.
그러니 진짜로 자기답게 살아보세요.
자기의 타고난 영역과 능력을 넓혀가며
이삶이란 경이로움 속에서 번쩍 눈을뜨고 최선을 다해보세요.
열심히 열렬히 살아보세요.
그러면 우리들이 상상으로 만들고 느끼던 <깨달음의 상태란 이럴꺼야>하는
그런 상상속의 행복보다도 더큰 진짜 리얼하고도
새로운 맛의 행복이 나에게 나타날것입니다.
남이 이래라하니까 거기에만 얽매인 사람 되지 마세요.
사실은 우리들이 누리는 그어떤 행복이나 불행도 다 우리들이 창조한 것입니다.
창조엔 한계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과거에 자기가 체험한것중 가장 좋은 느낌과 편안함이
바로 깨달음의 상태라고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과거에 사로잡혀
현재에 깨어나지 못한 죄(무명,원죄)가 있는겁니다.
존재속에 잠재해 있는 무한한 능력을 스스로 관념과 생각속에 가두고
그기준으로 남을 평가하며 그기준으로 자기의 진짜 삶도 가로막지요.
살아움직이는 감정과 느낌,
이놀라운 존재의 움직임을 한가지 척도로 재고 잘라서 무엇을 만들려고 하십니까?
심장이 터질거 같은 기쁨을 창조해 보세요.
화산이 폭발할거 같은 분노를 표출해 보세요.
자연은 이미 그렇잖아요?
그렇게 따뜻한 햇살을 주면서도 무서운 폭풍도 가져옵니다.
그러나 다만 그럴뿐이에요.
우리도 진정 무엇에 매이지말고 진짜 자유로이 자신을 살아봅시다.
내가 가진것을 한껏 발휘하고 다 소진합시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눈을 감을때
<이제 인간으로는 더살아볼 필요가 없어! 이제 만족해!>라고
스스로에게 확고하게 말할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를 깨우는 명상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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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유의 뜻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도덕윤리의 충돌을 생각한다.
즉 자유롭게 행동하자니
도덕 윤리에 걸리고
도덕윤리를 따르자니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고 심각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자체가
바로 <자유>를 오해하는데서 생겨난 것이다.
자유(自由)란 무엇인가? 그것을 한자글 그대로 풀이해보면 <스스로(自) 유래함(由)>이다. 즉 자유란 본래의 참뜻이 <제멋대로 한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유래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유래한다함은 그어떤 도그마나 법이나 가르침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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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결정함.
아시다시피 모든 결정에는
깊던 얕던간에 사유(思喩)함이 전제되며
다시 모든 사유에는
그일이나 대상을 바라다보는 관점이 전제된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행동이란
곧 모든것을 바라다보는 <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어떤 관점인가?
곧 내가 나를 무엇이라고 여기며
동시에 너와 상대를 무엇이라고 보느냐의 관점이다.
이관점에 따라 모든것이 다 달리 보인다.
이러한 관점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다르는 모든 인과나 결과를
스스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곧 자유(스스로 유래)함이다.
나는 지난날 많은 수행단체들을 체험하면서
자칭 깨달았다거나 열렸다는 사람들이
자유를 방종으로 알거나
혹은 자기를 구속한 모든 존재들에 대한
복수나 한풀이로 삼는 것을 종종 목격해왔다.
그래서 사회질서나 약속
혹은 가정이 파괴되며 이혼을 쉽게 생각하거나
혹은 자기단체를 떠났다고 없는 말을 만들어 비방하거나 협박하는등의
몰상식한 일들이 진리나 자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을 보아왔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란 <스스로 유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석가여래(如來)의 특성이 되는 것이며
깨닫고 구원받은 자의 자질이 되는 것이다.
예수도
<진리가 너희를 (천당으로 보내준다는게 아니라) 자유케 하리라>하였다.
스스로 유래한다함은 자기가 가진 관점이
무엇을 창조하고 선택하는가에 대하여 깊이 깨어있는 능력을 가진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 생각이나 감정이나 느낌이나 관계등에 휘둘려 끌려다니고 흔들리지
결코 일체의 그런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유래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무엇을 유래하는가?
자기와 자기주변의 환경을 어떻게 창조하고 선택하느냐
바로 그것의 주도적 결정권자요, 창조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주는 스스로 유래한다.
하느님도 스스로 유래한다.
석가여래도 스스로 유래한다.
오직 당신만이 스스로 유래하지 못하며
오늘도 자기가 배우거나 받아들인 것이나
집착하는것에 자기의 주인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지금 이순간 ,
그대는 모든것으로부터 자유스럽게 자기를 창조하고 있는가?
그대가 가진것이나 느낀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대스스로가 내리는 결정과 선택권에 의해서?
우리는 이삶속에서
수많은 염려와 두려움과 미혹속에서 스스로 자유스럽지 못하다.
하지만 옳바른 진리탐구와 수행이란
삶의 매순간속에서 바로 이러한 <나>를 직시하고
<만들어지는 나>로부터 <만드는 나>로서 거듭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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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방종의 차이
얼마전에 어떤 분이 아는 분을 통해
저를 갑자기 찾아와서는 깨달음에 대한 얘기를 펼쳤습니다.
처음엔 겸손하게 배우러 오셨다지만 대화를 해보니까
사실은 그분이 아시는 것을 주장하시거나
한술더 떠 저를 테스트하고 가르쳐주러 오신듯 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의 요지는
대충 간추리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1) 나는 깨달은게 아니라 깨달음이란
정신적인 물건으로부터 자유스러워졌다.
이것이 나의 깨달음이다.
2) 깨달음이란 것도 우리가 만든 생각이니
그생각과 욕망조차도 내가 만든줄만 안다면
그로부터 자유로와져 깨달으려고
수행이나 강좌니 그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3) 도란 한마디로 하면
잘먹고 잘놀며 잘살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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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답변을 그분이 듣고
어떻게 생각하시며 돌아가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
여기에 제견해를 좀 쓸까합니다.
실질적인 마음공부는 전혀 안하면서
이런 비슷한 생각으로 자기를 무장한채
(본인은 자기가 생각으로부터 자유롭다 말씀하지만
사실은 생각에 사로잡지 않는다는 생각을 다시 붙잡고 있는 것이다)
여기저기 언쟁하며 다니는 사람을
전에도 제가 본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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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1)번에 대해 살펴본다면 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이분 말대로 깨달음이란게
<깨달음>이란
정신적인 생각으로부터 자유스러워 지는 것이라면
치매환자나 저능아도 다 깨달은 존재가 되는거지요.
또 기독교인들도
깨달음엔 관심이 없으시니 다 깨달은 겁니다.
당연히 말이 안되지요?
진리란 보편타당한것이기에
그누구에게나 다 적용해도 말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깨달음이란 생각에 대해
관심이 없단 말은
아직 관심이 있단 말입니다.
<난 돈에 대해 관심이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은 그의 잠재의식엔
돈에 대해 여전히
지금도 붙들고 있는 마음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돈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은
돈 얘기를 안하고
그시간에 전혀 다른 얘길 합니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이런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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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말(깨달으려 고생할 필요가 없다)의 문제는
아직 이분이 사람의 마음과 인식의 작동구조를 잘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크게 키우려면
젊었을때부터 고생을 시키란 옛말도 있지요.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고통을 통해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위대한 성인들이나 위인들을 보세요.
고생안한 사람들이 있나요?
삶속에서 어려움이 오지 않을순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바라다보는 관점과 그에 대한 대처방법이지요.
따라서
어둠이 없이는 빛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를 모르듯이
고생없이는 정신적인 성장이 있을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입니다.
짐승들도 고생을 안하는게 아닙니다.
그들도 살아남기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문제는 그들은 그고통을 그냥 당할뿐
그것을 통해 깨어나고 성장할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결코
짐승이나 식물처럼 하향화하여 같아지는게 아닙니다.
그들의 일상적인 존재방식이
완전하게 존재할 것이란 생각은
우리들의 망상입니다.
깨달음은
마음의 고통이란 파동과
긴 정신적 집중이란 삼매적 상태
즉 큰 파동과 진폭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저는 단지
지나치게 과한 고생은 불필요하단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애시당초
인간의 마음이나 인식구조자체가 파동속에 존재하므로
이것(상대성)없이는 저것(절대성)이 창조되거나 인식되질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오랜 인내와 집중이란 고통없이는 아무것도 얻을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전혀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가 말하는 깨달음이란게
단지 한 생각의 전환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한생각의 전환,
즉 이생각에서 저생각으로 전환하는게 깨달음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생각이 전차원의 총체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것이지
생각속에서 생각에 의해
요리되어지고 전달하는 개념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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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에 대해 살펴보면
먼저 <잘(well)>이란게 무엇이냐부터 숙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나쁜것,부족한 것>의 반대가 되는
<잘>이란 것자체가 이미 상대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잘먹고 잘놀기>위해서 먼저
<잘>을 분별하려면 이미 시비분별속에 떨어집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돈도 꽤 필요하구요. 진리란 상식이니까요.
그러나 돈이 꽤 많이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라 성공학이나 처세술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깨닫거나 열린 사람에게는 <잘>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리 못먹고 못놀아도 설사 굶는한이 있고
육체가 꼼짝달싹을 못해도
스스로 이미 그존재 자체가 <잘(well)>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말로 그어디 어떤 환경에 있거나 상황속에 있어도
스스로 웰빙(well-being)>인 셈이지요.
그러므로 이런 육체를 중심으로 한
상대성에 붙잡힌 말자체가 도대체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이러한 주장들이
진리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란 것이 입증된 셈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생각들을
왜 진리라고 주장하거나 들고 다니는가?
그것은
이분이 진리와 나를 어떻게 다룰것이냐는
마음놀이(심리학)을 혼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마음의 능력(일체유심조)을 알고
그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다양하게 다루면서
그것의 흔들림없는 주인이 되는 것이지
마음의 능력이 펼친 마당속에서
이편이 힘드니 쉬운 저편으로 가자는 게 해답이 아닙니다.
자연법속에서도 가지치기의 아픔이 없는 포두나무열매는 시원찮기 마련입니다.
또하나 주의해야 할점은
생각은 우리가 무조건 무시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각에 의지해
진리를 탐구하고 때로는 생각을 초월해 넘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한개인 생각에 힘을 불어넣어
그생각을 모든 이들에게 전달하고
그생긱이 모든 이들속에서 공통된 정신력으로 공명되어 결집되면
마침내 아주 큰일을 하게도 합니다.
이것은 곧 내가 <말씀>그자체가 되는 도리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기위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를 말합니다.
현란한 말재주로 사람들을 잠시 현혹시킬수는 있어도
그것은 단지 혜(慧)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말재주나 생각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힘입니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서는
우리는 이런저런 생각에 의지하여
일부러 이러저런 분별과 생각을 창조하기도 하며
그생각이 안내하는 대로 자기를 수행하고 인내하기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선정집중력 즉
바로 정(定)을 키우는 것입니다.
저는 이분의 말씀을 들으며
<자유와 방종의 차이>에 대해 생각을 했습니다.
자유와 방종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자유와 방종은 둘다 스스로(自)로부터 우러나오는(由) 힘이지만
자유는
내가 과거 나라고 여겼던 그것(나)로부터조차도 벗어나는 것인데 반해
방종은
그것(그본질은 대체로 욕망과 감정이다)을 위해
제멋대로 이기적으로 굴면서도 그것을 (나의)자유라고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남에게 이유없이 폭행을 하거나 막말을 했다고 합시다.
혹은 위압을 쓰거나
사기를 쳐서 남의 돈을 공짜로 가지고 비싼 차를 구입했다고 합시다.
그이유를 물어보니
그냥 제식대로 <잘먹고 잘놀고> 싶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수행이란
그런 내면을 직시하고 왜그런 감정이나 욕망이 일어날까를 보는 것이지
그것은 도외시한채 왜 넌 일체유심조인데
잘먹고 잘놀지 못하고 내가 요구한 것에 걸리냐고
상대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운다면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은 사실은 방종이지 자유가 아닙니다.
즉 자유란
반드시 그것을 누리는 주체가 우리모두에 관계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탐구란
<나는 누구인가?>를 항상 자각하여
자기의 의식과 마음의 크기를
우주만큼 확장하고 부처만큼 성숙하게하여
너를 나속에 포용하는 것이지
그런 자기성찰없이
지금 정신적인 작은 <나>수준에서 머무르면서
또다른 생각으로 자기합리화에 열중하는게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우리모두가 더불어 좋은 관계를 창조하고
더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기위해서
필요한 제가 창조한 생각중에
아주 건전하고 바람직한 분별이라고 저는 다시또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각자를 위한
개인적으로 자기 편한 도만을 구한다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깨달음이 없습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나하나의 개체성을 넘어서서
우리인류전체를 더큰 <나>로 보는
즉 <우리와 우리속의 나란 무엇인가?>에까지 닿아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단지<나>라고만 여기고 끝날게 아니라
이<나>라는 지칭대명사속에
과연 그어떤 것들이 들어있고
무엇이 나올수 있는가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야만 할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이런저런 가르침과 이론들도 만들어서 쓸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에 걸림만 없다면
수행에 도움도 되니 아주 지혜롭지요.....
물론 이역시 제<생각>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생각속에 <나>를
더 크고 더 성숙하게 성장시키고
우주적 존재로서의 나를 재발견하게 하는
보다 더 큰 비밀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의 일부분인 내생각을 통하여서도
다시 더크게 깨어날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와 생각은
주인과 하인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주인이 하인에게 휘둘려도 안되지만
하인과 힘을 합하거나 혹은 하인이 열심히
무언가를 하게 만들줄을 아직 모른다면 그역시 무능하고 못난 주인입니다.
생각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아닌
때로는 생각으로하여금 무언가를 찾고 험한 곳을 탐구하게 하여
마침내 주인을 이롭게 하는 지혜까지도 말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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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란 몇천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두려운 것이다.
- 옳은 것을 위해서
가장 익숙한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
-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내면으로부터 신뢰를 갖고 행동해야 한다.
- 하루 아침에 약속된 땅에 다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그러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은 이 일을 다른 이에게 맡겨두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누구라도 자유를 위해 나아가려고 할때 하느님이 손수 함께 계신다.
- 성서에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랜 세대에 걸쳐 세이더의 예식안에서
먼저 이야기를 통해 영혼의 목을 축였다. 그다음 닭고기 수프를 먹었다.
seder[séidər] 뜻 : 유대인의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여 Passover의 밤에 행하는 축제 2) 유월절 밤 축제
- 우리 가운데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 돈 명예 권력, 성, 칭찬, 젊음 등등
무엇이든 우리가 거기에 애착을 둔다면 그것이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
-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들을 주인으로 섬긴다.
-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많은 것들이
우리가 진정 삶을 풍요롭게 누리기 깊이잇게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 그렇게 되면 불필요한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 약속된 땅은 많은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것일 수 있다.
- 어떤사람에게는 굶주림이나 두려움에서 빠져나와 누리는 자유일수 있고
어떤사람에게는 건강일수도 있고, 어떤사람에게는 차별이나 불의로부터 해방일 수도 있다.
- 그러나 깊은차원에서는 우리모두에게 같은것일 것이다.
- 바로 내면안에 있는 선을 따라 살고 서로를 검기고 사랑을 나누며 사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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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선을 따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우리내면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속박임을 알아야 한다.
- 우리는 자신에 대한 존중이 없는 상태, 또는 탐욕이나 무지 등의 무가치한 관념들의 덫에
사로잡힐수 있다.
- 그렇게 될때 우리는 희생이나 권리 주장등의 이름으로 노예가 된다.
- 이 이야기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이다.
- 어떤 것을 우리의 손에서 놓는 순간
우리는 미지의 것과 마주쳐야 한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초라하게 만들고
아품을 주는 장소나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다.
- 할아버지기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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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유의지와 자유의식 그리고 깨달음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의지란 것을
<자유의식>이라고 말을 좀 바꿔보면
(사실 자유의지는 자유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니)
불교나 명상의 깨달음과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눈이 열린 사람은
<자유의지(자유의식)>란 이말만 듣고도
바로 그비밀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지
한번 그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여러분은 깨달음을 얻는다는게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가장 크고
가장 깊으며
가장 높고
가장 영원하며
최고로 행복하고 평화스러운 것에 대한 체험을 통해
그것을 만들어 내는 주체인 자신을 새롭게 자각하는것입니다.
그것은 의식의
우주적(초월적)확장 을
통한 깨달음입니다.
여러분, 깨달음은 이처럼
체험을 통해 다가오지만
그러나 체험 그자체인 것은 아닙니다.
한때의 체험은
제아무리 대단한 것이라할지라도
모두 그냥 그렇게 흘러가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겪은 모든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모든 체험을 있게하는 그대란 바탕,
즉 <존재현상>만은 체험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깨달음을 무슨 체험이나
내면의 객관적 어떤 대상
(예컨대 하얗게,끊어진자리나 무변허공의 큰자리등등)을 발견하고
또 그것을 계속 유지하는것으로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을
헛 수고속에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유의지라면
무엇도 다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도 다 될수 있다면 스스로는 완전히 비어있어
그무엇도 아니어야만 합니다.
(심지어는 空도 아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끊어진 자리>입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어떤 대상도 될수없고
그어떤 정의도 할수 없지만
그러나
모든것이 다 될수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 그자체,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존재 그자체입니다..
이게 뭐 어렵습니까 ?
그대안을 한번 들여다 보세요.
거기에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다구요?
조금만더 정밀하게 살펴보세요.
그러면 거기에 무엇이 있나요?
그렇지요!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과 느낌만이 있을뿐이지
실제로는 거기엔
모든것의 배경이자
무한한 가능성 그자체가 들어있으니
그것이 <끊어진 자리>다 이말입니다.
더쉽게 말하면
자유의지란
바로 그대 그자체란 말입니다.
모든 체험과 감각과 느낌을 있게하는 그대가
끊어진 자리다란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감각,체험,존재감까지도
그<끊어진 자리>가 있기에 나오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까지도 만들고 있게하는
그 신묘한 창조능력이 그대안에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능력속에서
그것이 만든피조물들을 지금 이처럼
(모든 선과 악,좋은것과 나쁜것,도덕,윤리,
자연법칙,물질법칙,생각의 힘,상상력등등을)
모든 것을 체험해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죽으면 그대는 이몸을 떠나
하나의 <보는자>로서 존재할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관점>일뿐입니다.
깨달음이란
하나의 관점에 매이는게 아니고
무한한 관점에 대해 열리고
그모든 관점들을 스스로 다 갖는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스스로 우주의 문(Gate) 이되고
모든 관점이 나타났다가 돌아가는
<총관점>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상념에너지(윤회하는 힘)는
그배경위에서 춤을 춥니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
그것에 따라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모든 관점이자 그것조차 넘어서 있는
하나의 <바탕차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자기>가 없습니다.
다만 늘 모든것인 자신이라는 자각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자각에만 적멸속에서 머무르는게 아니라
(그러면 무정도에 빠진다)
그자각속에서 다시 창조를 하고 그창조를 체험하며 순환하되
그안에 있지않고 다만 그런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정도이며 현우주의 존재방식이다).
즉 (1)자각 (2)창조 (3)체험의 과정속에서
다시 한바퀴돌아 또 (1)자각으로 돌아가는것입니다.
우린 이미 태고적 차원부터
이런 흐름속에 있었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神(하느님,부처님)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첫단계로서의
자신의 능력(자각하는 힘)을 깜빡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법신불을 깨달으면
(마음수련식으론 우주를 보고 우주가 되면)
자기안에 일정한 내적공간이랄까 고요한 차원이 생겨서
그것이 온세상의 이면에서
세상을 삼킨채
침묵과 평화의 힘을 발휘하게되는 현상을 체험합니다.
이차원은 우리에겐
사실 <있는 그대로>우리본래모습의 현상이고 느낌이지만
이것이 업습속에 젖어사는 일반인들에게 활짝 열릴려면
그업습속에서 <있는그대로>흉내를 낸다고 해서 열리기는 어렵습니다.
(업습이 가만 놔둔다고 사라지는건 아니거든요)
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맹렬하게 물위로 솟아오르려는 몸짓을 하듯이
내적으로 업습에서 벗어나려는 자각력집중(혹은 죽이고 버럼)이란
선정의 힘을 키워야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야
그문이 열립니다.
이미 되어있는 사람에겐
진짜 <있는 그대로>이지만
아닌 사람에겐
<있는 그대로>가 아닌것입니다.
그는 거기 그업습의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시이소오의 중앙점은
크기도 영역도 모습도 힘도 없습니다.
다만 존재하고 <있을뿐>입니다.
그것없이는 좌우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며
힘의 균형을 맞출수가 없으니까요.
그처럼
자유의지는 크기도 모습도 영역도 힘도 없습니다.
아무런 흔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있기에 우
리는 이런저런 창조와 체험을 다해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자리에 대한 <자각>만이 필요합니다.
생각도 멈추고
<있는 그대로>있겠다는 의지나 생각도 놓아버리세요.
생각과 그것이 만드는 습성에서 벗어날려면
그안에 들어앉아<있는 그대로>를 외치면 아니됩니다.
진리를 찾지말고
그찾는 자의 모든 활동을 쉬십시오.
쉰다는 생각조차도 쉬십시오.
그리고 다만 그이후를 자각하십시오.
좌우에 탄사람의 무게나 위치,
빠르기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시이소오의 무게중심점을
잡으려들거나 점찍으려든다면 그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것을 그대내면에서 잡으려들거나 점찍으려들지 마십시오.
다만 그렇게 하려는 그대 자신을 알고 이해하고 자각함으로서
그대는 스스로 자기가 만든 허상들을 넘어설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시이소오 전체를 봄으로서
그중심점이 있음을 알게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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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유에 이르는 길
개인으로든 사회로서든 우리가 대하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깨달은 정도만큼 자유롭다고 합니다.
자유라는 용어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내용만의 아니라 내용을 넘어선 그 어떤 맥락도 필요한데
그 맥락은 누구를 위한 어떤 조건에서에서의 자유인가이다.
조사를 통해
상대적 정도를 갖는 자유의 전 범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자유란 용어는 다시 의식의 측정수준을 가리키고
그와 더불어 실재하며 지각되는
내면의 주관적 경험 대 외적 조건들 간의 차이를
가리킨다는 것이 발견되면서 문제는 해결된다.
진실로
자유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이지
단지 그에대해 생각하거나 가설을 세우는 것 아니다.
운용상으로는
만인은 자신의 자유롭다고 믿고
그러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사전적 의미에서 자유정의는
해방과 독립의 상태, 편안함, 방식, 특권적 자결적 속박에서 자유로운,
국민에게 행복추구의 자유, 언론 신앙 궁핍 두려움으로 부터 자유 들수 있다.
우리는 자유가
바람직스러운 가치의 측면에서 정의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부터의 자유라는 걸 안다.
이렇듯 자유는
인간의 원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 대
원치 않는것 과 박탈을 반영하는 말로 정의된다.
따라서 정의된 바와 같이
자유란 순수히 주관적인 현상이고
욕구와 욕구의 충족 정도 간의 경계면을 반영하며
따라서 경험함의 상대적 상태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결국
원하는 것이나 혐오함이 없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시간동안 내적 자유를 느낄 것이고
혐오하는 것, 좋은 것과 싫은 것 욕구가 많은 이들은
풍요로운 환경에 있더라도 좀처럼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 작성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