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양동마을로 1... (운흥사에서)
조선 선조 때 명종의 서형(庶兄)인 덕양군(德陽君)... 그의 장인(丈人)인 권찬(權纘)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외손자 풍산정(蘴山正) 종린이 태어났을 때부터 데려다 양육하고 사후의 제사(外孫奉祀)까지 기탁하였다. 종린 역시 외조부 권찬의 뜻을 따라 수양자(收養者)로서 참최(斬衰, 마르지 않은 상복)의 상복을 입기를 원했다. 하지만 예법에 맞지 않아 결정하기 어렵다면서 왕에게 의뢰하였으니 바로 종린사안(宗麟事案)이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외손이 후사가 되는 일은 예론에 없으며, 자기 아버지를 버리고 외할아버지의 성을 따라 斬衰의 상복을 입는 것은 인륜의 큰 줄기를 혼란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조상의 제사를 계승하는 계사(繼嗣)는 적장자(嫡長者), 적손(嫡孫), 차자(次子) 이하의 아들이나 직계손자 순으로 되어 있다 이들 중 아무도 없을 때 여손(女孫)에게 재산을 상속하고 사후봉사를 의뢰하는 것을 외손봉사라 한다. 17세기 후반부터 적장자의 우위 상속(相續)과 봉사(奉祀)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하나의 관습으로 처가 쪽으로 옮겨가서 한마을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이성동족부락(二姓同族部落)에서 두 입향조들이 외손간이거나 한 입향조의 처향(妻鄕)으로 그 대표적인 곳이 경주의 양동마을이다.
월성 손씨(月城 孫氏)와 여강 이씨(驪江 李氏)의 두 가문에 의해 형성된 유서 깊은 양동마을... 15세기 중반 조선시대 문신 손소(孫昭)가 양동으로 이주하고, 이번(李蕃)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를 ‘외손마을'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조선중기 문신인 손중돈(孫仲暾)과 사후 동방5현의 한 분으로 문묘에 배향된 성리학자 이언적(李彦迪)이다. 지형이 ‘말 물(勿)’자를 거꾸로 놓은 형상으로 양 가문은 각각 서로 다른 골짜기에 자신들의 종가와 서당, 정자 건물을 두고 있다.
이 양동마을을 2월 24일 한화관광을 따라 떠났다. 대전IC를 떠난 여행길...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경주IC로 나간다. 가는 길에 차 안에서 흐르는 노래... 혜은이의 ‘감수광’이다. ‘바람 부는 제주에는 돌도 많지만/ 인정 많고 마음씨 고운 아가씨도 많지요/ 감수광 감수광 나어떡할렝/ 감수광 설릉사랑/ 보낸시엥 가거들랑 혼조옵서예...’인 이 노래는 가사 내용이 잡동사니처럼 들리지만 방언만큼 순직한 노래는 없다. ‘가십니까?’의 감수광에 이어 ‘나는 어떡하라고 가십니까? 서러운 사람이 보내드리오니 가거들랑 바삐 오세요.’란 뜻이란다.
경주 양동마을로 2... (남산에서)
경주IC를 나간 여행길... 남산으로 가는 길에 벚나무가 가로수다. 쌍떡잎식물로 장미과에 속한 이 나무는 원산지가 우리나라로 일본과 중국에 분포하고 있다. 전국 곳곳의 산지(山地)에서 서식하고 있음은 관광지에 계획적으로 식목하고 있다. 일본 국화(國花)라는 이유로 국민들의 정서에 반하고 있지만 700의총처럼 일본에 감정이 서린 곳이 아니면 무방하지 않을까? 이는 진달래가 북한의 國花라는 이유로 모두 제거시켜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민간에서는 벚나무의 내피(內皮)를 기침약, 소양증(搔痒症) 등에 효과가 있단다.
남산으로 가는 길에 오릉(五陵)을 지난다. 신라 시조 혁거세왕이 돌아간 후 하늘로 올라가고, 7일 후에 그 몸뚱이가 5개로 나누어 땅에 흩어져 떨어졌단다. 한데 모아 장사를 지내려 하였지만 뱀이 방해하여 다섯 개의 능(陵)으로 각각 장사를 지냈단다. 다른 설은 5개의 왕릉이라고도 한다.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날아가고 육신(魄)만 남는다고 한다. 공양을 받지 않았거나, 이 세상에 미련이 남은 사자(死者)일 경우, 혼과 백은 귀(鬼)가 되어 이승에 악령으로 나타나 해(害)를 끼친다고 믿는다.. 귀(鬼)는 ‘돌아온 자’라는 귀(歸)와 같단다.
더 내려가면 포석정(鮑石亭)... 통일신라시대의 정원인데 돌로 수로(水路)를 굴곡(屈曲)지게 만들어 물이 흐르게 하였단다. 귀족들이 물줄기의 둘레에 앉아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화려한 연회를 벌였던 곳이다. 경애왕(景哀王)이 연회(宴會)를 벌이던 중 뜻하지 않은 후백제군의 습격을 받고 최후를 마쳤다고 전한다. 역사는 의자왕도 비슷하게 기록된 것을 볼 때 혼란스러운 시대에도 宴會가 가능할까? 역사는 승자(勝者)위주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한편 鮑는 전복을 뜻하고 돌(石)이 있으니 전복 껍질의 모양이란다.
남산에 도착한다. 이곳의 삼릉(三稜)...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의 능으로 추정한다. 사시사철 시원한 계곡물이 끊이지 않아 냉골이라 부른다. 봄이면 소나무 사이로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 등산길을 즐겁게 해준다. 이곳에 목이 잘린 채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는 불상(佛像)... 신라의 패망(敗亡)을 느끼게 한다. 먼저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놓고,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놓고 앉는 結跏趺坐... 사찰(寺刹)에서 승려나 수행인이 선종(禪宗)에서 참선(參禪)할 때 앉는 자세란다. 이곳의 금오산(金鰲山)... 금 거북이가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편하게 앉아 있는 형상이란다.
경주 양동마을로 3... (첨성대에서)
일부 회원은 금오산에 오르고 나와 일부는 천마총(天馬冢)으로 갔다. 가는 길에 27대 선덕여왕릉이 있다. 26대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 진평왕은 아들이 없었으며 부모가 성골(聖骨)출신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규정에 따라 보위(寶位)에 올랐다. 선덕여왕의 후임인 진덕여왕까지만 聖骨이고 이어 왕에 오른 29대 무열왕부터 진골(眞骨)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聖骨은 부모 모두 왕족이며 眞骨은 한쪽만 왕족이란다. 선덕여왕은 당숙(堂叔)인 용춘 형제와 세 번의 결혼을 하였지만 자손이 없었으니 남편 복(福)은 없었다. 당시는 왕족(王族) 간에도 근친(近親)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聖骨이 있었을 것이다.
선덕여왕 릉(陵) 옆에 신문왕릉이 있다. 문무왕의 맏아들인 신문왕은 강력한 전제왕권을 확립하였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룩하였지만 통일의 공신들이 왕실과 충돌이 심하였다.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는 동지지만, 정치적 경쟁자가 될 경우에는 칼로 제거해야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바로 해방 후 북한 정권처럼 피의 숙청과 비슷하다. 신문왕 역시 왕비를 폐위(廢位)하고 자신의 장인(丈人)인 김흠돌(金欽突) 등을 죽였다. 바로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첨성대(瞻星臺)에 도착한다. 역법(曆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줄이기 위하여 해와 달 등 별들의 운행을 측정하였을 것이다. 또한 미신적으로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해 점성학이 발달하였으니 점성대(占星臺)로 불러도 맞다. 백제와 고구려에 첨성대의 기록은 없다. 그 후 고려시대에는 강화도 마니산(摩尼山)의 참성단(塹星壇), 개성만월대(滿月臺) 등에 첨성대라고 구전(口傳)되는 석조물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의 세종은 장영실(蔣英實) 등이 만든 간의(簡儀, 관측기) 등 천문기기를 10여종을 활용하였단다.
첨성대를 돌아본 후 대릉원으로... 우거진 소나무 숲 사이로 오솔길이 펼쳐진다. 흙으로 쌓인 30여기의 무덤이 있는데 전(傳) 미추왕(味鄒王)릉, 천마총(天馬冢), 황남대총(皇南大塚)이 있다. 제 13대 왕인 味鄒王... 김알지의 후손으로 김씨 왕 38명 중 최초의 김씨 왕이다. 한편 박씨는 10명, 석씨는 8명의 왕위를 배출하였다. 금관을 비롯한 만 여 점의 유물이 출토된 天馬冢...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 그림이 그려진 말다래(障泥,배 가리개)가 발견되어 붙여졌다. 황남동에 소재한 신라 최대의 고분이라는 황남대총... 장신구 등이 발굴되었다.
경주 양동마을로 4... (양동마을에서)
운전기사의 소개로 이풍녀 구로 쌈밥(749-0600)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30여 가지의 반찬으로 이루어진 백반... 12,000원인 값에 비하여 반찬이 진수성찬(珍羞盛饌)이다. 하나 하나 맛을 보니 고량진미(膏粱珍味)다. 객지에 나가면 먹을거리가 문제다. 모범음식점이나 착한 가격 식당을 찾기도 쉽지 않으면 기사식당에 가면 편리하다. 오늘 남산 근처에 능이버섯 오리요리, 해물파전, 떡갈비, 만두 등이 곳곳에 걸려 있다. 특히 이곳의 경주 빵... 앙금이 가득하고 입에 넣으니 사르르 녹는다. 또한 찰보리 빵도 있단다.
금오산 등산 팀과 합류하여 다음 여정인 양동마을로... 입구에 세계 문화유산이라는 안내석(案內石)이 있다. 먼저 양동마을 문화회관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매표소는 회관을 나와야 구입할 수 있으니 잘못된 구조다. 또한 경로(敬老)는 무료이지만 입장권을 가져가야 검표소를 통과할 수 있다. 물봉동산을 배경으로 경사진 언덕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집이 향단(香壇)이다. 회재 이언적 선생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 중 어머니를 모시던 동생 이언괄에게 지어준 살림집이다. 원래 99칸이었으나 현재는 56칸만 남았단다.
입구 아래에 정충비각... 병자호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손종로와 그의 노비(奴婢) 억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그의 시체를 찾지 못하여 옷 등 소장품으로 장사(葬事)를 지냈다 한다. 왼편으로 성종 때의 문신인 손중돈(孫仲暾)의 고택(古宅)인 관가정(觀稼亭)으로 갔다. 잘생긴 사대부 종가를 보는 듯 언덕배기에 수령이 2-300년 된 은행나무 한 쌍을 비롯하여 향나무와 배롱나무가 고택의 운치를 더한다. ‘농사하는 모습을 내려 보다’'라는 觀稼亭... 너른 들판이 손중돈의 땅인가? 그는 입향조(入鄕祖) 손소의 둘째 아들이다.
언덕 너머로 여강 이씨 종택인 무첨당(無忝堂)이 있는데 더럽힘이 없는 집이라는 뜻이란다. 안골 맨 끝에는 경주 손씨 入鄕祖 입향조 손소(孫昭)의 고택인 서백당(書百堂)이 있다. ‘서백(書百)’은 하루에 백번을 참을 인(忍) 자를 생각하며 살면 행복이 오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뜻이란다. 강학당(講學堂).은 배우고 가르치라는 뜻으로 여강 이씨 문중의 서당이다. 월성 손씨 서당인 안락정과 쌍벽을 이룬다. 최근 형제간의 재산 싸움을 바라보면서 500여 년간 대를 이어 화목을 다져온 두 집안의 우의가 영원하기를 빈다. 그림 같은 모습의 가옥들이 주는 옛 것들의 멋스러움... 영천으로 나오면서 조선시대의 문화기행을 마친다. 고맙습니다.
첨설대 천마총 양동마을
첫댓글 어린시절 코흘리게 친구들이 그리운 나의 고향 경주~~
어린아이의 눈으로 봤을땐 나의 고향이 어마어마하게 큰세상 이었던것 같은데.....어른이 된 지금은 아늑한 보금자리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
사진으로 고향의 향수 듬북 받아갑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글 감상 잘~하였읍니다.
건강하시구 행복하세유.ㅎ ㅎ 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