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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타작 마당에 누운 룻
저자: 옥성석
은혜의 타작 마당에 누워서….
룻기는 탁월한 작품성을 가졌다. 괴테(J.W Goethe)는 룻기를 가리켜 “가장 사랑스럽고 완전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슈뢰더(A.Schroder)는 “세상 어느 작가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단편소설을 쓸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초점은 룻기의 작품성이 아니다. 그 절망의 현장에 사뿐히 내려와 꽂히는 “은혜’라는 씨앗을 주목한다. 이 조그마한 씨앗이 어떻게 싹을 틔우고, 얼마나 기이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지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룻기는 그야말로 ‘은혜의 보고’다.
또한 룻기의 탁월함은 단지 ‘은혜의 보고’로서 만족하지 않는다. 룻기는 스토리를 가지고 은혜를 그려나간다. 그 은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적(靜的)인 그 무엇이 아니라, 동적(動的)이다. 룻은 은혜를 간절히 사모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은혜가 나타나길 마냥 기다리지 않는다.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룻1:16), 베들레헴에서 보리밭으로(룻2:2), 보리밭에서 타작마당으로(룻3:3), 타작마당에서 보아스의 품으로 나아간다(룻4:13).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씀에 ‘예’라고 순종하여 나아간다. 자신의 신분, 처한 현실 앞에서 자학하거나 좌절, 실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현실을 헤치며 나아간다. 그야말로 역동적이다. 지금 현실은 상실의 현실이며, 텅 빈 밭이요, 주울 것은 보리 이삭 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믿음으로써 그 자리를 훌훌 털고Viewer 일어나게 한다. 나처럼 보잘것없는 자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기에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으로 탈바꿈하게 한다.
룻은 이방인이요, 본질상 진노의 후예였다(창19:37, 엡2:3). 게다가 그녀 곁에 있는 사람은, 가진 것 없고 기력도 쇠퇴해 버린 ‘마라’(쓴 물)(룻1:20)였지만, 룻에게는 언제나 든든한 후견인이자 격려자였으며 기도의 중보자이자 축복의 통로였던 ‘늙은 시어머니’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한다. 부담스러운 시어머니가 축복의 통로로 변했다(1장). 텅 빈 보리밭에서 줍는 보리 이삭은 은혜의 선물이었다(2장). 은혜의 맛을 본 그녀는 드디어 은혜의 타작마당에 누워 버린다(3장). 룻은 “운명은 단지 씨앗에 불과하다”(로버트 루이스)라고 외치며 그 타작마당에서 ‘은혜의 옷자락’으로 자신의 운명을 덮어 버린다. 이런 그녀가 드디어 온 이스라엘이 추앙하는 다윗을, ‘은혜 위의 은혜’인 예수를 탄생시킨다(마1:5, 요1:16).
<<인생에 찾아 온 흉년>>
(당신은 지금 무엇을 상실했는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는가? 사업에 실패했는가? 건강과 꿈과 명예를 잃었는가? 그래서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채 탄식하고 있는가? ‘돌아오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돌아올 때 반전의 기회를 허락하여 주신다. 하나님은 상실 후에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
1장. 모압 드림은 없다(룻1:1-5)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힘(젊음, 건강, 물질, 직장, 권력, 그리고 가족….등)을 숭상하는 사람과,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다. 힘을 숭상하는 사람은 교만해질 수밖에 없고,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늘 겸손하다. 또한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우리는 세상이면 세상, 하나님이면 하나님, 힘이면 힘, 은혜면 은혜,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세상의 힘은 눈에 보이지만 찰나적인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힘없는 사람을 강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어 지혜로운 사람은 예외 없이 그 은혜를 붙잡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은혜란 무엇인가Viewer?
필립 얀시는 은혜를 “우리 시대 최고의 마지막 단어다”라고 말했다. 또한 금세기 최고의 신학자 C.S 루이스는 기독교를 규정짓는 유일한 단어는 ‘은혜’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은혜란 단어의 어원은 ‘카리스’(Karis)인데 ‘기쁘다’, ‘즐겁다’라는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은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스토리를 가지고 은혜의 의미에 접근한다면 더욱 더 잘 이해할 수가 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에 관한 스토리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과 관련된 내용들은 예외 없이 은혜, 즉 지극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여러 스토리의 중심에 바로 ‘룻기’가 있다.
룻기의 중심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가 주제다.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이 되어 룻기 전편에 도도히 흐르고 있다. 룻기에는 ‘은혜’라는 단어가 두 번 밖에 언급되지 않지만 스토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지를 생동감 있게 전달하며, 그 속에는 그렇게도 갈망하는 ‘은혜’라는 천혜의 값진 보석이 곳곳에 숨어 있다. 룻기는 총 4장, 85절로 이루어진 짧은 내용으로 등장하는 인물도 단출하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 우리 자신이 과연 어떠한 존재인지,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 우리에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곳에서 나오미와 룻을 만나주셨던 하나님은 우리도 만나 주실 것이다. 우리도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가 어떠한지 깨닫게 되는 희열을 맛볼 수 있다.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엘리멜렉(‘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의 뜻)은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었을 때, 그는 온 가족을 데리고 베들레헴, 즉 신앙의 터전을 버리고 모압 땅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이러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하나님께 묻지 않았고, ‘자기 생각대로 ’모압 땅으로 이주한 후 자기도 죽고 자식들까지도 죽었으며 가졌던 재산마저도 모두 날려 버리고 말았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신의 영달을 위해서, 세상적인 힘을 숭상함으로써 그 모든 약속과 축Viewer복을 미련 없이 버리고 베들레헴을 떠났지만, 모압 땅에서는 결코 ‘모압 드림’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묻고 또 물어야 하며 (대상10:14), 시시때때로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한다.(히4:16)
지금 당신의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는가? 그래서 ‘모압드림’을 꿈꾸며 베들레헴, 즉 신앙의 터전인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을 떠나고 싶은 유혹을 받는가? 말씀과 헌신과 봉사의 자리를 떠나고 싶은가?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모압드림’은 없다. 그것은 허상이고 신기루일 뿐이다. 설령 우리의 베들레헴이 사막 같을지라도 그곳을 떠나지 말고 거기에 한 알의 겨자씨를 심어보라. 그러면 바로 그 현장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은혜를 맛보게 될지어다. 천국은 자기 밭에 겨자 한 알을 심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마13:31-32)
2장. 흉년이 들었을 때(룻1:1-5)
“사사들이 치리하던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룻1:1)
이스라엘 백성이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에 들어 와서 땅을 분배 받았고, 이제는 그 긴 여정을 끝내고 막 정착 생활을 시작하려는 사사시대 초기에 흉년이 들었다. 엘리멜렉은 약속의 백성이었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땅에 살고 있었지만, 그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그는 흉년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그 자리를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났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정이나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리더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격 요건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시기’와 ‘방향’과 ‘목표’이다.
리더는 ‘때’를 잘 분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는 적합한 때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전3:1-5)
리더는 ‘방향’을 잘 잡아 주어야 한다.
모압 땅은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곳이었는데 엘리멜렉은 그의 가족을 그곳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자신과 아들들은 죽고 말았고, 남은 가족들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리더는 ‘목표’를 잘 제시해 주어야 한다.
엘리멜렉은 모압 땅에 눌러 앉아 버렸고 자식들은 이방 여인과 결혼을 시키고 육신의 편안함이 어느새 그의 목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리더는 뚜Viewer렷한 목표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육신의 문제를 우선시 했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으며, 고난의 가치와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엘리멜렉은 한 가정의 리더로써 실패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리더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의 결정은 자신뿐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흉년이 들었을 때 조급해 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시기와 방향과 목표를 정확히 꿰뚫고 계신 하나님께 물어보고, 자신의 리더십을 그분께 맡겨 드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때가 이르면 놀라운 축복의 주인공으로 세워 주시는 은혜를 맛보게 될 것이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146:3-5)
3장. 말보다 더 강한 말(룻1:1-7)
룻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표면에 드러난 스토리와 함께 문장과 단어를 통해 은혜를 받는다. 룻기의 강점은 문장 구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달하시려는 또 다른 메시지, 즉 행간을 통한 메시지, 말보다 더 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A(1절, 2절):유다→모압 리더:엘리멜렉(나오미,두아들→내리막 길, 시련의 연속)
B(3절) 죽다↔남다. 남편 엘리멜렉의 죽음, 두 아들 남음.
C(4절) 결혼 이 사건의 중심 위치
A’(5절) 죽다↔남다 두 아들의 죽음, 나오미가 남음.
B’(6절,7절): 모압→유다 리더: 나오미,
(나오미, 두며느리→이 가정은 회복, 상승 곡선을 그리게 됨)
(A-A’, C, B-B’ 서로 댓구를 이룸)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환난과 고난이 닥쳤지만 여전히 고집을 피우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모압에 유혹되어 지금 베들레헴을 떠나고 있지는 않은가? 그곳으로 가고, 들어가서 유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는 지금 4절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모압은 우리의 일상 속에 이런 저런 모양으로 잠재해 있으면서 우리의 평범한 의식 속에 언제나 꿈틀거린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 채 돈을 벌고 쾌락을 즐기고 세상의 것으로 공허함을 채우려는 이 모든 현장이, 또한 허영심과 허탄한 마음, 하나님의 백성임을 숨긴 채 머물고 있는 어둠의 현장이 모압이다.
우리의 삶을 채우는 것은 우리 손에 달려 있지 않다. 모든 것은 그분의 장중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베들레헴을 떠나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공허와 상실만 주어질 뿐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만족하고 기뻐하며 무엇보다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자주 모압이 눈에 어른거릴 때가 있다. ‘다시스’가 혹은 ‘먼나라’가 유혹할 때도 있다. 그래서 그 곳에 가면 성공하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간다 갈 수도 있다. 들어간다 들어갈 수도 있다. 유한다 유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하나님이 어떤 일련의 일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실 때 우리는 그 시점에서 결단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항하며 죄에 깊이 빠져들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돌아설 것인지 그 선택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는 길을 택한다면 하나님은 이유를 묻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돌아오는 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그것만이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첩경이다.
4장. 은혜의 씨앗(룻1:1-5)
룻기 1장은 세 사람의 죽Viewer음으로 인하여 절망 가운데 놓여진다. 그러나 그 절망 가운데 심어진 은혜의 씨앗이 발견된다.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하나의 이름은 룻 이니라” (룻1:4).
모압 족속(부도덕의 상징, 진노의 씨앗과 같은 존재)의 후예이자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여인이었던 룻은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구원 받은 백성)이 되었다. 룻으로 말미암아 그녀가 속한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쓰러져 가는 가문이 다시 일으켜 세워지며 그 이름이 인류의 역사에 오르내리는 영광스러운 가문이 되며, 룻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보아스,룻→오벳→이새→다윗…→예수 탄생). 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대항하다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더 이상 소망과 꿈을 가질 수 없는 현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씨앗”을 심고 계신다. 이 씨앗에서 자란 은혜는 그들의 허물과 죄악을 덮고, 그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감싸 안을 만큼 넉넉한 것이다. 이 은혜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모압 여인 룻과 나오미 집안과 더 나아가 온 인류가 은혜를 입는다.
룻기 전체를 통해 “남았더라”는 은혜의 흐름을 나타낸다(룻1:6→룻2:16→룻4:6)
“엘리멜렉이 죽고….남았으며”(3절),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남았더라”(5절)
아무도 모압 여인 룻을 데려가려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한 사람은 바로 보아스다.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에 정착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 가족을 완전히 멸하지 않고 일부를 남겨 두셨다. 남편은 죽었지만 아내를 남겨 두시고, 아들은 죽었지만 며느리를 남겨 두셨다. 또한 보리 이삭을 남겨 두시고 기업 무를 자를 남겨 두셨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참으로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은 ‘남았더라’를 통해 놀라운 일을 새롭게 계획하시며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다.
“밤나무와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하나님은 주의 자녀들이 연약하여 실패하고 범죄에 빠졌을 때나, 또한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남았더라”의 은혜를 베푸신다. 철저하게 망하고 이제 끝났다는 상황이 우리 앞에 펼쳐질 찌라도 하나님은 희망의 씨앗, 다시 소생할 수 있는 불씨,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 무엇을 남겨두신다. 하나님은 하갈을 위하여 ‘샘물’을 남겨 두셨고(창21:19), 요나를 위하여 ‘물고기’를 남겨 두셨으며(욘1:17), 욥을 위해 ‘아내’를 남겨 놓으셨고(욥42:13), 엘리야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 Viewer꿇지 않은 칠천명을 남겨 놓으셨다(왕상19:18).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남겨 두신 것이 있다. 지금 처절한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 던져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무언가 남겨 두셨다. 새싹이 돋아날 그 무엇인가를, 즉 축복의 씨앗을 남겨 두신다. 무궁한 사랑의 하나님은 절대로 자기 백성을 멸망하도록 버려두지 아니하신다. 설령 죄를 지어 징계 받는 현장에 있다 할지라도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베임을 당했다 할지라도 ‘거룩한 터’는 남겨 두신다. 그러므로 남겨 놓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고난당하는 자 앞에서 우리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당한 고난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고난은 신비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당하는 자 역시 낙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그 고난의 현장에 오셔서 ‘은혜의 씨앗’을 심고 계시기 때문이다.
5장. 하나님의 신발소리(룻1:6-14)
룻기에서는 엘리멜렉과 나오미, 두 사람의 리더가 등장한다. 엘리멜렉이 자기의 가족 공동체의 리더로서 시기, 방향, 목표 설정에 실패함으로 그 가정은 재기 불능일 정도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오미가 리더가 되었을 때에 이 가문에 다시 서광이 비치며 대 반전의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두고두고 칭송 받는 후손을 배출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오미의 리더십은 무엇이었을까?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Viewer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룻1:6)
이 구절은 리더십이 교체되는 중요한 현장이다. 여호와에 관한 소문,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긍휼과 자비가 풍성한 분인지 소문을 통해 듣게 하신다. 그 소문을 듣고 나오미에게 결단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그녀를 기다리신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 결심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결국 이런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었다고 느끼도록 만드신다. 사실 작업은 하나님이 다해 놓으셨지만 축복은 나오미가 받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나님은 직접 찾아 오셔서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지 않는다. 대신 우리 주변에서 발걸음을 내신다. 어느 때는 남편의 실패를 통해, 어느 때는 자녀의 질병을 통해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일하신 흔적을 남기며 뚜벅뚜벅 걸어가신다. 그 때 그 발걸음 소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 발걸음 소리에 제대로 반응하기만 한다면 나오미처럼 회복되는 은혜를 맛보게 될 것이다.
나오미는 일련의 시련을 거치면서 영적으로 민감해졌고, 영적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단지 소문뿐이었고 하나님의 신발 소리에 불과했지만, 그 신발 소리를 통해 결국 회복의 역사, 축복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리더들이다. 자신의 의지와 생각, 기분 판단력만 믿고 가족과 사업장을 이끌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신발 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를 뒤따라 걸어가고 있는가?
6장.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룻1:6-14)
룻기에는 ‘베들레헴”(떡집, 하나님의 집, 말씀의 집, 신앙의 고향, 하나님을 경외하는 장소, 가나안, 언젠가는 메시아가 탄생하실 축복의 땅, 오늘날의 교회)과 ‘모압’(이방 세계. 우상 숭배, 음란과 부도덕, 불신앙, 배교의 자리, 신앙에서 멀어지는 그 어떤 곳)이라는 두 지명이 등장한다. 룻기 전반부에는 엘리멜렉, 나오미, 룻, 오르바가 등장한다. 이들은 한 가족이요,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이동하는 과정 속에서 각각 다른 발자취를 남긴다. 그들이 남긴 발자취는 오늘날 인생의 길,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표본이 된다.
엘리멜렉(룻1:1,3)은 베들레헴→ 모압으로, 오르바(룻1:15)는 모압→베들레헴→모압으로, 나오미(룻1:19)는 베들레헴→모압→베들레헴으로, 룻(룻1:22)은 자신의 본토, 친척, 아비집인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발자취를 남긴다. 이 네 사람 모두는 (오르바와 룻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택한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저들은 전혀 다른 인생의 발자취를 남겼던 것이다.
룻기 1장의 배경은 모압과 베들레헴, 베들레헴과 모압 사이를 잇는 길이다. 이 길에는 ‘슈브(돌아간다)’라는 단어가 무려 열 두번(여섯 번은 ‘베들레헴으로’, 여섯 번은 ‘모압으로’)이나 등장한다. 우리의 인생 길 역시 베들레헴과 모압, 모압과 베들레헴 사이에 펼쳐져 있다. 우리 인생도 이러한 길을 걸어가고, 우리 안에도 이러한 소리가 계속하여 들린다. 한편에서는 베들레헴(은혜의 자리, 말씀의 자리, 축복의 자리, 신앙의 자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리, 예배의 자리,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으로 돌아가라는 소리가 들린다. 또 한편에서는 모압(유혹의 메시지, 음란, 방랑, 불신앙, 세속, 우상 숭배, 돈 숭배, 세상적인 즐거움, ….등 말씀을 떠나는 자리)으로 돌아가라는 속삼임이 들린다.
우리는 지금 노중에 있다. 우리 앞에 두 갈래 길이 펼쳐져 있다.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를 의탁하며, 길 자체이신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길 때, 주님이 진리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다. (요14:16) 또한 주님은 길일뿐 아니라 말씀 자체이시다. (요1:1, 요1:14). 말씀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만 따라 간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요10:4)
당신은 지금 어떤 모양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가? 룻과 같이 비록 협착하여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진리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간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나로 하여금 “은혜의 타작마당”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7장. 상실후의 은혜(룻1:19-22)
사사 시대의 모압 땅은 모든 것이 풍족했고, 특히 땅이 비옥했다. 베들레헴의 흉년을 피해 비옥한 모압 땅으로 이주했던 엘레멜렉과 그 두 아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나오미에게 이들의 죽음은 완전한 상실을 의미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서 젊음과 재산, 의욕, 희망, 꿈들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재기를 위한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나오미는 모든 것을 상실하고 그 마음 속에 유혹과 갈등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자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붙잡자’라고 각오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돌아온 나오미릉 위해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와 세 가지 축복(사람, 때, 장소)을 예비해 놓고 계셨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 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룻1:22)
첫 번째 축복은 룻이 그녀와 함께 하는 은혜다.
이방여인이요, 홀로 된 여인이었지만 끝까지 룻은 나오미와 함께 하였고,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나오미가 복을 받게 되었고 큰 은혜를 입는다. 그리고 룻도 나오미로 말미암아 복을 받기 시작한다. 나오미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 주었다. 서로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감옥에 던져진 요셉 곁에는 술 맡은 관원장이 있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창41:9-14). 저주스러운 불치병인 나병에 걸렸던 나아만 장군의 곁에는 포로로 잡혀온 계집종 엘리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하나님이 나아만에게 베푸신 은혜의 상징이었다.(왕하5:3)
지금 당신 옆에 누가 있는가? 지금 만나게 하시고, 함께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바로 그 사람이 당신의 룻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당신을 축복하길 원하신다. 축복의 통로로 그를 내 곁에 두신 것이다.
두 번째 축복은 ‘보리 추수할 때’의 은혜다.
때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나오미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셨고, 일어나게 하셨고, 그리고 가장 적절한 때에 돌아오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은혜다.
세 번째 축복은 베들레헴에 이르게 하신 은혜다.
이는 제일 좋은 장소에 이르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곳에서 이 가문은 회복되는 은혜를 맛보고 물질의 부요함도 맛본다. 더 나아가 이곳에서 다윗이 탄생하고,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는 복된 장소가 되었다.
모든 것을 상실했지만, 다시 돌아 왔을 때 하나님은 ‘그 후의 은혜’를 예비해 놓고 허락해 주신다.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자리에서 일어나 베들레헴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아니 우리 인생에 길이 되어 주시는 주님께 몸을 맡기고 그분을 따라 가기만 하면 나오미에게 허락하신 은혜를 오늘 우리에게도 허락해주신다. 우리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을 우리 인생 여정에 동행시켜 주시고, 우리에게 적절한 때를 허락하시며, 우리가 꼭 가야 할 장소에 이르게 해 주실 것이다.
<<순종으로 들어간 은혜의 타작 마당Viewer>>
(우리가 주님의 밭, 교회에 오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간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젠 다른 밭으로 가지 말기를 바란다. 이 밭에서 생활하기를 바란다. 이 밭의 주인, 즉 우리 주님과 동행하기를 바란다. 그분은 ‘유력자’이고, ‘보호자’이고, ‘인도자’이시다. 또한 ‘자비로우신 분’이다.)
1장. ‘우연’과 ‘마침’의 만남(룻2:1-7)
룻에게는 “모압 여인”, “모압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등 ‘모압’이라는 수식어가 끈질기게 붙어 다닌다. 모압은 단순히 지명이나 이방인이라는 뜻만을 담고 있지 않다. 그 속에는 ‘저주 받은 민족의 후예’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떄문에 히브리 민족이 가진 집단적이고 율법적인 사고에 따르면 모압은 아무리 발버둥치고 애를 써도 축복받을 수도 없고 구원 받을 수 없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룻은 그들처럼 부정적인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주저앉아 있지 않고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룻2:2) 그들과는 달리 은혜를 꽉 붙잡고 있었고, 은혜적 사고를 가슴에 품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부정적이고 율법적인 사고를 과감히 떨쳐 버리고 ‘은혜’라는 단어 하나만 붙잡고 일어선다. 나오미의 율Viewer법적 사고(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집안, 삼 사대까지 벌을 받는 망해 가는 집안)와는 달리 룻은 자기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기만 한다면 분명히 놀라운 역사가 자신이 처한 삶의 현장에 일어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 믿음이 모압에서 일어나 베들레헴으로 향하게 했고 어머니를 붙좇게 했다. 그리고 이 은혜가 그녀를 보리밭으로 가게 했다. 이처럼 룻을 룻되게 한 원동력은 ‘은혜’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은혜 베풀기를 기뻐하신다. 이 은혜는 우리의 환경을 초월한다. 생각과 경험, 이성을 초월한다. 이 은혜는 대대로 내려오는 율법도 덮어 버린다. 룻은 이 은혜를 붙잡았다. 저주스러운 민족의 후예, 이방인, 과부, 징계 중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집안의 며느리였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이런 룻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가?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우연히……보아스에게 속한…”(룻2:3)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룻2:4)
“우연’과 ‘마침’의 절묘한 만남!!! 하나님은 룻의 ‘우연’과 보아스의’마침’으로 그 보리밭에서 그 두 사람을 만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도 이렇게 나타난다. 룻기를 보면 하나님은 한 번도 전면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러나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은 알 듯 모를 듯 은혜의 단비를 부어 주신다. ‘우연’과 ‘마침’이라는 단비를 적절히 사용하시면서 오늘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전혀 드러나지 않게 은혜의 손길을 펴신다.
2장. 딸아, 밭으로 갈지어다(룻2:1-7)
나오미가 드디어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오미의 곳간에는 사람도, 재물도, 희망도 텅 비어버린 곳이었다. 텅 빈 집에 남은 것은 며느리 룻 뿐이었다. 이방인인 룻에게 너무도 낯선 땅인 베들레헴이었지만 룻은 밭으로 나가 이삭 줍기를 간청한다. 자신의 기막힌 신세를 원망하거나,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밭에 나가 보리 이삭을 줍는다. 룻은 자신에게 펼쳐진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일했다. 룻이 자신도, 남도, 환경도 탓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묵묵히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룻2:2)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은혜’이다. “은혜’란 말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단어이다. 모압 여인 룻은 가슴 깊숙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그녀는 묵묵히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세상의 여러 조건에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이 믿음은 그녀를 담대하게 만들었고, Viewer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 당신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 가정은 어떤 상태이며,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요셉, 다윗, 다니엘, 모세…..이들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있었던가? 성장 과정에서 이들이 처한 환경은 또 어떠했는가? 물려받은 것 없이 모두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부모를 원망하거나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을 가장 귀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믿음으로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그들을 채워주셨다.
부모를 탓하지 말자. 환경을 탓하지 말자. 비록 부모님이 자신에게 세상적인 유산을 남겨주지 못했다 할지라도 믿음의 유산을 남겨 주셨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담대히 자신 앞에 펼쳐지는 밭을 향하여 ‘은혜’, 이 단어를 붙잡고 나아가 그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자. 그러면 하나님은 분명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3장. 축복의 통로, 밭(룻2:1-7)Viewer
룻기 1장의 모티브는 ‘길’(베들레헴과 모압, 모압과 베들레헴 사이에 펼쳐져 있는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슈브”(돌아가다)라는 음성이 들린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음성을 따라 각자의 발자취를 남긴다. 반면에 2장의 모티브는 ‘밭’이다. 한 여인이 밭으로 나갔는데 그곳은 ‘우연히”도 보아스의 밭이었다. ‘마침’ 그 밭의 주인 보아스가 나타나며, 그 두 사람은 그곳에서 식사를 같이한다. 그리고 밭에서도 음성이 들리는데 그 음성은 “헨”(Khane, 은혜)이라는 음성이다.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2절)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10절)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13절)
룻은 마음 속으로 ‘은혜’를 간절히 사모한 여인이다. 이러한 룻에게 ‘밭’이라는 축복의 통로를 통하여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자기 소유가 아닌 남의 밭에서 남겨진 이삭을 주우며 그 곳에서 보잘것없는 일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룻을 위하여 드디어 하나님이 작업을 시작하신다.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두 단어를 절묘하게 사용하시면서 마치 톱니 바퀴가 돌아가듯 룻과 보아스를 만나게 하셨다. 그리고 마음을 통하게 하시고 결국에는 결혼에 이르게까지 하셨다. 이 일련의 과정이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우연’과 ‘마침’인 것 같지만, 이것은 ‘우연히’도 ‘마침’도 아닌,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과 간섭 가운데 놀라운 일이 밭에서 일어났다. 즉, 그 밭은 룻을 위해 마련된 축복의 통로였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현장에 머물고 있는가?
분명한 사실은 오늘 우리가 일하고 있는 이 삶의 현장이 우리를 위한 축복의 통로라는 사실이다. 우리 눈으로 볼 때 너무 한심하고 지금 하는 일이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밭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은 그 현장을 통해 축복해 주길 바라신다. 그러므로 지금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 나의 이 환경, 삶의 현장을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고 축복해 주실 것이다. 은혜를 주실 것이다.
룻에게는 또 하나의 축복의 통로가 있었다. 늙고, 가난하여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을 위해 준비된 축복의 통로였다. 하나님은 룻을 축복하기 위해 룻을 옆에 두신 것이다. 이처럼 부모는 자녀를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된다. 하나님은 부모를 통해 자녀들을 축복하기 원하신다. 부모님께 최선을 다해라. 그것이 곧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귀하게 보시고 축복해 주실 것이다.
“자녀들아 주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서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1:1-3)
4장. 말(언어)을 타고 들어오는 또 하나의 축복(룻2:8-13)
룻기 2장에서 또 다른 축복의 통로를 찾아보자. 그것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말은 씨앗과도 같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무의식 속에 심겨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Viewer 그 내용과 똑 같은 열매를 맺는다.
여기에 등장하는 나오미와 룻(룻2:2, 룻2:19-20), 보아스와 사환(룻2:4), 룻과 보아스(룻2:8-10, 13)의 대화를 들어보라. 이들은 오늘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여러 관계의 모델이다. 가족 관계, 고용자와 노동자, 이웃, 권력자와 서민, 노인과 젊은이,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외국인과 내국인…… 이러한 관계 속에서 흔히 우리는 대립의 각을 세우며 서로 갈등하는 양상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들은 밭에서, 즉 삶의 현장에서 만나 서로 복을 빌어준다. 또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게다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좋은 말과 칭찬의 말을 하고 있다.(마10:26-27, 시45:1)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크게 축복하신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
“우리의 말은 자신에게 하는 예언이다” 『긍정의 힘』 -조엘 오스틴-
사람의 말, 특히 크리스천의 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영향을 미친다. 우리 입의 말이 우리의 구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롬10:9-10), 더 나아가 기적까지 일으킨다(막11:23).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을 축복의 통로로 활용해야 한다.
축복의 통로가 되는 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4:6)
첫째, 은혜로운 말을 하도록 힘쓴다(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하는 대화)
둘째, 남에 대해 말할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가능한 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좋은 말을 하라(마10:27). 특히 자녀들 앞에서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다. 그것은 자녀들의 인격과 신앙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부정적인 말, 왜곡된 말, 상대방을 깎아 내리는 말은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셋째, 우리의 말에는 마음의 중심이 담긴 겸손함이 배어 있어야 한다. (룻2:10)
우리가 겸손하게 대화를 나눌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얽어 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이 스스로를 규정짓는다.(렘23:36)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축Viewer복의 통로를 예비해 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말이다.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서로 아껴주고, 위하고, 축복하고, 상대에 대해 좋은 말이 되도록 하자. 이런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분명 축복해 주실 줄 믿는다.
5장. 주 날개 밑으로 피하면(룻2:8-13)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졌는데 바로 호흡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살아 있다는 뜻이고, 살아 있다는 것은 불안과 근심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지금 어떤 종류의 근심과 불안으로 힘들어 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가? 그리고 과연 어떤 환경들이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가?
성경은 객과 고아와 과부가 가장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으로 동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24:20-21) 그만큼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 가장 불안하고 근심이 깊을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객과 고아와 과부로서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여인이 있는데, 바로 그녀는 룻이다. 그런데 이처럼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던져진 룻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그 힘든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고 있는가?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대부분 칩거하거나 대인 기피 현상을 보이며,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꺼린다. 혹시 나온다 할지라도 이리저리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닌다. 그러나 룻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설기만 한 곳이었지만, 그러한 상황에 개의치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햇볕을 받으Viewer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둡고 침침한 방안에 머물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우울해지고 약해진다. 별별 생각을 다하다가 엉뚱한 행동으로 자신의 심리 상태를 발산하기도 한다. (마11:3, 왕상19:9, 창15:5, 마2:14)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밖으로 나와 햇볕을 쬐고, 산보도 하고, 사람도 만나야 한다. 햇볕은 최고의 살균제이자 정력제이다. 햇볕을 보지 못할 때 사람은 쉽게 우울증에 걸리고 몸도 쇠약해진다. 햇볕은 공기중의 양이온을 음이온으로 바꿔주면서 상쾌한 공기를 만들어 주어서 심신을 안정시키고 기분 좋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해준다.
룻이 밖으로 나간 곳은 밭이었다. 밭은 양식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 밭에서 보아스(유력한 자, 구속자)를 만난다. 현재 룻은 자신을 구속(救贖)해 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때 보아스가 룻에게 유력한자로 나타난다. (고엘제도: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을 때 그를 구해주거나, 남편이 죽었을 때 대를 잇도록 도와주거나, 돈이 없어 빚을 갚지 못할 때 대신 갚아주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이 일을 하는 사람을 “유력한 자”라고 불렀다. 즉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을 때 밖으로부터 건져주는 어떤 사람을 말한다. 유력자, 곧 고엘이 되기 위해서는 혈연 관계가 있어야 하고, 재정이 넉넉해야 하며, 기업을 물려주려는 자비로운 마음이 있어야 하며, 미망인과 결혼까지 하는 의사가 있어야 한다).
보아스는 룻의 구속자로 등장하는데, 특히 보아스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예수님을 가장 잘 묘사한다. 보아스가 주님을 상징한다면 보아스에 속한 이 밭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룻과 같은 존재다. 더 이상 소망을 가질 수 없던 어느 날, 보아스되신 주님이 갑자기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진정한 유력자가 되어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진흙 구덩이 속에서 건져내어 구원해주신 구속자다. 보아스의 밭, 이 곳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축복의 장소이다. 그분은 또한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이시다.
6장. ‘헤세드’를 붙잡아라(룻2:17-33)
베들레헴은 떠난 나오미는Viewer 고향을 잃었을 뿐 아니라, 가지고 갔던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의 기본 구조를 심려와 불안, 지루함과 슬픔, 죽음과 공포 등으로 파악한다. 그는 이러한 인간 심리 상태의 원인을 ‘고향 상실’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즉 그것은 ‘가까이 있고,’ ‘고향적인 존재’를 망각한 것이다. 1945년 12월 릴케 서거 20주기 기념 강연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이 말한 ‘고향 상실’의 의미를 ‘신의 결여’와 결부시켜 재해석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가난은 신이, 그리고 신의 성스러움이 사라져 버린 심령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향 상실’이란 곧 단순히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어떤 곳을 떠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향적인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상태를 ‘고향 상실’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품을 떠난 심령, 즉 고향을 상실한 사람은 불안을 느끼고 지루함과 슬픔을 경험하게 되며, 급기야 죽음의 공포 앞에 노출된다.
“나는 젊은 나이에 하고 싶은 것은 다해 보았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 품에 돌아오기까지 이 세상에서 참 기쁨과 만족을 얻지 못했다.”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 -성 어거스틴-
나오미가 고향을 떠난 후에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는 사실은 그녀가 단순히 장소적 의미의 고향을 떠났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 ‘고향적인 존재’, 즉 아버지의 품을 떠났다는 뜻이다. 그 마음에는 평안이 없고 온전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잃은 후에야 비로소 ‘고향’을 떠올리며 그곳에 관심을 갖고, 그곳에 대한 소문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신앙 생활이 고향을 찾는 것이며,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보고 이를 동일시한다. (히11:14)
그럼에도 고향을 상실한 사람이 고향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라고 했다. 이처럼 고향, 즉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많은 유혹과 난관이 산재해 있다. 나오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나오미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룻2:20)라는 믿음이었다. 룻이 사용했던 ‘은혜’(룻2:2)는 ‘헨’(Khane)으로 표기되지만, 나오미는 ‘헤세드’(Hessed)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룻기에서 이 ‘헤세드’는 ‘선대’(룻1:8), ‘은혜’(룻2:20), ‘인애’(룻3:10)라는 뜻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헤세드’라는 단어의 특징은 혼자 독립적으로 쓰이지 않고 언제나 다른 한 개의 개념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사용된다. 이 단어는 언제나 ‘언약’, ‘하나님과의 언약’과 관련되어 쓰이고 있다.(창21:23, 신7:9, 단9:4, 사54:10, 시136편, 수2:12-14) 이스라엘 백성들은 ‘헤세드’하면 본능적으로 ‘언약’, 즉 ‘하나님의 언약’을 떠올린다. 나오미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떠올리며 이Viewer 단어를 썼다. 이 언약의 핵심은 바로 대속의 언약이다. 즉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만 하면 긍휼을 베푸신다는 언약이다.
나오미를 고향으로 돌아오게 한 원동력도 바로 이 언약이었다. “나오미가 ….나를 선대한 것과 같이 …”(룻1:8). 그녀는 ‘선대’, 즉 헤세드를 붙잡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그녀가 붙잡은 헤세드가 룻을 밭으로 가게 했고, 보아스를 통해 풍성하게 나타났다.
당신은 지금 어떤 상황에 던져져 있는가? 혹시 나오미처럼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경험과 능력, 상식으로는 도무지 일어설 수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 있는 건 아닌가? 바로 이때 우리가 붙잡아야 할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헤세드’다. 하나님의 헤세드다. 언약의 말씀을 붙잡기 바란다.
<<축복의 계보>>
(요엘 선지자는 성령이 임하시면 젊은이들은 장래 일을 말하게 되지만,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욜2:28).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꿈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믿음의 사람은 꿈을 꾼다. 혹시 그 꿈이 자신의 대에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그 꿈은 자녀에게 전달된다. 요게벳의 꿈은 아들 모세에게로, 한나의 꿈은 사무엘에게로, 엘리사벳의 꿈은 세례 요한에게 전달되었다.)
1장. 내가 행하리이다(룻3:1-5)
하나님께서는 룻기를 통해,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각각의 주요 인물들(보아스, 룻, 나오미)을 통해Viewer 깊은 영적 교훈을 던져 주길 원하신다.
보아스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예수님을 상징한다. “유력한 자”, “기업 무를 자”로 소개되는 보아스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인간적인 약점을 거의 보이지 않으면서도 가장 완벽하게 구원 사역을 감당한다.
룻은 누구를 상징하는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구원받은 성도들이다. 우리는 예전에 이방인으로, 율법의 의로는 전혀 소망이 없던 사람이었다(엡2:1-2). 이런 우리를 주님께서 구원하셨고, 신부 삼아 주셨다. 그러므로 룻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의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누구를 상징하는 걸까?
나오미는 룻기 전장에 등장하면서 고비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며, 룻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나오미가 누구를 상징하느냐에 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나오미가 율법을 상징한다는 주장이다.
나오미는 룻을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룻1:22), 베들레헴에서 밭으로(룻2:2), 밭에서 주인인 보아스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룻3:2).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3:24) 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선생님이라는 것이다.
둘째, 나오미가 성령을 상징한다는 주장이다.
그녀는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 정확히 예언한다. 오직 성령만이 알고, 또 성령만이 하나님의 뜻을 통달할 수 있다. (고전2:10-11)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런데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고 있는가? 주님의 영, 예수의 영, 성령만이 예수의 뜻을 알고 있다. 그런데 나오미가 보아스의 일을 꿰뚫어 보는 것으로 볼 때 그녀야말로 성령을 상징한다는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이다.
셋째, 나오미가 목회자를 상징한다는 주장이다.
룻이 모압을 떠나 생소하기 그지없는 베들레헴을 향해 떠나고, 그곳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나오미는 인도자의 역할을 하며, 룻이 자원하여 “밭에 가겠다”고 말할 수 있도록 신앙으로 이끌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사를 세우신 목적은 성도를 바르게 인도하고 성숙시켜 봉사의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다. 또한 말씀 사역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는 것이다.(룻2:1) 그리고 그 후에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신부가 되어 그분의 아이를 낳는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룻3:1,고후11:2) 그러므로 룻기에 등장하는 나오미는 목회자를 상징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는데, 성경에 보면 율법이나 성령은 사람으로 묘사된 적이 없다. 또 하나 율법이나 성령은 완벽하신 분이다. 그런데 나오미는 살아오는 과정에서 많은 연약함을 노출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세 번째 견해인 목회자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나는 여기 등장하는 나오미는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목회자를 상징한다고 확신한다.
목회자는, 죄악의 땅이요 진노의 땅인 모압에 사는 사람들이 베들레헴으로 이주하는 과정에 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면서 그들보다 조금 더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Viewer. 그래서 보아스의 밭, 즉 하나님의 교회에 거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또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선견자의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써 성도에게 바른 방향과 목표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성도들에게 보아스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에까지 이르도록 중매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목회자의 일이다. 우리는 목회자가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룻이 나오미의 말에 “예”라고 순종 했듯이,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목회자의 말씀 앞에 “예”하고 순종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
그 이유는, 바울이 자신을 “하나님의 동역자”(고전3:9),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6:1),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1:1)이라고 소개하는 것처럼 즉 사역자, 예수님, 하나님을 거의 동일 선상에 놓고 말씀하시듯이 우리가 순종하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2장. 룻의 맥추 감사(룻1:8, 룻2:19-20)
현존하는 이 시대 최고의 영성 신학자이자 목회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진 피터슨은 그의 저서 『유진 피터슨 부활』에서 기독교의 최대 절기인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크리스마스는 살아 있으나 부활절은 흥미를 일으키는 부분에서조차 실패하고 말았다”. “부활절은 완전히 죽어 버렸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부활 신앙인가? 그는 이 책에서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안식일을 준수하라.
둘째, 공동체 안에서의 교제를 중요시하라.
셋째, 세례의 성결함을 마음에 담아라.
그는 이 세 가지가 부활의 정체성을 지키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 현대인은 안식, 즉 쉼을 잃어버렸다. 일에 치중하다 보니 하나님과의 교제는 있지만 믿음을 가진 형제들과의 아름다운 교제는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너무 이기적인 신앙으로 치닫고 있다. 더 나아가 도덕 불감증으로 인해 세례의 거룩함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 삶 속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 일으켜 세워주시는 것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책을 자신의 기도문으로 마무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마음 깊이 우러나는 감사와 애정과 관심과 사랑으로, 그리고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이 기도문은 유진 피터슨이 이 책을 통해 부활의 삶을 현재화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결론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감사’하는 마음의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감사는 단지 입술로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태도요 마음가짐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며 그러할 때 우리 삶의 현장에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낯선 땅에서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던 룻이 보아스를 만난 이후 그를 통해 그야말로 놀라운 은혜를 값 없이, 조건 없이 입고 있는 현장(일터를 얻고,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풍성한 양식을 공급받고, 안전하게 보호받음)이 바로 룻의 맥추 현장이다.(룻2:10)
소망을 가질 수 없던 룻과 같은 존재였던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 우리가 보답하는 길은 하나님 앞에 감사제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맥추 현장에서 받은 은혜에 어떤 자세로 감사하며 보아스에게 나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을 아낌 없이 드렸던 룻은 어떠한 축복을 받았는가? 보아스의 보호와 풍성한 양식을 얻고 더 나아가 그와 결혼하여 마침내 다윗을 낳는 명문가로 회복시켜 준다. 이렇게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에게 더 풍성한 은혜로 갚아 주신다.
3장. 안식할 곳(룻3:1-7)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룻3:1)
보아스의 밭에서 주운 보리이삭으로 나오미와 룻은 생계를 유지하지만 그러나 그마저도 보리 줍는 일이 끝나면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룻에게는 내일을 위한 어떤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바로 Viewer이때 나오미가 룻에게 “네 안식할 곳을 찾아라 그래야 복이 있다”라고 말한다.
룻기 3장의 주제는 ‘안식’이다. 안식을 뜻하는 ‘눕다’라는 동사가 룻3:4, 3:7절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다면 참된 안식은 무엇인가? 이를 위한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때’(누울 때에), ‘장소’(눕는 곳), ‘마음의 태도’(발치 이불을 들고)이다.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안식을 누릴 때) 곡식 단 더미(안식을 누릴 수 있는 장소)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안식을 누리기 위해 취하여야 할 태도와 마음가짐) 기기 누웠더라”(룻3:7)
안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룻이지만 안식의 주체는 보아스라고 성경은 말한다. 즉 이 말의 의미는, 우리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쌓아두면 우리 안에 평화가 깃들 것이라고 착각한 채 스스로의 안식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나오미는 룻에게 , 우리에게 “안식의 원천이신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주님께 온전히 드리기를 힘쓰라 그 때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던 참된 안식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죄의 문제이다. 죄로 인해 안식을 빼앗긴 우리는, 안식을 회복하기 위해 허물의 가리움을 받아야 한다.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 모든 죄악과 허물을 쏟아 놓을 때, 그 때 주님께서 주Viewer시는 참 안식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게 된다.
4장. 그 분은 쉬지 않으신다(룻3:14-18)
안식할 곳을 찾던 룻은 보아스의 발치에 가서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누웠다(3:7 안식할 곳을 찾음). 그녀는 그 밤부터 동트는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워 있었다(3:13-14 긴긴 밤 안식을 누림)
룻이 안식할 곳을 찾아 눕는 순간 보아스는 일어나 그의 옷자락으로 룻을 덮는다. 안식을 상징하는 옷자락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 간다. 한 사람의 안식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이 자신의 안식을 기꺼이 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한 사람의 안식이 있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의 안식이 포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룻의 안식)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라 하니라”(룻3:18)
룻의 안식을 위해서, 우리의 안식을 위해서 자신의 안식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 분, 그분이 바로 보아스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은 영광스러운 하늘에서 최상의 안식을 누리고 계셨지만, 안식을 원하는 우리를 위해 하늘의 안식을 포기하고 안식의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 “기업 무를 자”(대속 주)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실 이유가 없다. 그런데 기업 무를 자가 되신 그분은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다. 허물 많은 우리 죄인들을 당신의 신부로 삼으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신부로 삼은 우리의 안식을 위하여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다.
주님에게만 참 안식이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우리도 그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당장 우리 삶의 현장에 안식이 주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분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진정한 안식을 원한다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주님처럼 안식을 위해 일해야 한다. 진정한 안식은 일한 다음에 찾아 온다. 그러므로 안식의 원천이신 주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 들이기도Viewer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 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사람이 감당치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했느니라”(히11:35-38)
이들은 한결같이 예수를 선택한 후 이 세상에서 누리는 잠깐 동안의 안식보다 영원한 안식을 선택한 것이다. 안식의 주인이신 주님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심을 바라보며, 안식의 원천이신 그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처럼 하나님의 일을 했다.
5장. 에브랏에서 들리는 소리(룻4:7-12)
“인간은 관계를 위해 창조되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끊임없이 그 무엇인가와 관계를 맺고 있다. 관계를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관계 DNA』 -게리 스몰리(Gary Smalley)-
인간은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나 자신, 나와 하나님, 이 세 가지 관계를 위해 우리가 지음을 받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관계는 인식하든 못하든, 그렇게 살든 살지 못하든 존재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 관계가 건강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저주받은 모압의 땅에서 태어났고,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남편도 세상을 떠나고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더 이상 아무 소망도 없어 보였던 룻은 한마디로 뒤틀린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베들레헴에서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놀라운 축복을 누리며 명문가를 이루게 된다.
-에브랏에 가득 찬 소리(룻4: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기에서 에브랏(기름져 열매를 많이 맺는다)은 삶의 현장,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머무는 삶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즉 베들레헴 전역에서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하는 소리가 들린다. 노사관계, 가족, 부부, 이웃간이든, 은밀한 장소나 공개된 장소이든 삶의 현장, 가정, 쉼터, 재판정에서든 서로를 격려하고 축복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이것이 바로 에브랏에서 들리는 소리다. 그 들리는 소리는 세 종류의 소리였다.
첫째, 하나님을 의식하는 소리, 하나님을 높이는 소리였다. 그들은 복이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각인시키고 있다.(룻2:4, 12, 3:10, 13, 2:20)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DNA의 줄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힘썼다는 말이다.
둘째, 중심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소리였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 DNA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힘썼다. 하나님께서 연결시켜준 사람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겼다. 이렇게 하나님과 또 타인의 관계가 튼튼해지면 자연스럽게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DNA도 튼튼해진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받고 인정을 받으며 계속 격려를 받아보라.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도 회복되기 시작한다.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고 자신감이 생긴다. 자학하던 자리에서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부정적인 생각이 점점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나 자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DNA를 연결시키는 고리는 바로 칭찬이요, 격려인 것이다.
이 시간 조용히 귀를 기울여보라. 삶의 현장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는가? 그 곳에서, 우리가 관계하는 여러 사람과의 대화에서 축복하고 격려하는 소리가 많이 들린다면 분명 그 현장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기름진 열매를 맺는 그야말로 떡집(베들레헴)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소리가 들리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다. 우리가 서로 복 비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른다. 우리가 서로의 복을 빌 때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래서 그곳이 ‘에브랏’이 되게 하신다. 나와 하나님, 나와 이웃,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를 튼실하게 잇는 끈이 무엇인가? 그것은 축복이며, 칭찬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삶의 현장이 ‘에브랏’이 되도록 힘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6장. 어머니로부터의 꿈(룻4:13-22)
룻기는 한 개인의 가정사로 시작했지만 마지막 부분에 와서는 그 가정의 계보가 자세히 밝혀지고 있다.
“베레스의 계보는 …..살몬은 보아스를 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4:18-22)
늙은 나오미에게는 꿈이 있었다. 망한 집안, 대가 끊어질 위기에 처한 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꿈이었다. 자신은 너무 늙어 그 꿈을 성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 자신의 꿈을 며느리 룻에게 심어 주기 시작했고, 며느리 룻을 통하여 그 꿈을 성취했다.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베레스 역시 다말의 꿈이었다. 보아스를 낳은 이방 여인 기생 라합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이 보아스를 통해 이루어졌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욜2:28). 혹시 그 꿈이 자신의 대에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그 꿈은 자녀에게 전달된다. 요게벳의 꿈은 아들 모세에게로, 한나의 꿈은 사무엘에게로, 엘리사벳의 꿈은 세례 요한에게 전달되었다.
당신은 부모로서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어떤 꿈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은가? 당신은 꿈을 가지고 있는가?
다말이 가슴 속에 품었던 꿈, 라합이 품었던 꿈, 나오미가 가슴 속에 품었던 그런 꿈들 말이다. 그 꿈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 바란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꿈이 있느냐이다. 믿음의 사람은 한결같이 꿈을 가졌고 그 꿈이 자녀 대까지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룻기의 주제는 ‘꿈’이다. 나오미는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었고, 그 꿈을, 룻을 통해 멋지게 이루었다. 오늘 우리도 믿음 안에서 꿈을 가지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물려줄 때 자녀의 손을 통해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축복해 주실 줄 믿는다. 믿음 안에서 선한 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그 꿈을 통해 명문가로 만들어 주실 뿐만 아니라 너무 평범하여 묻혀 버릴 뻔 했던 우리의 삶도 다시 빛을 발하게 해 주실 것이다.
한 손에 믿음을, 또 한 손에 꿈을 갖고 “은혜의 타작 마당’을 향해 달리는 자들이 다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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