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하늘엔 쥐구멍이 많다. 창피해서 숨고 싶은 쥐구멍, 수십억 광년 너머의 볕이 드는 쥐구멍, 소 같은 꿈을 어처구니없이 몰아가는 쥐구멍….숱한 쥐새끼들이 갉고 또 갉으면 어디론가 통할 수 있는 출구라도 되는듯 힐끔힐끔 눈으로 별을 갉아대다 보면 그야말로 환하게 활짝 열린 아파트 지하주차장 입구가 보인다. 비상구 계단 비스듬히 깍힌 뒷면에 숨겨 놓은 세차 리어카를 끌고 불빛에 반짝거리는 차들 사이로 들어서면 가장 무서운 건 귀신도 정적도 아니다. 사람이다.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은 아주 옛날 부터 호랑이도 늑대, 독사 같은 사람의 천적이 득실거리던 때부터 있어 온 말이 실감나는 것이다. 습관처럼 cc카메라를 올려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지날때면 어디선가 사람이 불쑥 튀어나올까봐 덜컹대는 리어카 바퀴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걷게 된다. 오늘도 무사할지, 다행히 차의 영혼처럼 차를 비운 차주들은 차 곁을 얼씬거리지 않는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바퀴 보호제와 광택제로 바퀴를 닦는 일이다. 추운 겨울 날 댓돌 위에 놓인 주군의 신발을 가슴에 품는 심정까진 아니라도 차라는 물건이 워낙 사람의 목숨과 가까운 물건이라 마음 속에 나쁜 기운을 불어넣는 감정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게 된다. 나는 어리석게도 옛날 어머니들이 해가 지기 전에 빨래를 걷으시며 "찬 이슬 맞은 옷은 옷 주인에게 해롭다"고 하시던 말을 믿는다.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양자역학 같은 것을 수박 겉 핧기 식으로 인용한 책들을 보면 내가 품은 의도를 우리들 자신을 구성하고 있거나 우리 모두를 에워싼 미립자들이 정확하게 읽고 실제로 그것이 물질과 현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말도 저 말도 다 믿는다. 그래서인지 내가 " 이놈의 인간들은 사기치고 남의 약점 이용해서 이렇게 좋은 차 타고 다니나, 부모에게 물려받고 재수 좋고, 머리 좋은 인간들, 우리 집 전세 값 몇 배의 돈으로 없는 것들아! 보란 듯이 굴리고 다니겠지"하는 마음으로 바퀴를 닦으면 웬지 차에 좋지 않은 마가 끼일 것 같다. 얼굴도 잘 모르는 차주들이지만 어쨌거나 나보다 잘 사는 김에 왕창 더 잘 살아라! 가만 두어도 반짝이는 차 더 반짝이게 하는 심정으로 타이어의 작은 홈도 놓치지 않고 걸레질을 아끼지 않는다. bmw, 아우디, 벤츠, 도요타, 에쿠스, 이름도 낯선 외제차, 국산차들이 내 고객들이다. 언젠가 나도 잠깐 차주 였던 적이 있긴 했다. 내차는 98년식 세피아에서 마지막 A가 떨어져 나간 세피였다. 짚 풀로 천년은 닦은듯한 은은한 광택에 비싼 코팅을 입힌듯한 고품격의 땟깔은 아예 기대 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나에게 달리는 집이 한 채 생겼다고 서투른 운전 실력에 엄마 태우고, 아이들 태우고, 친구들 태우고 온 동네 기사 노릇을 자처 했었다. 누구에게 얻어터졌는지 움푹 찌그러진 옆구리조차 사랑스러워 어느 고급 승용차 옆에도 당당하게 세웠었다. 일 년도 되지 않아 어디로 새어 나가는듯한 기름 값과 유지비가 버거워 차를 폐차하면서 강제 퇴거당하는 사람의 비감에 젖어 술을 마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달랑 백 만 원 짜리 차도 내 평생에 그런 호사였는데 몇 억을 호가하는 이 차들이 차주들에게는 어떤 기쁨 이였을까? 사실 난 상대방 입장에서 무엇을 헤아리는 일이 쉽지 않은 인간이다. 그러나 밤낮 없이 걸레와 행주를 쥐고 무엇인가를 닦고 정리하는 삶을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닦기 위해 숙이는 동안 바닥에 내려놓은 마음까지 조금씩 닦고 있었나보다. 언젠가 골목에 세워 놓은 외제 차 옆에 세발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아이가 차에 흠집을 내었다고 전세 오백에 월세 삼 십 사는 집에 오백만원을 물어달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내 일도 아니면서 밤새 분해서 잠이 오지 않았던 적도 있다. 그 아이 엄마가 눈물로 양은 잔속의 막걸리를 희석 시키며 그 돈 마련하려면 노래방이라도 나가야한다고 했다. “그렇게 돈 많아서 비싸 차를 타고 다니려면 자기들만 달리는 도로, 자기들만 가는 주차장을 따로 만들고 살아야지, 세발자전거 타고 노는 녀석들이 지 차가 외제차인지 티고 인지 알게 뭐야”
그러나 나는 오늘도 BMW를 닦는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근거 없는 오해와 불신을 닦고, 가졌음에도 나눌 줄 모르고 더 가지 못해서 그 외제차들 보다 빠른 속도로 질질 끌려 다닐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닦고, 천 마리 양을 키우면서 이웃의 한 마리 양에게 질질 흘리는 침에 대한 노여움을 닦는다. 세상은 철옹성 같아, 이 넘볼 수도 없는 단단함 들로 첩첩 봉인된 세계에 스며들어 풀이 되고 꽃이 되려는 내 꿈에 대한 절망을 닦는다. 얼마 전 치바이스라는 중국 화가의 그림 값이 718억이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직도 세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빌딩보다 자동차보다 백화점 보다 비싼 예술의 가격이다. 그기에 힘 있는 자들의 어떤 알력과 지저분한 농간들이 함께 거래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한 예술가의 혼이 이 세계의 어떤 단단한 물질의 값보다 높은 가격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희망이다. 너무 가난해서 아궁이에 개구리가 살았다는 사람이 붓 하나로 세계의 부호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선망을 이룬 것이다. 내겐 붓도 피아노도 무대도 없지만, 걸레가 있다. 목욕탕 의자를 밟고도 깨금발을 들고 닦으면 먼지보다 반사된 광택이 묻어 나오는 외제 차의 등짝은 내게 세계로 통하는 화선지고, 도화지고 피아노다.
화가가 붓끝에서 짜낼 수 있는 아름다움, 피아니스트가 건반에서 짜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나는 걸레에서 짜내어야한다. 그런다고 어느 날 피가 마르고 목이 말라 한바탕 차를 닦고 나면 눈앞이 까매지는 이 노동의 값이 빌딩은커녕 부자들의 한 끼 저녁 식사 값보다 높아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불빛의 각도가 조금만 달라도 보이지 않을 파리똥을 지우면서 내가 차창에 불어 넣는 입김은 내 용서와 사랑과 기도의 미립자들이다. 내가 닦은 차를 탄 사람들이 누구보다 맑은 눈을 가지고, 그들이 가진 것에 걸 맞는 영혼의 광택을 갖고, 그들의 부가 도로에서 거리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한숨과 눈물이 되지 않기를, 그 차에 실린 골프채들이 더 이상 세상의 멀쩡한 숲들을 날려버리는 이기의 도구로만 쓰이지 않기를, 평생 그림을 그렸다면 어느새
그는 캔버스에 그의 영혼을 옮기는 경지에 이를 것이다. 빛처럼 잡히지도 보이지도 앞을 가로 막지도 않지만 엄연히 비쳐서 따뜻하고 눈이 부신 그런 힘이 영혼이라면 말이다. 나도 이미 이십년 넘게 걸레를 쥐었다. 무심히 걸레에 묻은 먼지만큼 돈을 긁어모으는 것이라면 나의 이십년은 무참하다. 이제는 나도 닿는 모든 것에 영혼을 묻히는 걸레를 가져야겠다. 내 걸레가 닿았던 자리가 반짝이고 환해지듯 내 눈과 내 숨이 닿는 모든 사람과 공기가 맑고 따뜻하고 편안해지도록 내 스스로가 참 걸레가 되어야겠다. 그것이 야심이라면 나 자신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걸레질하고 정돈해야겠다. 그들의 차는 사실 더러워서 닦기 힘든게 아니라 깨끗해서 닦기 힘들다. 더러움이 보여야 더러움을 치울텐데 보이지 않는 더러움을 창조해내려니 새벽잠을 그르치고 나온 눈이 얼마나 피곤하고 대충 해치우고 싶은 유혹이 꿀떡 같은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경지는 그렇게 눅눅치 않다. 차의 내부를 청소하는 휴대용 진공 청소기에 빨려 들어오는 것은 그렇게 깨끗함을 좋아하는 그들의 하루에서 묻어난 미세한 마음의 먼지들이다. 내가 닦은 차에 첫발을 밀어 넣는 그들의 하루는 왠지 상쾌할 것이다. 차 한 대를 닦는 값은
이천 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걸레로 입김으로 땀방울로 불어 넣는 기운의 값은 그날 그에게 이천 삼천 억, 억이 되기를 바랄 수 있어 나는 걸레질의 고수다.
모든 새벽의 의식을 끝내고 지하주차장을 빠져 나오는 시간이면 쥐구멍 뿐이던 밤하늘은 어느새 말갛게 무너져 있다. 씻고 아이들 밥 챙겨 먹이고 한 시간쯤 눈을 붙이다 알람 소리에 깨어 다시 걸레를 쥐러 가야한다. 힘으로 권력으로 자신이 가진 것들로 세상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다 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내가 쥔 것으로 세상을 맑히다 가니 내 생은 참으로 기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