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K. Malevich’s Black Square
马列维奇的黑方塊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이것이 무엇일까?’ <검은 사각형>이 세계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는 설명을 듣거나 읽는다면, 더욱더 아연할 것이다. 당황할 수도 있다. 냉소적인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아주 단순하다. 캔버스에 검은색 사각형만 그려져 있을 뿐이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렵다. 말없는 작품을 보고 또 보면 어느 순간 <검은 사각형>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모든 것을 영으로 만든다. 모든 것이 0이 된 그 자리에서 새로 시작한다. 전통의 압박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공간으로 새로운 미감을 내고자 한다.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과 미래를 지향한다. 무엇을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검은 사각형이다. <검은 사각형>은 회화의 혁명, 미술의 혁명, 예술의 혁명이다.’
말레비치(K. Malevich, 1878~1935)의 생각은 ‘모든 것을 0으로 만든다’에 함축되어 있다. 예술사의 콘텍스트에서 말레비치의 0은, 기존의 전통예술을 해체한다는 뜻이다. 말레비치는 동굴벽화, 신화와 설화, 기록화, 종교화, 사실주의, 자연주의, 인상파, 야수파, 심지어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입체주의와 미래주의까지 0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다. 그 선언은 절대주의, 최고주의로 알려진 쉬프레마티즘이다. 쉬프레마티즘(Супремати́зм)은 말레비치가 창안하고 말레비치가 완성했다. 다른 예술운동에 비해서 많은 예술가가 참여한 것도 아니고 오랜 기간 지속된 것도 아니지만, 말레비치의 쉬프레마티즘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예술운동이다. 그중 <검은 사각형>은 쉬프레마티즘의 정형이라고 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현재 러시아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Tretyakov Gallery)에 소장되어 있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은 1915년 당시 페트로그라드(Petrograd, 1914~1924)였던 페테르부르크의 ‘도비차이나 미술국(Dobychina Art Bureau at Marsovo Pole)’에서 전시된 작품이다. 이 전시회의 명칭은 <회화의 마지막 미래파 전시 0,10(The Last Futurist Exhibition of Paintings 0,10)>이다. 말레비치는 기하학적 도형 형상의 작품과 함께 <검은 사각형>을 전시하면서, 특별히 이 작품을 모서리에 배치했다. 이것은 러시아 정교의 아이콘 배치와 유사하다. 전시 기법과 작품의 형상도 매우 특이해서, 당시에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의 원형은 1913년 <러시아 미래파/입체-미래파 오페라(Russian Futurist/Cubo-Futurist Opera)>의 의상과 커튼이다. 당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을 선도하던 말레비치는 파리에서 시작된 입체주의 큐비즘을 보고 완전히 새로운 예술을 구상했다.
말레비치는 1912년 파리를 방문했을 때 피카소, 브라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예술인 입체주의 큐비즘과 미래파로부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단지 모더니즘이나 아방가르드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회화였다. 러시아로 돌아온 말레비치는 예술가와 대상의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기존 예술은 대상을 재현하거나, 대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말레비치는 대상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회화보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대상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는 전복적인 추상예술의 극한을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인물, 풍경, 사건, 이야기, 신화와 같은) 대상이 없는, 아주 단순한 기하학적 형상만 남겨 놓았다. 극단적인 절제를 통해서 남은 것은 선, 면, 색이다. 선은 직각이며, 면은 정사각형이고, 색은 검은 단색이다. 말레비치는 새로운 시각언어로, 기존의 회화 기법을 0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말레비치의 의도는 공간을 새롭게 구성하고, 색채와 점선면(點線面)을 최대한 절제하여 예술의 새로운 길을 여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성이 설계하고 과학기술이 실현한 근대 모더니즘 사상을 새롭게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검은 사각형>은 봉건 지배계층과 부르주아의 감성에 조종을 울린 작품이다. 말레비치가 <검은 사각형>에서 추구한 미학은 ‘순수한 감정(pure feeling)’이다. 말레비치에 의하면 대상은 감정이나 느낌으로만 남는다. 사실 <검은 사각형>은 이율배반의 미학이다. 이성의 절제를 지향하면서 감정의 순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 이율배반 때문에 말레비치는 혁명기의 러시아에서 존중받을 수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극단적인 전통 부정의 형식을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에서 발견했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은 세계미술사에서 혁명적 전복을 시도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김승환)
*참고문헌 Ad Reinhardt, “Art as Art”, Art international, VI, no. 10, Lugano, December 1962.
*참조 <구체>, <기하학적 추상>, <다다이즘>, <러시아혁명>, <미니멀리즘>, <아방가르드>, <앵포르멜>, <인상주의⦁인상파>, <일반상대성이론>, <입체주의 큐비즘>, <재현>, <절대주의[미술]>, <초현실주의>, <추상>, <추상표현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표현>, <표현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