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존경 받는다.
그는 한말의 3대 문장가이자 뛰어난 시인이며 올곧은 역사가로 숭고한
삶을 산 인물이다.
망국의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 순국한 황현,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대쪽 같은 선비임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는 올곧은 시대정신의 실천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서도,
나약한 지식인으로서의 방황과 좌절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자결하는 그 순간까지.
황현은 나라가 망하는 비참한 때를 맞아 선비로서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고 말았던 탁월한 애국지사였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위로 하늘에서 받은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못하고 아래로 평소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저버리지 않으려 눈을 감고
영영 잠들면 참으로 통쾌함을 느끼리라. 너희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지어다!”
-그의 유서(遺書)에서
황현은 자신을 매장시킨 왕조에 대해 사대부로서 마지막까지 의리를
다한 선비였다.
나라가 망했는데 5백년 종사와 목숨을 같이 하는 선비 하나 없다면 이 나라가 얼마나 비참한가라고 탄식하며
그 유명한 <절명시>를 남기고 1910년 9월 7일 자결했다.
참으로 깊디 깊고 크나큰 울림을 주는 절명시의 한 귀절이다.
"글자나 아는 사람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難作人間識字人)
입으로만 외치는 오늘날 나약한 지식인에게 향하는 강렬한 메시지 같았다.
문장으로 유명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곳이다.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石沙里)의 서석(西石)마을이다.
지리산 줄기의 문덕봉(文德峯) 아래에 자리잡은 아늑한 마을이다.
예로부터 문덕봉(文德峯) 또는 문필봉(文筆峯) 자락에 있는 마을에서는
유명한 문장가들이 난다고 풍수지리에서는 말한다.
한말 3대 문장가 매천 황현과 소설가 김승옥을 배출한 명당 서석마을이다.
광양(光陽),
밝은 빛과 따스한 볕이 가득한 곳이다.
백운사과 섬진강 그리고 남해가 이루어내는 그 절경이 기가 막힌다.
그 광양에는 매천 황현이 그토록 좋아하던 매화가 만발해 온 동네가 그야말로 '꽃동네'다.
매천 황현은 1855년 광양 봉강면 석사리 서석마을에서 태어났다. 세종 때의 명재상 황희의 후손이다.
임진왜란 때 명장 황진 또한 그 집안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오랫동안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한다.
몰락양반이 된 그의 집안을 일으켜 세운 할아버지의 재력 덕택에 매천은 평생을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매천은 어린 시절 총명하여 공부하기를 좋아하였다.
11세 때 구례로 유학을 가서 천사 왕석보와 그의 장남 왕사각 부자를 스승으로 모셨다.
10대에는 지방 향시와 순천의 백일장에서 광양의 황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며 호남 최고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스승 왕석보로부터 “앞날이 촉망된다”는 평을 들었다.
스물네 살 때 서울로 올라와선 이건창과 교유하며 ‘한말 삼재(三才)’로 불릴 정도였다.
스물아홉 때 과거에 급제했으니 시골 출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장원에서 2등으로 밀렸다.
매천을 떨어뜨린 시관은 노론 명문 출신의 한장석이었다.
그는 답안지의 봉미(응시자의 성명과 사조단자를 봉해 놓은 곳)를 뜯어 매천 집안의 별 볼 일 없음을
확인하고 최종 단계에서 탈락시켰던 것이다. 먼저 사다리에 올라 출세한 노론들의 ‘사다리 걷어차기’였다.
노론의 권력 독점은 조선 후기의 대세였기 때문에 매천은 시대를 원망하긴 했어도 시관 한장석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환멸을 느낀 매천은 칩거에 들어갔지만 과거에 재응시하라는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서른네 살 때
다시 과거에 합격했지만 이미 그의 조선은 민씨(閔氏)들이 활개치는, 무너져 가는 나라였다.
그때 그가 낙향하며 남긴 말이 있다.
“도깨비 나라의 미치광이들!”
이은철 교사(광양제철중학교)가 광양뉴스(http://www.gynet.co.kr)에 연재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조선의 마지막 선비, 매천 황현>을 인용하려고 한다.
바로 소설가 김승옥이 매천의 집에 살게 된 사연은 이렇다고 한다.
필자가 매천 황현의 생가인 광양 봉강면 석사리 758번지를 답사할 때,
옆집에 사는 류재유 옹(1933년생)은 “구한말엔 석사리 땅 전체가 매천의 소유였다.”고 하였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1910년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때 작성된 석사리의 부책식 토지대장 7권을 모두 찾아보았더니,
겨우 약 이천여 평의 땅이 매천의 아들 황암현의 소유로 등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매천의 생가인 석사리 758번지의 소유자는 황암현이 아닌 김수행이라는 사람이었다. 누구일까?
『무진기행』의 저자 김승옥이 바로 그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얘기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김수행과 김승옥은 어떤 관계일까?
최근의 석사리 토지대장을 찾아보니 1989년까지 김승옥 작가가 그 집의 소유주로 되어 있었다.
김승옥 전의 소유주는 김수행이었다. 김승옥 작가를 잘 아는 분을 통해 확인해 보니
김승옥과 김수행은 손자와 할아버지 관계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김승옥의 부친은 여순항쟁 때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의 유산이 바로 손자에게로 상속되었던 것이다.
2011년 10월 17일, 김승옥 작가가 광양의 매천 생가를 방문하였다.
최근 건강이 좋지 않은 김승옥 작가는 필담으로 어린 시절 석사리에서 생활하였던 것을 증언하였다.
서석마을에서 두 명의 글쟁이가 탄생한 것은 분명 이 마을의 뒷산이 문덕봉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명불허전이다.
이름은 절대 헛되이 전해지지 않는다. 백운산 문덕봉이 낳은 최고의 글쟁이가 바로 매천과 김승옥이다. 우
연하게도 이 두 사람은 할아버지 덕택에 그 집에서 살았다. 재미있고 의미 있는 역사이다.
이 집에는 4개의 주련(柱聯)이 있다.
山居三十年(산 속에 삼십 년 묻혀 살면서)
種德不種木(덕을 키웠을 뿐이지 나무를 키우진 않았다네)
柑栗自能生(감나무며 밤나무는 저절로 자라나서)
低低秋晩熟(주렁주렁 가을 열매가 가득 열린다네)
방문을 열자 눈에 익은 초상화가 있다. 정자관에 심의를 입고 동그란 안경 너머 눈동자가 강렬한 모습이다.
구한말 최고의 초상화가 채용신의 작품이다. 매천이 삶을 마감하기 직전인 1909년 서울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그렸다고 한다.
삶을 마감하기 직전 해인 1909년,
매천 황현은 마지막으로 상경하여 강 김규진(1868~1933)이 운영하는 서울의 천연당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현재 같은 사진이 두 장 남아 있다.리에게 많이 알려진 한 장에는 종이로 제작된 사진틀의 테두리 오른쪽에
매천 친필로 ‘매천 55세 소영(梅泉五十五歲小影)’이라고 씌어 있다.
매천은 초상화의 바탕이 된 사진에 일생을 응축한 시를 남겼다.
‘세속의 시류를 따르지 않으려 하니/ 비분강개에 쌓인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네/ 독서를 즐겨했지만 홍문관에는 이르지 못했고/
유람을 좋아했지만 발해를 건너지 못했네/ 다만 옛 사람이여, 옛 사람이여 크게 외치며/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평생 가슴속에
불만만 쌓이는가’
매천의 나이 55세 되던 1909년은 경술국치 1년 전이다.
이때쯤이면 매천은 생을 마감해야겠다는 다짐을 이미 마음속으로 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매천 황현의 생가에서 450미터 떨어진 산자락에 있는 <매천역사공원>이다.
이 공원의 중심은 매천 황현의 선산이다.
맨 위에 있는 무덤이 매천의 할아버지 황직의 묘소다.
그 아래 왼쪽의 묘소가 매천의 아버지 황시묵의 묘이고 가운데는 ‘황현의 묘’다.
황현의 묘 왼쪽은 매천 황현의 큰아들 황암현의 묘소다.
이렇게 4대의 묘소가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매천역사공원에 들어서 처음 볼 때는 가파른 산자락에 있어 묘자리로서는 좀 그랬다.
막상 묘역 윗쪽에 올라 내려다 본 경관을 사뭇 달랐다. 좌우의 산세며 앞에 탁 트인 벌판이 안정감을 주었다.
매천 황현의 무덤이다. 4기의 무덤 중 유일하게 벼슬을 한탓에 황공 진사(黃公 進士)라고 비문은 기록한다.
매천 황현의 할아버지 황직의 묘소다.
묘비는 장수학생 황공(長水學牲 黃公)...라고 쓰고있다.
할아버지 묘비문은 손자 매천 황현의 썼다고 한다.
매천 황현의 아버지 황시묵의 무덤이다.
묘비는 장수학생 황공(長水學牲 黃公)...
아버지 황시묵도 벼슬을 못했다고 비석은 말한다.
매천 황현의 큰아들 황암현의 묘소다.
큰아들 묘비도 장수학생 황공(長水學牲 黃公)...이다.
매천 황현은 자결하기 전에 작은 초가 구안실(苟安室)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구안(苟安)’은 “넉넉하지는 않지만 편안하다”는 의미다. '구차스럽게 편안함을 구한다'는 뜻도 있다고 한다.
16년간 이곳에서 머물며 1천수가 넘는 시를 지었다. <매천야록> 등 역사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도 여럿 남겼다.
그의 글은 매세웠다.
'매천의 붓 끝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친구도 아는 사람도 그의 붓 앞에는 냉철하게 그리고 준엄하게 비판 받았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치욕적인 경술국치를 당하게 된다.
매천 황현은 동생 황원(黃瑗)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 꼴이 이와 같으니 선비라면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만일 오늘 안 죽는다면 장차 반드시 날로 새록새록 들리는 소리마다
비위에 거슬려 못 견뎌서 말라빠지게 될 것이니 말라빠져서 죽느니보다는
죽음을 앞당겨 편안함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경술국치의 소식이 황현에게 전달되던 1910년 9월 8일
그는 유작(遺作) ‘절명시(絶命詩)’ 4수를 준비하고 생의 마지막을 정리한다.
이튿날 9월 9일
아편을 탄 소주를 준비했다.
죽음을 각오한 몸이다.
그도 인간인지라 아편을 탄 소주를 단숨에 마시지 못한다.
잠시 숨을 쉬워가면서 아편을 탄 소주를 마셨다고 전한다.
그렇게 진한 아편물을 마셨다.그 목숨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방에 불을 때어 방을 덥게 만들었다.
피가 빠르게 돌며 온 몸에 아편 기운이 퍼졌다.
매천 황현은 그렇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매천 황현(梅泉 黃玹)은 아주 뛰어난 시인이며
올곧은 역사가이었으며 '행동하는' 선비 애국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