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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장흥 위씨는 보의론 연구결과를 두고 유사 이래 심각한 홍역을 치렀다. 아마 모르긴 해도 족보의 수정문제로 현수막을 걸고분신자살까지 하겠다는 촌극이 연출된 사례는 초유의 사태로 기록될 것이다. 이런 숭조정신과 기록보존정신은 아마 다른 성씨에서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 갸륵한 위선정신이 좀 더 일찍이 발휘되었더라면 위문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을 동력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속담에 비 온 뒤에 땅이 단단해진다고 했다. 우리 위문도 이런 계기를 통해 보다 발전되기를 바란 마음에서 세계전복사태에 가려진 이면을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1. 관작은 높지만 사서에 없어
우리 족보 세계는 5세 6세 7세와, 7세에서 14세간의 연대와 세대차와 함께 관작의 모순이 심각하다. 중시조공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2세(澾)는 문하승선관찰어사, 3세(原補) 중랑장, 4세(耆老) 태보문하시랑 동평장사, 8세(克謙) 우직간, 9세(景孝) 문하평리, 10세(溫) 문하시중 동 평장사), 11세(仁鑑) 호부상서, 12세(脩)간성군사, 13세(潤琦) 용호장군 등이다. 벼슬로만 보면 당연히 고려사나 고려절요 등의 사서에 등장하고도 남을 인물들이다.
원래 세계에 올릴 조상이면 어떤 역사서에 근거했다는 전거가 있어야 한다. 우리 세계에는 개성부호적, 승방동 구적 등이 전부다. 그러나 이들 선조들을 역사서에서 찾아낼 수 없다. 중시조와 10세조는 문하시중으로 지금 총리에 해당되는 벼슬아치이다. 그 정도의 품계이면 인터넷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족보의 상계를 화려하게 빛내고 계신 10명의 조상은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2. 族譜에 없는 舊사적비 내용
<대동보와 조선실록의 상치 부분>
구 분 | 상 이 점 | 사적비의 내용 | 대동보와 실록의 내용 |
시조공 | 동래 동기 | 금수강산이 좋아서 자의동래 | 선덕여왕 청에 따른 도예지사 |
〃 | 봉군 명칭 | 회주는 신라 때 장흥의 고호 | 고려 충선왕 때의 장흥의 지명 |
〃 | 관작 품계 | 대아찬(쇠락한 왕손과 혼인) | 아찬(성골과 진골골품제의 상한) |
〃 | 실계 기간 | 280여년 | 298년 |
중시조 | 활동 연대 | 신라 말인(羅季人) | 고려 초인(麗初人) |
〃 | 관작 품계 | 신라 대각간(大角干) | 고려 대각관(大覺官) 시중(侍中) |
소(紹) | 관작 품계 | 호부원외랑(정6품) | 첨의정승(정2품) |
원개공 | 자 축 시 | 월궁의 계수나무 | 월궁의 계수나무 |
판사공 | 활동시기 | 1390년 이후 실종 | 1412년까지 활동기록 확인 |
1987년에 건수한 사적비에는 우리 족보의 통설에 반대된 내용이 많다. 그럼에도 종인들은 그 비에 대해 한 번도 시비를 거는 경우가 없었다. 우선 그 비에는 시조공이 신라의 도예지사 자격으로 동래한 것이 아니고 복지의 땅에 살고 싶어 당나라 8학사와 왔다고 됐다. 관작은 대아찬이며 봉군도 신라 때 이루어지고, 회주가 신라 때 고호라고 되어있다.
또한 실계기간은 280년이고, 중시조의 족보에는 고려 초인이라 됐는데 신라 말인(末人)이라고 됐다. 관작도 최고벼슬인 대각간 시중으로 기록됐다. 원개가 형제의 장원급제를 자축하는 시도 곁들이고 있다. 판사공의 진도 유배를 사실처럼 밝히고, 세계에서 중시조의 재세시기를 고려 초인으로 적고, 사적비는 신라 말인으로 기록 서로 상치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적비 내용에는 세계 이외에 시조공의 동래 동기, 자격, 관작, 장흥의 지명 등이 모두 잘못 새겨있다. 실계기간도 족보와 18년이나 줄여 기록됐으며, 중시조도 활동시기, 관직이 족보와 다르다. 원개공의 자축시도 처음부터 출가를 희망하는 승려 희망자의 작품이 아니다. 판사공도 조선왕조실록에 유배지가 울주와 덕산으로 확실하게 나타났다.
이렇게 비문의 내용이 족보의 기록과 9개 사실이나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세계문제 하나 때문에 개비(改碑)를 반대한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세계만 중요하고 다른 사항은 관계없다는 것일까? 반대자 모두가 지금까지 사적비와 족보 기록과의 상치된 사실을 몰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알고도 이미 25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냥 손대지 말자는 애기인가.
3. 서명날인과 말 바꾸기
어느 문중이나 저마다 발전을 위해 조직이 있고 그 조직은 회의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게 마련이다. 우리 문중도 마찬가지이다. 도문회는 총회, 상임위원회, 운영위원회 등 공식 의결기구를 운영하고 있다. 근래에는 250년 위문 족보사에 늘 문제가 된 보의론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총회와 운영위원회의 위임에 따라 보의론 연구위원회를 출범시켜 5개항의 보의 문제를 연구해 확정했다. 그런데 일부 위원과 종인들이 보의론 연구결과 확정과정에서 언행과 이후 주변인물의 권유나 계파의 분위기에 따라 자신이 기왕에 뱉은 말을 뒤집었다. 한 문중의 지도급 인사들이 자신의 언동에 대해 책임지지 않은 것은 후생들에게 참으로 민망스런 일이기에 그 실태를 반면거울로 삼자. (편집자 주) |
1) ○○ 宗人
△○○(79) 종인은 보의론 연구위원회의 발족을 결의한 2010년 7월 7일과 연구결과를 추인한 2011년 1월 8일 백산재 강당에서 개최된 도문회 운영위원회에 모두 참석, 동의하고 의결을 확인하는 명부에 서명날인까지 했다. 물론 당시 추인운영회의에서 결의할 때 김해 김수로왕의 비에 158세까지 살았다는 비문의 내용과 공고기간을 늘어 잡자는 요지의 발언도 한 바도 있다. 그러나 연구결과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공고기간을 20일나 넘긴 2011년 2월 말쯤 정우 간사에게 전화로세계는 어른들이 해둔 것이니 그대로 두자고 했다. 이어 2011년 3월 12일 대종회 운영위원회와 2011년 5월에 발행된「장흥 위씨 종보」제17호, 2011월 6월 28일 도문회 운영위원회에서의 발언, 그리고 2011년 7월 5일 장흥 위씨 홈페이지 대화방란에「장흥 위씨 보의론 연구에 관심 있는 종인」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의견을 주장했다.
(전략)- 족보상 8세인 극겸(克謙), 9세 경효(景孝) 10세 온(溫)은 위씨이면 모두 이분의 직계자손들이다. 그런데 우리 직계 조상을 버리고 방계조상을 직계조상으로 바꾼다면 말이 되는가. 옛날 10대 초반에 나이든 규수와 혼인을 시키는 예도 있고 5-60대에도 손을 본 예도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선조 때는 손이 귀한 때라 혹시 양손으로 대를 잇다보면 연대가 잘 맞지 않을 수 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 했으면 한다주장했다.
신세계를 반대하는 계후 종원이 제시하는 이유는 언뜻 보면 타당하게 보이기도 한다. 가령 기존 세계의 8세-10세의 조손론(祖孫論)이나 방계의 조상을 직계조상으로 넣는 일 따위는 무엄하게 보일 수 있다. 초보발행 이후 250년 동안 손을 대지 않은 일종의 금기(禁忌)사항을 감히 뜯어고칠 수 있느냐고 힐난할 수 있다. 보의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종원들에게 세계의 조상을 빼버렸다고 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이유들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견강부회(牽强附會)랄 수 있다. 가령 5세와 6세조가 90세가 넘어서 아들을 낳은 것처럼 해석되는 문제를 그럴싸하게 설명하기 위해 5-60대 생산과 양자론을 제시했다. 물론 구약(舊約)시대에 모두셀라는 969세 또는 800세를 살았다고 기록됐다. 중국의 동방삭은 3천 갑자인 18만년까지도 살았다. 영국사람 토마스 파(Thomas Parr)는 실제로 152세를 살기도 했다.
공고절차에 대한 말은 무책임의 극치이다. 보의론 공고절차를 밟을 때 도문회는 전국 23개 종중, 대종회는 20개 지역종친회장에게 문건을 발송했으니 43인에게 보낸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가 만일 도문회장이나 대종회장이면 전국 모든 개별종인에게 공고문을 발송했을까. 물론 그에게 그런 중책을 맡겼으면 전국 종원에게 결과를 통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별 종인에 대한 통보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역사상 우리 문중에서 파종문과 지역종친회에 문의를 알리고 이의신청을 접수하는 절차를 밟은 전력이 있으면 그 증거를 대보라. 그리고 자신이 도문회장이나 대종회장으로 안건을 결의한 후 당신 같은 인물이 나온다면 어떻게 했을지 역지사지(易地思之)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봉건사회에서도 대부분의 의제(議題)는 다수결원칙을 지켜왔다. 그렇다고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2) ○○ 宗人
△2011년 1월 8일「보의론 연구결과 보고서 처리」를 위한 도문회 운영위원회 : 저도 연구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처음에는 사실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위원장께서 일을 처리해가는 과정을 볼 때 확실한 원칙과 기준을 세워놓고 심도 있게 연구하고, 위원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오로지 우리 족보를 바르게 하려는 충정을 느꼈다. 이는 우리 문중사에 일찍이 없었던 발전의 계기가 아닌가 싶다.
△2012년 2월 11일 개비문제 종인 긴급회의 : 보의론연구위원 선정 때부터 연구위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보의론 연구과정에서 덕인식당에서 전거가 없어 반대했는데 날인한 것은 내용도 모르고 시도기(時到記)에 날인 한 줄 알고 날인했다. 조금 더 숙고해서 5월 대제 때 다시 논의하자.
△2012년 2월 11일 개비문제 종인 긴급회의 : 보의론 연구위원장이신 증 위원장께서 전거가 없으면 고치지 않겠다고 했을 때 찬성했는데 보의론 연구위원회에서 전거도 없이 세계를 바꾸는 것은 안 된다고 본다.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이 있다. 계후 종인은 2011년 1월 8일 회의에서는오로지 우리 족보를 바르게 하려는 충정을 느끼고, 우리 문중사에 일찍이 없던 발전의 계기다라고 극찬했다. 그런 말이 1년 1개월 뒤인 2012년 2월 11일에는전거가 없어 반대했는데 도장을 찍은 것은 시도기에 날인할 줄 알고 찍었다고 발뺌한 것이다. 그리고는 세계에 전거가 없다고 다시 확인한 말로 자신의 종전 태도를 바꾸는 구실로 삼았다. 제사 때마다 시도기의 붓을 잡은 분이 언제 시도기에 도장을 찍은 일이 있는지 알 수 없다.
3) ○○ 宗人
△2011년 1월 28일경 보의론 연구위원회 정우 간사에게 보낸 서신
「小考」
譜疑論叢 小委員會 委員 諸賢의 勞苦에 衷心으로 感謝를 드리면서 한 말씀 덧붙여 올립니다. 秦星圭 敎授의「圓鑑國師集」飜譯過程에 玿 할아버지가 蒙古軍의 捕虜가 된 羞恥를 덮기 위해玿를紹로 바꿨을 것으로 풀이하고 글자는 다르나 同一人이라고 斷定, 解釋하였는데 拙者의 愚見으로는 五世祖 繼令 繼廷 二分 先祖의 아들들이 緝과 紹 二分 先祖는 同行 四寸이 되므로 蒙古軍에 被逮된 玿할아버지는 紹와 同一人이 아닌 傍祖가 아닌가 思料되므로 檢證을 바라옵고, 아울러 六世祖 紹를 九世祖로 修訂하겠다는 實務小委의 最終 確定案이 發表되었는데 妥當하다고 生覺되는 것이 現 譜牒에 五世와 六世의 銜字가 같은 糸辺으로 되어 있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釋然치 않게 生覺되었던 차에 譜疑論叢 實務小委가 發足되어 上系 譜疑論을 修訂하겠다니 막힌 가슴이 뚫린 듯 시원합니다. 繼續 硏究 檢證해서 좋은 결과를 맺어주시기 付託합니다. 感謝합니다.
○○
△2012년 2월 8-9일경에 도문회장에게 보낸 사적비 개비반대 경고 서신
△2012년 2월 12일 개비문제 종인 긴급회의 발언 : 영이재공이 족보를 만들 때 보의론을 제기하면서 확실한 전거가 있으면 고치라 했다. 충렬공과 원개 사이에 3대를 넣는 것은 무방하다. 충렬공의 휘 繼廷에 糸사 변이 들어가고, 6세 휘 紹에 糸 변이 들어가는 것은 부자간에 같은 糸 변이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3대를 넣는 것은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나 족보에 있는 할아버지를 빼는 것은 안 된다. 그래서 비를 개수하는 것은 안 된다.
△2012년 2월 12일 개비문제 종인 긴급회의 발언 : 사적비는 1988년도에 세워졌다. 우리 선조 세계에서 세 분을 넣고, 세 분을 빼는 것에 대한 전거를 제시해 보라.
진환 종인의 두 서신은 무엇이 진심인지 알수 없다. 첫 서신에서는 보의론 연구위원회의 연구결과를 보고上系 譜疑論을 修訂하겠다니 막힌 가슴이 뚫인 듯 시원합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던 것이 1년 뒤에는 정반대로 돌변, 사적비의세계에 보의론 연구결과를 반영해 개비하면분신자살 하겠다고 극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세계를 고쳐서 시원하다더니 어느 사이에 세계를 고치면 죽어버리겠다고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또충렬공과 원개 사이에 3대를 추가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우리 족보의 세계가 3대가 더 늘어나게 되어 그 자신은 33세에서 36세가 된다. 족보의 틀이 완전히 뒤틀리고 만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 생각인 것이다. 또한 연구위원회에서 세분을 빼고 세분을 넣는 전거를 제시하라 했다. 그 전거는 이미 그가 확인한「보의론 연구결과 공고 안」에 있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억지소리를 하는 것이다.
4) ○○ 宗人
그 종인이 도문회장에게 보낸 서신은 무슨 말이 중심인지 알기 어렵다. 보의론 연구결과가 중심인 것 같은데고증 있는 유치면 단산리 의금부도사, 현감, 영경문의 기록은 유명한 학자가. 요람과 인터넷에 왜 기록이 없습니까? 의보작업은 안 됩니다라고 표현 등은 감을 잡을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5) 본인 동의 없는 날인
이른바「개비(改碑)반대 진정서」에는 관산에 거주하는 종인 39명이 연명날인했다. 이 문건은 2012년 2월 9일경 진환(珍煥)이 분신자살하겠다며 도문회장에게 보낼경고편지를 계흠에게 보여주자 그가 동석한 성렬, 성량, 계후 종인에게 열람한 후 작성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날인은 이장 성천 종인에게 있는 이민들의 도장을 본인동의도 없이 9명이나 날인됐다.
6) 이중 서명날인 종인
보의론 연구위원회는 과제의 중대함을 인식하고 연구항목과 의결절차를 철저히 만장일치라는 의결과정을 준수했다. 그리고 관련 기록에는 반드시 참여한 종인들의 서명날인을 받아 역사의 자료로 삼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종인들은 자신이 서명하고 날인한 사실을 까맣게 망각하고 세계 반대운동에 서명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형태는 국역 존재집 구입비와 존재학회 설립문제를 다룬 문중회의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 때문에 존재학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를 거듭하고 있다. 이게 장흥 위문의 좌절이자 비극이다. (편집자 주) |
△성렬 종인 : 보의론 연구결과에 옳다고 서명 날인은 물론 한사코 반대를 하는 계후 종인을 설득하기도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2012년 2월 10일경 방촌과 와룡 일부 종인들로 하여금 개비에 대한 반대를 일부 종인들에게 종용하면서「연판장」에 서명하게 했다.
그는 1987년 봄까지 추진된 5대 사업 중「시조공 사적비와 판사공묘비문」의 초안을 작성할 때 桂沙의 고증내용에 따라 비문의 내용이 옳지 않다는 이유에서 1992년 연명 날인했다. 아래 명단은 당시 사적비의 비문내용에 반대했던 서명자들이다.
霞山門契長 魏聖日․有司 玉煥․俸煥․利彦
長川門契長 圭良․有司 啓瑭․啓鎭․啓尙, 啓祥․芳良․焄․啓孝․喆煥․圭复․彧良․啓瑭․鍾文․六煥․啓天․聖烈․星煥․定煥․定良․必煥․成良․啓玹․聖浩․準煥․龍煥.
△성량 종인 : 보의론 연구결과에 찬성서명, 세계반대운동에 다른 사람이 반대하니 나도 반대한다며 연판장에 서명했다. 그는 1987년 때도 서명.
△계흠 종인 : 보의론 연구결과에 찬성하고 세계반대운동 연판장에 서명
4. 밤중 전화와 현수막 게시
이번 세계반대 운동에는 건의서, 진정서, 편지, 우편엽서, 경고장 등의 방법이 동원됐다. 이들 문건 중분신자살이라는 섬 뜻한 내용을 제외하면 보통사람들이 사용하는 통상의 방법이다. 이외에도 광주 일부 종인들은 주로 밤중에 도문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종인은 강진에 사는 종인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주고받았는데 나중에 현수막에는「강진종친회」도 참여한 것으로 이용했다고 밝혔다. 특히 현수막 제작사로 하여금「하산사」주차장 울타리에 걸도록 일렀는데 업자가 위씨를「유씨」로 잘못 알아듣고 외평화 유씨 제각 앞에 게시하는 촌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본 문건은 도문회 회칙 제 16조에 의거 2012년 4월 12일 운영위원회에서 2012년 3월 10일자로 접수된 위증 종원의「세계조 해법모색을 위한 제안」을 협의한 후후손들에 대한 선인의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세계 조항 및 사적비 개비와 관련된 공식 문건과 이에 대한 반론을 묶어 책자로 만들고 이를 차기 족보의 지장록 자료로 남겨 역사의 평가에 맡기기로 한다.는 결의 4항에 따라 작성했다.
2012년 12월 21일
도문회 보의론 연구결과
세계 번복사태 전말서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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