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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린 사랑-태진아>
올 첫 본격 장마, 사무실에서 좀 쉬어볼까했더니 갑자기 동편제 판소리 취재 명령이 떨어졌다. 전주를 거쳐 고창과 남원을 아우르는 빡빡한 일정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우리 전통 음악(?) 중 유일하게 뿌리를 좀 알고 즐기는 장르가 판소리이다.
여기에는 돌아가신 최순우(‘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저자) 선생을 위시하여 황수영, 진홍섭 정양모, 유홍준 교수 등이 창립한 민학회民學會의 청년회원으로서 한때 열심히 각종 우리 전통문화를 답사했던 경험이 취재에 크게 한몫했다.
판소리가 무엇인가?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 또는 장구 치는 사람) 한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사설을 말한다. 장르는… 좀 애매하다. 문학적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고, 1인극 또는 음악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등장인물이 단출하지만 종합공연예술로 보는 게 맞다.
유래도 정확하지 않다. 원체 자료보다는 구전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 영조 30년(1754)에 유진한이 지은 <춘향가>의 내용으로 보아 짐작하건데, 적어도 숙종(1674∼1720) 이전에 발생했을 것이다. 신라 때 성행했던 ‘판놀음’을 그 기원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만, 아놔! 그렇게 따지자면 뽕짝 가요도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를 기원으로 해야 할 판이다. 역사가 길다고 다 가치가 있는 게 아니지.
18세기에 이르러 <배비장전>, <옹고집전>, <장끼전> 등을 포함한 ‘판소리 열두 마당’이 완성되지만, 점차 공연 레퍼토리 수가 줄어들다가 충, 효, 의리, 정절 등 조선시대의 주요 가치관을 담은 것들만 예술적으로 가다듬어져 ‘판소리 다섯마당’으로 정착되었다.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토끼타령)>, <흥보가(박타령)>, 적벽대전을 포함한 중국 역사소설 『삼국지연의』의 일화를 그린 <적벽가>가 그것들이다. 아! 대물 변강쇠와 밝히는 여인 옹녀의 걸쭉한 성적 행적이 특징인 <가루지기타령>을 포함한 ‘여섯마당’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공연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일단 너른 마당 중심에 멍석을 깐다. 고수는 북(또는 장구)을 앞에 둔 채 양반다리로 앉고, 제대로 된 의관 갖춘(남녀불구하고) 소리꾼이 양손에 부채 하나 감싸 쥐고 다소곳 그 옆에 선다. 관객들은 그 주위로 빙 둘러 앉아 시선을 중심으로 모은다.
하던 짓도 멍석 깔아놓으면 안하는 아마추어도 있지만, 뭐 이 양반들은 프로다. “허잇!” 하는 고수의 추임새와 함께 ‘두둣 두둣 둥’ 특유의 울림이 경쾌한 북소리가 공연 시작을 알리면, 소리꾼은 ‘당황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그때 춘향이는 매를 맞고 옥중에서 도련님을 그리워하는디…”라는 아니리(말)에 이어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된다.
흔히 판소리가 전라도에서 발생한 것으로 오해들 하신다. 아니다. 시작은 경기 남부와 충청도의 걸립패에서 시작되었다. ‘걸립乞粒’이란 오늘날의 버스킹Busking(길거리 공연)이니, 걸립패란 음악이나 재주를 보여주고 관객들이 던져주는 돈으로 살아가는 영혼 자유로운 무리를 이르는 총칭인 셈이다.
마을 굿판을 담당하는 굿중패, 저잣거리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판을 벌리는 사당패, 아무 집에나 다짜고짜 들어가 진득하게 달라붙어, 레퍼토리라곤 단 하나 “작년에 왔던 각설이”만 주구장창 불러댐으로써 주인의 진을 뺀 다음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는 각설이패, 솟대를 앞세워 사물놀이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솟대패, 기악 연주를 주로 하던 소규모 유랑 연희집단 풍각쟁이 등이 다 걸립패에 속하며 이들을 뭉뚱그려 ‘광대’라고도 했다.
이들 중 각설이패와 솟대패, 풍각쟁이는 판소리와 실제로 별 관계가 없다. 사당패와 굿중패가 절대적으로 판소리 탄생에 기여했다. 굿중패는 영혼 달래기 살풀이가 끝난 후 더러 사당패들의 선소리 형태를 다소 순화한 공연을 펼치기도 했는데, 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로부터 소리를 익힌 사람들, 즉 판소리계의 시조로 불리는 서산 사람 이동백 등을 이 업계의 프런티어로 본다.
사당패寺黨牌란 유랑하면서 노래와 재주로 입에 풀칠하는 근본 없는 떠돌이들이었다. 사당패의 사회적 위치는 유식한 말로 ‘견자지자제犬者之子弟’라. 천하의 개쌍놈 자식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가던 혼성 유랑집단이었다. 집도 절도(절은 있었구나, 겨울 한 철만) 가족도 없이….
얼핏 보기에 남녀가 뒤섞여 윤리와 도덕 없이 중구난방으로 생활하는 것 같지만, 이들에게도 나름대로 ‘룰’이 있었으며 지도자인 꼭두쇠를 중심으로 집단이 운영되었다. 꼭두쇠의 권한과 카리스마는 대단하여 룰을 어긴 구성원의 생사까지 좌지우지했다.
여자 구성원들을 ‘사당寺黨’이라 불렀는데 여기에서 ‘사당패’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왜 ‘사당[절 패거리]’라 했을까? 특별히 불심佛心이 깊은 광대 무리여서가 아니다. 손님 없는 겨울 한 철에 안면 터놓은 절에나 들어가 숙식을 해결하다가, 날이 풀리면 절에서 ‘불한당이 아닌 믿을 만한 놈들’이라는 증표를 받아 다시 거리로 떠나는 집단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사당패가 노마드Nomard(유랑집단)이긴 했지만, 그 뿌리는 이름 그대로 ‘절[寺]’에 두고 있었다.
남자들은 불교식으로 점잖게 ‘거사居士’라 했다. 춤과 재주는 거사들이 맡았다. 공연 레퍼토리는 주로 여섯 가지. 풍물(농악), 버나(대접 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 등으로,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여 흥을 돋워준 대가로 던져주는 엽전을 모아 먹고살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무형문화재, ‘남사당男寺黨’은 개화기 이후 패거리에서 사당(여자)가 배제되고 난 후에 생긴 이름이다. 기왕 ‘사당패’로 이름이 알려진 이상 남자만으로 구성된 걸립패라 하여 ‘거사당居士黨’이라 하기엔 좀 그렇잖은가? 여사당이 없는 대신 영화에서 이준기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젊은 아이에게 여장을 시켜 ‘암동무’라 했다.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그들 사이에서는 동성 간 육체적 관계도 허다했다.
거사들이 재주를 보이는 동안, 여사당들은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천한 몸짓으로 관객들에게 돈을 거두었다. 공연이 끝난 후 더러는 꼭두쇠의 허락 하에 해우채를 받고 치마끈을 푸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당연히 양반들의 모임에는 불려 다니지 못했다. 그런데 영화 <왕의 남자>에서는 양반댁도 아닌 궁중에서 공연을 한다. 이거 실화인가? 연산이란 임금이 원체 기이한 인물이었으니 그 정도쯤이야 뭐 충분히 가능했을 법.
사당패 공연은 그 시대 서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오락거리 중 하나였다. 집안 쌀독이 비어 있더라도 엽전 한 냥을 아까워하지 않고 던질 만큼. 그러나 아무리 재밌는 구경거리라 한들, 찬바람이 속곳을 씽씽 통과하여 불알까지 오그라들게 하는 겨울 거리 공연에 구경할 놈은 흔치 않다. 겨울공연은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터무니없이 작았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했다. 안성 근교에서 활동하던 사당패는 딱 겨울 한 철만 인근 청룡사靑龍寺에 몸을 의탁하곤 했다. 그런데 고려 말 대덕 나옹선사와도 관계있는 유서 깊은 사찰 청룡사가 어찌 이런 패륜집단 사당패를 받아들였을까? 서로에게 부담도 불만도 없는 윈윈 전략의 결과였으리라.
사당패들이 겨우내 절밥이나 축내면서 뜨끈한 장판에 몸 지지고 있었던 게 아니다. 거사들은 매일 장작을 마련하거나 꽁꽁 언 얼음을 깨어 계곡물을 길어야 했다. 사당들은 빨래나 부엌시중으로 절 살림살이를 거들었다.
“거, 부처님 공양허구 남은 것 같이 나눠먹읍시다 그려. 본디 스님 것들도 아니잖수?”
시절이 하수상하여, 외딴 절 전문털이 화적떼들이 우글거렸지만 청룡사는 늘 무사했다. 막 나가는 걸로 따지자면 화적떼 저리가라던 막가파 ‘거사님’들이 두려워 절 근처에도 오지 못하니 청룡사 스님들 마음도 편했다. 사당패가 사찰건축을 위해 적지 않은 불전(기금)을 기부했다는 기록도 청룡사에 남아있으니 절로서는 오히려 남는 장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이다. 요즘 절은 대개 속세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깊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수행 전문 절만 빼고 오늘날 기독교 교회처럼 다 북적거리는 마을 안에 있었는데. 조선조 초기부터 강력 시행된 배불정책에 따라 절들이 마을에서 사라진 거다. 한 마디로 쫓겨 간 거다. 배불정책은 여말 불교의 부패가 핑계였다. 예나 지금이나 혁명 성공 세력이 제일 먼저 손보는 것이 부패세력이다.
아무튼, 그때부터 절은 ‘강제로’ 고요함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쫓겨난 사실은 딱 숨기고 말이 존재하지 않는 묵언수행 공간임을 애써 강조한다. 사람들이 시심詩心과 절의 아우라가 서로 닮아 있다고 쉽게 착각하는 까닭이다. 심지어 절[寺]과 시詩는 말씀[言]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 크게 다를 바 없는 사이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군.
교활한 승려들과 말장난 즐기는 시인들은 절[寺]에서 하는 말씀[言]이 곧 시詩라는 말까지 만들어 낸다. 개뿔이다! ‘말빨’로 보통사람들 기죽여놓고 이니셔티브를 쥐려는 수작들이다. 역으로 절[寺]이란 묵언의 공간이 아니라 서러운 자들의 한풀이[言]로 중구난방 시끌벅적해야 옳다. 껍데기만 고상한 담론[詩] 따위는 개에게나 줘버려야 진짜 불교다. 종교가 저잣거리에서 멀어지면 더 이상 종교가 아닌 거다.
이제 더 이상 핍박도 없는데 왜 사찰이 계속 산속에 있어야 하나? 저잣거리에서 아웅다웅 세상살이의 서러움과 외로움을 함께 해야 불교 아닌가? 중생들의 고통에서 슬쩍 비켜서 있으면 더 이상 불교도 아니다. 중생들의 고통 해탈을 위해 사유하고 기도한다면서 정작 중생들의 진짜 어려움은 외면한 채 고상하고 번드레한 미사여구나 일삼는 승려는 ‘강남좌파(과연 그 실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에 다름 아니다.
겉멋 든 산사의 철부지 승려도 문제다. 문득 몇 년 전 알고 지내던 북한산 모 사찰 주지스님 뵈러 산길을 오르다가 안면은 쪼글쪼글, 입성은 꼬질꼬질, 추레한 할매 한 분이 보따리 등에 메고 허이허이 험한 산길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사업 실패한 자식새끼 염려되어 관절염 앓는 다리 무릅쓰고 ‘기도빨’ 영험하다는 소문 듣고 날 잡아 집을 나섰다 했다.
함께 모시고 올라가 뒷짐 지고 느릿느릿 마당을 걷던 젊은 스님에게 할매를 인계(?)하고 돌아서려던 찰나, “시님 시님, 지발 우리 새끼 심 쫌 내라꼬 영험한 기도 좀 올려 주시쇼.”하는 할매의 애원에 스님의 싸가지 없는 말본새가 참으로 거시기하게 들려온다.
“할喝(정신 차리시오)! 보살님은 부처님이 어디 개인 복이나 들어주는 분인지 아시오?”
할? ‘헐’이다. 할매도 다 아실 게다. 불교란 본디 믿는 종교가 아닌 마음 수행의 종교라는 걸. 하도 답답하여 마음이라도 좀 편해질까 하여 절나들이 하셨을 뿐. 거기까지는 좋다. 허면, 아까 슝∼ 자가용 타고 절 앞 마당까지 무사통과한 그 부잣집 사모님풍의 보살은 어찌 그리 살뜰하게 환대하시는가? 지금 남의 자식은 어찌되었던 제 자식만 대학 붙게 해달라는 기도 올리는 중인 저 사모님 말이다.
사판승인 듯한 그 젊은 승려와 처마 밑에 당당하게 걸려 있는 <수능합격 기원 백일기도> 플래카드가 조선시대 명필이 썼다는 대웅전 현판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진 것 없고 행색 초라한 저 할매 보살 마음 좀 다독거려주면 부처님이 잡아먹기라도 하시나? 분별하여 차별하지 말라는 부처님 말씀은 어디에 꽁꽁 숨겨두고 그런 망발을 하냔 말이다.
단지 불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불교는 그나마 양반이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종교 사제들께서 너무나 이러저러 하여 거시기하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자고로 절이란 산 아래로 다 내려와 있어야 한다. 가끔 속세의 때를 벗기는 목간 공간으로서, 하안거 동안거 수행에 필요한 선방禪房 몇 개쯤은 필요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안성 서운산 청룡사의 처사는 참으로 옳고 타당했다. 겨울 한 철, 천한 신분의 사당패들을 마다하지 않고 거두어들였으니 깨달음 세계의 핵심,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부처님의 ‘불이不二’ 정신을 적극 실천한 거다.
아이고! 할 이야기가 많은데 바다로 가야할 배가 산사山寺까지 올라와 버렸다. 다시 판소리로 돌아가자. 안성 사당패의 ‘선소리’가 판소리의 한 축이 된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다 사설이 길어지고 말았다. 암튼, 여섯 가지 공연 콘텐츠 중에서 나머지 네 개가 몸을 쓰는 재주라면, 탈놀음과 꼭두각시놀음에는 말 재주인 선소리(대사)가 필요했다.
대사는 스토리텔링의 기본 요소다. 사당패들은 시중에 떠도는 음란한 스캔들과 잡다한 해프닝, 거기에 구전되는 옛이야기를 더하여 노래와 춤, 몸동작으로 걸쭉하게 한마당 공연을 펼쳐지곤 했었는데, 그 중 선소리와 창이 판소리의 한 바탕이 되었다는 말씀이 되시겠다.
배운 것(?) 없는 사당패들의 스토리텔링은 굿중패들에 비해 좀 허접하고 천박했으며 거칠 수밖에 없었다. 관아나 부잣집을 들락거리면서 살풀이를 해주던 굿중패들은 그나마 사설이 보다 세련되고 정제된 편이었다. 주요 클라이언트 인 양반들이 천한 사설에 거부감을 나타낸 탓도 있고,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양반들과 자주 접하다보니 유식한 표현도 쓸 줄 알게 된 거다.
하지만 신분이 천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굿중패의 경우 거리에서 펼치고 주는 대로 받는 랜덤플레이가 아니라 신분 높은 양반들로부터 일정액 수준의 보수를 담보 받는 초청공연이니만큼 겨울에도 실내에서 공연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대접에 관한 한 천지 차이였다.
아무튼, 굿중패와 사당패에 의해 태동된 판소리는 안성 8명창으로 불리는 권삼득,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신만엽 등에 의해 장단과 곡조에서 오늘날의 판소리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어 판소리 문화는 서서히 남하하여 충청도 강경, 장항을 거치고 익산과 남원을 지나 전주에서 크게 꽃을 피우게 되는데, 지금 판소리 형태의 8할이 전주에서 완성되어 훗날 ‘동편제’ 판소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경기도와 충청도 식 초기 판소리는 동편제와 구분하기 위해 훗날 ‘중고제’라는 이름을 얻는데, 대사가 비교적 순하며 창 또한 가볍고 여릿여릿한 경기민요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낸다. <배뱅이굿>을 연상하면 '딱'이다. 그에 비해 전라도 동북지역에서 완성된 동편제는 대사가 질펀하거니와 소리 또한 내용에 따라 때로는 애절하게 때로는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는 특징을 가진다.
판소리의 기본은 스토리텔링 곧 이야기이다. 말하듯 전하고 노래하듯 말하는 것이 판소리의 기본문법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재미있어야 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재미나는 이야기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음담과 재담만한 게 없다. 그것이 동편제 판소리가 음담과 재담을 넘나들며 중고제보다 걸쭉해진 이유다. 그러나 판소리가 예술이란 위치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음담과 재담에만 의지할 수 없다.
시대는 남원 사람 송흥록을 요구했다. 그는 창에서 ‘폭포 소리’ ‘비바람 몰아치는 소리’ ‘천군만마가 몰려들어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 등의 다양한 창법을 만들어 중고제 판소리를 마감하고 동편제 시대를 연 인물이다. 내용에 따라 박자도 진양조로 느리게 혹은 중중모리로 빠르게 전개하여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등 여러 기법을 발전시키는 등 송흥록은 판소리계에서 큰 활약을 하게 된다.
국악계에서 판소리가 진정한 예술로 거듭난 것을 송흥록 때부터라고 보는 것만 봐도 송흥록이 근대적 판소리계의 중시조라는 이름을 거저 얻은 게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또 그에 의해 비로소 판소리는 양반들이 대놓고 즐기는 새로운 오락이 되기에 이른다. 당대의 송흥록은 영호남 가리지 않고 자연히 양반들의 초청 공연 대상 1순위였다. 그는 당시 남도 땅 전역을 아우르는 스타였던 것이다.
이병주 선생 말마따나,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인기가 높았던 만큼 송흥록에 대한 신화적 일화도 많다. 달빛에 물든 대표적인 그의 대표적 신화가 맹렬孟烈과의 사랑 이야기이다.
맹렬은 송흥록이 대구감영에 초청되었을 때 만난 감영 소속의 앳된 권번 기생이었다. 낭창한 몸매에 매혹적인 자태, 게다가 “오⤻빠↗야⤸” 같은 대구 처자들 특유의 애교 넘치는 말투에 송흥록은 그만 이성상실. 대구 부사에게 목숨까지 걸고 사정하여 겨우 맹렬을 얻는데 성공한다. 맹렬 또한 판소리계의 스타 송흥록의 구애에 활짝 얼굴을 펴서 화답했다.
결국 맹렬은 부푼 꿈을 안고 졸래졸래 송흥록을 따라 그의 활동 본거지인 전라도 남원 땅에 들어서게 되는데, 아시다시피 꿈과 현실은 달라도 한참 다른 법이다. 가시버시로 서로 며칠은 꿈같은 나날을 보냈으나 오래지 않아 맹렬은 자신이 한 지아비의 아낙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게 얼마나 가당치 않은가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만다.
어려서부터 권번에서 몸에 익힌 유흥 본능이 어디 가랴? 온몸이 근질근질, 매사가 따분했다. 시도 때도 없이 권번 생활이 스믈스물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맹렬의 마음은 점차 식어 갔다. 그러나 송흥록의 사랑은 여전했으니 ‘미운 정 고운 정, 정만 쌓을 줄 알았다. 불면 꺼질 새라 놓으면 날아갈 새라 애지중지 딸 키우듯 맹렬이를 사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맹렬이 사라졌다. 송흥록이 화들짝 놀라 수소문했더니 누군가가 단봇짐을 싸들고 운봉을 거쳐 지리산 넘어 경상도 땅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단다. 뒤를 쫓아보았지만 맹렬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홋저고리를 보고 서러웠고 댓돌 위에 뒹굴고 있는 꽃신조차 서러웠다. 그러나 송흥록은 프로페셔널했다. 그 애달픈 심정은 곧 창이 되어 절규했으니 그는 천상 소리꾼이었다.
“맹렬아, 이 나쁜 것아! 가려거든 다 가져갈 것이지. 워쩌라고 정은 두고 가냔 말이다.”
이 애끓는 단장곡이 그가 그토록 원했던 진양조를 완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햇빛에 바랜 이야기인지 달빛에 물든 이야기인지는 내 알 바 없다. 오로지 지하 또는 하늘에 있을 송흥록만이 알 일이다. 그런데 이 멘트가 21세기 오늘 날, <가버린 사랑>이란 대중가요 가사에 차용되고 있다. ‘레알’이다. 가사는 이렇다.
백년해로 맺은 언약
마음속에 새겼거늘
무정할 사 그대로다
나 예 두고 어데 갔나
그대 이왕 가려거든
정마저 가져가야지
정은 두고 몸만 가니
남은 이 몸 어이하리
최초로 이 노래를 취입한 가수는 <립스틱 짙게 바르고>로 유명한 임주리다. 그러나 내가 즐겨듣는 것은 태진아 버전이다. 체질적으로 트롯 계열 음악과의 접점이 약한 나도 이 노래만큼은 아끼는 편이다. 태진아 특유의 가래 끓는 듯 거친 샤우팅이 마치 동편제 판소리 한 마당처럼 가슴에 콕콕 다가와 박히기 때문이다. 그의 이 독특한 창법은 오히려 트롯이 아닌 록이나 블루스 곡에 아주 적합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송흥록이 신창법을 완성하여 판소리를 예술의 경지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면, 신재효는 판소리의 이론을 정립하고 구전으로만 이어오던 사설을 정리한 소위 먹물 지식인으로서 평가를 크게 평가 받는 사람이다. 고창 사람 신재효는 대대로 아전 집안 출신으로 그 또한 고창읍 아전으로서 밥먹고 살았다.
소위 먹물깨나 잡수신 양반 아니 중인으로서 출세는 애시당초 포기, 향리에서 아전으로 만족했다. 향리 아전? 알고 보면 참 괜찮은 직업이다. 대대로 ‘철밥통’에다가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안전하지, 오히려 고창 군수보다 끝발 세지….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군수야 기한 채우고 떠나면 그뿐이지만 아전한테 한번 잘못 보였다가는 평생 삶이 괴로워지는 법. 잘 보이려 갖다 바치는 놈이 많으니 곳간이 넘쳐난다.
가야금 좋아하고 판소리 좋아하는 신재효 같은 사람에게 아전이란 하늘이 내려준 직업이었다. 대대로 쌓은 부를 바탕으로 난다 긴다 하는 향토 예인들을 후대하면서 유유자적 예술적 삶을 살 수 있었다. 그의 나이 마흔, 때는 판소리가 구전으로만 전승되는 탓에 통일성이 없었으며, 가사 또한 천박함을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마침, 영남의 판소리 ‘덕후’ 김해부사 정현석이 신재효의 소문을 듣고 그에게 보냈다.
“춘향, 심청, 흥보 등의 노래는 쉬이 사람을 감동시키니 권선징악에 충분하나, 그 나머지는 들을 게 없소. …윤리도 없고 광대들 중 글 아는 자가 없어 고저가 뒤바뀌고,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고 소리나 부르짖어 무슨 말 하는 지 알아들을 수도 없으며… 차마 눈 뜨고 보기 민망하오.”
이처럼 양반들이 관심을 가져주니 판소리의 가능성은 충분히 입증되었다. 예술적 도약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소위 먹물들의 이론적 토대가 시급했다. 정현석은 적격자로 신재효를 택했다. 알아주니 용기가 났다.
이때부터 신재효는 무려 20년 동안 중구난방이었던 판소리 사설을 개작하거나 정리하는데 신명을 다했다. 그리고 ‘어단성장語短聲長(말은 짧게 소리는 길게)’ 등 판소리의 이론이 그에 의해 정립되었으니 비로소 판소리는 이론적 으로도 탄탄한 예술의 한 장르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이청준의 소설과 영화로 유명해진 서편제를 빼고 판소리를 논할 수 없다. ‘서편제’의 ‘서西’란 남도의 땅 서쪽 담양, 순창, 보성 등에서 발전된 소리를 말한다. 대체로 동편제가 경상좌도와 전북지방의 소리라면, 서편제는 전라남도 지역에서 발전한 소리이다.
지리적으로 중고제와 동편제의 경계가 금강이라면, 동편제와 서편제의 경계는 노령산맥이다. 다만 구례 일대는 예부터 경상도 색채가 강하여 함께 동편제 영역에 속한다. 서편제라는 말이 생김으로 하여 중고제, 동편제라는 이름도 생겨났으니, 서편제야말로 판소리의 끝판이다.
서편제는 동편제에 비해 보다 ‘가슴을 저미는 한이 사무친 소리’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음악적으로 훨씬 정교해졌으나, 동편제의 간결성과 우람스런 표현에 비해 설움조, 애원조인 계면조 위주의 소리로 일관하여 신파적, 통속적이라는 양반층의 비판이 많았다. 공감이 쉬운 만큼 싫증도 쉽게 나는 기법이란 것이다. 허나 일반 대중들은 달랐다. 마치 막장드라마에 빠져들 듯이 서편제 소리에 쉽게 빠져들 수 있었다.
서편제의 스타는 단연 이날치였다. 이름이 말해주듯 그는 걸립패에서 줄을 타던 재인이었다. 타고난 소리와 재담으로 서서히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서편제의 가장 큰 특징이랄 수 있는 ‘아구성’ 즉 소리를 짓이기고 씹고 흔들면서 다소 천박하지만 가장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소리로 노래하여 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같은 시대 사람인 동편제의 김세종 소리가 클래식이라면 이날치의 소리는 파퓰러였던 셈이다.
구한말에 이르면, 판소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되어 궁중에서도 공연된다. 판소리를 변형시킨 창극唱劇 형식도 이때 탄생했다. 고수 1인을 동반하여 남성 광대 혼자서 부르던 판소리는 20세기 초에 남창과 여창으로 나누어졌고, 이어서 각각의 배역을 나누어 부르는 대화창으로 발전했으며, 마침내 많은 연기자들이 무대에 올라 각자 배역을 맡아 오페라 또는 뮤지컬 형식의 창극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판소리에 관한 이야기는 이상으로 마치려한다. 고창, 전주, 남원 출장기는
태진아의 <가버린 사랑>과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로 대신하니 즐감하시길. 참, 영화 <서편제>를 못 보신 분들께서는 유튜브에 ‘서편제 Sopyonje (1993)’를 입력하시면 됨. 비교적 괜찮은 화면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음.
<쑥대머리-안숙선>
첫댓글 우리나라 판소리에 대하여 많이 배웠습니다.
절(寺)에서 하는 말씀이 시(詩)이다. 글쎄요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참 재미 있는 표현입니다.
안성 8명창에 권삼득이 있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