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자
화순-장재철, 전정일, 김삼중, 강해중, 유춘화, 김동식
나주(남평, 효천)-김재홍, 왕태경, 해정구,
장재춘, 김재진, 황남열, 배성진, 박행삼
담양(교도소)-최열락, 채종일
피란민들에게까지 무차별 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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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진압작전에 참가했던 부대의 지휘관들이 작성한「광주사태 체험수기」표지.「5·18 수사기록」에 편철되어 있다. |
송정리 방면으로 통하는 화정동, 화순 방면의 지원동(주남마을), 목포 방면의 송암동, 여수·순천 방면의 문화동, 31사단 방면의 오치, 장성 방면의 동운동, 광주교도소 일대 등 7개 주요지점에 軍이 再배치되었다.
전남大에 주둔 중이던 3공수여단은 5월21일 17시30분 광주교도소에 도착하여 보병 31사단의 교도소 경계임무를 인수받았으며, 화순 방면의 주남마을에는 7공수와 11공수가 주둔했다. 그 밖의 지역에도 보병 20사단 병력이 증파되어 배치되었다.
21일 20시를 기해 광주市 외곽지역은 계엄군에 의해 완전 장악되어 他 지역과의 왕래가 일절 불가능해졌다. 계엄군의 만행에서 벗어난 광주市가 평화로운 해방의 도시였던 반면, 市 외곽에서는 계엄군의 만행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주남마을, 송암동, 화정동(국군통합병원 앞) 양민학살이 모두 5월22일부터 24일 사이에 외곽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아들딸을 찾아 광주로 들어오거나 광주를 벗어나는 피란민들에까지 계엄군들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승용차에 백기를 꽂고 가거나 그들의 요구에 따라 일단 정지한 사람들에게도 막무가내였다.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피신을 가던 강해중씨는 지원동 버스 종점 부근에서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양 눈을 실명했고, 황남열씨는 송암동에서 군인 대위에게 통과 허락을 받고 남평 근교까지 갔으나 그곳 야산에 매복해 있던 계엄군에게 집중 사격을 받아 운전사는 사망하고 본인과 부인은 부상을 입었다.
시위를 확산시키고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오가던 시위차량들이 집중공격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거나 부상을 당한 것은 물론이다. 남평으로 가는 길목에는 차들이 길가나 논바닥에 처박혀 있고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피란민들과 영암·나주·목포 등지로 나갔던 시위차량들이 5월21일 밤부터 돌아오다가 공격을 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