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아마도 1978 년부터 15 회 이상 다닌 것 같다.
도쿄, 오사카, 고베, 교토, 삿보로, 후쿠오카, 오키나와, 돗도리, 히로시마, 요코하마, 구마모도, 오카야마 등. 아마도 출장과 여행으로 반반 정도인 것 같다.
처음 도쿄에 갔을 때는 동경역 근처 호텔에 있었던 것 같은데 회사도 그 근방이어서 점심때 동경역 지하에 가면 음식점과 상점이 아마도 수백개는 되는 것 같은데 한번 간 식당을 그 다음날 찾지 못할 정도로 번화 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도 동경역전에 우동이 유명하다 해서 밤늦게 가서 사먹은 적도 있는데, 맛은 별로 였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똑 같겠지만. 사실 일본은 아주많은 교류가 있었지만 가장 싫어 하는 나라이다.
1978 년 처음 출장가서 미스코시인가 뭔가하는 백화점에 갔을 때가 인상 깊이 남는데 좋은 물건이 아주 많이 쌓여 있는게 한국 백화점과 달렀던 것 같다. 게이샤가 나오는 술집에도 가보고, 라이브쇼도 가보고, 초창기의 가라오케 등등 ....
오사카에 갔을 때 업무를 마치고 직원들과 오사카성엘 구경 갔는데 맨 위층에 가니 풍신수길 의 약력이 홀 중앙에 세로로 길게 써 있는데 1592 년 조선 1 차 정벌 그리고 몇 년후 조선 2 차 정벌이란 글귀를 보고 직원들에게 다시는 오사카성에 오지도 말자고 하며 나왔지요.
2012 년 경에 다시 그곳에 갈 일이 있어서 일행이 코스로 된 여행이라 오사카성 에 가서 보니 정벌이란 단어가 진출로 바뀌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말이 그 말인데 약간 순한 말로 바뀐 것 같다.
고베 대지진이 난 거의 1 년후 그곳에 출장 갔을 때는 고가 도로가 무너진 것을 볼수 있었고 새로 은행 빚을 내서 집 지은 사람은 국가에서 보상도 안 해주고 완전 망했다는 얘기도 들었던것 같다.
북해도에 갔을 때 가이드가 하는 말이 북해도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1800 년경이나 되어서 일본 막부가 관리를 시작했는데 그곳에 눈만 쌓여있어서 먹고 살아갈 식량을 새로 개발 하려고 미국에 요청했는데
미국에서 남작( 귀족)을 파견해 주었는데 이 사람이 삿보로에 와서 감자를 재배하기 시작해서 남작 감자라고 하며 우리나라에 까지 보급되었다고 한다. 일본은 섬나라이어서 바람이 많이 불고 먼지가 거의 없으며 와이셔츠도 이삼일 입어도 와이셔츠가 깨끗했던 것 같다.
일본 사진은 여러분들이 많이 보아 오던 것이라 생략 합니다.
일본은 2 차 대전때 패전으로 인해 아주 망했는데 한반도에 5000년 역사상 최고 돌대가리인 김일성이 일으킨 한국동란으로 인해 한국이 피폐화 되고 일본은 패전 6 년만에 산업을 일으키고 완전히 큰돈벌고 노가 나게 된다. 옆에 나라가 전쟁이 일어나면 돈을 버는 상황이 벌어진 것임, 일본 에는 언제나 이런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을지.
일본 출장이나 여행을 다니며 왜 일본이 한국보다 더 잘사는지 생각해 보았는데, 임진 왜란때부터 더욱 차이가 벌어진 것 같다.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로 천도 한후 그곳에는 은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당시에는 은값이 금값처럼 가치가 높아서 유럽까지 일본이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고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조선에서 훔쳐간 도자기 기술로 도자기를 만들어 유럽에 수출하여 그곳 은행에도 구좌를 만들어 국부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일본은 평야가 많고 바다도 넓어 식량 확보에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부의 축적으로 인해 힘의 논리가 극대화되던 20 세기 초에 힘을 비축하게 되었고. 청일, 노일 전쟁에서 실전 경험을 쌓고 난후, 그 결과가 미국에 까지도 한판 붙자고 했는데, 원자폭탄 2 방 맞고 항복한 것으로 결론이 났지요.
일본사람들은 2 차 대전을 일으킨 나치와 히틀러와 비교되는 일본 왕을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다.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독일인 중에 별종 하나로 생각해서 잊어버리고 싶은 잘못된 사람으로 생각하는 반면 일본인들은 일본 왕을 그들의 삶에서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자기 자신과 조상으로 생각하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특히 일본은 기독교 인구가 전국민의 1 % 정도 박에 않된다. ( 대한민국은 신구교 합쳐서 25 % 정도) 즉 신사참배 (전통신앙)에 더욱 집착되어 있다.
이런 종족옆에 사는 우리 조선( 대한민국) 이 잘 생각하고 국론을 이끌어 나가야 할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동창분들도 이주제에 대해 혹시 비슷한 의견이나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귀하게 경청하겠습니다.
일본 도자기
일본은 조선 도공의 납치로 자기 기술 확보 후 자기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조선 도공 이삼평으로 하여금 도자기의 주원료인 고령토를 일본 내에서 찾게 하고 1616년 이삼평이 일본 아리타의 이즈미 산에서 고령토를 찾을 때까지 18여년의 긴 기간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조선에서 건너간 도공들에게 곡식과 집을 주고 녹봉을 지급하는 등 그들이 일본에 정착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들이 기술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생산에서도 전통의 방식을 탈피하여 분업화를 통한 대량 생산방식의 변화를 꾀하여 일본의 최초 자기 생산 후 끊임없이 자기 기술을 향상했다.
1644년 명·청 교체 시기 유럽에 수출되어 막대한 이익을 남기던 중국 도자기가 정세의 혼란으로 수출길이 막혔을 때 기회를 잡은 것은 일본이었다. 중국 도자기를 실어 나르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중국을 대신하여 도자기 생산에 성공한 일본에 중국풍 청화백자를 주문하고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의 수출 길을 연 것이다.
그 후 중국 도자기의 재생산으로 중국풍의 청화백자의 수출량은 급감하게 되었지만, 일본은 중국 도자기와 차별화되는 상품으로 유럽 시장을 점령해 나갔다. 이는 채화 자기로 기존의 청화 백자와는 달리 붉은색, 노란색, 녹색 등의 안료를 첨가하여 일본만의 색채를 만들어 냈다. 또한, 도자기의 기형에서도 그릇, 화병, 촛대, 사람 인형, 동물 인형 등 다양해졌으며 일본풍을 유지하면서도 유럽인들의 취향을 파악하여 코끼리 인형 등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상상 속의 동물도 도자기로 만들어 수출하였다. 유럽 사람들은 일본 도자기에 반하여 막대한 양을 수입하였으며 나중에는 중국 도자기가 아닌 일본의 도자기를 모방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입니다.
첫댓글 일본,,, 참 미운 나라지요.!!
허나 알고도 당하는게 더 어리석은게 아닌가??
배일(排日)이 아니라 용일(用日)을 해야하지 않나요.
작금,, 우리가 반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관광객으로 일본 가는 한국인과 한국에오는 일본인 숫자가 2019 년에 대충 600만대 150 만 정도로 알고 있는데
이런것부터 우리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