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평
- 빗금을 긋고, 다시
정재훈(문학평론가)
갈림길 중 하나로 들어서는 것은 외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생겨난 수많은 가능성들을 만나러 들어가는 길입니다. 가능성이란 계속 나뉘는 길 중에서 도착지를 알 수 없는 한 줄기 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가능성이란 항상 쉬지 않고 변화하는 전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가 사라졌다. 이 말은 코로나가 종식이 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염병으로 휘몰아친 공포가 사라졌고, 동시에 낯선 사태로 인한 우리들의 각성과 윤리적 긴장 또한 사라졌다는 의미다. 갑작스러운 사태로 인해 국가 의료 체계가 마비되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은 이웃들이 있었고, 과로사로 숨진 의료인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일상을 잠식하며 곳곳에 치명적인 상흔을 남기고 간 바이러스처럼 누군가를 향한 혐오와 공격이 퍼져나갔음에도 어떠한 사과나 보상은 없었다. 그야말로 시민이자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와 책무는 훼손된 채로 망각의 격리에 처해 방치되었다.
모든 것들을 휩쓸고 지나갔던 이 황망하고 참혹한 사태가 남긴 폐허 위에서 (과거의) ‘복원’은 무의미할 따름이다. 무엇을 복원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더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전망이 우세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고 점차 가속화될 것이라고도 했다. 자본은 코로나라는 위기 앞에서도 자신의 유연성을 십분 보여주었다. 사람들의 불안을 파고들면서 비대면의 새로운 시장성을 발견하게 되고, 플랫폼과 인공지능 등이 대두되면서 인간을 대체할 명분이 생겼다. 모두가 시스템의 붕괴를 예상했지만, 오히려 더 견고해지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어쩌면 위기는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어떤 햇살도
이곳의 어둠을 밝히지 못한다
오직 굶주림이다
그믐도 한창 깊은 계곡
먹을 것 하나 없는 혹풍한설이다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눈보라에 흔들리는 때죽나무보다
그 가지에 빌붙는 굶주림이 무섭다
또 한 번 밤이 뉘우치듯 지나간다
둘러보아도 숨을 곳 없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벌판,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굶주림
밤새 물어뜯는 피 흘림이다
동료가 동료를 배반하는 계절
숨은 먹거리를 찾아 내려가야 한다
슬금슬금 그림자를 끌고 내려가야 한다
마지막 피 흘림의 순간이
아무렇게나 마련된다고 해도
― 임동윤, 「야만의 그늘」(문예바다, 2023년 봄호)
위 시의 절망감은 햇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처럼 짙다. 야만의 그늘을 포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전의 문명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근대(빛)의 찬란한 명분으로 내세웠던 야만(어둠)이, 문명으로 인해 종식되었다고 여겼던 그 야만이 다시금 그늘을 드리우며 민낯을 드러냈다. 위 시에서 인간은 “승냥이”로 격하된다. 폐허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은 벌판”에 남겨진 이들에게 안식처는 없다. 어디에도 몸을 숨길 곳이 없는 상황보다 더 절박한 것은 “굶주림”이다. 이것이야말로 폐허를 지배하는 주인이며, 모든 폭력의 명분이다. 그렇게 혹독한 겨울을 나야 하는 절망감이 서서히 적의敵意를 덧칠해나가고, 서로가 서로를 “배반하는 계절”이 펼쳐진다.
살육이 벌어지고, 여기저기서 배반의 비명이 난무하지만 굶주림은 조금도 해소될 기미조차 없다. 그럼에도 위 시의 광경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그림자와도 같은 마음의 동요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뉘우침’이다. 굶주림으로 폐허가 된 이곳에서 완전히 메마른 줄 알았던 윤리적 감정의 흔적은 과연 무엇을 뜻할까. “밤새 물어뜯는 피 흘림”이 멎고, “슬금슬금 그림자를 끌고 내려가야”만 하는 뒷모습을 비춘 것은 과연 어떤 빛이었을까. “어떤 햇살”이 사라진다고 하여도, 밤하늘에 뜬 희미한 별빛으로 인해 짊어지게 된 그림자의 무게는 여전히 이들에게 일말의 양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분명한 사실은, 이 배반의 계절 또한 언젠가 지나간다는 점이다.
겨울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어제는 이 계절이 얼른 지났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 년 전의 오늘은 내가 나를 가두고 있었는데 그런 기분으로 하루를 살았는데 일 년 후의 지금도 그런 기분으로 하루를 사는 것 같아 종종 아픕니다. 고민과 생각과 그런 상태의 내 건강에 마음이 쓰이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나는 답보 상태라는 진단을 내립니다. 그런 나에게 마음이 쓰여 이 계절이 얼른 지났으면 하는 생각을 했나 봅니다. 올해는 나아질 거예요. 눈앞에서 읽힌 명확한 문장은 올해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아픈 문장으로 되돌아올 것을 압니다. 여전히 나아질 거라는 불확실한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실체 없는 믿음으로 계속해서 견디는 나. 내년에는 나아질까요. 그랬으면 합니다. 일 년 후에도 같은 생각을 한다면 아마 이후의 몇 년도 나는 같은 생각으로 다른 고민을 여전히 견디면서 살고 있을 겁니다. 올해는 나아질까요. 나아질 거예요, 올해는.
― 권기선, 「올해는 나아질 거예요」(포지션, 2023년 봄호)
위 시에서도 “겨울”은 화자에게 혹독한 시련으로 다가온다. 폐허와도 같은 곳에 화자는 스스로를 가두어 살고자 했었고, 그렇게 하여도 자신은 충분히 감내할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주변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해갔음을 목도했다. 그때마다 고민과 생각을 짊어졌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고통도 사실은 매번 같은 강도는 아니라서, 이것 또한 가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겨울나기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어도 그렇게 갇힌 육체를 둘러싼 침묵은 여전하다. 죽지 않았지만, 죽음에 가까운 예행(겨울나기)으로써 침묵은 더 깊어진다. 정답이란 없는 고민과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을 배회하듯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어느 쪽으로 향할지 알 수 없는 이 “답보 상태”는 아이러니하게도 “불확실한 믿음”을 더욱 견고하고 무겁게 한다.
맹신처럼 보이겠으나, 적어도 화자에게 이것은 수없이 반복하여 터득하게 된 ‘진단법’에 따른 것이다.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고민과 기분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어제와 오늘 모두 같을 수만은 없다. “일 년 전의 오늘”을 살았던 기분과 “일 년 후의 지금”을 사는 기분의 격차를 주목해 보자. 전자의 기분은 과거에 분명 화자가 느낀 것이지만, 후자의 것은 ‘∼것 같은’이라는 추측형의 상태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예측이 어긋나도 상관없었을 테다. 그저 지금까지 터득한 진단법에 또 하나의 사례가 추가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화자의 진단은 “올해는 나아질 거예요.”라는 문장을 계속해서 빗겨 갈 것이다. 문장에 감춰진 아픔을, 그 실체 없는 것을 직감하며 그때마다 오독을 새롭게 반복해 나가면서 말이다.
빗금 그어진 문장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림자와 그늘이 구분되지 않고
햇살과 전등 빛이 분간되지 않을 때
시점이 사라지고
점점 흐려지는 소실점
더 이상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고
서로의 거리를 알 수 없게 되고
길이 모이는 곳에서 만나자던
약속이 사라질 때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자
누설하지 않았던 혼잣말
모르는 세계의 첫 언어처럼 발음하며
다시 서로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눈에 담으며
낯선 질문을 하듯 이름을 부르면
대답으로 새로운 문장이 태어날 거야
빗금은
새로운 행과 연이 시작되는 지점
빗줄기는 사선을 그리며 내리고
별들은 기울어지며 흐르네,
넝쿨은 비스듬히 타올라 담장을 넘지
세상의 층계는 모두 빗금을 닮아서
뒤집으면 위로 향하던 계단들이
새로운 방향으로 비스듬하게 서겠지
그러니
빗금으로부터
― 김지윤, 「빗금으로부터」(현대시, 2023년 4월호)
여기, “빗금”이 그어진 문장이 눈앞에 있다. 이것은 문장이 틀리거나 잘못되어서 그어진 것이 아니다. 위 시의 화자에게 빗금은 “새로운 문장”의 도래를 암시하는 표식일 수 있지만, 이것이 그어졌다고 해서 기존의 문장이 완전히 지워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빗금 아래의 기존 문장은 새로운 문장을 태어나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수없이 빗금을 치듯 혀끝을 맴돌았던 “혼잣말”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말이 당신에게 닿을 수 있는 것이고, 별빛의 유유한 흐름을 지상에서 올려다볼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어둠에 눈이 오랫동안 적응되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세계의 첫 언어”와 “낯선 질문”도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와 질문에 빗금을 긋는 것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 가만히 보면 빗금이 마치 길처럼도 보인다. 언젠가 “길이 모이는 곳에서 만나자던 / 약속이 사라질 때”야말로 비로소 또 다른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후에 어떠한 것으로도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약속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늘의 약속은 내일의 약속을 위해 빗금이 그어지며 유예된 것뿐이다. 그렇게 각자가 길을 걸었던 시간이 이어지다가, 다시 길이 모이는 곳에서 만나 서로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눈에” 담으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모였다가 흩어지며 여러 갈래로 뻗은 이야기는 그것이 “시작되는 지점”이 어디였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로 점차 흐릿해질 것이다.
새로움은 기존의 것들을 거칠게 긋고 부정하여 열리는 것이 아니다. 빗금은 그것을 긋는 주체에 의해 독점됨으로써 완전히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열어놓는다. 누군가가 그은 빗금을 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위에 자신만의 문장을 써넣을 수도 있는 것이다. ‘코로나’라는 위기가 우리들이 알던 모든 것들에 빗금을 긋도록 강요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누군가에 의해서만 독단적으로 결정되거나,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던 인간적인 가치와 의미까지 까맣게 지워져서는 안 된다. 새로운 문장과 이야기를 쓰더라도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어디였는지를 잊지 않는 노력. 그리고 앞으로 주어진 길이 어떤 외길이거나 막다른 길이 아니라, 서로를 다시 만나게 해줄 것이라는 상상. 위기에 맞서고자 하는 인간다운 노력과 상상은 이러해야 한다. 그리고 이 노력과 상상의 새로운 이름은 바로 ‘믿음’이어야 할 것이다.
정재훈 |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으로 등단. 공역 ‘재일’이라는 근거(다케다 세이지, 소명출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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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경희대학교, 광운대학교, 연성대학교 강사
공역, ‘재일’이라는 근거(다케다 세이지, 소명출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