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최저기온 -16℃, 우리가 잠시 쉬어간 강원도 홍천은 -20℃, 백두대간을 넘어 도착한 목적지 양양은 -12℃로 기세등등 2월의 매서운 추위가 정신을 후딱 깨우는 날, 우리는 춘천교구의 양양 성당, 강릉에 위치한 행정 공소, 임당동 성당, 강릉 대도호부 관아를 순례하였습니다. 한기가 피부에 콕콕 스며들고 지나가는 바람이 간지럽히듯 몸을 떨게 했지만 어쩐지 이따위 추위야 어떠랴 싶은 마음으로 상쾌한 걸음을 내딛은 날이었습니다.
양양 성당
2019년 3월에 우리 순례단이 방문한 적이 있는 양양 성당은 영동 지역 최초의 본당입니다. 백두대간으로 가로막힌 지리적 여건 탓에 타 지방에 비해 복음이 늦게 전파된 영동 지역은 병인박해를 피해 백두대간을 넘어온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 신자들이 터를 찾아 정착하면서 신앙이 전파되었습니다. 당시 형성된 범뱅이골(양양), 싸리재(속초) 등의 교우촌에 뿌리를 두고 1921년에 양양 성당이 설립되었으며 2015-2016년에 전대사 성당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양양 성당은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의 기념관이 자리한 성당입니다. 이광재 신부는 1909년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냉골에서 태어나 1936년 3월에 사제품을 받고 1939년 7월에 양양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습니다. 해방 후 38선 이북에 위치한 성당이 1948년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으로 공산당에 의해 종교박해를 받게 되자, 이광재 신부는 단 한명의 양도 북쪽에 남기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수녀, 신학생, 신자들이 무사히 38선을 넘어 남으로 가도록 돕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 발발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에 평강 지역의 신자를 위한 미사 중에 체포되어 1950년 10월 9일 새벽에 원산 방공호에서 인민군이 난사한 집단 학살의 총탄을 맞고 쓰러집니다.
이광재 신부는 두개골이 파손되는 상처를 입고도, 아비규환 속에서 물을 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비명에 ‘응, 내가 가요... 응, 내가 가요....’ 하며 무의식중에서도 또렷한 목소리를 내었다고 합니다. 스무번 남짓한 대답을 이어가던 끝에 순교하신 이광재 신부는 41세의 나이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사제복도 없이 입은 옷도 내어주는 청렴한 삶을 살며, 양들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신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하여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맡은 양들을 사랑한 그의 치열한 삶이야말로 예수님의 삶 그 자체가 아닐지 곱씹어보게 됩니다.
기념관에는 이광재 신부를 기념하는 갖가지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요한복음 전체 내용을 커피로 필사하여 만든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의 초상화입니다. 그림 중간 즈음에 또렷하게 드러낸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라는 복음 문구는 이광재 신부의 삶을 통째로 증명하는 상징이겠지요. 양양 성당 김창기 안토니오 사무장님의 열심한 해설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행정 공소
접시 위 반찬을 싹싹 비우며 맛있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강릉의 행정 공소로 향합니다. 박해 시대의 교우들은 오지로 숨어들어 그릇이나 숯을 구우며 살았는데, 행정 공소는 그러한 우리 교회사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옹기마을 신앙촌인 행정 공소는 1924년경에 옹기점 마을 회장이었던 김세중 라파엘이 일가를 데리고 양평에서 이주하여 옹기점 교우 마을을 이루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아들과 손자까지 3대에 걸쳐 공소 회장을 맡으며 전교에 힘써 한때 마을 50세대 전체가 교우들이었다고 합니다.
행정 공소는 처음에는 목조 건물이었으나, 1958년에 신자들이 힘을 모아 옹기를 굽는 가마에서 흙벽돌을 구워 공소 건물을 지었습니다. 인근 지역에 두 개의 공소가 더 설립되어 신앙촌이 활성화되었으나 1970년대에 들어와 옹기점이 사양화되면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인근 도시와 서울 등지로 이주하면서 쇠퇴기를 맞이했습니다. 오래 방치되어 손상되었던 공소 건물을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춘 후, 2004년 10월 28일 장익 주교가 중창식을 하였습니다.(중창: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지음) 춘천 교구는 옹기 마을 교우촌이면서도 오지 벽돌(벽돌 표면에 유약을 발라 구워 도기같이 코팅이 된 것처럼 매끄러운 벽돌)로 지어진 행정 공소 건물을 교구 사적지로 지정하여 2009년에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임당동 성당
병인박해 이후 충청, 전라, 경기도의 신자들이 피신해 오면서 영동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강릉 지역에는 많은 공소와 본당이 설립됩니다. 1921년 5월에 양양 본당이 설립되고, 12월에는 금광리 본당이 설립되어 강릉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금광리는 거주에 적당치 않고 발전 가능성도 적어 주문진으로 본당을 이전합니다. 그러나 주문진에서의 전교 역시 활발하지 않고 지역적으로도 강릉의 발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 되면서 1929년 1월에 주문진 성당이 화재로 전소되자 강릉시 임당동으로 본당 이전 준비를 합니다.
1934년 강릉으로 이전된 본당은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며 발전을 거듭해 1974년 11월에 옥천동 본당을 분가시키며 본당 명칭을 임당동 본당으로 바꾸고, 2001년 12월에는 춘천교구 대희년 전대사 지정 순례지로 지정되었습니다.
1955년에 준공된 임당동 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강원 지역 성당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건축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아담한 임당동 성당은 수차례 창, 지붕, 바닥 등을 보수하였지만, 정면 중앙부 종탑을 비롯한 외형이 건축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장식 또한 독특하여 2010년 2월 19일 우리나라 근대문화유산(국가 등록 문화재 제457호)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지난번 나바위 성지에서 처음보았던 성석이 강릉가톨릭역사박물관의 유물 기념관에 있었습니다. 못보신 분들 자세히 보시면 좋겠어요. 나바위성지의 성석과는 또 조금 다른 위치에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네요.)
임당동 성당에는 네 분의 순교자가 계시는데, 현재 시복 추진 중이신 심능석 스테파노와 이유일 안토니오, 김교명 베네딕도 신부, 라 바드리시오 신부를 기억해야 합니다.
심능석 스테파노는 현재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시복 청원되어 있으며, 병인박해 당시 문초를 받는 동안 단 한 명의 교우도 밀고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이유일 안토니오는 남종삼, 홍봉주, 김면호와 함께 대원군에게 이이제이방아책을 권유한 인물로,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강릉으로 피신했으나 심능석과 함께 체포되어 4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는 일제 강점기 말의 교회 탄압과 광복 이후의 공산 치하를 모두 겪은 사제로, ‘신자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며 월남 권유를 거부하며 의주 본당에서의 사목을 이어가다가 1950년 6월 25일에서 26일 새벽 사이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연행된 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유엔군에 의해 북한 인민군이 후퇴할 때 처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라 바드리시오 신부는 1949년 묵호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영어도 가르치며 사목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자 교우들이 배를 마련하여 피난할 것을 청했으나, “양들을 버리고 목자가 혼자 도망 갈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공산군이 들어오자 라 신부는 전교 회장 집의 작은 골방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몰래 미사를 봉헌하였으나 자신으로 인해 교우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을 염려하여 결국 공산군에게 체포되었고, 미국 간첩으로 몰려 매질을 당하며 끌려가 묵호에서 강릉으로 이송되던 중, 아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불안해하던 공산군에 의해 밤재굴에서 총살당해 순교했습니다. 라 신부의 유해는 땔감을 구해 산에서 내려오던 동네 노인에게 발견되어 언덕 위의 비탈진 곳에 가매장되었으며 그 후 군종 사제와 교우들이 도로변에 묻힌 라 신부의 유해를 찾아내 묵호 경비사령부 앞에 매장하였다가 묵호 성당으로 옮겼고, 이듬해 춘천 죽림동 성당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하였습니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역시 19년 3월에 우리 순례단이 방문하였던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로, 1994년 강릉 임영관지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11월에 강릉 대도호부 관아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객사문인 임영관 삼문(국보 제51호), 칠사당(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 이외에는 대부분 훼손된 것을 복원하였습니다. 이곳은 현재의 시청과 같은 역할을 하였지만 사법 기능도 갖춰 죄인을 심문하거나 옥에 가두어, 박해 당시 심문을 당한 천주교 신자들이 옥에서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병인박해시 심능석 스테파노, 이유일 안토니오 등이 잡혀 서울의 좌포도청으로 옮겨져 순교했을 때, 서울 이송 전에 이곳 강릉 대도호부 관아를 경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임영관 삼문과 칠사당은 오랜 역사를 버티며 예전 모습의 고즈넉한 한옥 자태로 후손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특히 칠사당 앞의 508년 된 보호수는 예전 우리 신앙 선조들의 모진 고초를 고스란히 지켜본 증거자로 묵묵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뜻깊은 순례를 위해 아침 콩떡을 마련해주신 유재순 안나마리아 어르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고령이신데도 젊은이들 못지 않은 열정으로 항상 여정에 함께 해주시고 계신 안나마리아님 존경하구요, 유난히 맛있고 따뜻한 한끼였습니다. 고소한 롤과자를 듬뿍 준비해주신 송삼옥 도미니카님께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또한 어김없이 정성을 다한 매듭묵주를 봉헌해주신 일상성당 매듭 묵주팀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양양 성당의 이명호 베드로 신부님께서 깜짝 놀라시며 고맙게 받으셨습니다.
오늘 우리 순례단은 백두대간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따뜻한 영동지방으로 2월 순례를 떠났었는데요. 하지만 역시나 2월! 추웠지만 수도권이나 내륙의 맹추위는 벗어날 수 있었던 좋은 선택지이지 않았나 합니다. 크게 바스라지던 안목 해변 겨울 파도의 장관 역시 한 잔의 커피로 누리며, 우리의 순례 여정에 쉼표 하나 찍어주는 소소한 행복 시간이었습니다. 단원들이 한 봉지씩 들고 와 나눔한 뻥튀기 과자가 빠각빠각 부서지며 내는 소리가 버스 안에 가득했던 행복한 시간이 아직도 생각나네요. ^^
봄 가을은 이제 우리나라에서 사라지는 중이라고 합니다. 사계의 행복도 우리 삶을 풍족하게 해주는 자연의 행복임을 느끼고, 열심히 누리며, 하느님 사랑으로 또다시 힘차게 살아보아요. 건강 잘 챙기시고 3월 순례에서도 반갑게 만나요~!
첫댓글 성지 도착전 예습.
톡방에서의 복습.
카페에서의 마무리.
뒤돌아서면 잊어버리지만 오늘도 다시한번 총정리하고 갑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매달 글라라님의 글과 사진으로 순례의 확실한 마무리를 합니다.수고에 항상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