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종원(盧從元)
1535년(중종 30) ~ 1583년(선조 16),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순백(順伯), 호는 매헌(梅軒)으로 거주지는 청주(淸州)이다. 조부는 주부(主簿)를 지낸 세보(世輔)이며, 부친은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경기(景麒)이다.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1569년(선조 2) 임실 현감(任實縣監)에 제수되고, 이어 1571(선조 4) 형조 낭관(刑曹郎官)으로 체환(遞還)되었다가, 의성 현령(義城縣令)으로 도임하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선생의 문집을 개간하여 각판을 의성서원(義城書院)에 보관했는데, 이는 선생의 관향(貫鄕) 의성(義城)이고, 선생의 사당을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
1577년(선조 10) 전라 도사(全羅都事)에 임명되어 겨울에 천안군을 다스리게 되었으나, 길가 고을로 일이 많고, 부모 봉양(奉養)에 불편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1580년(선조 13) 금산 군수(錦山郡守), 지평(持平)을 지냈는데, 전후로 맡아서 다스린 고을 모두가 모두 명성(名聲)과 치적(治績)이 있었다.
체화당사(棣華堂祠)
체화당사는 숙종 27년(17010에 송헌(松軒) 노계원(盧繼元, 1532~1586), 국헌(菊軒) 노후원(盧後元, 1533~1592), 지평(持平) 매헌(梅軒) 노종원(盧從元, 1535~1583), 죽헌(竹軒) 노일원(盧一元, 1539~1611)등 4형제의 위폐를 봉안하고 설립한 서원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기록에 따르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이들 4형제의 남다른 우애를 보고 선조(宣祖)에게 아뢰니 선조가 친히 "逮華堂"이란 어필(御筆)을 써서 그 집에 걸도록 하여 당호(堂號)가 되었는데 나중에 그들의 사당인 체화당사가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집과 현판이 불에 타 숙종 27년(1701)에 다시 세우고 영조 37년(1761)에 서암(西菴) 노덕원(盧德元, 1549~1629)을 추향하였는데 원생(院生) 17명을 둔 사원(祠院)이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에 사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는데 1967년 남일면 신송리 큰뫼마을에 다시 세우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중정일(仲丁日)에 향사하고 있다.
지금 서원은 1967년 중건하고 1988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반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다. 사당 안에는 1967년에 권용직(權容稷)이 짓고 이범규(李範圭)가 쓴 "체화당중건기"를 걸었고 밖에는 "체화당사"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마당 앞에 솟을 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그리고 사당 옆에는 이우겸(李宇謙)이 짓고 성영(成泳)이 써서 숙종(肅宗) 45년(1719)에 세운 체화당사적비(逮華堂事蹟碑)가 비각 안에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