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의 동시와 아포리즘
박 일
1.
소설가 황순원(1915〜2000)이 동시를 썼다는 사실은 한국 동시단에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동시인도 흔하지 않다. 물론 황순원의 동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도 이루어진 적도 없다. 『오늘의 동시문학』에서 50호 발간 기념으로 황순원의 동시를 재조명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이는 한국 동시의 지평을 넓히는데 의의가 있다는 생각에서 황순원의 동시를 살펴보기로 했다. 조연현의 『한국현대문학사』(성문각)를 뒤지기 시작했다. 나의 지금까지 외면에 반감이라도 가졌는지 퀴퀴한 종이 냄새가 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황순원은 만나야 했다.
『삼사문학』이 자연 해방상태에 있을 1936년에 『창작』과 『탐구』의 두 동인지가 나왔다. 전자는 김병기, 황순원, 주영섭, 정병호, 장영기, 한천, 박동근, 신백수, 한적선이 그 동인이었고, 후자는 신백수, 정병호, 이용우, 이시우, 최인준, 주영섭, 한태구 등이 그 동인이었다. 『삼사문학』의 자연 해방과 함께 『삼사문학』의 동인이던 한천과 그리고 평양 근지 출신인 황순원, 주영섭 등과 합작한 것이 『창작』이었고, 『창작』이 동년 4월에 2호로서 다시 폐간상태에 들어가자 그 5월에 과거의 『삼사문학』 중심동인과 『창작』 중심동인들이 결합하여 새로이 내놓은 것이 『탐구』였다.
이 양지(兩誌)는 그 동인구성이 유사하고, 간행 시일이 같은 시기인 관계로 인해서 제호만 다른 동일한 동인지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양지에 주로 시를 쓴 사람은 황순원, 주영섭, 정병호, 장영기, 한천 등이었고, 소설을 쓴 사람은 신백수, 조풍연, 이용우, 최인준 등이며, 희곡을 쓴 사람은 이시우, 박동근 등이었다.
이 때 만21세였다. ‘시를 쓴 사람은 황순원’이라고 했으니까 시를 먼저 쓴 것이 분명하다. 아마 시작업을 통하여 소설가의 꿈을 키우면서 삶의 경륜을 쌓아가고 있었으리라. 그 이전에도 작품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1931년『동광』이라는 잡지에서 시 「나의 꿈」을 발표하였다. 만16세였다. 참고로 『동광』은 1926년에 창간되었던 월간 종합잡지인데 편집 겸 발행인은 주요한이었다. 사회주의 운동을 표방하였던 잡지들에 맞서 안창호의 흥사단(興士團)을 배경으로 창간되었고, 1933년 1월 통권 40호로 종간된 잡지다. 민족주의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문학작품도 많이 발표하였는데, 문예면에 활약한 작가로는 주요한, 이광수, 김억, 주요섭, 김동환, 김동인, 양주동 등이었다.
1940년 『황순원 단편집』을 간행하면서 소설가로서 입지를 분명히 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시작(詩作)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시적 감정과 정서를 소중히 했기 때문에 시와 소설을 병행할 수 있었다. 아마 1931년부터 1940년까지는 시작에 더 집중한 시기였다. 시집 『방가(放歌)』(1934)와 『골동품』(1936)도 이 때 상재했었다.
1930년대는 일제강점기였지만 한국의 현대문학사에 있어서 지극히 중대한 시기였다. 조연현은 그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30년을 전후해서부터 1935년을 전후한 그 전반기는 동인지문단시대가 사회적문단시대로 변하고, 습작문단이 작가문단으로 바뀌고, 순문학과 대중문학이 분립되어 문학의 예술적 경향과 오락적 경향이 확연해짐으로써 처음으로 한국의 현대문학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된 시기이며, 1935년을 전후하면서부터는 그 후반기는 전반기의 문학적 수준이 확대심화되는 동시에 종래까지 근대문학적인 성격 위에 놓여 있었던 한국문학이 처음으로 현대문학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한 때문이다.
2.
사춘기 성장통을 겪을 때 황순원의 「소나기」에 얼마나 매료되었던가. 시골 소년과 도시 소녀의 청순하고 깨끗한 사랑이 아직도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듯하다. 깔끔하고 간결한 문체도 극적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었다.
개울물은 날로 여물어 갔다.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 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서당골 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 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로 수없이 갈꽃을 휘어 꺾고 있었다.
-「소나기」 부분
월간 『문학사상』(2010년 7월호)이 1931년 3월부터 1932년 4월까지 동아일보에 발표한 황순원의 동요 ‘봄싹’ 등 8편과 단편소설 ‘추억’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양지쪽따스한곧 누른잔듸로
파릇한풀싹하나 돋아나서는
봄바람살랑살랑 장단을맞춰
보기좋게춤추며 걔웃거리죠
보슬비나리면은 물방울맺혀
아름다운진주를 만들어내고
해가지고달뜨면 고히잠들고
별나라려행꿈을 꾸고잇어요
-「봄싹」
황순원은 평양 근처인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중학에 다닐 때 '평양 글탑사 황순원' '숭중 황순원' 등의 이름으로 독자투고를 하기 시작했다. 이 때 발표된 작품들이 대거 발굴되었다. 권영민 서울대 교수는 "문단에서는 그동안 선생의 문필활동이 1931년 시 창작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알려져 왔으나 이번 발굴로 그 범위를 한정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16세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78세까지 작품을 쓴 황순원은 시 104편, 단편 104편, 중편 1편, 장편 7편을 남겼다. 황순원은 경희대 교수로 23년 6개월간 재직했다. 그의 제자인 김종회 교수는 시 104편 중 10여 편 이상을 동시풍의 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확실하게 ‘동시’라고 하지 않고 끝까지 ‘동시풍’이라고 하는 것은 과연 동시의 기준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나의 역량 부족일 것이다. ‘황순원이 시는 물론이고, 동시도 썼다’ 이 부분에 대해선 학자들과 비평가에게 맡긴다고 했다. 동시작가 박두순도 이에 동의하면서 10여 편은 동시라고 확신하였고, 동시작가 서금복도 이를 규명하기 위한 노력을 했었다.
그렇다면 동시를 썼다는 것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어떤 작품이 동시이며 몇 편이 되는 것일까? 소설가 이문구는 황순원이야말로 ‘진정한 선비의 초상’이었고, ‘선비 정신의 요체는 바로 동심에 있었’기에 가능했을 거라고 했으니까 황순원의 동시도 예사롭지 않으리라.
3.
황순원의 동시는 아포리즘이다. 굳이 동시와 시를 구분하지 않고 시의 형식을 도입한 아포리즘 성격의 문장을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아포리즘이란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글이다.「팽이」를 ‘세월이 잠긴다’라고, 「빌딩」을 ‘하모니카 불고 싶다’라고 표현한 것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성격을 다분히 띠고 있지만 동심의 정도에 따라 동시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작품들이 보였다.
제2시집 『골동품』은 제1시집 『방가』와는 달리 세상을 향한 울부짖음이 없다. 시집 서두에 ‘나는 다른 하나의 실험관이다’라고 적어놨듯이 『골동품』에서는 그동안 썼던 격정적인 시와는 달리 맑고 단아한 동시풍의 시와 만나게 된다. 『골동품』에는 동물초(動物抄), 식물초(植物抄), 정물초(情物抄)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22편의 시가 들어 있다. 여기서 동시를 가려냈다. 10편이다.
날개만
하늑이는
게
꽃에게
수염 붙잡힌
모양야
-「나비」
‘하늑이는’은 가볍게 느리게 흔들리는 모양이다. 꿀을 빠느라 정신없는 나비의 모습을 ‘꽃에게/ 수염 잡힌/ 모양’이라고 했으니 정말 아이스럽지 않은가.
이 집에는
비눗물 바가지 든
꼬마가 산다
-「게」
게거품을 보면서 비눗물 바가지 든 꼬마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2
자가
너를
흉내 냈다
-「오리」
오리를 숫자 2에 비유한 것이 얼마나 멋진 동심인가.
이 초롱불엔
불나방이
안 모인다
-「꽈리」
잘 익은 꽈리는 붉은 색을 띤 초롱 모양이다. 그래서 초롱불에 비유했지만 불나방이 달려들지 않는 불빛이라고 했다. 비유와 동심적 상상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이빨을 몽땅
드러내고
웃는다
-「옥수수」
이빨 드러내고 순진하게 웃는 동생이 연상된다. 옥수수가 그런 동생이었다.
땅의
해에는
흑점이
더 많다
-「해바라기」
태양의 흑점. 해바라기는 땅 위의 해다. 흑점이 많은 해다.
나를
혀 위에
굴리었다
-「앵두」
깨물고 싶도록 탐스러운 앵두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러나 차마 깨물지 못한다. 깨물고 싶도록 탐스럽기 때문에.
별을
쓰느라
머리가
세었소
-「갈대」
‘별을/쓰'는 것이 좀 어렵지만, 묘사를 참신하게 하기 위한 작가의 고심이 엿보이기도 한다. 갈대는 빗자루처럼 생겼다. 밤마다 별을 쓸었기 때문에 머리가 세었다는 표현은 압권이었다.
연문을
먹고서
온몸을
붉혔소
-「우체통」
우체통이 붉은 이유를 알겠다. 연문을 받아먹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편지인 ‘연문’ 때문에 동시가 아니라고 한다면 동시의 외연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사춘기가 빨라지는 세상에.
한중간에 세면
능청맞은 소리
하나쯤 속여친다
-「괘종」
괘종이 속여 치겠는가. 아니다. 괘종의 소리를 세고 있는 화자가 잘못 세기 때문이다. 괘종이 능청맞은 게 아니라 능청스러워지는 화자의 동심이 미소를 짓게 한다.
4.
문학 교사로 재임하면서 김유정, 이효석, 김동리 그리고 황순원 등의 소설은 시적 서정과 감각을 중시한 문장이라고 가르쳐왔다. 그들의 시를 분석해 보거나 시와 소설의 문장 유사 관계 등을 고민해 본 적도 없이 지도서에 적혀 있는 대로 앵무새처럼 지껄여왔다. 비로소 황순원의 소설 문체가 절제와 생략이 두드러졌던 것은 시로서 다져진 문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확신도 얻게 되었다.
황순원의 동시는 10여 편 정도다. 제2시집 『골동품』에 10편이 들어있고, 월간 『문학사상』이 발굴한 작품이 있으니까. 그러나 아쉬운 면이 없는 건 아니다. 「호박」「반딧불」「지도」「종달새」「코끼리」그리고「맨드라미」등은 동시풍으로 남겨 놓을 수밖에 없었다. 더 연구가 필요해서다.
끝으로 황순원의 오랜 친구인 원응서가 밝힌 황순원의 작가정신(『황순원 전집 』제12권)은 후배 문인들의 귀감이 되고도 남으리라. 그대로 옮긴다.
언어 감각에 천재적 자질을 타고나 있으면서도 그렇게도 깨를 볶듯이 문장을 고소하고 함축 있게 담는 노력을 나는 이전부터 지금까지 보아왔고, 그의 초고를 노트에다 깨알처럼 쓰고 지우고 썼다가는 또 지워버린 자신도 후에 읽고는 무슨 말인지 몰라할 정도의 숫제 잉크로 까맣게 뭉개진, 그의 초고노트를 나는 지금 한 권 간직하고 있다.
누가 황순원이란 작가를 물으면 나는 대답 대신 이 노트를 내보일 참이다. 이렇듯 그의 삶은 그의 작품은 실로 각고와 더불어 벗해왔던 것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며 대패질 하는 시간보다 대팻날 가는 시간을 길게 가졌던 황순원. 오랜 세월 재직했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하겠다고 했을 때 ‘작가는 글로써 승부해야 한다’며 거절했다는 황순원. 그는 동심을 꼭 껴안고 있었기에 세속적인 명예에 눈길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의동시문학』2016. 가을/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