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5 (요 4:23-24) - 하늘 문이 열리는 비결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개척교회를 하는 젊은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주일이면 20여명 정도의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아버지가 예수를 안 믿었었는데 아들이 개척을 한다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아들을 위한다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예배를 참석했는데 찬송가도 모르지 성경도 찾지를 못하지 이것저것 불편하고 따분한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설교를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예배는 참석하되 적당히 졸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예배를 인도하다가 아버지를 볼라치면 졸거나 주무시니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불러 말하기를 “너, 이번 주일부터 할아버지 옆에 앉아 있다가 할아버지가 졸거나 주무시는 눈치가 보이면 할아버지를 깨워라. 그러면 주일마다 1,000원씩을 줄께.” 이 말을 들은 아들은 주일마다 1,000원 벌이 아르바이트를 잘 수행했고 예배는 더욱 은혜롭게 잘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은 지 두 달 정도 지난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의 아버지는 그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들의 설교시간에 졸기도 하고 코를 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손자 놈은 할아버지를 깨울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난 뒤에 목사님은 아들을 불러 할아버지가 졸고 있는데도 깨우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똑 부러지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빠, 할아버지가 자기를 흔들어 깨우지 않으면 2,000원을 준다고 했어요.”
예배에 관한 글을 읽다가 “이런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라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1. 엉성하지만 감격과 환희의 눈물이 젖어있는 찬양이 있는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2. 더듬거리고 앞뒤 문맥이 잘 맞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여 가슴만 치던 세리들과 창기들의 기도가 있는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3. 아름다운 벽화도 예쁘게 장식된 꽃꽂이도 없이 마굿간 같은 냄새가 나고 의자는 다 망가 져서 앉을 자리는 불편해도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에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고백 하는 겸손한 사람들의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4. 사람의 지식과 기교로 교만한 자들의 허영심을 즐겁게 하는 설교가 아닌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 앞에 나아가 그 분의 거룩한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나와서 눈물과 통곡으로 외치던 옛날 선지자들의 그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5. 불의의 재물과 교만한 마음의 장식물과 같은 헌금 대신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놓은 순전함을 드리는 과부의 두 렙돈으로 예배하고 싶습니다.
6. 자신의 종교적 의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바리세인들의 제사가 아닌 신령과 진정 안에서 드리는 믿음의 제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7. 말씀시간이 10분만 길어져도 지겨워지는 삼류 코메디 같은 예배가 아닌 예수님의 말씀에 온 인격이 매료되어 그의 발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던 마리아가 드렸던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8.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인간의 더러운 인격을 녹이고 하나님의 신의 성품을 새롭게 하시는 그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9. 우리끼리 소금치고, 빛 뿌리고, 손뼉 치는 그 곳 밖에서 울고 계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 그 분의 눈물 앞에 무릎을 꿇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10. 축도가 끝나면 남남이 되어 빨리빨리 자신의 자리도 도망가는 콘서트 같은 예배가 아닌 예배의 끝남이 아쉽고 안타까워 자리를 뜨지 못한 채 그분의 임재 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여호수아의 경외심으로 드리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어떤 예배를 받으시는 지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순종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성경은 순종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려주시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내린다는 기본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순종하는 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마귀는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역사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죄송하지만 마귀의 영에게 붙들린 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이 불순종하는 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자, 자신의 생각만을 관철하기 위해 쓸데 없이 힘을 쓰는 자, 하나님의 생각을 알면서도 인간적 생각을 내세우는 자, 이런 자들은 사단에게 붙들린 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자신을 늘 살펴 자신을 마귀에게 내어주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자신을 사단에게 내어준 예배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울 왕이었습니다. 사울은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에 블레셋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병력이 3,000이었고, 블레셋은 병거가 30,000이고, 마병이 6,000이고, 군대는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는 블레셋 군대를 보고 겁이 나서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어 들어갔습니다. 겁이 나기는 사울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빨리 와서 제사를 드려주기를 원했는데 사무엘 선지자가 사정이 생겨서 일주일 이상 지체하면서 이스라엘 군대는 사울에게서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다급해진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다 지쳐서 하나님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마치자마자 사무엘 선지자가 도착을 했고,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에게 “왕이 하나님께 임의로 제사를 드린 것은 망령된 것이다.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다면 왕위가 영원했을 것이지만, 왕이 망령되이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사울 왕은 아말렉과 전쟁을 했는데 하나님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을 물리칠 때에 모든 것을 다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살찌고 튼튼한 소와 양과 어린 양을 숨겨두고 가치 없고 형편 없는 것들만 죽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에게 말하기를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하나님이 당신을 왕으로 세워 주셨는데, 이제 스스로 자신을 높여 하나님을 거역하니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렸다.”고 말을 합니다. 사울 왕은 갖은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사무엘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를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렸다.”고 단호하게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하나님은 사울 왕을 대신하여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습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의 말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긴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교만해졌고, 하나님에게 불순종했고, 자신의 영혼을 사단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사울은 결국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예배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사울처럼 자기 욕심을 따르면 안 됩니다. “위클리프 성경 번역회”라는 선교기관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어학에 특별한 재능을 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남미나 아프리카나 조그마한 나라 부족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서 사용하는 말은 있어도 글이 없는 곳에서 그들은 언어를 만들어 주고, 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 주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마태복음을 번역하고 죽으면 누군가가 뒤를 이어 다시 그 곳에 가서 마가복음을 번역하고, 또 죽으면 다음 사람이 가서 그 다음을 번역합니다. 그런데 선교사 하나가 남미의 어떤 마을에 들어가서 성경 번역을 하던 중 ‘순종’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에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면서 “심부름을 시킨 것을 꼭 해야 한다.”는 말을 계속 강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심부름 가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또 말하기를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한다. 네 마음을 나누지 말라.”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번역하기를 “마음을 나누지 않고 모든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길게 번역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순종은 마음을 나누지 않고, 모든 마음으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내려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후에 광야에서 40년을 지내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이동원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따라서 움직이고, 하나님의 구름기둥이 멈추면 그곳에 진을 치고 구름기둥이 움직일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무른다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이 앞장 서 가시고 자신들은 하나님 뒤를 따라간다는 것이 생활원칙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할 수 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몸이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기도로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리챠드 백스터는 순종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이 가시고자 하는 곳은 어디든지,
당신이 하시고자 할 때는 언제든지.
둘째, 하나님은 화목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성도는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으로 상대방을 판단합니다. 마음이 좁은 사람은 마음이 넓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격이 부족한 사람은 인격이 넓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실력이 없는 사람은 실력이 있는 사람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5살 된 아이와 건강한 아빠가 달리기를 하면 아빠가 이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빠는 빨리 걷기만 해도 5살 된 아이는 아빠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아이가 사랑스러워서 아이와 달리기 시합을 해서 한두 번 져주면 아이는 자기가 아빠보다 더 빨리 달리는 능력이 있는 줄 알고 좋아합니다. 어린 아이는 아빠가 아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경기에서 져 준 것을 헤아려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자라고 성숙해지면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져 준 것도 알고, 자기도 남을 위해서 져주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넓혀가면서 자신이 성숙해 지는 것을 하나씩 둘씩 배우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했습니다.
남아프리카 ‘반투’라는 지역은 대부분 흑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흑인들이 백인들을 향하여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흑인 폭도들은 얼마나 난폭했는지 그 지역에 살고 있던 17살의 독일 소녀를 사로잡아 도끼로 토막을 내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소녀를 구하려던 이웃 집 소년도 똑같이 도끼에 몸이 토막나서 잘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폭동이 계속되면서 그 지역에 있던 독일 개혁파 교회도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17살 어린 꿈도 펴보지 못한 외동딸을 잃어버린 버뮤렌 부인은 흑인들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흑인들을 보면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증오가 너무 심한 날은 밤에 잠도 이루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폭동이 끝나고 세월이 지나 반투족이 교회를 재건하면서 교회 종탑 헌금을 모금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버뮤렌 부인은 마태복음 6장을 읽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버뮤렌 부인은 반투족의 교회 재건에 필요한 종탑헌금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반투족 사람들은 버뮤렌 여사의 헌금을 받아 교회 종탑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봉헌되던 날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 버뮤렌 여사는 17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딸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반투족 사람들은 버뮤렌 여사의 사랑의 마음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구약의 제사에 화목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을 원할 때 하나님께 화목제물을 드림으로 화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의 화목의 개념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뛰어 넘어서 사람들 간의 화목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19절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보다 형제간의 화목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부간에, 가족간에, 형제간에, 성도간에 문제가 있다면 내가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목과 화평의 예배를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래 전에 브리티시 위클리(British Weekly) 잡지에 교회를 다니는 한 성도가 잡지사의 편집자에게 보낸 글이 원문 그대로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목사의 설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목사님들은 설교에 상당히 큰 비중을 두고 설교 준비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30년간 아주 규칙적으로 예배에 참석해 왔고 그 동안 제 추산이 정확하다면 적어도 3,000번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놀라는 것은 그 설교 중에 단 한 편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시간을 달리 썼다면 더 유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편지를 두고 수 주간 평신도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설교에 대한 찬반론이 산사태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다음과 같은 한 편지가 그 논쟁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저는 결혼한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저는 32,850회의 식사를 하였습니다. 거의 저의 아내가 요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는 그 많은 식사 중 한 끼의 메뉴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식사를 할 때마다 매끼 영양을 공급받았습니다. 저는 그 많은 식사가 없었더라면 오래 전에 이미 굶어죽었을 것이라는 분명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은혜롭게 들었던 말씀을 실생활의 갈등 속에서 다 기억할 수 없지만 맛있게 먹은 음식이 몸의 양분으로 공급된 것처럼 은혜롭게 들은 말씀은 기억과 상관없이 영의 양식으로 공급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결해지고 성화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단 한 번의 설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의 말씀과 설교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그들은 더 빨리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설교는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왕의 축복과 왕의 선포가 전해질 때에 백성들은 귀를 기울이고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성도는 아멘,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여, 말씀하소서, 제가 듣겠나이다.”라는 자세로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 주시고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배를 드리는 목적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캐톨릭 예배의 특징이 의식이라면 개신교 예배의 특징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개신교 예배는 목사의 설교가 강력한 예배의 수단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말씀을 먹고 자라납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야, 오늘 설교는 아무개가 꼭 들어야 하는데, 그 인간이 오늘 나오질 않았네?”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듣고는 점수를 매기고, 평가를 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설교를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처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며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숙한 성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기도응답을 받고, 삶의 좌표 결정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설교를 들으면서 성숙한 삶을 이루어갑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 저에게 말씀을 사모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야 우리의 기도도 응답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 말씀에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많이 있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비가 내리지 않아서, 질병이 들어서, 전쟁이 일어나서 고통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풍부해도 찾아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입니다. 아모스 8장 11절 말씀에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배자는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내 마음 판에 새기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의 삶에 하늘 문이 열리는 기적이 임하는 것입니다. 아멘.
************* 추신 : 예배 메뉴에 더 많은 묵상자료가 있습니다. **********************
참고해주세요.